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범인들 속에 있으면 무료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다른 이의 관심 속에서 단단해지고 담대해진다. 시선에 대한 부담도 없다. 화려한 게 좋다. 자신만의 아우라가 빛을 발해 주변이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팝 아티스트 낸시 랭(27)은 화려하다. 작품으로 사진으로 몸짓으로 자신을 활짝 보여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말도 거침없다. 여과 없이 ‘날’로 드러난 생각들은 때론 공격의 타깃이 된다. 그래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나고, 내 세계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다. 타고난 화려함이다.
‘애교’ ‘도발’ ‘섹시·큐티’ ‘청담동 키드’ ‘음주가무의 여왕’…. 낸시 랭에게 따라붙는 어휘들이다. 누군가는 “그의 작품 터부요기니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물정 모르고 해맑기만 한, 그리고 약간은 제멋대로인, 심각한 것은 질색인, 나태한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부유한 아가씨를 떠올린다.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낸시 랭은 자신을 ‘팝 아티스트’라고 소개한다. 공식 직함은 ‘쌈지 ‘낸시랭 라인’ 아트디렉터’. 소개를 듣고 나도 여전히 헛갈린다. 팝 아티스트란 단어도 그리 익숙지 않은데 방송, CF, 패션잡지, 전시회를 오가는 아티스트라니. 당최 주종목을 모르겠다. ‘만능 엔터테인먼트’라는 편한 말이 떠오르지만 아무래도 ‘아티스트’라는 단어가 걸린다.
파격적인 몸짓으로 패션브랜드 ‘쌈지’ 광고, 초고속통신 망 메가패스 광고, 홍대앞 퍼포먼스 등에 등장하는 그는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미술계 명사가 됐다.
PR공주?
서울 홍익대 근처 허름한 분식집에서 낸시 랭을 만났다. 같이 밥을 먹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가 배가 고프다며 그렇게 하잔다. 다른 곳으로 갈 걸 싶다. 낸시 랭과 분식집은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
분식집으로 그가 들어온다. 날렵한 체구에 걸친 미니 청 원피스와 핫핑크 조끼가 경쾌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매직박스’도 손에 들었다. TV에서 막 튀어나온 하이틴 스타 같다. 당당함과 애교스러움이 적절히 섞인 몸짓과 말투. 낯은 전혀 가리지 않는다. 끊임 없이 ‘하하호호’가 이어진다. 우려와 달리 분식집 배경과도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배를 좀 채우고 작업실로 자리를 옮긴다.
그의 작업실은 홍익대 근처의 복합문화공간 쌈지 스페이스 6층에 있다. 심사를 거쳐 올해부터 1년간 지원 작가로 선정돼 이곳 작업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작업실 벽면에는 터부요기니 시리즈와 그의 퍼포먼스 사진이 빼곡하다. 벽 한구석에는 만화책장을 찢어 붙여놓기도 했다. 괜히 기분 좋아지는 작업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