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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따라 대마도를 구경하다.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nzip@donga.com

통신사 따라 대마도를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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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韓流의 주인공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됐다. 대마도에서부터 시작된 사신 접대는 수도인 에도에 이르기까지 융숭하기 짝이 없었다. 사신들이 묵는 숙소 기둥에 금칠을 하고 그릇까지 금은으로 치장하는 등 화려함을 한껏 과시한 데는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새로 막부 장군 자리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조선의 사신들이 장군을 알현하는 것처럼 연출해 다이묘들에게 새로운 막부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의 저자인 청주대 일문과 정장식 교수는 “‘해사록’을 보면 막부의 이런 정치적인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듯, 사신을 극진히 접대하라는 장군의 명령을 선의로만 해석했으니 적국(敵國)의 정세(情勢)를 너무 안이하게 보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17세기 중반에 접어들자 대마도의 위상이 달라졌다. 행여 조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조심하던 태도를 거두고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마도가 이렇게 표변한 까닭은 조선에서 대마도의 경제적·정치적 역할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은 은으로 중국의 비단과 약재를 수입하고 왜관의 중계로 이것을 다시 일본에 수출해 이익을 내고 있었다. 이때 사용되는 은을 대부분 대마도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조선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정장식 교수는 이 시기 “동북아의 정치·경제 교류에서 이제 대마도는 조선의 짐이 아니라 필요악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통신사 파견은 분명 양국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문화 교류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폐쇄된 사회에서 통신사와의 접촉은 선진문화를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또 당시 일본의 고관대작들 사이에서는 조선 사신들이 그린 서화가 큰 인기였다. 이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서화를 얻고자 했으며 이 서화가 비싼 값에 팔리기도 했다. 오늘날 한류(韓流) 스타가 나타날 때마다 얼굴을 보기 위해 일본 팬들이 공항에 몰려들어 아우성치는 현상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약삭빠른 대마도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사신들이 머물 때 가능한 한 많은 서화를 받아뒀다가 일본의 고위층에 뇌물로 제공했고 이를 팔아서 사신들을 접대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했다.

에도시대와 유사한 오늘날 한일관계

그렇다면 당대의 한류 스타인 사신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장식 교수는 사신들이 이것이야말로 일본에 조선의 문화적인 우월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요청하는 대로 서화를 그려주려 노력했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한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을 문화적으로 순화시켜 야만적인 침략성을 바꾸도록 해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은 배울 것 없는 나라라고 무시해버린 것은 안이하고 순진한 판단이었다. 훗날 실학자 이익은 대(對)일본 외교를 맡은 인사들이 일본에 대해 무지하고 편향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일본의 ‘왕정복고’를 예견했다. 실제 18세기 조선의 문화를 흡수한 일본은 19세기 들어 무서운 속도로 국력을 키워 나갔고 1866년 막부 시대를 끝낸 뒤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메이지유신에 성공했다.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행보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를 끝맺으며 정장식 교수는 “오늘날 한일관계는 광복 이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과정이며 마치 에도시대처럼 서로 이해를 쌓아가는 시기”라고 했다.

실제 1990년대 이후 대마도 곳곳에서 한국과의 교류를 상징하는 비문이 만들어지고 유적들이 복원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고종의 막내딸인 덕혜옹주가 대마도 귀족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한 것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가 이들의 이혼 후 쓰러진 채 오랫동안 방치돼 있다가 최근 다시 세워진 것 외에도 대마도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송환을 위해 노력했던 외교사절 충숙공 이예를 기념하는 비,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 순국비, 항일 의병장 최익현 순국비, 조선통신사비, 조선역관 조난비 등이 잇따라 세워졌다.

이는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한일 민간외교의 결실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비문 뒤에 한국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것을 보면서 진정한 ‘通信(믿음을 주고받는다)’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마도 유적 답사를 계획했다면 ‘간도에서 대마도까지’(임채청 지음, 동아일보사), ‘대마도, 역사를 따라 걷다’(이훈 지음, 역사공간)의 일독도 권한다. 명백히 일본 땅이 된 대마도가 왜 이리 친근하게 다가오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동아 200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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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n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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