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전 진짜 MVP는 박지성 아닌 이운재”
- “을용이 형, 프리킥 내가 찰게. 감이 너무 좋아”
- 감독의 롱패스 지시,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 원톱, 안정환이냐 조재진이냐…코칭스태프 설전
- ‘시청률 경쟁’ 해설자 3인방 축구 얘기로 밤새워
- 아드보카트, 월드컵 시작도 전에 자서전 내고 CF 찍은 이유
독일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한국대표팀은 골 결정력 향상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현지에서 취재하면서 때론 선수들 가까이서, 때론 거리를 두고 월드컵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었다. 월드컵 원정 첫 승을 따낸 토고전을 보며 희열로 전율했고, 프랑스전에서 극적으로 무승부를 기록하자 마치 승리한 것처럼 기자석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나 스위스전에서 패하자 그 신명나던 독일월드컵은 영 재미없는 대회가 되어버렸다. 기자나 팬이나 감정은 다를 바가 없다.
스위스전이 끝난 후 믹스트 존(공동취재구역)에서 선수들을 기다릴 때 한국 기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뭘 물어봐야 하지?”였다. 어떤 패배보다도 가슴 아팠을 그들에게 “오늘 경기 어땠어요?”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게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잘한 건 골 넣은 것뿐”
6월18일 프랑스전에서 1대 1 무승부를 기록한 대표팀 선수들을 만나기 위해 믹스트 존에서 달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가장 늦게 나온 선수가 박지성. 이날 경기에서 동점골을 터뜨리며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그는 공식 방송 인터뷰에다 스탠딩 인터뷰까지 마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뜻밖에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제가 오늘 잘한 건 골 넣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말고는 너무나 형편없는 플레이를 펼쳤고 모든 부분에서 부족했습니다. 좀더 집중해야 했고, 좀더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컨디션도 안 좋았고, 상대가 워낙 강하다 보니 뭔가를 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표팀의 키 플레이어 박지성은 극적인 무승부에 도취해 있던 기자에게 이렇게 ‘자아비판’을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겸손한 ‘방송용 멘트’가 아닌 솔직한 심정이었다. 라이프치히에서 직접 경기를 지켜본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도 “이 경기의 MVP는 박지성이 아닌 이운재가 받았어야 한다”며 아들의 경기 내용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박지성의 반성처럼 그날 플레이가 정말 그렇게 형편없었을까. 축구는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다. 11명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경기가 제대로 된다. 그러나 한국대표팀에서 박지성이 차지하는 비중과 실제 경기장에서의 의존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박지성이 아무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뛰어다니고 중앙으로 열심히 패스를 찔러준다 해도 다른 선수들과 손발이 맞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이 세 경기에서 종종 노출됐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앙에 선 원톱의 머리를 향해 줄기차게 패스를 날리는 박지성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대 수비수들의 거친 태클과 집중견제의 대상이 되다 보니 박지성처럼 그라운드에서 빈번히 넘어진 선수도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부담과 스트레스였다. 축구팬, 기자, 심지어 대표팀 후배들까지 박지성의 발끝만 쳐다보며 선전을 기대했고 당부했다. 특히 병역면제 혜택을 간절히 소원하던 후배들은 그를 볼 때마다 “저희는 형의 다리만 믿겠습니다”라며 본의 아니게 부담을 주기도 했다. 박지성 혼자 뛰는 팀이 아닌데도 자신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현실이 스물다섯 살 청년에게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박성종씨는 독일월드컵 직전에 이렇게 하소연한 바 있다.
“My English is bad”
“지성이가 많이 힘든 모양이다. 평소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애인데 이번엔 ‘좀 힘들다’고 하더라. 4년 전에는 워낙 난다 긴다 하는 선배가 많아 배운다는 마음으로 부담 없이 월드컵을 치렀는데, 이번엔 너무 큰 임무가 주어지다 보니 이래저래 어깨가 무거운 것 같다.”
그러나 박지성은 그라운드에서 몸을 불살랐다. 상대 수비수의 숱한 태클과 반칙에도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토고전이 끝난 뒤 박지성은 월드컵 첫 경기를 마친 심정을 이렇게 털어놨다.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패한 뒤 아프리카 팀을 상대로 어떻게 게임을 풀어가야 하는지를 알았어요. 오늘 경기에서 세 개의 포지션을 소화한 것 같습니다. 크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판타스틱한 골들이 터져서 힘든 줄 모르고 뛰어다녔어요.”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터뷰를 즐기지도, 재미있어 하지도 않던 박지성이다. 그러나 독일에서 만난 그는 4년 전에 비해 분명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가장 큰 차이점이 언론을 대하는 태도다. 선수들의 공식 인터뷰가 있을 때 박지성은 영어와 우리말로 수많은 기자를 상대한다. 옆에서 듣기엔 우리말로 하는 것보다 영어 표현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온다. 한번은 프랑스 기자가 “히딩크 감독과 아드보카트 감독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다. 그동안 한국 기자들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숱하게 들었던 박지성이 어떻게 대답할지 시선이 쏠렸다. 박지성은 이렇게 재치 있는 멘트를 날렸다.
“My English is bad!”
박지성의 발전은 선수들에게도 묘한 자극을 주었다. 선배들은 후배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4년 전보다 두세 계단은 업그레이드된 플레이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박지성과 의형제처럼 지내는 김남일(29·수원 삼성)은 박지성의 존재 자체가 대표팀에 큰 힘이 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남일은 “역시 선수는 큰물에서 놀아야 하나 보다. 지성이가 몰라보게 발전해서 돌아왔다. 그 친구 때문에 덩달아 나도 열심히 하게 된다”면서 후배의 성장을 대견해했다.
박지성은 스위스전이 끝난 뒤 주심의 석연치 않은 오프사이드 판정에 대해서 다른 선수들이 감정적인 멘트를 쏟아낸 것과는 달리 “심판도 경기의 일부분”이라며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동료들이 울분을 터뜨리는 가운데 그런 ‘소수 의견’을 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박지성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누나, 뭔가 터질 것 같아”
“천수, 어때?”
“(물) 올랐어. 뭔가 터질 것 같아.”
토고전 전날, 프랑크푸르트 경기장에서 마지막 훈련을 마친 뒤 이천수는 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평고 시절부터 ‘누나’ ‘동생’으로 지내 서로 편하게 말하는 사이지만 첫 경기 전날의 ‘올랐다’라는 표현은 이천수밖에 할 수 없는 코멘트였다.
이번 월드컵 기간에 기자들을 가장 흐뭇하게 한 선수는 이천수였다. 이미 월드컵을 앞두고 가진 평가전에서 ‘재목감’으로 꼽힌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토고전에서 동점골을 터뜨리는 등 절정의 기량을 보였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이런저런 설화(舌禍)에 휘둘렸던 이천수는 한동안 인터뷰를 두려워했다. 똑같은 말도 자신의 입을 거치면 축구팬들이 워낙 민감하게 반응해 ‘혀천수’ ‘혀컴’ 등 좋지 않은 별명이 따라다니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토고전에서 환상적인 프리킥 동점골을 터뜨리며 극적인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한 이천수는 더 이상 ‘돌출행동으로 튀기 좋아하는 문제아’가 아니라 축구를 잘하고 축구를 사랑하며 축구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줄 아는 플레이어로 성장했다.
토고전 프리킥은 원래 이을용의 몫이었다. 그가 킥을 찰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천수가 다가오더니 자기가 차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프리킥에 일가견이 있는 이을용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천수의 표정에서 해낼 것 같은 자신감을 읽었기 때문이다.
동점골을 터뜨린 뒤 이천수는 그 경황없는 중에서도 부상으로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한 선배 이동국과 연인 김지유를 위해 골 세리머니를 펼쳐 보였다. 그는 이동국이 골을 넣고 하늘을 향해 ‘손 키스’ 세리머니를 하는 제스처를 흉내냈고, 언더셔츠에 써넣은 김지유의 이니셜인 ‘Y’자를 내보여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경기 후 그에게 Y자가 김지유를 의미하는 것인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이 쏟아졌다. 이천수는 즉답을 회피한 채 미소만 지었다. 그는 다음날 회복훈련 후 가진 스탠딩 인터뷰에서 김지유를 상징하는 이니셜이었음을 털어놨다. 이천수가 진실을 밝히기 전까지 기자들 사이에서는 ‘사실은 Y가 아니라 땀으로 얼룩진 글자였다’는 추측이 나왔다. 그때 이천수가 한마디 던졌다.
“어휴, 참…아무리 땀이 흘러도 그런 글자는 안 만들어지거든요.”
롱패스 논란
토고전 종료 직전 마지막 프리킥 찬스에서 직접 슈팅하지 않고 볼을 돌린 데 대해서도 이천수는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자신은 차고 싶었지만 이영표가 다가와 감독의 지시라며 볼을 돌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발언은 월드컵 기간 내내 화제가 됐다.
아드보카트 감독의 수비지향적인 전술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두고두고 쓴소리가 쏟아졌다. 이천수는 “1점차 승부를 지키려는 감독의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공격적으로 경기를 끌고 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킥 기회가 너무 좋았고 반드시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는 것.
이천수는 스위스전이 끝난 뒤 그라운드에 엎드려 눈물을 쏟아냈다. 그 후 믹스트 존에서 만난 이천수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이렇게 소감을 털어놓았다.
“너무나 이기고 싶은 경기였어요. 이번만큼 준비를 열심히 했던 적이 없었거든요. 당연히 16강에 진출할 거라 믿었죠. 역시 한국 축구의 문제는 골 결정력이었어요. ‘한 방’이 중요하다는 걸 경기 내내 절감했습니다. 4년 뒤에는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여선 안 돼요. 많은 걸 보고 배운 시간이었어요.”
아드보카트 감독이 수비지향적으로 경기를 풀어가면서 가장 바쁘고 정신없었던 포지션이 수비수였다. 그중에서도 맏형 최진철은 3경기 내내 주전으로 출전, 사력을 다해 상대팀의 공격수들을 막아냈다. 그중에서도 힘겨운 경기는 프랑스전이었다.
“솔직히 두려웠어요. 프랑스 선수들이 돌파해올 때는 어떻게 막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서더라고요. 워낙 위협적이고 빈틈을 보이지 않는 선수들이라 수비하기가 막막했어요. 특히 앙리의 스피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죠. 잠시 방심하고 있다가 놓치면 바로 골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최진철에게 가장 가슴 아픈 경기는 스위스전이었다. 경기 중 상대 공격수 머리에 부딪혀 눈썹 밑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자 ‘이 게임에서 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다친 몸보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이었다는 것.
“선수 입장에서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뭐라고 말한다는 게 좀 뭣한데…다 좋았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감독님의 롱패스 지시였죠. 워낙 중요한 경기였기 때문에 분명 감독님 나름의 의도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선수들은 경기를 차근차근 풀어가고 싶었어요. 무조건 중앙으로 볼을 올리기보다는 잔 패스를 통해 조직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려 했는데 그럴 수 없었죠. 특히 스위스전에서 롱패스 지시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는 아드보카트 감독의 ‘작품’이나 다름없는 경기 전의 단체 인터뷰가 가장 고역이었다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똑같은 질문에 반복해서 대답하는 게 힘들었고, 기자들이 인기 있는 선수들에게만 몰리는 바람에 그렇지 못한 선수들이 찬밥 대우를 받는 것도 속상했다. 그래서 가끔은 단체 인터뷰 때 얼굴만 내밀고 곧장 숙소로 도망친 일도 있다고 한다.
월드컵 전부터 ‘체력’과 ‘노장’이란 단어를 징글징글하게 들었던 최진철은 대표팀 최고참이란 타이틀을 달고 빛나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해설을 위해 월드컵 현장을 찾은 황선홍은 최진철이 보여준 투혼을 이렇게 평가했다.
“진철이 좀 보세요. 나이 서른다섯 넘어서 몸 던져가며 태클하는 것 봐요. 그런데 어떻게 손가락질할 수 있냐고요. 잘하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거든요.”
아드보카트와 베어벡의 격렬한 토론
이번 월드컵의 색다른 재미는 홍명보 코치와 황선홍이 그라운드 안팎에서 나눈 우정에 있었다. 대표팀 막내코치로 지도자 생활에 첫발을 내디딘 홍 코치와 축구공 대신 마이크를 잡고 월드컵 현장에 뛰어든 황선홍. 선수시절부터 두터운 정을 나눠온 두 사람은 이번 월드컵 기간 틈만 나면 의견과 정보를 주고받았다. 홍명보가 황선홍에게 “유니폼 준비해놨으니 (대표팀에) 들어오라”고 농담을 던지면 황선홍은 “지금 들어갈 테니 방 잡아놔라”며 응수했다.
황선홍은 해설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가끔씩 홍 코치에게 전화를 해 대표팀 속사정을 전해 들었지만, 홍 코치가 터놓고 얘기한 부분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방송에서도 공식적인 언급만 인용했을 뿐 사적으로 말한 내용은 함구했다.
홍 코치는 운동장이 아닌 벤치에서 월드컵을 치른 데 대해 “무엇보다 경기에 출전할 선수를 결정짓는 게 힘들었다”면서 “23명 중 11명을 가려내는 일이 쉬울 것 같았는데, 그 결과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갈 선수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런 고통이 없었다”고 했다. 경기 전날 선발 라인업을 짤 때는 아드보카트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모여 선수들을 평가하는데, 그 자리에서 가장 격렬하게 대화하는 사람이 아드보카트 감독과 핌 베어벡 코치였다고 한다.
“처음엔 그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했어요. 그러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 목소리가 커지더라고요. 제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려고 노력했죠. 반드시 선발 투입해야 할 선수에 대해선 물러서지 않고 맞섰습니다.”
홍 코치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미팅에서 가장 논란이 된 선수가 안정환이었다는 소문이 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안정환을 선발로 점찍었으나 베어벡 코치와 홍 코치는 조재진을 강력 추천했다는 것. 결국 아드보카트 감독은 자신의 뜻을 굽히고 3경기 연속 조재진을 선발로 내세우는 모험을 단행했다.
홍 코치는 가장 힘들게 치른 경기로 프랑스전을 꼽았다.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프랑스가) 훨씬 강한 압박으로 나와 수비수들이 당황했다”고 털어놨다. 그런 중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점골을 뽑아낸 데 대해선 선수들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예전 같으면 또다시 골을 먹고 자포자기했을 텐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덕분에 무승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골키퍼 이운재도 프랑스전을 가장 어려웠던 경기로 꼽았다. 그는 지금까지 치러낸 A매치 100경기와 프로리그 전 경기를 통해 이때처럼 많은 골을 막아낸 적도, 골문 앞에서 잠시도 쉴 틈 없이 바쁘게 ‘장사’한 적도 처음이었다고 토로했다.
조재진의 머리에만 의존한 아드보카트의 공격전술에 선수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운재의 선방은 프랑스전을 무승부로 이끌었다.
홍명보 코치는 월드컵을 앞두고 스코틀랜드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 부상 선수가 많아져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다.
“조직력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부상 선수가 많아서 팀 전체 훈련이 되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토고전을 앞둔 4∼5일 전부터 회복되는 선수들이 생기더라고요. 한편으론 다행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발을 맞춰볼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게 아쉬워요. 좀더 시간이 있었다면 훨씬 좋은 플레이를 펼쳤을 텐데….”
게임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수비에서 예상치 못한 실수가 벌어졌을 때 홍 코치는 벤치를 박차고 그라운드로 뛰어들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선수들을 향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별별 제스처로 지시한다 해도 정작 게임은 선수들이 풀어가는 것이다. 그는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도 힘들지만 벤치에서 지켜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황선홍도 비록 스탠드 위에서였지만 목이 터져라 대표팀을 응원했다. 토고전에서 선취골을 내줬을 때는 잠시 마이크를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돌아왔을 정도다. 후배들의 플레이나 감독의 전술을 납득할 수 없어 답답해하기도 했다. 경기장 바깥에서 지켜본 월드컵 무대는 그에게 또 다른 시각을 길러줬고 돈 주고 살 수 없는 수많은 ‘느낌표’를 전달했다.
“지려고 게임에 나가는 선수는 없을 거예요. 모두 어금니 꽉 물고 나가요. 애국가 나올 때 선수들 얼굴을 봐요. 살기가 묻어나잖아요. 모두 절실하거든요. 간절하고요. 그렇게 했는데도 지면…뭐, 하늘을 원망해야죠.”
황선홍은 스위스전이 끝난 후 선수들은 정말로 열심히 했지만 벤치에서 그걸 받쳐주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말했다.
“우리가 52년 만에 월드컵 원정경기에서 1승하고 승점 4점을 딴 부분은 분명히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러나 전 솔직히 감독의 색깔이 별로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워요. 지더라도 감독의 색깔이 선명하게 묻어나야 하거든요. 우리 팀 세 경기의 전체적인 플레이가 들쭉날쭉했어요.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같은 색깔을 내는 팀이 진짜 좋은 팀이에요. 그걸 볼 수 없어 정말 속이 상했습니다.”
황선홍은 이번 월드컵에서 4년 전 월드컵을 경험한 선수들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한 부분도 지적했다. 월드컵처럼 큰 무대에선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독일에선 4년 전 월드컵을 치른 선수들이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지성이 외엔 (이)영표나 (설)기현이, (이)을용이, (안)정환이 등이 풀타임을 뛰지 못했어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선수들 컨디션이나 체력적인 부분 등을 다 고려했겠죠. 그래도 너무 젊은 선수들 위주로 갔어요. 특히 스위스전에서 을용이를 그냥 방치한 건 정말 아까워요.”
스위스전이 끝난 뒤 하노버 인근의 한인 식당에서 방송 3사의 월드컵 해설을 맡은 차범근, 유상철, 황선홍이 우연히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는데, 그들은 새벽까지 월드컵과 대표팀 얘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약속하지 않은 자리였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시청률 경쟁의 ‘갑옷’을 벗고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자서전, CF 구설수
지금은 이곳에 없는 사람을 두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특히 네티즌들은 아드보카트 감독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월드컵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신이 옮겨갈 러시아 프로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계약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대목이다. 당시 그는 사실 확인을 요구하는 기자들에게 “루머일 뿐”이라고 둘러댔지만, 일종의 위기탈출의 제스처였을 뿐이다. 선수들은 입 밖으로 언급하진 않았어도 이미 월드컵 이후의 ‘보금자리’까지 마련해놓은 감독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자들로선 월드컵이란 중대사를 앞두고 감독의 진로 문제를 물고 늘어지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더 이상 그에게 러시아 운운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드보카트 감독이 월드컵이 시작되기도 전에 한 일은 또 있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자서전을 쓴 데 반해 아드보카트 감독은 선수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던 시점에 자서전을 출간해 기자들마저 어리둥절하게 했다. CF 촬영도 월드컵 전에 이뤄졌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이 끝난 이후 CF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데 반해 아드보카트 감독은 핌 베어벡, 압신 고트비 코치까지 합세한 광고 촬영으로 자신의 주가를 확인하려 했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아마도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곧장 출국하려 했던 그로선 월드컵 성적표가 나오기 전에 챙길 수 있는 것은 다 챙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선수 선발과정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유럽파 선수들을 중용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자신이 선호하는 선수들을 경기장에 세웠다. 특히 이을용을 대신해 출전한 이호가 여러 차례 결정적인 실수를 했는데도 그에 대한 신뢰를 아끼지 않았다. 컨디션이 나쁘다고 알려졌던 이을용은 측근에게 ‘컨디션 이상무’를 외쳤고, 송종국과 김남일도 체력과 컨디션에 문제가 없었지만 감독의 선발 낙점을 받지 못했다. 결국 이호와 김동진이 아드보카트 감독과 함께 러시아 길에 오르자 억측은 더해졌다.
스위스전을 앞두고 대표팀 숙소에서 단체 기자회견이 있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기자들의 질문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며 스위스전 필승을 다짐했다. 그런데 한 기자가 “이전 두 경기에서 너무 수비지향적인 전술을 구사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순간 아드보카트 감독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면서 “절대 그렇지 않다”고 버럭 화를 냈다. 그러면서 강조한 말이 있다. “지금까지 대표팀과 언론의 사이가 매우 좋았다”는 것.
아드보카트 감독은 스코틀랜드에서 전지훈련하는 동안 지역 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한국에서 왕처럼 대접받고 지냈음을 자랑했다. 돌이켜보면 그가 ‘왕’이길 바라기 전에 우리가 그를 ‘왕’으로 떠받든 게 아니었나 싶다.
언론의 기사 논조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때론 삐치기도 하고 때론 불만을 토로하면서 언론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아드보카트 감독. 그는 히딩크보다 덜 영리하고, 덜 세련된 감독이었다. 독일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한 선수에게 히딩크와 아드보카트의 차이를 묻자 그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히딩크 감독님은 머리가 좋았어요. 아드보카트 감독은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속이 보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