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호, 유창혁, 최철한, 박정상….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자리잡은 충암학원이 배출한 프로 바둑기사는 88명에 이른다. 이들의 단수를 모두 합하면 무려 450단이다. 올해로 개교 40주년을 맞는 충암학원이 바둑 명문 사학으로 발돋움하게 된 특별한 교육법을 알아봤다.
교문 가까이에서 야구복을 입은 학생들이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다가가자 학생들이 일제히 “안녕하십니까?” 하고 우렁차게 인사를 한다. 뜻밖의 인사에 기분이 좋아져 “학생들, 나 알아요?” 하고 물으니 “아니요” 하고 씩씩한 대답이 돌아온다.
“학교에 오신 분이면 누구에게나 밝게 인사하는 것이 충암의 전통입니다.”
버스 옆에 서 있던, 감독으로 보이는 남자가 웃으며 말한다. 야구부원들은 동국대 일산캠퍼스로 훈련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충암학원엔 야구연습장이 없다. 연습장도 없는 학교가 ‘야구 명문’이라니….
사람들에게 충암학원을 아느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야구”나 “바둑”을 이야기한다. 1969년에 만들어진 충암고 야구부는 고교야구가 인기 절정이던 1970∼80년대 최강의 자리에 있었다. 충암고 출신인 심재학 선수(기아 타이거즈)는 “동대문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이기고 돌아오라, 충암의 용사!’로 시작되는 응원가를 들으며, 최선을 다해 싸웠다”며 “충암고 재학생은 물론 동문들까지 와서 불러주던 응원가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고 회상한다.
야구부 학생들을 뒤로하고 이사장실로 향했다. 충암학원엔 이사장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서무실’이란 작은 팻말이 붙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홍식(李弘植·65) 명예이사장과 그의 아들 이태건 이사장이 방을 나눠쓰고 있었다.
이홍식 명예이사장은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덥지요?”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실내 공기가 덥고 무거운 바깥 공기와는 달리 한결 시원함을 느낀다. 에어컨이 필요없겠다 싶다.
“1965년에 지은 건물이라 그래요. 교실 4개짜리 가건물로 시작해 해마다 500평씩 증축했습니다. 덕분에 건축업자 다 되었지요.”
1965년 부친 私財 털어 설립
▶ 건물을 손수 지으셨나요.
“그런 셈이죠. 제가 대학 4학년 때 해병대에 입대했어요. 제대하고 보니 아버지께서 황무지 6000평을 사서 터를 닦고 막 가건물을 세우셨더군요. 제가 장남이라 아버지 혼자서 많은 일을 감당하시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공사현장에 나와 자재와 장부를 꼼꼼히 비교해보니 문제가 많은 걸 알겠더라고요. 공사감독을 불러 ‘운동장에 있는 모래와 자갈더미 양이 장부에 기록된 것과 다른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사감독이 ‘내가 감독인데, 당신이 이사장 아들이면 다요?’ 하면서 장부를 내던지고 나가버렸어요. 결국 아버지께 사실을 알리고, 제가 직접 공사를 지휘하기 시작했죠.”
충암학원은 이홍식 명예이사장의 선친 이인관(李仁寬) 전 경기공업전문학교 교장이 1965년 30년 교직 생활을 정리하며 사재(私財)를 털어 설립했다. ‘지식과 학문에 뛰어난 지성인을 양성하기 전에, 먼저 성실·근면하고 책임감이 강한 민주시민의 자질을 육성하겠다’는 것이 설립이념. 오는 11월 개교 40주년을 맞는다.
1965년 설립 당시엔 충암실업고등공민학교였다. 1968년 충암종합고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1973년 인문계인 충암고등학교로 전환했다. 현재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며, 280여 명의 교직원과 4000여 명의 학생이 충암의 구성원이다.
▶ 설립자 이인관 선생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아버님은 북간도 명천 출생인데, 일본에서 유학하고 함경북도 청진 철도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장단중학교 교장, 경기공업고등학교와 성동고등학교, 경기공업전문학교 교장을 지내셨어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과 유럽의 산업시설과 교육계를 시찰하고 돌아오셔서, 선진국 경제성장의 동력이 공업이라고 인식하고, 공업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셨죠. 그래서 경기공업전문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시면서, UNKRA(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 찾아가 경기공업전문학교에 실험실을 지을 원조금을 받아내셨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경기공업전문학교 실험실 개관식에 참석해 축하 연설을 1시간도 넘게 하며 기뻐했던 일은 교육계에 널리 알려진 일화죠.”
▶ 명예이사장께서도 교직생활을 하셨다죠?
“학교 건물 증축 공사가 몇 년 동안 계속됐어요. 제가 공사감독을 맡았으니 대학 졸업 후에도 다른 직장을 구할 겨를이 없었죠. 자연스럽게 충암에서 교편을 잡았어요.”
이홍식 명예이사장은 경기중·고와 서울대를 나왔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고, 아버지가 설립자이니 아주 반듯한 교사였을 듯한데 “나는 날라리 교사였다”며 웃는다.
“1969년 호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1966년부터 3년간 화학을 가르쳤는데, 학교 공사 감독하고 행정적인 일까지 처리하느라 늘 피곤했어요. 1인3역을 하려니…. 우리 학교는 개교 이래로 1년에 2번, 학기말에 학생들에게 백지를 나눠주고 교사에 대해 평가하도록 해요. 불만사항이나 개선되기를 바라는 내용을 자유롭게 적도록 하죠. 제가 교사로 있는 동안 아이들 불만 사항에 제 이름이 가장 많이 나와서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죠. 하지만 학교 공사일로는 칭찬을 들었어요. 벽돌을 직접 굽고 인부들을 독려해 공사비를 대폭 줄였거든요. 잠꼬대로 공사 얘기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어요.”
‘날라리 교사’는 나이 서른에 교장이 됐다. 학교를 설립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부친이 돌연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대학교 부지를 둘러보러 부산에 갔다 오셔서는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과로하신 탓이죠. 1970년, 제 나이 서른 살 때예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머니를 위로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학교를 운영했어요.”
▶ 젊은 나이에 교장이 되는 것에 교직원들의 반발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제가 장남이니 아버지의 뒤를 잇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요. 장례식을 마치고 전체 교직원 회의를 소집해 제가 중학교 교장을 맡고,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장은 새로 임명해 화합으로 학교를 이끌어갔죠.”
‘450단의 학교’
충암은 바둑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프로기사 이창호 9단과 유창혁 9단이 충암 출신이며 최근 후지쓰배(杯)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한 박정상 6단도 충암고를 졸업했다. 이밖에 허장회 9단, 정수현 9단, 조대현 9단, 강만우 9단, 양재호 9단, 김승준 9단, 이상훈 9단, 윤성현 9단, 김성룡 9단, 안조영 9단, 조한승 9단, 최철한 9단, 박영훈 9단 등 88명의 충암 출신 프로기사의 단수를 모두 더하면 450단이다(2006년 7월3일 현재).
일본의 기타니 도장은 일본의 바둑 거물 기타니 미노루 선생이 제자를 양성하던 사설 바둑도장이다. 그곳 출신인 이시다 요시오, 도타케 히데오, 가토 마사오, 다케미야 마사키, 고바야시 고이치, 조남철, 조치훈 등의 프로기사가 한때 일본 바둑계를 좌지우지했다. 기타니 출신 프로기사의 단수 합이 500단인데, 1975년 기타니 선생이 사망하면서 도장문을 닫았다. 현재 기타니 출신 기사가 가진 바둑대회 타이틀은 없다. 신예 기사들에게 권좌를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충암학원은 기타니 도장의 기록을 넘어서는 세계 바둑 신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올초 동아일보사 주최 국수전에서 맞붙은 최철한 9단(왼쪽)과 이창호 9단. 둘 다 충암고 출신이다.
“1971년에 우리 학교 인근에 살던 고(故) 김수영 사범이 학교로 찾아와 바둑부를 만들어 프로기사를 길러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어요. 마침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바둑을 참 좋아하셨어요. 저도 아버지께 바둑을 배웠는데, 고1 때 처음 아버지를 이겼죠. 그런데도 아버지께선 백(白)을 안 넘겨주시더군요. 이후에도 제가 계속 이기니까 그 뒤로는 먼저 ‘바둑 두자’는 말씀을 안 하셨어요. 아버지와 대국(對局)하던 기억 때문에 바둑에 더 애착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수영 사범의 권유대로 바둑 특기부를 만들고, 김 사범이 추천하는 학생들을 스카우트했지요. 당시 허장회 사범이 고1이었는데, 원주고등학교에 다니다 우리 학교로 왔지요.”
▶ 특히 기억에 남는 대회가 있다면?
“정치적인 이유로 바둑대회가 없어진 적이 있죠. 1970년대 초, 조남철·김수영 사범과 함께 ‘한중일 고교생 바둑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당시 학생이던 문용직, 조대현, 강만호 등을 데리고 대만에 갔어요. 장제스(蔣介石) 총통 시절이었는데, 대만기원 저우즈러우(周至柔) 이사장과 잉창치(應昌期) 부이사장이 우리 일행을 맞았어요. 대만 그랜드 호텔에서 만찬이 열렸는데, 저우즈러우 이사장 옆에서 생글거리며 명함을 돌리던 공보부 리덩후이(李登輝) 국장은 후에 대만 총통을 오래 역임했죠. 우리를 환대한다고 최고급 음식을 내놓았는데 생선이고 육류고 전부 기름기를 싹 빼서 맛이 없어 억지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그때 한창 대만과 일본이 국교를 끊느니마느니 했는데, 결국 일본이 대만과 국교를 끊는 바람에 한중일 바둑대회가 흐지부지되고 말았죠.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 바둑 특기생들이 이사장 관사에서 생활했다고 하더군요.
“허장회, 유창혁, 조대현, 김영환, 정현선이 우리 집에서 살았지요. 늘 4∼5명이 우리 집에서 생활했어요.”
▶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바둑 특기부를 만들고, 우수한 학생들을 스카우트하던 초기에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마땅히 기숙할 곳이 없었어요. 저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라 보기 딱해 저희 집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있기로 했어요. 제가 2남2녀를 뒀는데, 다 제 자식처럼 잘 어울려 지냈어요.”
“이창호가 대학 나왔습니까?”
유창혁 9단은 고1 때부터 2년간 이홍식 이사장과 함께 지냈다. 유창혁 9단은 “이사장님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실 때마다 방문을 두드리시고는 들여다보셨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사모님께서 신경쓰실 일이 많았을 텐데 전혀 내색 않고 잘 대해주셨다”고 했다.
이홍식 명예이사장은 오래 전부터 ‘야구 특기생과 바둑 특기생은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파격적인 방침을 이어오고 있다. 시험도 보지 않는 특기생들에게 바둑이나 야구에 전념하라고 장학금을 준다. 충암의 바둑 특기생으로 등록하면 수업시간에 구애하지 않고 각자 기원에서 연구해 프로에 입단하고 대회에 출전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충암고 출신 바둑기사들의 연구 모임인 충암연구회에서 선후배가 함께 연구하며 실력을 다진다.
“한 가지 일만 잘하면 돼요. 수업 다 챙겨 들으면 언제 바둑 공부하고 대국해서 실력을 향상시킵니까? 수업시간에 배우지 못한 것은 스스로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익히면 돼요. 제도권 교육은 초등학교로 충분하다는 게 제 교육관(觀)입니다. 중학교 때부터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해야죠. 누구나 다 대학에 들어가고, 석·박사 되는 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이창호나 유창혁이 대학 나왔습니까? 그들에게 대학 졸업장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최선의 교육’은 교육을 통해 자기계발을 이루고, 자아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하기 싫어하는 공부 억지로 시키지 말고, 바둑이나 야구, 미술, 음악, 골프, 요리 등 학생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열심히 할 수 있게 하면 돼요. 물론 우리 학교에도 이런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만.”
충암초등학교 학생들의 수업에 참여한 이홍식 명예이사장.
“그런 생각으로는 세계 최고가 되지 못해요. 우린 지금 한국은 물론 세계의 두뇌들과 경쟁하는 지구촌시대에 살고 있어요. 이창호나 유창혁이 정규 수업 다 듣고 시험도 봤으면 언제 바둑을 연구했겠습니까. 에디슨, 빌 게이츠, 월트 디즈니도 대학 졸업장이 없어요. 하지만 다 세계적인 천재 아닙니까. 우리나라가 내세울 건 사람뿐이에요. 한국 사람처럼 평균적으로 두되가 우수한 민족은 세계에서 드물어요. 그 두뇌를 잘 활용해서 영재교육을 하면 10년 안에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천재가 나올 겁니다.”
제7차 교육과정의 핵심은 ‘자기주도학습’이다. 충암은 이미 1980년대부터 자기주도학습을 시행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수업시간 50분 중, 처음 10분간 학생은 학습 범위와 목표를 확인하고, 교사는 학습 목표 및 핵심을 제시한 뒤 참고사항이나 유의사항을 말해줍니다. 수업 전개부분인 30분 동안은 학생 스스로 교과서를 읽고 내용을 요약·정리하죠. 필요에 따라서는 문제를 풀고 실험도 합니다. 교사는 학생들의 학습사항을 살펴보고 개별적으로 질문에 답해요. 마지막 10분은 정리와 평가시간입니다. 학생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을 확인하고, 교사는 구두 질문이나 쪽지 시험으로 수업 내용을 정리합니다.”
▶ 학생들이 잘 적응하던가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이러한 수업방식을 도입했는데, 초기에는 학생들이 잘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리를 잡아갔어요. 1992년, 당시 김상준 서울시 교육감이 와서 수업을 참관하기도 했죠. 일선 학교와 교육기관에서도 관심을 보였고요. 우리 학교가 바둑 명문이 된 것도 자기주도학습의 결과라고 볼 수 있죠. 바둑 특기생은 일단 프로에 입단하면 스승 없이 혼자서 책을 보고 연구해야 하거든요.”
▶ 일찍이 자기주도학습을 권장한 계기가 있습니까.
“1975년에 미국 필립스아카데미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제겐 큰 충격이었죠. 부시와 클린턴이 졸업한 미국 명문 사학 필립스아카데미에선 사관학교 학생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학생들이 칠판 하나 없는 작은 교실에서 각자 자신의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칠판이 없는 대신 개인용 컴퓨터가 있는 게 독특했죠. 학생들이 공부하다 손을 들면 교사가 금세 뛰어와 가르쳐주더군요. 우리의 수업 방식은 어떻습니까? 교실에 학생들을 가득 앉혀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교사가 일일이 설명해주죠. 귀국 후 당장 그 방식을 도입하지는 못하고 1980년대 초부터 시작했어요. 교사들이 반대했거든요(웃음). ‘수업은 교사가 가르치는 것’이라면서.”
1980년대부터 자기주도학습
▶ 교사들을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제 경험을 들려줬지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입시에서 전국 2등을 했어요.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공부를 엄청 많이 시켰어요. 그러나 선생님이 칠판 앞에서 가르치는 시간이 길진 않았어요. 숙제를 많이 내주고, 그 다음날 시험으로 확인하는 식이었죠. 학생 스스로 공부하도록 유도한 거예요. 스스로 집중해 공부한 시간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학습 결과가 좌우된다는 걸 교사들에게 강조했습니다.”
▶ 결국 교사들이 설득당했나 보죠?
“그런 셈이죠. 우선 고등학교 교실 6개를 트고, 상위 15% 안에 드는 학생들을 모아 밤 11시까지 자율학습을 시켰어요. 교사들은 돌아다니다 질문을 받으면 설명해주고요. 요즘 학생들이 얘기하는 ‘야자’를 일찌감치 시작했던 거죠.”
▶ 효과가 있었습니까.
“물론이죠. ‘야자’ 덕분에 1983, 84년 서울대 합격자 수가 전국 최다였어요. 1983년에 서울대 52명, 연세대 52명, 고려대 49명이 합격했고, 1984년에는 서울대 54명, 연세대 55명, 고려대 50명, 1985년엔 서울대 47명, 연세대 67명, 고려대 49명이 합격했죠.
▶ 요즘 충암고 학생들의 성적은 어떤가요.
“예전보다는 안 좋아요. 우수한 학생들 대부분이 특목고로 빠져나간 탓이죠.”
충암은 졸업생 중 연예인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개그맨 이휘재·김현철, 가수 홍서범·윤상·탁재훈, 탤런트 차인표·김명민…. 개그맨 이휘재는 이홍식 명예이사장의 아들인 이태건 충암학원 이사장과 친구 사이다. 이휘재는 “무명시절 이사장님 댁 신세를 많이 졌는데, 이사장님은 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고 격려해주셨다”고 전했다. 이홍식 명예이사장은 “획일적인 평준화 교육은 학생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라며 “과거엔 연예인을 ‘딴따라’라고 비하했지만 배용준, 보아 같은 연예인이 한류 바람을 일으키며 중소기업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결국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연예인도 다수 배출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학생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아 공부해야 창의성이 길러지죠. 중·고등학교 교과서 달달 외워서 뭐에 씁니까. 살면서 필요한 부분은 그때그때 공부해서 따라가면 돼요. 그런 점에서 특목고나 영재학교, 직업전문학교가 많아져야 합니다. 교과목도 바둑, 애니메이션, 요리, 골프, 금속, 전기 등으로 세분되어야 하고요. 이렇게 특화해 10년만 교육하면 각 분야에서 세계 일류가 나올 겁니다.”
그는 또 우수 인력을 교육계로 끌어들이려면 교직사회에도 경쟁 체제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방형 교장 공모제를 실시하고, 평교사에게도 역량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사들이 노력하죠. 저는 지금껏 추천을 받아 교사를 채용한 적이 없어요. 실력으로 판가름합니다. 매년 개교기념일에 교사를 공모하죠.”
지난 5월 열린 충암고 동문 체육대회엔 500여 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이홍식 이사장은 “학생들이 졸업한 뒤에도 충암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서로 돕고 사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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