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년 전 섬마을에서 평온하게 살던 한 가족이 간첩으로 몰려 갖가지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다. ‘신동아’가 이 기막힌 사연을 보도한 지 2년 만에 과거사위원회가 진상 조사에 나섰다. 이제는 진실이 밝혀질 것인가.
2004년 ‘신동아’ 취재에 응한 김기웅씨의 모친 강덕례씨(오른쪽). 왼쪽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김씨의 사촌누나는 고문과 성학대로 지금껏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다.
그로부터 1년8개월이 흐른 지난 6월1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김익환 일가 고문 및 가혹행위 사건’에 대해 ‘조사개시결정’을 내렸다. 진상조사에 앞서 과거사위가 ‘신동아’ 기사를 토대로 정리한 사건개요는 다음과 같다.
‘1971년 9월20일경 전남 여천군 화정면 백야리 섬마을에 거주하던 신청인 김기웅의 모(母) 강덕례(당시 32세), 사촌누나 김OO (당시 26세)와 백부 김익환(당시 42세)이 여수출장소 중앙정보부 소속 수사관들에게 간첩사건 관련자로 연행되어 당시 여수시장 관사(官舍)로 사용되던 중정 조사실에 수용되어 갖은 고문을 받고 무혐의로 풀려난 후 지금까지 고문후유증에 시달린다며 진상규명을 요청함.’
김기웅씨에 따르면 어머니 강덕례(67)씨는 그때의 충격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다리를 온전히 쓸 수 없게 됐다. 미혼이던 사촌누나 또한 알몸으로 고문과 성학대를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지금껏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일 과거사위가 정식 출범한 지 나흘 뒤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흐른 지난 6월19일에야 비로소 과거사위측으로부터 ‘결정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신청서를 접수한 2개월 뒤 김씨는 과거사위로부터 ‘진상규명신청서 보완요구서’를 받았다.
보완할 내용 중 하나로 지적된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과정에서 제시받은 체포장이나 동행명령증 존재 여부에 관한 사실관계 확인’이었다. 김씨는 “어디로, 무슨 이유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무슨 체포장이며 동행명령증이 있었겠습니까?”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냈다.
‘고문’은 계속된다
김씨는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이유 불문하고 온 집안을 뒤져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어머니와 누나는 눈까지 가려진 채 질질 끌려갔다. 사람을 일주일 동안 붙잡아 고문해놓고 나중에 일절 발설하지 말라며 각서를 두 장씩이나 쓰게 한 사람들에게 법이 어디 있고 무슨 서류와 절차가 있었겠냐”고 반문했다.
과거사위 대외협력과 유한범 과장은 “자료 보완요구와 관련해 신청자에게 입증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십년 전의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가능하면 많은 증거·정황 자료를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위원회에 접수된 사건들은 대부분 오랜 시간이 지난 것들이다. 그래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다시 말해 신빙성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부족해 각하결정을 받는 사건이 적지 않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과거사위 규정에 따르면 진실규명신청서가 접수된 날로부터 90일 이내(30일 연장 가능)에 ‘조사개시’ 또는 ‘각하’ 결정을 내리고 통보하도록 되어 있다. 시한이 지난 지 두 달이 넘도록 결정이 지체되자 김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는 “생각을 해보라. 고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후 지난 4년간 온갖 국가기관에 민원을 넣었지만 어느 한 곳 관심을 갖고 조사한 적이 없다. 이번에도 똑같은 꼴을 당하지 않을까 초조하고 불안했다”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에 대해 유한범 과장은 “수십년 전에 발생한 사건인 만큼 피해자나 가족들은 너무 오래 기다려왔으니까 왜 빨리 처리 하지 않느냐고 조바심을 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진실규명이 중요하니까 각하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다 보면 정해진 기간이 지나 조사가 더디게 진행될 때가 있다”고 해명했다.
김씨는 결정통지서를 받고도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 청와대, 국정원, 국가인권위원회, 국회 등에 민원을 낸 것만도 여러 번.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번번이 그를 좌절시켰다. ‘관련기관에 통보해 처리토록 함(청와대)’, ‘국가 대상 소송은 규정 밖(법률구조공단)’, ‘공소시효가 지나 조사대상이 아님(인권위)’…. 그는 “지금은 국가기관(과거사위)에서 현장조사를 다녀가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 덜 답답하다”고 했다.
국정원, “너무 오래된 일”
과거사위에 접수된 사건 중 김씨 사건을 포함한 인권침해 관련 사건은 297건이며, 이 가운데 현재까지 ‘조사개시결정’이 내려진 것은 10건(실제 사건은 7건. 동일 사건 피해자가 따로 신청서를 낸 중복사건이 있기 때문)에 불과하다. ‘각하결정’이 내려진 것은 35건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제21조, 이하 과거사기본법)에 따르면 ‘진실규명 신청 내용이 그 자체로서 명백히 허위이거나 이유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각하결정’이 내려진다. 이렇게 보면 김씨 사건은 신빙성이 높고 진상조사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위원회측이 판단한 것이다.
과거사위측은 조사개시 결정에 앞서 피해자가 거주하는 광주와 중앙정보부 지부가 있던 여수, 사건 당시 피해자 일가족이 살았던 백야리 섬 등에 조사관을 파견해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김씨에 따르면, 조사단은 고문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황모씨(64세, ‘신동아’ 2004년 11월호 399쪽 상자기사 참조) 외에 기사에서 짧게 언급한 또 다른 관련자를 찾아내 사건 정황을 뒷받침하는 진술을 받아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은 과거사위원회 출범 전인 지난해 2월4일 국가정보원(옛 중앙정보부)이 김씨에게 보낸 민원 회신에 포함되어 있다. “귀하께서 2004년 12월 다시 청와대에 제출한 민원 내용의 사실여부를 확인해본 결과, 당시 여천군청 행정계장이던 임모씨도 ‘내무과장 이모씨와 함께 여천군청 관사를 방문, 민원인의 백부 김익환씨를 면회하고 담당 조사관(중정 여수지부)에게 선처를 부탁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내무과장 이씨’는 임씨와 함께 김익환씨가 중앙정보부 여수지부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줄 수 있는 중요 인물이지만 이미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은 김씨에게 회신을 보내기 전, 김익환씨와 사건 관련자들이 당시 여수지부장으로 지목한 ‘천 소장’에 대한 소재 추적에 나섰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국정원 회신에는 ‘천 소장의 소재를 파악한 바, 그는 1975년 10월 면직된 후 1980년 12월 미국으로 이민하여 1982년 11월 국내에 1회 입국한 이래 귀국사실이 없어 근황을 알 수 없는 상태’라고 되어 있다.
과거사위측은 ‘진실규명’과 ‘진실규명불능’ 결정을 앞두고 현재 국정원에 관련 자료를 요청해놓은 상태다.
김씨는 지난 5월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둔 채 일주일이 멀다하고 서울과 광주 집을 오가고 있다. 서울의 동생 집에 사건 피해자인 어머니 강씨와 사촌누나 김씨가 기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분 모두 서울에서 수시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 또 진상조사 때문에 광주로 모시고 내려갈 수도 없는 처지다. 특히 사촌누나는 내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서 아무도 안 만나려고 한다”고 했다.
‘신동아’ 취재 당시에도 사촌누나 김씨는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극심한 대인기피증과 공포감, 불안감을 나타냈고, 알몸으로 고문당한 사실을 얘기할 땐 가슴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어 여러 차례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함께 인터뷰에 응했던 강씨는 척추수술을 앞두고 몸이 아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두 사람에 비해 그나마 건강상태가 양호했던 김익환씨는 올초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김기웅씨는 “지금도 어머니나 누나는 초인종 소리만 나도 숨고, 낯선 사람만 보면 놀라 주저앉는다. 사람을 매우 두려워하고 불안감이 심하다”고 했다.
“진실 규명과 보상은 별개”
무엇보다 김씨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어머니 강씨가 그에게 내비친 걱정이었다. 강씨가 “괜히 나 때문에 자식들까지 이번 일로 또 무슨 험한 꼴을 당할까 무섭다”고 했다는 것. 김씨는 “얼마 전 과거사위에서 조사관과 심리상담사가 나와 어머니와 누나의 진술을 받아갔다. 그날도 누나가 쓰러졌다. 35년 전에 당한 일때문에 국가기관이라면 아직도 벌벌 떠는 어머니와 누나를 곁에서 지켜보기 힘들다”며 안타까워했다.
최근 김씨의 마음고생은 더욱 심해졌다. 과거사정리기본법에 따르면 ‘진실규명’ 혹은 ‘진실규명불능’에 대한 결정사항을 신청인에게 통지하는 것으로 과거사위의 업무는 마무리된다. 국가를 상대로 한 민·형사상 처벌과 손해배상은 피해자가 따로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더욱이 공소시효(형사)와 소멸시효(민사)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난해 시효배제와 관련한 특례법(열린우리당 이원영 의원 외 145인 발의)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아직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계류 중이다.
김씨는 “얼마 전 어머니와 누나를 모시고 있는 동생이 ‘위원회 조사가 끝나봐야 보상도 안 되고 구제도 안 된다면서 뭐 하러 자꾸 지난 일을 들추느냐’며 원망해 언성을 높인 적이 있다. 고향사람과 친지들을 만나면 ‘조사는 언제 끝나고 보상은 언제 받느냐? 그래야 아픈 사람들 약값이라도 하지 않겠냐’고 묻는 통에 난감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과거사위 유한범 과장은 “개인에겐 처벌과 보상이 중요한 문제지만 위원회는 국가책임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위원회에서 진실규명결정이 나도 그것이 국가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점이 과거사정리기본법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고무적인 것은 최근 법원 판결이 국가가 저지른 반인권적 범죄에 대해 민사상 소멸시효를 폭넓게 해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 김씨는 30년 넘게 쉬쉬하며 감춰온 가족의 고통과 아픔, 분노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