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시뮬라크르의 공간, 라스베이거스 뜯어보기

“당신이 상상하는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없어요, 라스베이거스에 있답니다”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6-08-09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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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과 프랑스, 일본과 중국, 원탁의 기사와 시저의 궁전, 구겐하임 미술관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한곳에서 만나고 싶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꿈꾸는 것은 뭐든지 갖다놓는 도시 라스베이거스. 사막 위에 건설된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 화려한 공간은 낮에는 천장 가득 밤하늘을 만들고 밤에는 낮하늘을 만들어 비를 뿌리는 ‘상상력과 상업성의 극한 조화’를 뽐낸다.
    시뮬라크르의 공간, 라스베이거스 뜯어보기

    109층 높이의 스트라토스피어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라스베이거스 중심대로(Strip)의 야경.

    ▼ 불과 몇 달 후면 옛날이야기가 되겠지만, 라스베이거스로의 여행은 지루한 사막길을 달리는 자동차에서 시작한다. 난생 처음 보는 사막에 호기심이 동하는 것은 잠시뿐이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 내리 다섯 시간째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오직 황무지. 차라리 모래바람 부는 열사의 땅이라면 운치라도 있겠건만, 이건 풀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잡초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시뻘건 돌산만 이어진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휴게소에 내려봐야 별 볼일 없기는 마찬가지다.

    슬슬 지루함을 견디기 어려워질 무렵, 이제 막 조성공사가 끝난 듯한 택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형형색색의 입간판도 보이기 시작한다. 곧 이어 나타나는 호텔과 카지노, 고층건물들. 사막 한가운데서 마치 신기루처럼 초대형 도시가 솟아오른다. 라스베이거스다.

    사실 라스베이거스 진입로는 밤에 달리는 게 제격이란다. 불빛도 없는 사막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화려한 조명을 만나는 놀라움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 중 상당수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를 내려 자동차로 사막을 건너 이곳에 이르곤 했다. 9월22일 인천-라스베이거스를 직항으로 연결하는 대한항공이 취항하면 사라지게 될 풍경 가운데 하나다.

    밤이 낮보다 아름다운 것은 진입로만이 아니다. 라스베이거스의 모든 거리는 밤이 되어야 비로소 피어난다. 저녁 10시를 넘으면 인적조차 찾기 어려운 미국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호텔이 줄지어 선 이 도시의 중심대로에서는 새벽 2시까지 택시를 잡기가 어렵다. 거리를 달리는 버스도 만원이긴 마찬가지다. 거리를 대낮처럼 밝힌 네온사인 아래에서 이국의 관광객은 숨이 막힐 정도로 흥분에 빠진다.

    말이 난 김에 험프리 보가트나 워런 비티에게 어울릴 법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거리에도 주인이 있다면, 이 ‘밤의 거리’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스럽겠지만, 굳이 꼽자면 정답은 초대형 호텔체인 MGM미라지사(社)다. 라스베이거스를 상징하던 마피아는 공식적으로는 이 도시의 장악력을 상실한 지 오래. 마피아가 치안을 담당해 경찰이 안 보인다는 것도 옛말일 뿐이다.



    라스베이거스에 존재하는 총 13만3000여 객실 가운데 4분의 1을 소유한 MGM미라지사는, 중심대로(Strip)에만 10개의 호텔을 갖고 있다. MGM미라지사는 1990년대까지의 라스베이거스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초대형 호텔과 초대형 카지노 전략’의 대표주자다. 회사의 모태가 된 MGM그랜드 호텔은 총 5005개의 엄청난 객실수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화려한 치장 없이 세 방향 직각으로 뻗은 이 덩치 큰 초록색 건물이, 주말마다 만원을 기록하며 하룻밤에 20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객실이 많은 만큼 버는 돈도 많았던 호텔은 곧 도시의 또 다른 대형 호텔 미라지와 합병했고, 계속해서 인근에 서 있던 경쟁사들의 호텔을 수십억 달러의 현금을 주고 차례차례 인수한다. 중심대로의 남쪽 끝은 오로지 이 회사가 소유한 호텔로만 이뤄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열 호텔들을 연결하는 무료전차를 공공 대중교통수단과는 별도로 운영할 정도다.

    MGM미라지 계열 호텔들은 하나로 뭉치기 이전부터 콘셉트 건축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해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호텔마다 옛이야기든 역사의 한 페이지든 상상으로만 접할 수 있던 공간을 고스란히 재현해놓는 식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엑스칼리버 호텔은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로빈훗과 셔우드 숲을 테마로 실내를 꾸미고 이름을 붙여놓았다. 매일밤 열리는 공연도 마상(馬上)창술시합이 테마다. 호텔 룩소르는 아예 23층 건물 자체가 피라미드다. 초대형 스핑크스 모양의 입구로 들어서면 피라미드 벽에 객실이 배치되어 있고 피라미드 속은 텅 비어 있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준다. 카지노 종업원들도 이집트풍 옷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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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베이거스 중심대로. 자유의여신상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모방해놓은 호텔 뉴욕뉴욕과 5000여 객실을 자랑하는 MGM그랜드 호텔 간판이 보인다.

    이러한 콘셉트 건축은 한때 라스베이거스 전체의 유행이었다. ‘전통의 강자’로 불리는 시저스팰리스 호텔 또한 이름이 말해주듯 로마와 그리스 건축물을 고스란히 현대에 재현해놓은 모양새다. 호텔 안 공연장의 이름은 ‘콜로세움’. 실내에 조성된 쇼핑거리 곳곳의 광장 분수대에는 로마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동상이 서 있다. 호텔 입구에 있는 경기장에서 권투경기가 자주 열린 것도 로마시대 검투사들의 결투와 가장 흡사한 스포츠였기에 선택된 이벤트였다. 경기장 가운데를 가로지른 호텔 2층의 바에서 타이틀매치를 내려다보는 손님은 네로 황제가 된 듯한 기분에 취했을 것이다.

    이러한 콘셉트에 따라 설계되고 꾸며지고 운영되는 호텔들은, 흡사 놀이동산에 온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던 풍경과 그림으로 꾸며놓은, 그렇지만 리얼리티보다는 환상성이 더 강조되는 일종의 ‘키치’다. 건설된 지 시간이 꽤 지난 일부 호텔들은 벌써 상당히 낡아서 중저가 전략으로 전환한 지 오래지만, 방문객을 신기함과 즐거움에 빠져들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흥겨운 분위기, 흥미진진한 느낌이 1990년대까지의 라스베이거스를 상징했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익히 알고 있던 바로 그 라스베이거스다. 사람들은 이집트와 중세 영국과 고대 로마의 귀족이 된 듯한 착각 속에서 슬롯머신 레버를 당겼다. 약간의 비현실감과 알코올은 기본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라스베이거스의 호황이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상은 어긋나게 마련이다.

    ‘키치’와 ‘놀이동산’을 넘어

    ▼ ‘밤의 도시’이니만큼 라스베이거스의 아침은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 뉴욕이 교통체증에 진저리를 치고 있을 아침 7시, 거리는 텅 비고 자동차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들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숙소인 호텔 엘리베이터에 오르니 이른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다들 빨간색 별이 그려진 같은 무늬의 명찰을 달고 있다. 단체관광객? 아니다. 이 호텔 초대형 컨벤션 센터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한 전자제품 회사 ‘우수직원’들이란다. 모두 일 때문에 온 셈이지만, 라스베이거스의 분위기 탓에 적당히 들뜬 듯하다. 세일즈 부문에서 일하고 있다는 패트리시아 캐너헌씨는 귀찮음직한 질문에도 내내 즐거운 표정으로 답했다.

    “라스베이거스에는 자주 오는 편이에요. 업계 컨벤션이 많이 열리거든요. 물론 밤에는 쇼도 보고 쇼핑도 하고 게임도 하지요. 회사도 아냐고요? 당연하죠. 굳이 로스앤젤레스 같은 대도시를 두고 여기서 행사를 여는 건 다른 의미가 아니라고요. 직원들에게 일종의 ‘보너스’를 주는 거지요. 다들 가족도 데리고 왔는 걸요.”

    승승장구하던 ‘도박도시’ 라스베이거스는,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다. 2001년 9·11테러였다. 대륙의 반대쪽 끝에서 벌어진 이 참사는 지갑 가득히 달러를 꽂고 카지노를 향해 날아오던 해외여행객 숫자에 치명타를 날렸다. 강화된 비자 발급 절차와 입국수속, 공항검색 때문에 특히 오일달러를 흔들어대던 ‘큰손’ 중동 관광객이 급격히 감소했다. 블랙잭과 슬롯머신만으로도 떼돈을 벌 수 있던 시절은 갔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놀이동산이던 라스베이거스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들이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것은 컨벤션이었다. 이미 시 당국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던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가 상당수 방문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은 거센 IT 열풍에 휩싸일 때였다.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IT 비즈니스의 야심찬 도전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 사업설명회를 열었다. 실리콘밸리와 로스앤젤레스가 그리 멀지 않은 라스베이거스에는 충분한 경쟁력이 있었다. 행사에 참여한다는 ‘공무’로 이 도시에 온 이들이 밤에 가벼운 술 한잔과 함께 게임을 한다면 더욱 고마운 일이었다. 호텔들은 앞다투어 카지노 건물 옆에 초대형 컨벤션센터를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붙은 라스베이거스의 컨벤션 비즈니스는 순식간에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2005년 한 해 동안 총 2만2000개의 컨벤션을 열었다는 이 도시는 이를 통해 600만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이들이 쓰고 간 돈만 도박을 제외하고도 76억달러라는 게 라스베이거스 관광청 선임국장 크리스 메이어씨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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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치안 호텔의 자랑이라는 운하의 곤돌라.

    컨벤션은 또한 관광객 계층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수치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미묘한 변화였지만, 의미는 생각보다 엄청났다. 비즈니스를 위해 이곳에 온 이들은 예전의 도박꾼들과는 달랐다. 떠들썩한 놀이동산 분위기나 알코올의 흥겨움은 유치하거나 저급한 것처럼 느끼는 이가 상당수였다. 기존의 콘셉트를 바꿔야 할, 정확히 말해 ‘고급화’해야 할 필요가 솟아올랐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최근 강력하게 부상한 호텔이 2005년 완성된 윈(Wynn)이다. 이 호텔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공간을 모델로 하지 않았다. 굳이 콘셉트가 있다면 현대 유럽풍이라는 것이 PR담당 부사장 데니스 란도조씨의 말이다. 호텔의 프런트 데스크에는 피카소의 ‘꿈(Le R릚e)’ 원본이 천연덕스럽게 걸려 있다. 호텔 객실 곳곳에서도 피카소 그림의 복사품을 볼 수 있다.

    사막 한가운데 지어진 호텔 안에 호수가 있고 건너편에 솟은 작은 산에서는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산자락에 심어진 나무는 모두 각국에서 수입해온 것이다. 호수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일본 음식점에는 일본에서 공수해온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아래 전형적인 일본식 정자가 꾸며져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로데오 거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명품 쇼핑가나 도심 속 골프장도 ‘고급화’의 연장선상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고급화 전략을 표방하는 또 다른 호텔로는 베네치안 호텔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 호텔의 압권은 실내에 꾸며놓은 명품 쇼핑가. 바닥에 깔린 보도 블록 하나, 계단에 설치된 난간 하나도 진짜 베네치아의 디자인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쇼핑몰의 입구에 해당하는 광장에는 운하가 있고, 그 위로 곤돌라가 지나간다. 역시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곤돌라 뱃사공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이탈리아 가곡을 부른다. 오가는 경비원들이 입은 옷은 이탈리아 경찰 제복이다.

    베네치안 호텔 공연장은 최근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고 있다. 호텔 한켠에는 현대추상미술의 전당이라는 구겐하임 미술관 분관까지 유치했다. 브로드웨이가 필요하면 브로드웨이를, 르네상스가 필요하면 르네상스를, 현대미술이 필요하면 현대미술을 거침없이 불러들이는 식이다.

    새로 떠오르는 이 고급 호텔들은, 외국의 것을 모방했다 해도 이전의 놀이동산 분위기 호텔과는 방식이 다르다. 놀이동산형 호텔들이 이미지만을 차용했다면 이들은 원형의 ‘이데아’를 재현하기 위해 애썼다고나 할까. 평범한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실제 베네치아에 가면 사진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쓰레기나 운하의 탁한 수질을 보고 당혹스러워한다. 라스베이거스는 그런 부정적인 요소들을 깨끗이 정리한 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방해놓았다. 실제 이탈리아 베네치아보다 라스베이거스 호텔의 쇼핑가가 오히려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베네치아의 이미지에 더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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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급화 전략’의 대표주자인 윈 호텔은 도심 한복판에 18홀 규모의 골프장을 구비하고 있다.

    멋진 것은 뭐든지

    ▼ 시끌벅적한 카지노 한켠에 얌전히 달려 있는 고풍스러운 나무문. 삐그덕 열고 들어가니 완전히 다른 세계다. 온통 보라색과 검정으로 디자인한 고전적인 분위기, 흔들리는 촛불, 부드러운 벨벳 방석. 벽에 걸린 고가의 그림과 짙은 갈색 마호가니 가구들. 여기는 프랑스다.

    MGM그랜드 호텔이 야심차게 준비했다는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 조엘 로부숑이다. ‘세기의 요리사’로 선정된 바 있다는 프랑스 요리의 거장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운영한다. 메뉴가 따로 없이 코스요리만 판매하는 이 집의 한 끼 식사는 와인을 빼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인당 30만~40만원. 안내를 맡은 선임부사장 로브 민씨의 얼굴에 자부심이 피어오른다.

    레스토랑 한쪽에는 야외 테라스를 가장해 꾸며놓은 룸이 있다. 햇볕은 들 리 없지만, 들어서니 온통 싱그러운 생화 향기가 어찔할 정도로 가득하다. 수천 송이는 될 듯한 노랗고 빨간 장미가 벽과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다. “몇 송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레스토랑 종업원은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정확히 잘 모르겠다. 전속 정원사가 매일 공항에 나가 꽃을 받아온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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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에펠탑과 개선문, 몽골피에 형제의 기구를 모방해놓은 호텔 파리스.

    ‘새로운 강자’들의 고급화 전략이 성공을 거두자, ‘전통의 강자’들도 안주할 수 없었다. 시저스팰리스 호텔은 막대한 자본을 들여 건물과 쇼핑몰을 리모델링했다. MGM그랜드 호텔 또한 카지노 안에 세계 최고급이라는 프랑스 레스토랑을 꾸미고 엄청난 정종 리스트를 자랑하는 일본 음식점을 만들었다. 모두 현지 외에는 오로지 라스베이거스에만 있는 가게라고 한다. 음식재료를 현지에서 공수해오는 것은 불문가지다. MGM미라지사는 기존의 체인 외에 동남아시아 가상의 해변을 모델로 꾸민 고급호텔 만달레이베이를 인수하기도 했다. 호텔 중앙의 수영장에서는 남국의 파도를 재현한 인공파도가 치고, 지하에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수족관이 방문객을 맞는다.

    카지노와 호텔뿐이던 라스베이거스가 이렇듯 다양한 비즈니스를 개발한 것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전통적으로 라스베이거스는 도박을 즐기는 중산층 남자 관광객의 도시였다. 그러나 9·11 이후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려는 호텔들은 쇼핑을 즐기는 여성들과 고급문화를 소비하는 부유층을 위해 한층 질이 높은 문화적 소비재들을 라스베이거스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MGM미라지사의 PR담당 매니저 이베트 모네씨는 “여성이나 아이들이 주된 타깃일 수는 없지만, 가족이 함께 와도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정리했다.

    그 과정을 통해 라스베이거스의 전략은 ‘상상을 재현해 꾸며놓는다’는 이전 방식에서 ‘전세계 어느 곳에 있든, 멋지고 그럴 듯한 것은 다 가져온다’는 식으로 진화했다. 그에 따라 라스베이거스의 공간도 함께 진화해왔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하늘 천장’이다. 거리를 걷기 힘들 정도로 무더운 사막기후를 고려해 시저스팰리스 호텔이 실내에 거리 같은 분위기의 쇼핑몰을 만들었을 때만 해도 천장은 하늘을 ‘그려놓은’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후 만들어진 호텔 알라딘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 법한 거리 위로 진짜 하늘처럼 보이는 천장을 만들었고, 정해진 시간에는 비까지 뿌렸다.

    가장 근래에 지어진 베네치안 호텔의 쇼핑몰 천장은 그 진화의 결정판이다. 밖에 있다가 5층 건물 높이의 광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순간 혼돈을 느낀다. 분명 밤이었는데 광장에 들어서니 낮이 됐기 때문이다. 실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짜 같은 하늘이 펼쳐지는 것이다. 조명을 조절해 밤시간에는 하늘을 낮으로 만들고, 낮시간에는 하늘을 밤으로 만든다. 새벽과 저녁노을도 재현한다. 매연 하나 없는 청정한 하늘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늘의 ‘이데아’를, 그것도 한낮에 밤하늘을 불러오는 자본의 마술이다.

    시뮬라크르의 공간, 라스베이거스 뜯어보기
    이데아, 현실, 시뮬라크르

    ▼ 플라톤은 세계가 원형인 이데아, 이데아의 복제물인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의 복제물인 시뮬라크르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복제가 이뤄지는 순간 진짜와는 다른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시뮬라크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포스트모던 철학의 대표주자 들뢰즈는 생각이 다르다. 시뮬라크르가 단순한 흉내나 모조품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모델과 같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뛰어넘어 새로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가는 역동성과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라스베이거스는 필요한 모든 것을 복제한 도시다. 굳이 이름붙이자면 ‘시뮬라크르의 도시’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라스베이거스의 시뮬라크르는 복제의 대상보다도 오히려 더 이데아에 가깝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운 관념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까닭이다. 그렇게 라스베이거스는 키치를 넘어 시뮬라크르가 되었고, 플라톤을 배반하여 들뢰즈의 ‘포스트모던한’ 품에 안긴다.

    2001년 이후 라스베이거스는 인구와 도시규모가 모두 20% 이상 성장했다. 관광객 역시 해마다 200만명씩 증가하고, 곳곳에서는 새로운 초대형 호텔과 컨벤션센터를 짓는 공사가 줄을 잇는다. 기존의 호텔들도 저마다 고급화를 표방하며 대대적으로 단장하고 있다. 도시 전체가 리모델링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리 곳곳에는 가로수로 기후와는 어울리지 않는 야자수를 심어놓았다. 이 도시에서 ‘미국 중부의 사막도시’라는 라스베이거스 고유의 무언가를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막대한 자본과 풍부한 수력발전 에너지는 사막 위에 사막 아닌 도시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전지전능한 힘을 보여준다. 오로지 자본주의의 극한에 선 미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라스베이거스는 본래의 정체성을 버리며 살아남았다. 당신이 꿈꾸는 베네치아는 베네치아에 없다. 아마도 라스베이거스에 있을 것이다. 당신이 꿈꾸는 로마는 로마에 없다. 아마도 라스베이거스에 있을 것이다. 당신이 꿈꾸는 해변은 동남아에 없다. 모기 한 마리, 해파리 하나 없는 깔끔한 남국의 파도는 아마도 라스베이거스에 있을 것이다. 그럼 진짜 라스베이거스는 어디에 있느냐고?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지. 분명한 것은, 당신이 21세기의 상업자본이 만들어내는 시뮬라크르의 힘을 믿는다면 라스베이거스는 그 믿음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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