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230년 후,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의 현주소는?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6-08-09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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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 보스턴 독립기념일 축제의 구호는 ‘자유가 울리게 하라’이다. 영국은 식민지 미국에서 더 많은 세금을 걷으려 했고, 미국의 민초(民草)들은 몸을 던져 수탈에 저항했다. 결국 쟁취한 자유. 그러나 230년이 지난 오늘, 미국의 ‘자유정신’은 살아 있는가.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1776년 7월4일, 미국 대륙회의의 독립선언.

    2006년 7월4일 저녁, 보스턴 찰스 강변의 해치셸(Hatch Shell) 야외음악당. 젊은 지휘자 키스 로크하트(Keith Lockhart)가 지휘하는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가 독립기념일 축하 음악제를 열고 있다. 해치셸이 있는 보스턴 쪽 강변은 물론이고 건너편 케임브리지 강변도, 그리고 두 곳을 잇는 롱펠로 인도교도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들어차 있다. 해마다 보스턴의 독립기념일 축제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인파는 50만 이상이고, 그중 3분의 1이 외지인이라고 안내 팸플릿에 적혀 있다.

    독립혁명의 발원지이기에 보스턴의 독립기념일 행사는 각별한 의미를 갖고, 그런 만큼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것 또한 당연한 일이리라.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오후 8시30분, 미국 국가(國歌)를 연주하면서 축제는 시작됐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목소리로 국가를 합창한다. 국가가 끝날 무렵 편대를 이룬 전투기의 축하비행이 이어진다. 들려오는 날렵한 굉음에 사람들은 환호성으로 화답한다. 하늘에는 비행선이 떠 있는 가운데 헬리콥터 두 대가 계속 순찰비행을 한다.

    찰스 강에도 여러 척의 경찰 경비정이 오가며 순찰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삼엄한 경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환호하고, 춤추고, 노래한다. ‘9·11’ 이후 이런 물리적 긴장은 미국인들에게 일상적 삶의 일부가 된 듯하다. 보스턴 팝스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캉디드 서곡’을 연주한다. 번스타인의 경쾌한 멜로디에 이어 ‘아메리카’ ‘이 땅은 그대의 땅’ ‘양키 두들’ 등 애국적인 노래의 합창이 뒤따른다. 환호성 속에서 록카펠러의 노래가, 뒤이어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의 선율이 찰스 강에 메아리친다.

    사람들은 한덩어리로 어울려 손뼉을 치며 춤을 춘다. 옆자리의 중년 부부는 크런치 바를 권한다. 앞에 앉은 폴이라는 젊은이는 멀리 메릴랜드에서 일부러 구경을 왔는데, 아침 9시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고 자랑한다. 뒤에는 중국계 미국인 가족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 부부는 연신 중국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그 옆에서 영어로 재잘댄다. 촛불을 켜놓고 있는 사람, 얼굴에 성조기 문양을 한 사람, 자유의 여신상 머리띠 장식을 두른 사람도 있다.

    미국이여, 자유가 울리게 하라!



    피부색도 각양각색이고, 언어도 영어만이 아니라 중국어, 스페인어, 심심찮게 한국말도 들린다. 그러나 이런 차이도 이 순간만은 한마당 축제의 흥겨운 분위기에 파묻혀 의식되지 않는다. 미하일 바흐친에 따르면, 축제는 전통적으로 유토피아적 욕망과 이데올로기적 의식 주형이 뒤섞인 상징적 실천이다. 정치가 대중적 스펙터클의 장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는 18세기 말 이후 축제의 이런 사회적 기능은 더욱 중시됐다.

    축제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갈등의 목소리를 발산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상적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사회적 안전판 기능을 수행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묶는 원천이기도 하다.

    ‘광활한 하늘과,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들판과, 자색의 장엄한 산들로 아름다운 아메리카’에 대한 찬가 속에서 사람들은 이라크전쟁을 둘러싼 이념적 갈등도, 날로 심화되는 빈부의 격차도, 태풍 카트리나가 드러낸 엄존하는 인종차별의 현실도 잠시 접어두고 일시적이나마 하나가 되는 환희를 맛보는 것이다.

    축제는 10시30분에 시작된 불꽃놀이에서 절정을 이뤘다. 하트 모양, 민들레 모양, 성조기의 별이 됐다가 흩어지는 모양 등 형형색색의 다양한 불꽃이 230년 전 독립전쟁의 불을 댕긴 이곳 보스턴의 하늘을 수놓았다. 사람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는 불꽃놀이도 실은 자본의 첨예한 경연장이다. 무려 1만9000파운드어치의 폭죽이 스페인, 중국, 대만,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전세계의 폭죽회사로부터 수입돼 서로 성능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보스턴 차 습격단 사건이 일어났던 곳. 이 사건은 훗날 미국의 독립을 가져오는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올해 축제의 구호는, 팸플릿의 이곳저곳에 적혀 있듯이, ‘자유가 울리게 하라(Let freedom ring)!’이다. 독립전쟁은 정녕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시작됐고, 자유의 쟁취로 끝이 났다. 그렇게 얻어진 자유의 반석 위에 미국은 세워졌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의 찬가도, 자유의 수호도, 모두 상충하는 복잡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하부에 거느리고 있다. 230년 전의 독립전쟁도 결국 규모와 첨예함의 정도만 다를 뿐, 아메리카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상충된 경제적 이해관계가 촉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7월4일의 정신이란 과연 무엇일까.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는 직접적 동인(動因)이 북아메리카 식민지 지배권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오랜 쟁패에서 거둔 승리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763년, 역사가들이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 부르는 7년에 걸쳐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지루한 싸움에서 영국은 마침내 승리한다. 영국은 전쟁 초기에는 원주민 인디언 부족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한 프랑스에 고전했으나 식민지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 국면을 전환할 수 있었다.

    영국은 1759년 퀘벡을 함락하고, 1760년에는 몬트리올에서 프랑스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패배한 프랑스는 1763년 오늘날의 캐나다 지역 대부분과 미시시피 강 동쪽의 프랑스 식민지를 영국에 양도하고 뉴올리언스와 미시시피 서쪽 식민지는 스페인에 양도하는 것을 골자로 한 파리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이로써 북아메리카 대륙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유럽을 선도하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하지만, 1억3000만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전비(戰費)를 부채로 떠안게 됐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해 이를 변제하고자 했다.

    ‘세금폭탄’은 저항을 낳는다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 수입하는 당밀에 수입관세를 부과한 1764년의 설탕법, 공문서는 물론 모든 상업적인 출판물에 인지를 첨부하라는 1765년의 인지법, 수상 찰스 타운젠드(Charles Townshend)가 주동이 되어 식민지의 일상 수입품인 차, 종이, 도료 등에 관세를 부과한 1766년의 타운젠드법은 모두 이런 재정적 난관을 타개하고자 하는 고육책의 소산이다. 이 가운데 특히 인지법은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 직접세적인 성격으로 부과한 첫 세금이어서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버지니아 주 식민지의회는 저 유명한 패트릭 헨리가 주동이 되어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는 주장 아래 인지법을 거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보스턴에서는 당시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5000명이 보스턴 코몬에 모여 인지세 징세관인 앤드루 올리버의 초상을 느릅나무에 매달아 화형시키고(그후 이 느릅나무를 ‘자유의 나무(Liberty Tree)’라 칭했다) 그의 집으로 달려가 기물을 파괴했으며, 며칠 뒤에는 부지사로 갑부이던 토머스 허친슨의 집에 몰려가 부수고 약탈했다. 버지니아와 보스턴에 이어 뉴욕,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도 인지법에 항의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인지법은 결국 본국 의회의 식민지 관할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 셈인데, 이 논쟁은 본국 정부와 식민지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고, 그로부터 촉발된 시민적 권리와 자유의 한계에 대한 제자백가(諸子百家)적 논쟁이 결국 1776년 독립선언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본국 정부의 규제와 간섭에 대한 이와 같은 격렬한 반응은 1692년 국왕이 임명한 총독에 의한 직할 식민지 체제로 바뀌었다고 하나 청교도 시대의 자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국 의회에서 타운젠드법이 통과되자 보스턴에서는 인지법에 항의하기 위해 새뮤얼 애덤스가 주동해 조직한 이른바 ‘자유의 아들(Sons of Liberty)’을 중심으로 영국 물품 보이콧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이렇게 소요 사태가 계속되자 치안 유지에 불안을 느낀 당시의 버나드 총독은 본국으로부터 2개 연대의 정규군을 지원받아 보스턴에 주둔시켰다. 상비군이 식민지에 주둔하자 본국 정부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따라서 긴장의 파고도 높아졌다.

    1770년 3월에 터진 ‘보스턴 학살’은 이런 불신과 긴장이 폭발한 결과였다. 식민지의 격렬한 반응에 영국 정부는 한발 물러나 1773년에는 차를 제외한 모든 물품에 대해 수입 관세를 철폐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이런 미봉책에 만족하지 않았다. 1773년 12월 동인도회사의 수입 차를 싣고 온 배를 영국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총독에게 요구하던 보스턴 식민자들은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올드 사우스 교회에 모여 집회를 연 다음 모호크 인디언 복장을 한 채 동인도 회사 선박에 난입해 수백 상자의 차를 바다에 내던졌다.

    ‘보스턴 차 습격단(Boston Tea Party) 사건’은 영국 지도층을 격앙시키기에 충분했다. 식민지를 강압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을 등에 업고 영국 정부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의회는 곧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주의 자치권을 몰수해 모든 관리를 총독이 임명하고, 재판권을 회수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군대의 주둔비용은 민간인이 부담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강압법(Coercive Act)을 통과시켰다. 이와 함께 토머스 게이지 장군을 사령관 겸 새 총독으로 임명하고 4개 연대를 보스턴에 파견했다.

    어머니의 나라에 총을 겨누다

    사태가 심각하게 전개되자 아메리카 식민지는 1774년 본국 정부의 이런 강경 조치를 논의하기 위해 전 식민지 대표자 회의, 곧 제1차 대륙회의를 소집했다.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 주에서 파견한 대표자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대륙회의가 열리는 동안 매사추세츠 주민들은 한편으로 지역 읍민회의를 소집해 각 식민지에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중지하고 강압법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영국의 군사행동에 대응하여 자체 방위를 할 민병대의 구성을 결의했다. 매사추세츠 읍민회의 결정 사항은 즉시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에 보내졌고 대륙회의는 이를 추인했다.

    사태가 극단으로 치닫자 대륙회의에 참석한 일부 보수적인 지도자들은 영국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이들은 각 식민지의 대표자로 식민지의회를 구성하고, 그 수장은 국왕이 임명하는 방식의 중재안을 마련해 식민지가 반대하는 것은 억압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의회이지 국왕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국왕인 조지 3세에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는 청원서를 내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이런 타협안은 이미 식민지를 반란 상태로 규정하고 이를 진압할 군사작전을 고려하던 영국 정부도, 단절의 필연성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식민지 자체에서도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775년 4월18일, 게이지 장군은 마침내 군사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이미 본국 정부로부터 식민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주동자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아놓고 있었다. 게이지는 프랜시스 스미스 중령의 지휘하에 2개 중대 700명을 발진시켜 렉싱턴에 숨어 있는 새뮤얼 애덤스와 존 행콕을 체포하고 민병대가 콩코드에 비축해놓은 화약을 몰수할 것을 명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보스턴 자유의 아들 지도자 조지프 워런(Joseph Warren)은 폴 리비어를 렉싱턴으로 급파, 두 지도자에게 영국군의 군사행동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이에 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는 또 리비어가 체포될 것에 대비해 윌리엄 도즈(William Dawes)에게도 같은 임무를 부여해 다른 길로 렉싱턴으로 출발하게 했다. 리비어는 영국군이 찰스 강을 이용해 수로로 보스턴을 출발할 경우와 육로로 행군할 경우를 상정하고, 전자일 경우에는 올드 노스 교회의 첨탑에 등불을 2개, 후자인 경우는 1개를 걸도록 종지기에게 부탁하고 보스턴을 떠났다. 보스턴에서 배를 타고 찰스턴으로 간 다음 콩코드까지 밤새워 파발마를 달린 리비어의 이 주도면밀한 행동은 훗날 ‘폴 리비어의 달리기’라는 롱펠로의 시에 담겨 인구에 회자됐고, 올드 노스 교회에 걸렸던 등불 또한 ‘자유의 등불(Liberty Light)’이란 이름으로 콩코드 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독립의 횃불 들어올린 민병대

    1775년 4월19일 새벽, 게이지 장군이 출동시킨 700여 명의 영국군 정규군이 렉싱턴 코몬 근처에 당도했을 때, 인근에서 출동한 80여 명의 민병대가 이들과 맞섰다. 영국군 장교가 민병대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요구하자 민병대 장교 찰스 파커 대위는 수적으로 맞설 수 없다고 판단, 부하들에게 해산하라고 명했다.

    이 순간 누군가가 총을 발사했다. 그와 동시에 교전이 시작되고 육박전이 벌어졌다. 독립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 발포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역사가 대다수는 전쟁에 참여했던 당시 병사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영국군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첫 전투에서 민병대원 8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당했다. 영국군은 부상자가 한 명 있었을 뿐이다.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렉싱턴(왼쪽)과 콩코드의 민병대 상(像).

    렉싱턴 교전 후 영국군은 콩코드로 계속 진격했다. 렉싱턴에서 교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콩코드의 민병대는 수적 열세를 감안해 영국군과 직접 맞서기를 피하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노스 브리지 너머 작은 언덕 뒤로 집결했다. 영국군은 수색대를 조직해 콩코드 읍 곳곳을 수색했으나 몇 문의 작은 대포를 발견했을 뿐 화약은 찾을 수 없었다. 민병대가 미리 다른 장소로 옮겨놓았던 것이다. 영국군은 콩코드 읍내 중앙에 세워져 있는 ‘자유의 나무’를 잘라버리고 텅 빈 가옥들을 불태웠다.

    불이 마을회관으로 옮겨 붙으면서 연기가 읍내를 뒤덮었다. 멀리 노스 브리지에서 이를 바라본 민병대는 영국군이 읍에 불을 지른 것으로 오인하고 분격한 나머지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다리 쪽으로 이동했다. 곧 이어 노스 브리지를 사이에 두고 교전이 벌어졌다. 이 콩코드 전투야말로 식민지군이 스스로 나서서 영국군과 힘으로 맞선 첫 전투이다. 콩코드 제1교구 목사 윌리엄 에머슨은 다리 바로 옆의 목사관 올드 맨스에서 이 전투를 지켜봤는데, 뒷날 그 손자는 ‘콩코드 찬가’에서 이 역사적 전투를 이렇게 묘사했다.

    강물 위로 휘어진 거친 다리 옆에

    그들의 깃발이 사월 미풍에 날렸다.

    한때 농부들이 여기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이 쏜 총소리가 전세계에 울려 퍼졌다.

    시에 언급되어 있듯이 민병대의 대다수는 농부였다. 그들은 쟁기로 땅을 갈다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총을 잡은 시민군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봉기는 세계사의 진행을 바꿀 역사적 사건의 서막이었다. 1781년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항복할 때까지 8년간 지속된 독립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렉싱턴에서 콩코드에 이르는 전투 지역은 오늘날 ‘국립민병대 사적공원’으로 지정돼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매년 100만명 이상이 찾는 이 사적공원에는 독립전쟁 당시에 중요한 역할을 한 건물과 집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특히 역사의 자취가 서린 중요 지점을 잇는, 5.5마일의 ‘전투로 트레일(Battle Road Trail)’은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옛 길을 복원해 전원의 고즈넉한 정취를 맛볼 수 있는 하이킹 코스로도 제격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개의 민병대 동상이다. 그중 하나인 렉싱턴 민병대상(像)은 렉싱턴 방문자센터 건너편에 서 있는데, 영국군과의 첫 교전을 지휘한 찰스 파커 대위를 모델로 보스턴의 조각가 킷선(Henry A. Kitson)이 1900년에 제작한 청동 상이다. 화강암 위에 세워진 8피트 높이의 렉싱턴 민병대상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두 손으로 총을 움켜쥐고 보스턴 쪽을 향해 서 있다.

    치열한 벙커힐 전투

    특히 모자를 쓰지 않은 맨 머리에 소매를 걷어붙인 그의 모습에서 약동하는 젊음과 힘, 자유를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킷선은 갓 태어날 신생 공화국의 이미지를 다소간의 부자연스러움을 무릅쓰고(역사가들이 지적하고 있듯 첫 교전이 일어난 1775년 4월19일 새벽 5시라면 매우 추웠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모자를 쓰지 않거나 소매를 걷어붙였을 리 없다) 이 동상에 투영한 것이다.

    콩코드의 노스 브리지에 서 있는 콩코드의 민병대상(像)은 이와 대조적으로 모자를 쓰고 오른손으로는 총을 들고 왼손으로는 쟁기의 손잡이를 잡고 있다. 콩코드의 조각가 대니얼 프렌치(Diniel C. French)가 노스 브리지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1875년에 제작, 봉헌한 콩코드 민병대상은 농부이면서 군인인 전형적인 민병(Militia)의 모습이다. 렉싱턴-콩코드 전투가 발발하자 인근 27개 지역에서 이런 시민들이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의지로 노소를 불문하고 전투에 나선 것이다. 각 지역 민병대는 위기 상황에 즉각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병력으로 전체 인원의 3분의 1가량을 지정해놓았는데 이들이 바로 ‘Minuteman(몇 분 안에 출동할 수 있는 병력)’이다.

    식민지 민병대는 콩코드와 렉싱턴에서 보스턴으로 패퇴한 영국군을 찰스 강을 경계로 보스턴 외곽에서 에워싸 고립시켰다. 보스턴은 원래 가느다란 지협(Boston Neck)을 통해 바다로 돌출한 반도여서(오늘날의 보스턴은 이후 대규모 매립공사를 하여 이런 지형적 특성이 사라지고 없다) 고립시키기도 쉽고 역으로 방어하기도 쉬운 지역이다. 매사추세츠 주 전역에서 모여든 민병대는 이제 1만5000명이 넘어서 5000명의 영국군을 수적으로 압도했다. 매사추세츠 안전위원회는 민병대를 식민지군으로 정식 편성하고 아르테머스 워드(Artemas Ward) 장군에게 지휘를 맡겼다.

    찰스 강을 사이에 둔 매사추세츠 식민지군과 영국군의 대치는 1776년 3월까지 9개월 이상 지속됐는데, 이 기간 중 가장 치열했던 접전이 1775년 6월의 벙커힐 전투다. 벙커힐은 보스턴 북쪽 찰스턴에 위치한 작은 언덕이다. 식민지군은 외부로부터 고립돼 바다를 통해 해군으로부터 보급품을 공급받는 영국군을 더욱 압박하기 위해 보스턴 항이 내려다보이는 이 곳에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안전위원회의 지시를 받은 윌리엄 프레스콧 대령은 약 1200명의 군사를 동원, 항구에 좀더 가까운 브리즈힐에 약 50m에 걸쳐 2m 높이의 진지를 구축했다.

    대륙회의의 독립선언

    밤 사이에 생겨난 성채에 놀란 영국군은 위협을 느끼고 보스턴 항에 정박 중인 군함에서 포격을 가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영국군은 맞은편에 있는 보스턴의 콥스힐에서 찰스턴을 향해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는 한편 브리즈힐에 상륙해 삼면에서 식민지군 진지를 공격했다.

    2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화력이 우세한 영국군은 진지를 점령하고 식민지군을 벙커힐 너머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이 승리는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공격에 투입된 병력의 약 40%에 육박하는 1054명의 사상자가 났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식민지군은 약 140명이 사망하고 301명이 부상당했을 뿐이다.

    벙커힐 전투는 식민지군에 유럽 최강이라는 영국 정규군과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반면, 오합지졸로 얕보던 식민지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본 영국군은 전술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는 계기가 됐다. 뒷날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가 평가한 바 그대로 “벙커힐 전투는 전쟁을 결정지은 일격”이었고, “독립을 더 이상 의심할 바 없는 것으로 만든” 싸움이었다. 영국군은 벙커힐 전투 이후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고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수세 작전으로 전환했다. 그로부터 3주 후 대륙회의의 결의에 따라 식민지군 전체 사령관으로 임명된 워싱턴이 케임브리지에 도착해 이제 대륙군(Continental Army)으로 명명된 식민지군의 지휘를 맡았다.

    워싱턴은 전열을 정비해 공세를 강화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영국군의 수비벽을 뚫을 수 없었다. 교착상태가 지속되자 워싱턴은 이듬해 3월, 멀리 뉴욕의 티콘데로가 요새에서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사정거리가 긴 거대한 대포를 운반해 와 보스턴 남쪽의 도체스터 하이츠에 설치했다. 이제 보스턴 전역이 대포의 사정거리에 놓이게 됐다.

    영국군이 도체스터 하이츠에 솟아 있는 포대를 보고 놀란 것은 물론이다. 토머스 게이지의 뒤를 이어 영국군을 지휘하던 윌리엄 하우 장군은 처음에는 도체스터 하이츠를 공격코자 했으나, 벙커힐 전투에서와 같은 막대한 피해를 우려해 결국 보스턴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하우는 보스턴을 불태우지 않는 조건으로 안전한 철수를 요구했고 워싱턴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보스턴은 파괴를 면하게 됐다. 1776년 3월17일, 영국군과 1100여 명의 보스턴 왕당파 인사들은 보스턴 항을 떠나 노바스코샤의 핼리팩스로 철수했다. 이로써 보스턴은 1768년 인지법 소요로 촉발된 영국군의 주둔으로부터 8년 만에 해방됐다. ‘자유의 요람지’인 보스턴의 해방은 식민지 전체의 정치적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776년 7월4일, 대륙회의는 타협파와 독립파 간의 지루한 공방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독립을 선언한다.

    코몬, 보스턴의 살아 있는 역사

    간밤에 간간이 뿌리던 비가 멈추고 이튿날 아침은 화창했다. 축일(祝日) 다음 날이지만 보스턴 코몬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활기차다.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이런 공유지가 있다는 것이 삶을 얼마나 청량하게 만드는가.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사람,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는 중년의 여성들, 윗몸을 드러낸 채 조깅하는 사람,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 손을 맞잡은 다정한 연인들은 분망한 도시의 일상에 한 템포의 여유를 제공한다.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새뮤얼 애덤스(왼쪽)와 벙커힐 기념탑.600.txt

    미국 사회가 녹색 공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서 도시 녹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부터다. 프레데릭 옴스테드(Frederick L. Olmstead)가 설계한 뉴욕의 센트럴 파크 건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보스턴 코몬은 그러나 조금 다른 경우다. 원래 이곳은 청교도들에 앞서서 1622년 이곳에 정착한 윌리엄 블랙스턴 목사 소유의 목초지였다. 물이 귀했던 보스턴 인근 지역에서 생수가 나오는 이곳을 새로 이주해 온 청교도 사회는 원했고, 블랙스턴은 이 땅을 기꺼이 청교도들에게 양도했다.

    청교도들은 이곳을 방목장으로, 군사훈련장으로, 또 한때는 쓰레기장으로 활용하다가 1650년대 이후 주로 공적인 행사장소로 썼다. 44에이커에 이르는 보스턴 코몬은 청교도 시대 퀘이커교도와 마녀의 처형에서부터 독립혁명기의 항쟁 집회를 거쳐 최근의 반전 데모에 이르기까지 보스턴의 온갖 영욕의 사건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다. 1775년 4월18일, 식민지의 군사적 징벌 결정에 따라 콩코드까지 출동했던 700명의 영국군 병사가 출정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독립혁명과 관련된 보스턴의 사적지는 이곳 보스턴 코몬에서 시작해 강 건너 찰스턴의 벙커힐에서 끝나는, 2.5마일 거리의 ‘자유의 트레일(Freedom’s Trail)’을 따라 걸으면 거의 찾아볼 수 있다. 자유의 트레일은 보도에 붉은 줄 혹은 붉은 벽돌로 표시돼 있기 때문에 방문자는 길을 잃을 염려 없이 쉽게 따라갈 수 있다. 나는 파크 스트리트 지하철 역 근처에 위치한 안내 센터에서 안내 지도를 하나 얻은 다음 트레일을 따라 보스턴 코몬을 가로질러 비콘 힐의 주 의사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황금빛 돔이 장중함을 더해주는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은 1795년 당시 주지사이던 새뮤얼 애덤스와 폴 리비어가 초석을 놓고, 유명한 건축가 찰스 불핀치(Charles Bulfinch)가 설계해 세운 것이다. 보스턴 태생인 불핀치는 당시 공공건물로서 가장 아름답고 장중하다는 평을 받은 이 건물을 설계한 덕분에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 설계도 맡을 수 있었다.

    건물이 세워진 땅이 한때 매사추세츠 주 초대 민선 지사이자 독립선언서의 서명자인 존 행콕의 소유였다니, 이 새 의사당 건물은 말하자면 혁명 주역들의 합작품인 셈이다. 존 행콕은 보스턴의 제일가는 갑부였으나 그는 상당한 재산을 자유의 아들 활동자금으로 내놓았고 사리사욕을 위해 공적 대의를 소홀히 하지 않은 인물이다.

    미국인이 가보고 싶은 도시

    같은 상인 출신으로 대륙회의 의장을 지낸 헨리 로렌스(Henry Laurens) 또한 자신의 사업을 접고 공직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한 드문 정치가 중의 하나다. 오늘날 미국 건국의 초석을 다진 정치사상으로 존 로크의 계몽주의 정치철학 못지않게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덕목을 강조한 르네상스 공화주의가 주목되고 있는 것도 공공선을 우선시한 건국 주역들의 존재 때문이다.

    의사당 건물 내벽은 청교도 순례자들의 플리머스 상륙을 필두로 매사추세츠 역사를 소재로 한 벽화들이 장식하고 있고, 최근에 완성된 그레이트 홀에는 매사추세츠 주의 351개 시·읍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도열돼 있다.

    의사당을 나와 파크 스트리트 교회를 지나 그래너리 묘지에 들렀다. 고층건물에 둘러싸인 상업지구 한가운데에 이런 묘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보스턴이 샌프란시스코에 이어 미국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두 번째 도시로 거명되는 것도 이처럼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묘지는 독립선언서 서명자 셋(존 행콕, 새뮤얼 애덤스, 로버트 페인), 매사추세츠 주지사 아홉, 제임스 오티스, 폴 리비어, 퀸시 마켓이 들어서 있는 유명한 패늘 홀을 보스턴 시에 기증한 피터 패늘, 다섯 명의 보스턴 학살 희생자,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 부모의 무덤의 포함되어 있다. 이곳이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묘지를 나와서 트레몬트가(街)를 왼쪽으로 따라가다가 바로 다음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스쿨 스트리트로 들어서니 육중한 석조 건물인 킹스 채플이 보인다. 1687년 제임스 2세의 특명에 따라 청교도의 도시인 보스턴에 처음으로 세워진 영국 국교회 건물이다. 킹스 채플 옆에는 또 하나의 작은 묘지가 있다.

    1630년 청교도들이 이곳에 정착한 뒤 곧바로 조성한 보스턴의 가장 오래된 묘지다. 묘지 북쪽으로 매사추세츠 식민지 건설의 주역인 존 윈스롭의 상석 묘가 있다. 이곳 청교도 사회의 으뜸가는 지도자가 이제는 영국 국교회에 부속된 묘지에 잠들어 있다는 것이 역사의 변화무쌍함을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킹스 채플에서 나와 직진하면 거리 끝자락에서 만나는 작은 벽돌 건물이 유명한 올드 코너 서점이다. 이곳은 원래 매사추세츠 청교도 사회 최초의 반체제 인사인 앤 허친슨의 집터였다. 19세기 초엽에는 에머슨, 소로, 호손, 롱펠로 등의 작품을 출판한 ‘티크너와 필즈(Ticknor · Fields)’ 출판사가 이곳에서 뉴잉글랜드 문예부흥을 이끌었다. 이 일대는 보스턴 저널리즘의 산실이기도 하다.

    이념의 혁명

    1704년에 창간된 식민지 최초의 신문인 ‘뉴스레터’, 1719년에 설립돼 독립혁명 기간 중 영국 정부를 비판한 수많은 논설을 게재해 혁명의 불꽃을 지펴 나간 ‘보스턴 가제트’ 등이 이곳에서 출판됐다. 미국 독립혁명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수호하고 자유의 의미와 조건을 재정의한 이념의 혁명이다. 이 점이 미국혁명을 기존 사회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삼은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요인이다.

    미국혁명의 원동력을 수많은 팸플릿을 통해 표명된 서로 다른 이념들의 교환과 논쟁에서 비롯된 창발적 에너지로 보자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학자 버나드 베일린(Bernard Bailyn)의 조사에 따르면, 1750년부터 독립을 선언한 1776년 사이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의 관계를 초점으로 다룬 정치적 팸플릿만 400편 이상 발간됐다. 독립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1783년까지 그 수는 무려 1500편에 이른다. 이로 본다면 그런 팸플릿이 발간되고 유통된 이곳이 바로 독립혁명의 진앙(震央)인 셈이다.

    그 다음 내가 찾은 곳은 올드 사우스 집회당이다. 제임스 오티스, 새뮤얼 애덤스, 조지프 워런 같은 혁명 지도자들이 설탕법, 인지법, 보스턴 학살 등에 항의해 사자후를 토하던 바로 그곳이다. 보스턴 차 습격단 사건 때, 5000명이 넘는 군중이 새뮤얼 애덤스의 열변을 들은 곳도 이곳이고, 보스턴 학살 사건 5주년인 1775년 3월, 자유의 아들 지도자인 조지프 워런이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든 탓에 사다리를 타고 창문으로 들어가 연설했던 곳도 이곳이다. 이 뜨거운 혁명의 열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왜 보스턴인가. 왜 결국 혁명의 길로 치달았는가. 다른 선택은 없었는가.

    미국 독립혁명은 최초로 성공한 식민지 혁명이라는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미국과 종주국의 관계는 아시아·아프리카 제3세계 국가들과 그 종주국의 관계와는 다르다. 영국은 외세의 침략 제국이 아니라 미국의 뿌리요 아버지의 나라다. 가령 독립혁명기를 배경으로 하는 ‘나의 친척 몰리뇌 소령’이라는 호손의 단편에서 영국에 대한 군중의 저항에 오이디푸스적 친부(親父) 살해의 이미지가 어른거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제3세계 국가들처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폭정에 시달렸다든지 경제적 수탈로 생존 그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에드먼드 버크의 표현대로 “미국인은 멀리 바다 건너에서 부패한 미풍이 불어올 때마다 폭정이 다가오는 낌새를 맡곤 했다.” 제3세계 국가 처지에서 본다면, 한마디로 호들갑이다. 이 호들갑은, 미국인들이 1776년 이전 이미 한 세기 반 동안 자치를 누려왔다는 것, 본국 사람들보다 실제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해왔다는 것, 자율이 일상 곳곳에 배어 있어 되돌릴 수 없게 됐다는 것, 이런 점들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1792년 제임스 매디슨은 유럽에서는 자유의 특권을 권력이 부여했지만, 미국은 권력의 특권을 자유가 부여하는 본보기를 세웠고, 프랑스가 그것을 본받았다고 썼다. 요컨대 미국혁명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제와 정치, 혁명의 두 수레바퀴

    이런 상념에 젖어서 옛 의사당 건물을 찾았다. 1712년에 지어진 의사당 겸 주지사 청사로 쓰인 이 건물은 보스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이다. 원래 이곳은 17세기의 읍청사(Town House) 자리였는데, 1711년 화재로 전소된 다음 현재의 건물이 들어섰고, 독립 후 매사추세츠 정부가 비콘 힐의 신(新) 의사당으로 옮겨간 후 퇴락의 길을 걷다 19세기 말에 지금처럼 복원됐다.

    당시만 해도 보스턴에서 가장 기품 있는 건물이었다는데 오늘날은 고층 건물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 위용을 뽐낼 수 없는 형편이다. 이 건물의 오른편, 길과 길이 교차하는 한가운데가 유명한 보스턴 학살의 현장이다. 복잡한 교통과 차들의 소음으로 그때의 정경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콩그레스가를 따라 곧장 걸으니 이윽고 패늘 홀이다. 입구 쪽에 서 있는 새뮤얼 애덤스의 동상이 눈길을 끈다. 보스턴 대학살 사건 직후 영국군은 즉각 철수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결의에 찬 애덤스의 모습을 새긴 이 동상은 1880년 앤 휘트니가 조각한 것이다.

    7월4일의 정신

    이 자유의 산실을 보스턴의 독립혁명을 주도한 인물이 지키고 있는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동상의 한 명판에는 ‘부패와 두려움을 몰랐던 정치가(A statesman, incorruptible and fearless)’라고 새겨져 있다. 오늘날 이런 정치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래층을 가게로, 위층을 집회장으로 쓰고 있는 패늘 홀의 건물 구조도 암시적이다. 그것은 경제와 정치는 늘 함께 가는 것임을 새삼 말해주면서 또한 양자의 관계는 투명해야 한다고, 부패를 몰랐던 정치가 애덤스가 경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패늘 홀에 이어 북쪽 노스가의 폴 리비어의 집과, 자유의 등불이 걸렸던 올드 노스 교회와 그의 기마상을 본 다음, 나는 걸음을 재촉해 강 건너 찰스턴의 벙커힐 기념탑으로 향했다. 221피트의 거대한 화강암 오벨리스크가, 마치 벙커힐 전투의 승리로 가능해진 독립의 의미가 얼마나 지고(至高)한 것인지를 헤아려보라는 듯,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신문수

    1952년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벙커힐 기념탑은 1825년에 착공해 17년 만인 1843년에 완공됐다.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은 물론 재원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러나 벙커힐 기념탑 건립위원회는 돈 많은 사람들의 거금을 사양하고 일반인이 내는 십시일반의 성금만을 고집했다. 1825년 6월17일 벙커힐 기념탑 기공식 연설에서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 대니얼 웹스터는 독립혁명을 ‘시대의 경이’이며, ‘세계의 놀람이요 축복’이라 상찬했다. 건립위는 말하자면 기념탑의 건립이 그와 같은 세계사적 축복을 일반 모두가 골고루 누리는 계기로 작용하길 바랐던 것이리라.

    그러나 남북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던 당시의 미국사회는 그런 희원(希願)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1855년 허먼 멜빌은 벙커힐 전투에 참가했던 한 참전용사의 기구한 삶을 다룬 역사소설 ‘이스라엘 포터’를 기상천외하게도 바로 이 벙커힐 기념탑에 헌정한 바 있다.

    멜빌은 독립선언서에 천명된,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과연 일상의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반이 지난 오늘의 현실에서도 멜빌의 의문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7월4일은 오늘날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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