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욱진 화백의 산문을 되풀이해서 읽곤 하는데 ‘강가의 아틀리에’라는 그의 산문집은 1976년에 초판이 나왔다. 이 화가는 무엇에 매이거나 묶이는 노릇을 싫어했다. 자신의 공간, 또는 자신을 위한, 아울러 자신에 의한 공간 마련에 민감했다 한다. 이사를 자주 다녔다는데, ‘탈(脫) 서울작전’은 새로운 공간의 개간으로 그의 삶만 아니라 그림을 달라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산문집에는 화가가 산책을 하면서 풍경 경물들을 응시한 바에 대해서 쓴 글이 여러 편 나온다. 어느 것 하나 예사롭게 관찰하거나 무심하게 살핀 내용이 아니다. 가령 이런 대목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이른 새벽의 산책이 몸에 붙었다. 고요하고 맑은 대기를 마시며 어둑어둑한 한적한 길을 걷노라면 새들의 지저귐 속에 우뚝 우뚝 서있는 모든 물체의 모습이 씁쓸한 맛의 색채를 던져준다.”
1958년에 한 일간지에 쓴 칼럼의 일부분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진솔 담백한 내용이지만 단어마다 꼼꼼하고 문장 이음이 야무지다. 그의 미술 창작 방식과 과정이 또한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고요하고 맑은 대기’ ‘어둑어둑한 한적한 길’, 이는 눈의 언어이기보다는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을 표현한 몸의 언어, 살갗의 언어다. ‘고요하고 맑은’ ‘어둑어둑한 한적한’이라는 어법, 두 형용어를 병렬하여 스케치에 에칭을 가미하는 듯한 묘사다.
‘새들의 지저귐 속에 우뚝 우뚝 서 있는 모든 물체’라는 표현은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의 교묘한 결합이다. 지저귐(새)과 우뚝 우뚝(물체)이 새벽의 바깥쪽과 안쪽을 포착해낸다. 희붐하게 날이 새고 있으니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는 것이지만 어둠은 채 가시지 않아 모든 물체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그냥 ‘우뚝 우뚝’이다. 그리하여 이 문장의 종결부가 나오는데 ‘씁쓸한 맛의 색채’라는 표현이다. 맛에 과연 색채가 있는 것일까. 나 자신은 도무지 이런 표현을 해볼 능력이 없다. 동적인 청각(지저귐)과 정적인 시각(우뚝 우뚝)이 전경(前景)이고, 대기(고요함/ 맑음)와 길(어둑어둑/ 한적)이 후경(後景)이다. 이 모든 것의 동시다발성을 화가는 그 어느 것 하나 놓치려 하지 않는다. 산문 읽기이지만 동시에 그의 미술작품 감상의 맛이다.
‘씁쓸한 맛의 색채’는 화가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각의 제국’이겠는데, 이 표현 속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함께 들어 있다. ‘씁쓸한 맛’은 외기(外氣)로부터 투입돼 화가의 촉감에 닿아 있는 것이겠는데, ‘맛의 색채’는 화가로 하여금 내면의 눈을 뜨게 하여 ‘새벽 아우라’의 총체적 색감을 적발해내게 한다.
산책하고 있는 화가의 공간 인식은 어찌 되는가. 화가는 ‘사회적 존재’에서 유턴해 ‘자연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외부자연과 접촉하고, 나아가 교섭하고 있다. 이 화가는 친(親)자연적이지만 비(非)사회적이고 어쩌면 반(反)사회적인 성품을 지녔다. 자연생태, 또는 생태자연으로부터 끊임없이 미학 에너지를 흡입해 이를 자신의 창작 미술로 표출했다.
박수근(1914~65), 이중섭(1916~56), 장욱진(1917~90)의 미술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무와 새와 어린이(또는 가족)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이 살았던 당대는 가난과 억압의 ‘사회혼란 시대’였다. 이들은 ‘혼란’을 처절하게 겪으면서도 혼란 그 자체를 화업(畵業)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혼란을 일차적으로 화가 자신에게 여과해 걸러낸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이를 자연사물에 투영해 어떠한 미학반응이 일어나는지 관찰한다. 나무는 고단해하고 새는 슬퍼하고 어린애는 몸을 가만 놓아두지 못하는데 이 대목에서 화가의 관찰력은 냉혹하리만큼 철저하다.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평안스럽지 아니하고 불안스럽다. 삼라만상, 어느 것 하나 자유롭지 않다. 상관관계에 엮여 치고 치인다. 세상살이는 시시콜콜 시끄럽고 꼬치꼬치 시시비비다. 이를 걸러내려고 망원경 관찰을 한다. 세상만사는 세상만사에 맡기되 그것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굴렁쇠만 살피는 격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생활은 고단하고 역겹고 어이없게 흘러간다. 이를 바꿔치기하는 현미경이 필요하다. 장욱진 표현을 빌리면 ‘씁쓸한 맛의 색채’, 즉 ‘예술화’다.
장욱진 미학은 자연 몰입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여는 화업이지만, 이 화가는 실제로는 ‘도시 문명’의 세례와 세뇌를 받은 ‘서양화가’다. 문명과 자연, 그 관계는 대립인가 화해인가. 문명도시의 출구를 넘어 국토자연의 탐미에 나서고 있는 까닭은 분명하다. 그는 다른 글에서 이렇게 토설한다.
“40년을 그림과 술로 살았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니까.”
1973년 어느 신문에 발표된 글이므로 그때의 40년이라면 1933년부터 40년이다. 장욱진 화백의 그림과 술, 일과 휴식에 경의를 표한다. 우연히 따져보니 나도 40년을 문학과 술로 살았는데 이때의 40년이라면 1966년부터의 40년이다. 그는 같은 글에서 또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림처럼 정확한 내가 없다. 난 그림에 나를 고백하고 나를 다 드러내고 나를 발산한다.”
장욱진 미술의 이러한 전력투구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화가는 스스로 철저하다 할 만큼 고립된다. 의도적으로 단절돼 사무치게 한다. 그리하여 당대의 세속성에 동화 오염되지 아니하고 나아가 당대성으로부터 탈출한다.
화가의 눈과 세상만사. 양자 사이에 걸러내기와 바꿔치기가 있다. 세속성, 통속성을 천진성, 천연성으로 걸러내어 이를 미술창작으로 바꿔치기하는 현장 보고서(산문)에 눈뜸과 눈부심이 있다. 화가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차대에 이르러 대단한 역전 현상이 일어난다. 마이스터 또는 마에스트로. 그 어렵고 힘들던 ‘초기 근대화’의 혼란시대에 한국미술, 나아가서는 한국문화예술이 장인(匠人)과 장인정신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작업 방식의 미학이었다. 이 화가의 예술세계는 ‘디지털 문명’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아날로그 미학’의 이전이다. 꼼꼼하고 깐깐한 수작업 창작과정에서 어떠한 기계화한 도구도 상상할 수 없다. 디지털 문명을 만나지 않은 것은 이 화가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국토는 한마디로 ‘문명화한 자연’이다. 문명화하지 않은 자연을 그는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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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바깥의 자연이 아니라 문명 내부로 삽입된 자연일망정, 이를 숨 쉴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근래에 새벽 산책 습관을 붙였는데, 미명의 새 지저귐과 우뚝 우뚝한 물체들에 나 또한 빠져든다. 밝음은 못 되지만, 그러나 어둠은 아닌 미명이다. 그 모호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세상만사의 모든 사소한 표정과 변화가 예쁘고 미쁘고 곱다. 그러나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러한 산책이 산책으로만 마감될 뿐이다. ‘산책담론’의 서사 산문마저 왜 아니 나오는 것일까. 되돌아오는 길에 지난 시대의 ‘화가의 눈’을 되살려 환기해보게 되는 까닭이다. 무장된 눈의 산문정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