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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책, 아저씨의 책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언니의 책, 아저씨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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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뭔가’

최근 김훈의 ‘강산무진’(문학동네)을 읽었다. 오십대인 남자 선배가 술 한잔 걸치고 “야, 넌 읽지 마라. 그냥, 우리 같은 아저씨들이 보는 책이다”라고 한 게 괜히 마음에 걸려, 차일피일 미루다 얼마 전에야 손에 들었다. 그보다 먼저 오토가와 유자부로의 ‘살다’(열림원)를 읽었다. ‘살다’는 직장 동료가 “기가 막힌 소설”이라며 손에 쥐어준 책이다. 그도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의 아저씨다.

‘살다’는 일본 에도시대에 무사의 긍지를 지니고 살아온 사무라이 마타에몬의 이야기다. 당시 무사들은 자신이 모시던 영주가 사망하면 순사(殉死)함으로써 주군에 대한 충의와 슬픔을 입증했다. 마타에몬은 아버지 때부터 2대에 걸쳐 모셔온 영주 히다노카미의 죽음이 임박하자 자신도 할복할 때가 왔음을 인식한다. 히다노카미를 주군으로 모시면서 37년간 풍족하게 살아왔으니 이제 죽음으로 은혜를 갚을 때다. 마타에몬은 아들 이호지가 아직 어리다는 점과 병약한 아내를 두고 죽어야 하는 것이 염려스러웠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본다면 아들이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석 가로(영주의 중신으로 무사를 통솔하고 실무를 총괄하는 벼슬) 가지타니가 은밀히 마타에몬과 오노데라를 불러, 순사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만일 법을 어기면 자손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말하고 ‘죽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한 뒤 마타에몬의 삶은 분열된다. 살아남았지만 살아 있지 않은 삶이 된 것이다. 가지타니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순사하지 않는다면) 비겁한 일, 겁쟁이가 하는 일, 은혜를 모르는 일이라는 비난을 받겠지요. 나는 그것을 제지하는 일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오. 그러므로 두 사람에게는 고통스런 긴 싸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오명을 씻을 날이 올 것이오. …어떻소.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은 셈 치고 살아줄 수 없겠소?”



죽음 대신 삶을 택함으로써 마타에몬은 모멸과 수치 속에 살아야 했다. 영주가 죽자 순사 금지령에 관계없이 줄줄이 순사 소식이 이어졌고, 마타에몬의 주위 사람이 하나둘 사라졌다. 그중에는 사위 마나베와 아들 이호지도 있었다. 마나베 집안은 순사를 거부한 겁쟁이 마타에몬 집안과 의절을 선언하고 딸과 손자도 마타에몬을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호지는 순사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할복했다. 함께 서약서를 썼던 오노데라는 단식 끝에 죽었다. 아내 사키마저 세상을 떠났다. 마타에몬은 그렇게 홀로 10년을 버텼다. 살아 있지만 죽은 삶, 죽은 셈 치고 사는 삶. ‘살다’는 무사 마타에몬을 통해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를 징그러울 만큼 잘 묘사하고 있다.

소설집 ‘살다’에는 표제작 ‘살다’ 외에도 딸을 유곽에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평온한 모래톱’, 출세하기 위해 헤어진 여자와 23년 만에 우연히 재회하는 늙은 무사의 이야기를 다룬 ‘조매기’ 등이 함께 실려 있다. 소설 한 편 한 편이 ‘산다는 게 뭔가’ 하고 곱씹게 만든다. 저자 오토가와는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다고까지 할 수 있는 올곧은 사람들, 정의와 인정과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것이 확실히 존재하는,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삶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를 젊은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나는 시대소설을 쓴다.”

맹랑한 가르침과 노인의 철학

김훈의 ‘강산무진’은 읽은 이가 훨씬 많을 것이므로 그 줄거리는 생략한다. 내게 책 읽기를 만류한 오십줄 선배의 말대로 철저히 아저씨들의 시선으로 쓴 책이다. 소규모 식품회사를 운영하다 망한 뒤 택시를 모는 남자(배웅),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간병하는 중년 남자(화장), 새로운 삶을 위해 뭍으로 나가는 40대 등대장과 한때 잘나가던 전자회사 상무였지만 회사 부도로 인해 모든 걸 정리하고 등대로 들어오는 50대 남자(항로표지), 의류 수출회사에 근무하다 간암 판정을 받고 죽음을 준비하는 50대 남자(강산무진). 중년의 자매가 주인공인 ‘언니의 폐경’을 빼고는 모두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것도 잘나가던 시절을 뒤로하고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자의 허무가 짙게 배어 있다. 김훈의 소설이야말로 인생의 끝을 준비하는 노인의 철학이다.

남보다 빨리 성공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읽는 20대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나쁜 남자를 유혹하라’는 식의 맹랑한 가르침보다는 인생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 솔직하게 보여주는 쪽이 약이 된다고. 때로는 노인의 철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고민하는 청춘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읽는 짬짬이 ‘살다’와 ‘강산무진’ 같은 아저씨 냄새가 물씬한 책도 읽어야 한다.

신동아 200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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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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