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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이 쓰는 이 사람의 삶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 윤 기

“반한반일(半韓半日)의 코스모폴리탄, 재일교포 노인들의 든든한 ‘빽’이 돼드릴게요”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 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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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 한국인 노인홈을 지은 공로로 윤 이사장은 6월1일 삼성그룹이 주는 호암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다. 그의 업적이 노인홈만은 아니다. 그는 평생을 소셜워커로서 살아왔다. 아니 대를 이어 그렇게 살고 있다. 80년 전 목포에 맨 처음 공생원이란 고아원을 연 부친 윤치호씨에 이어 그가 했고, 이제 하나 있는 딸 윤록씨도 목포 공생원을 맡아 3대가 사회사업가의 길을 걷는 중이다.

그는 요즘 한 달에 일주일 정도만 한국에 머문다. 나머지 3주는 일본에서 지낸다. 1970년대, 공생원을 나가는 친구들에게 일자리를 얻게 할 목적으로 그가 만든 ‘한남동 청소년직업학교’에서 윤기 이사장을 만났다. 낯빛이 밝고 눈매가 따스한 초로의 신사가 손을 내민다. 손이 크고 억세다. 손아귀 힘이 강하다. 키는 작지만 몸이 야물고 날쌔 보인다. 웃음이 특별히 환하다.

그가 쏟아내는 이야기는 고비마다 날 감동시켰다. 주책없이 눈물이 핑그르르 돌아 윤기 원장과 나는 동시에 얼굴 비벼대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그는 목포에서 태어났다. 목포 공생원이 그의 집이었다. 고아들과 똑같이 자랐다. 목포중·고교를 나와 중앙신학대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마흔까지 여기서 살았으니 친구도 추억도 정서도 취향도 모조리 한국인이다. 지금도 무심코 입을 열면 불쑥 튀어나오는 건 목포중학교 교가다. ‘백두산 뻗친 줄기 유달에 닿고 오천년 넋을 받은 겨레의 아들….’

그러나 그의 국적은 한국이 아니다. 그는 일본인이다. 아버지는 한국인 윤치호, 어머니는 일본인 다우치 시즈코였다. 부친의 성(姓)을 취하는 국적법에 따르면 그는 한국인이라야 마땅할 테지만, 무남독녀인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그 집의 데릴사위로 입적했다. 물론 그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속속들이 한국적 정체성을 가졌지만 국적은 일본인이라는 사실, 그게 윤기 이사장을 언제나 괴롭혔다. 어려서는 ‘쪽발이’라고 놀림받았고, 일본에 가면 당연히 말도 문화도 서투르고 어색한 이방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알량한 가름을 뛰어넘기로 했다. 나는 한국인이고 동시에 일본인이다! 그래, 나는 코스모폴리탄이다!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를 놓는 데 나만큼 적임자가 또 있느냐? 그게 내 몫의 일이다. 그게 일본인이면서 한국인인 나의 운명이다!

‘사랑의 묵시록’

“내 평생의 테마는 크게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복지, 두 번째는 한일 간의 숙명적인 문제를 푸는 데 앞장서자는 것!”

그의 인생 테마를 말하기 전에 먼저 그의 부모 얘기를 해야 한다. 아버지 윤치호씨는 목포의 ‘거지대장’이었다. 다리 밑 거지들을 줄줄이 끌고 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기독교 전도사로 거리에서 전도를 하다 거지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바람에 절로 고아원을 운영하게 됐다. 사랑으로 보살피고 희망을 주려 노력하고 배불리 먹여도 고아들의 얼굴은 늘 어두웠다. 그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면 얼굴이 펴지지 않을까, 음악선생을 구하면 아이들에게 웃음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1928년 공생원을 설립한 윤치호 전도사는 생각했다(‘공생원’의 ‘공생’은 글자 그대로 ‘더불어 함께 산다’는 뜻이다).

목포여고 영어교사에게 피아노 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나온 그 인텔리는 자신의 제자인 얌전한 일본 처녀 하나를 소개했다.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목포부 관리, 어머니는 조산원으로 일하는 일본인 부부의 외동딸이었다. 공생원에 와서 수백명의 고아를 만난 처녀는 피아노만 치는 게 아니라 아이들 코 닦아주고 세수시키고 이 닦아주고 밥을 먹였다. 제집에 있는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거지대장 윤치호에게 그 처녀는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었다.

둘은 뜻이 맞았고 서로 사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주변에선 그런 처녀더러 ‘돌았다’고 했다. 총독부 관리가 아버지였으니 딸의 ‘미친 짓’을 말리고 싶은 아버지는 공생원을 도시계획에 걸렸다며 철거해 버렸다. 그러나 둘은 1939년 기어이 결혼한다. 어렵게 결혼이야 했지만 시대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젊은이의 삶이 평화로울 리 만무했다.

1945년 드디어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을 이룬다. 아내는 울고 남편은 웃었을까? 그럴 리 없다. 남편 성을 따라 이름을 윤학자로 고쳤던 윤기 이사장의 어머니, 그녀는 해방 이듬해 홀로 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둘 사이엔 이미 아이가 둘이나 생겨 있었다. 작은아이 기는 밤마다 아버지를 찾으며 울어댔다. 1년 만에 그녀는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과 고아들이 기다리는 목포로 돌아온다.

“누나는 지금도 가끔씩 날 원망해요. ‘그때 네가 그렇게 울지만 않았으면 우린 그냥 일본에서 잘 살았을 텐데…’ 하면서.”

해방의 감격 속에 아버지는 친일파로 몰렸고, 6·25 때는 인민재판을 받았고, 국군이 들어왔을 때는 스파이 혐의로 경찰에 끌려갔다. 그리고 1951년 광주도청에 가서 고아들의 식량을 구하겠다며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공생원만 어머니의 손에 남겨졌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돌아와 “공생원은?” 하고 물을까봐 목포를 떠날 수 없었고, 공생원 고아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임종하는 그날까지 어머니는 공생원과 고아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일했다. 그동안의 우여곡절이야 이루 말도 못한다.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영화 스토리 같다. 로망과 휴먼과 멜로와 역사가 고루고루 섞였으니 시나리오로 만들기에 안성맞춤이겠다. 아닌게아니라 윤학자 여사의 삶은 1960년대 ‘사랑의 묵시록’이란 제목으로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다. 한남동 직업학교 윤기 교장의 방에 그 영화의 낡은 포스터가 붙어 있다. 옆방엔 ‘나는 거지대장의 아들이다’라고 써있는 커다란 편액도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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