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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김광화의 몸 공부, 마음 이야기(16)

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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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자리에서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 네가 부럽다

논두렁을 바르고 논물을 가두는 것으로 한 해 농사가 시작된다.

모내기가 끝나면 모는 이제 벼라고 부른다. 이 벼는 보름 정도면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린다. 활착(活着)이다. 노르스름 빛깔이 사라지고 푸르른 빛으로 싱그럽게 바뀐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이를 ‘벼가 깨어난다’고 한다. 옮겨 심은 벼가 뿌리를 제대로 땅에 내리면 이제 새로운 가지가 뻗는다. 분얼(分蘖)하는 것이다. 벼는 온도나 생육 상태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일주일에 하나씩 새로운 가지가 나온다.

우리는 ‘뿌리내린다’는 말을 자주 쓴다. 직장에, 마을에, 지역에 뿌리내린다. 그만큼 식물의 뿌리가 갖는 의미가 깊다는 뜻이리라. 벼는 한번 심겨진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다. 그곳에서 자신의 한해살이를 마감한다. 벌레가 와도 도망갈 수 없으니 자기 방식으로 버텨낸다. 병이나 벌레를 겪으며 벼 스스로 강인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가뭄이 들라치면 벼는 뿌리를 더 깊이 뻗는다. 그래서 논물 관리가 쉬운 곳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분얼이 한창 진행될 무렵 일부러 논물을 떼어 논바닥을 말려준다. 이를 간단관개(間斷灌漑)라 한다. 자연 상태의 벼가 갖는 야생성을 북돋워주는 것이다.

벼가 무럭무럭 자라자 한 번은 그 뿌리가 궁금했다. 벼 한 포기 살며시 뽑으니 쉽게 뽑히지 않는다. 뽑히지 않으려고 반발하는 것 같다. 아하, 뿌리내리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구나. 조금 더 힘을 주니 뽑힌다. 오랜 뿌리는 흙빛에 가깝고 이제 막 새로 내린 뿌리는 하얗다. 그 싱그러움이 내 모습을 부끄럽게 만든다. 어디 멀리 가야만 새로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선 자리에서도 싱싱하게 자신을 가꾸는 벼가 부럽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벼를 본다. ‘답답하지 않니? 너희는 어디론가 가고 싶지 않니?’ 떠나고 싶을 때 뿌리내리는 게 뭔지를 돌아본다.



벼가 왕성하게 자라면 논에서 일출과 일몰을 보기 어렵다. 논 전체가 푸르러 벼 잎이 논물을 가리기 때문이다. 이제는 바람이 좋다. 바람결에 벼 잎이 살랑살랑 거리면 벼에게서 인사를 받는 기분이다. 저절로 내 입에서도 인사가 나온다. ‘잘 잤니? 잘 자라는 구나.’ 학창시절이나 군대 시절은 피사열자로서 솔직히 사열식이 내키지 않았다. 지금은 사열대 주인공이 되어 실컷 인사를 받아본다.

논두렁은 내 몸의 허리

그렇지만 성주라고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뭄이 든다거나 태풍이 오면 마음을 졸인다. 가뭄으로 논에 물이 마르기 시작하면 올챙이들은 물이 많은 곳으로 올망졸망 모여든다. 논바닥이 조금 낮거나 사람이 디딘 발자국에는 물이 제법 깊다. 이곳에는 올챙이가 그득히 모인다. 낮에는 왜가리, 밤에는 너구리라는 놈이 올챙이를 잡아먹기 위해 논을 마구 밟아 놓는다. 왜가리나 너구리에게 벼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면 성주라고 자부하던 나의 오만함도 무참히 짓밟힌다.

논두렁의 두더지 구멍도 골치다. 두더지는 지렁이를 먹기 위해 곧잘 논두렁을 뒤집는다. 유기농이라는 이름으로 농사를 지으면 논두렁에 두더지가 더 극성이다. 밭에 있는 두더지 굴은 흙을 부드럽게 하는 구실을 한다지만 논두렁의 두더지 구멍은 아주 성가시다. 이 구멍을 며칠만 내버려두면 그 구멍으로 논두렁 흙이 물에 쓸려가 구멍이 점점 커진다. 급기야 논두렁이 터진다. 마치 거대한 연못이 작은 구멍 틈새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장마 때, 밤새 내리는 비와 두더지 구멍이 두렵다. 논두렁이 터지면 논주인 한 사람만 힘겨운 게 아니다. 아랫논 또한 고스란히 피해를 본다. 윗논이 터지면 논물과 흙이 한꺼번에 아랫논으로 휩쓸린다. 아랫논도 이를 견디지 못하고 덩달아 논두렁이 터진다. 이는 위아래 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산골 다랑논 전체에 연쇄적으로 퍼진다. 그러면 비상이 걸린다.

논두렁이 터지면 그 여파는 곧장 내 몸에도 미친다. 논두렁이 터지던 해, 멀쩡하던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몇 달이나 그 아픔이 이어졌다. 가을걷이 끝나고 논두렁을 고치고 나서야 허리 통증이 사라졌다. 논과 내 몸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강렬하게 이미지화하는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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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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