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어트, 노화 방지, 면역력 증강까지 한 번에 해결한다. 건강식품의 대명사가 된 발효식품엔 발효 과정에서 생성된 이로운 물질이 가득하다. 매일같이 먹는 김치, 된장이라면 이제 질린다고? 걱정 마시라. 강정청국장, 석류 요구르트, 고추술… 입맛 따라, 취향 따라 골라 먹는 재미도 있다!
“토종 콩을 삶아 깨끗이 씻은 볏짚과 함께 항아리에 넣고 2~3일 동안 띄운다. 청국장이 완성될 때까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겨울에는 전기방석 위에 항아리를 놓고 이불을 두세 겹 덮어둔다. 너무 오래 띄우면 쓴맛이 나서 못 먹는다. 처음엔 번번이 실패했다. 삶은 콩을 띄울 때 나는 냄새가 역겹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제대로 띄우면 냄새가 별로 없다. 잘못 띄우면 잡냄새가 강해진다.”
제대로 띄운 청국장을 잘 빻아 냉장고에서 보름간 숙성시키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청국장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결과가 궁금해 매번 가슴이 설렌다는 김씨는 인터넷 카페 ‘청국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운영하며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김치는 슈퍼 푸드
“청국장이 맛있게 되면 반찬 걱정을 덜 수 있어서 좋다. 요즘 청국장이 몸에 좋다는 건 다들 아니까 집에서 직접 담근 걸 선사하면 좋아한다. 청국장 덕분에 우리 네 식구 모두 피부가 곱고 몸도 날씬한 편이다. 병원 가본 지 10년이 넘었다. 1년 내내 감기 한 번 안 걸릴 만큼 모두 건강하니까 청국장 담그는 건 번거로움보다 보람이 몇 배 더 크다.”
지난해 5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식품박람회에선 김치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시 농수산물유통공사(aT)가 마련한 한국식품관 앞에는 즉석에서 만든 ‘김치 팬케이크’를 맛보기 위해 미국인들이 길게 줄을 섰다. 12월에는 워싱턴에 있는 주미 한국대사관의 한국문화홍보원이 김치 시식회를 주최했는데, 미국 정부 관리와 의회 관계자, 문화계 인사 등 300여 명이 참석해 김치 담그는 과정을 견학하고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맛보는 등 성황을 이뤘다.
이처럼 미국인들이 김치에 대해 예상외의 호응을 보인 것은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조류 인플루엔자(AI)와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에 김치가 탁월한 예방효과를 보였다는 소식이 영국 BBC, 미국 ABC 등 해외 유수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결과였다.
몇 년 전 미국 상원 영양문제특별위원회가 흥미로운 조사를 벌였다.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식습관을 조사했더니 미국식으로 식습관을 바꾼 사람들의 암 발병률은 미국인 수준으로 높아졌다. 반면 태어난 나라의 식습관을 그대로 유지한 사람들의 암 발병률은 매우 낮게 나타났다. 이후 미국과 유럽 의학계는 ‘왜 아시아인의 식사법이 건강에 좋은가’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결과 아시아에서 널리 발달한 발효식품에 주목했다. 그 후 미국의 건강전문 월간지 ‘헬스’가 인터넷판 기사에서 김치를 ‘세계 5대 건강음식’으로 선정했다.
세계가 인정한 건강음식 김치와 함께 한국 전통음식인 된장, 간장, 청국장, 고추장은 지구촌 곳곳으로 수출되고 있다. 이들 발효식품은 다양한 질병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효능을 지녔다. 전북대 응용생물공학부 식품공학전공 교수이자 바이오식품 소재개발 및 산업화연구센터 소장인 신동화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발효식품은 배추나 콩 등의 원재료가 가진 성분과 성질을 거의 완전하게 바꿔 새롭게 창조된 식품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미생물의 직접 작용, 미생물들이 생산한 효소에 의해 일어나는 발효과정에서 배추에는 없는 젖산이 생성되는가 하면 콩의 단백질을 분해해 아미노산류가 생성되는 등 우리 몸에 유익한 물질이 많이 생겨난다. 발효를 통해 얻어지는 다양한 저분자 물질들이 우리 몸 안에 들어가면 유용한 생리적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구인들이 발효식품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 기능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인체는 면역기능이 약해질 때 암 등 각종 질병의 공격에 쉽게 노출된다. 면역력은 섭취하는 음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발효과정에서 다양한 생리활성물질을 생성하는 발효식품은 면역력을 높이는 대표적 음식이다. 그 가운데 김치는 ‘종합면역증강식품’이라 할 만큼 기능이 뛰어나다.
김치의 재료인 배추, 파, 양파 등에 함유된 칼슘, 구리, 인, 철분, 나트륨은 체액을 알칼리성으로 만든다. 김치가 항암효과를 낸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김치에는 살아 있는 유산균이 많아 장내 미생물의 대사활성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변비와 장염 예방은 물론, 대장암 예방효과도 있다. 또 마늘의 알리신 성분은 살균·정장 효과가 높아 위암 등 암의 발생을 줄이며, 심장병 예방에 도움을 주고,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도 키워준다. 또 김치는 베타카로틴 함량이 높아 폐암을 예방하는 데 효과가 있으며, 고추의 매운 성분인 캡사이신은 대사작용을 활성화해 우리 몸의 지방을 태워 없앤다. 훌륭한 다이어트 식품이라는 얘기다.
최근에는 김치가 식중독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국식품연구원 식품안전성연구본부 이종경 박사팀에 따르면 미생물 실험 결과 자연발효된 국내산 김치가 식중독균인 살모넬라균, 포도상구균, 비브리오균, 병원성대장균의 생육을 억제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당한 상태로 발효된 김치에 여러 종류의 균을 넣은 결과 4시간 만에 99% 이상의 균이 사멸한 것. 고추가 원재료인 고추장엔 비타민C와 비타민E가 사과보다 20나 더 많이 들어 있어 뛰어난 항산화력을 발휘한다. 또한 소화력을 높이고 정장작용을 한다.
노화 방지는 청국장으로
콩을 원료로 하는 전통 된장과 청국장은 면역력 증강에 도움을 준다. 부산대 식품영양학과 박건영 교수 연구팀은 된장의 발효기간에 따른 항암효과 차이를 실험했다. 그 결과 발효시간이 길수록 항암활성 및 암전이 억제효과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령 24개월간 발효된 된장이 3∼6개월 발효된 된장보다 항암효과 및 암전이 억제효과가 2∼3배 높았다. 그뿐 아니라 2년간 발효된 된장은 종양 생성을 줄이고 비장의 NK세포(암세포를 죽이는 세포) 수를 증가시켜 항암활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콩이 장시간 발효되면서 새롭게 생성되거나 기능이 강화된 리놀레산, 제니스테인, 멜라노이딘 같은 성분이 항암효과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천안 호서대 생물정보학과 김한복 교수는 10년째 ‘소금을 넣지 않는 청국장’을 연구하며 청국장 먹기 운동을 펼쳐 ‘청국장 전도사’로 통한다. 그에 따르면 콩의 발효과정에는 많은 균이 작용하는 데 균에 따라, 그 모양이나 색 그리고 특성이 다양하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균이 청국장의 맛과 풍미를 결정한다. 청국장 속의 비타민E는 항산화작용을 통해 콩기름 속에 있는 리놀산, 리놀레산이 과산화물이 되어 우리 몸에 해를 끼치는 걸 막아준다. 콩 속의 플라보노이드류도 몸속의 지방이 산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따라서 청국장은 노화나 주름을 방지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청국장에는 또 심장병이나 뇌졸중의 원인이 되는 혈전을 녹이는 효소가 많이 들어 있다. 레시틴은 혈관에 달라붙은 콜레스테롤을 씻어내 혈액순환을 원활히 해주고 영양소가 몸 구석구석으로 운반되도록 돕는다. 당뇨병에 걸리면 비타민B2의 흡수율이 저하된다. 따라서 비타민B2를 섭취하면 당뇨병과 그 합병증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다. 비타민B2는 일반 콩에 100g당 0.3㎎이 들어 있지만, 발효과정을 거친 청국장에는 그 두 배가량이 들어 있다.
혈압 강하 기능이 있는 청국장 개발한 호서대 김한복 교수.
김한복 교수의 말이다.
발효특허 전성시대
발효식품에 들어 있는 다양한 생리활성물질의 약성(藥性)이 속속 밝혀지면서 선진국은 일찌감치 그 기능성에 주목해 연구를 활발히 진행해왔다. 최근 일본 도쿄농공대 대학원 생명공학과 소데 고지 교수 연구팀은 우리의 생청국장과 유사한 낫토에 함유된 필로로키노린키논(PQQ) 성분을 이용해 낫토가 파킨슨병에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다. 선진국보다 발효식품이 훨씬 발달한 우리나라는 비록 한발 늦게 관련 연구에 뛰어들었지만, 최근 들어 그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발효식품과 관련한 물질 특허와 각종 식품의 제조 방법 및 제품 특허출원, 특허등록도 증가하고 있다.
전북대 신동화 교수는 복분자고추장을 비롯해 인진쑥 음료, 감잎차 음료 등 9건의 식품가공 기술을 개발해 업체에 넘겨 상품화했다. 그 과정에서 7건의 특허를 따내고 애로사항이 있던 기술 50여 건을 해결했으며 관련 논문도 280여 편을 발표했다. 고추냉이와 겨자 등 천연보존제를 이용해 고추장이 부풀어 오르는 현상을 막는 방법을 개발한 그는 “김치에 이어 고추장을 세계식품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큰 과제”라고 했다.
호서대 김한복 교수는 혈압강하 기능을 강화한 기능성 청국장(특허명, 기호도가 향상된 혈압강하 기능성 분말 청국장 조성물)을 개발해 2004년 특허를 따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몸에는 혈압을 조절하는 계통의 안지오텐신이 있는데, 혈압이 상승하는 것은 안지오텐신 변환효소(ACE)라는 물질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ACE의 작용을 억제하면 혈압을 내릴 수 있어 의약품으로 혈압강하제가 쓰인다. 그런데 청국장의 단백질 분해 효소인 프로테아제가 안지오텐신 변환효소의 작용을 강력하게 저지한다. 김 교수가 청국장 섭취 2시간 후와 1개월간 복용 후의 수축기 혈압변화를 측정한 결과 청국장 섭취 2시간 후에는 혈압이 평균 11mmHg가량 떨어진 반면 1개월간 복용한 후에는 15mmHg가량 하락했다고 한다.
우석대 생명공학과 오석흥 교수 연구팀은 김치 유산균을 이용해 흥분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GABA(Gamma Amino Butyric Acid)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아미노산의 일종인 GABA는 혈압을 낮추는 것은 물론, 뇌세포의 신진대사 촉진과 시력회복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기능성 물질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김치에서 GABA 생산능력이 탁월한 유산균을 분리해 GABA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서울대 미생물연구소와 벤처기업 쎌바이오텍, 그린바이오텍은 김치에서 분리한 유산균으로부터 천연항생물질인 항균 펩타이드를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발효콩 잼, 청국장 아이스크림
발효식품에 포함된 기능성 물질을 분리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이를 응용한 항(沆)헬리코박터 유산균 강화 김치, DHA 김치 등 기능성 발효식품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또한 고유 발효식품에 다른 재료를 첨가해 기능성을 강화한 매실된장, 허브요구르트, 수박고추장, 호박보리된장, 버섯보리된장, 생강막걸리, 녹차김치, 인삼김치도 인기를 끌고 있다.
토종 매실을 농약을 쓰지 않고 직접 길러 매실장아찌, 매실된장, 매실고추장을 생산하는 송광매원 서명선 사장은 미국 장류(醬類)업체와 손잡고 특허 등록된 매실된장 핵심원료를 공급, 현지에서 매실된장을 생산한다. 된장이나 고추장의 발효가 정점에 올랐을 때 염장처리한 매실절임을 재가공해 섞어주면 최고의 발효상태를 유지하면서 그 맛이 오래간다. 매실을 첨가한 장류는 일반 장보다 산패기간이 3배 정도 길어지기 때문. 매실은 물과 음식, 혈액 속의 독을 제거하고 체질을 개선하며 소화기와 간 기능 향상에 도움을 준다.
자연발효 빵을 만들어낸 수원농생명과학고 고상진군.
발효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비자의 입맛에 맞춘 이색 발효식품도 쏟아지고 있다. 청국장 아이스크림, 한방발효유산균 제품, 발효콩 잼, 청국장 음료, 청국장 햄, 청국장 빵, 발효 콩고물을 이용한 한과, 청국장 강정 등은 가격이 비싼데도 찾는 이가 많다. 미생물과 균을 인위적으로 조절해 만드는 가공 발효식품과 달리 자연상태에서 숙성되는 전통 발효식품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생물과 균들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발효되기 때문에 담글 때마다 맛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런 매력 때문에 자연이 빚어내는 창조적 작품인 전통 발효식품에 빠지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다.
“내가 발효왕”
충북 괴산군 농업기술센터 박찬순 연구원은 고추식초와 고추술 제조방법을 개발해 지난 3월 특허등록을 마쳤다. 괴산군의 고추 생산량은 전국 3위. 하지만 고추 외에 이렇다 할 대체작물이 없고 가격의 등락폭이 커 농가 소득이 불안정하다. 또 건고추를 만드는 과정에 상품성이 떨어져 버려지는 생고추가 많다. 박 연구원은 3년 전 버려지는 생고추를 활용하고 고추값이 쌀 때를 이용해 소득을 올릴 만한 가공식품을 만드는 연구에 착수했다.
“냉면을 예로 들면 식초와 고추장 또는 식초와 겨자가 소스로 쓰인다. 특히 식초와 고추의 궁합이 잘 맞아 고추식초를 떠올렸다. 그런데 식초를 만들려면 먼저 술을 빚어야 한다. 술 제조과정을 배우기 위해 주류업체에서 교육을 받았다. 술이 완성되자 동료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좋았다. 맛도 괜찮고, 고추의 색과 농도에 따라 노랑, 주황, 초록으로 달라지는 술 색깔도 아름다웠다.”
고추의 캡사이신 성분은 알코올에 잘 녹는 지용성이라 숙성될수록 성분이 강화된다. 또 체내에서 열을 발생시켜 화끈거림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낮은 도수, 적은 양으로도 술을 충분히 마신 효과를 낸다. 또 캡사이신은 체내 지방을 태워서 술로 인한 지방간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수원농생명과학고 1학년 고상진군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발효식품 세계에 눈떴다. 친구의 어머니가 버터롤 만드는 것을 보게 됐는데, 밀가루에 이스트를 넣어 발효시키자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신기했다고 한다. 그 후 빵과 발효 관련 책을 사모아 읽기 시작했다. 수십권의 책을 반복해 읽으면서 발효의 원리에 눈뜬 뒤에는 동네 제과점을 순례하면서 발효과정을 곁눈질로 익혔다. 방학이면 전국에서 열리는 식품박람회와 세미나를 찾아다니느라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중학생 때 직접 빵 만들기에 도전한 그는 숱한 실패 끝에 자연발효 빵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예전에 이스트가 없을 때는 술을 이용해 찐빵 같은 자연발효 빵을 만들었어요. TV에서 보니 자연발효 빵은 만들기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1000개가 넘는 전국의 제과점과 제빵업체 가운데 자연발효 빵을 만드는 곳은 12곳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왜 자연발효가 어려울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고 무작정 도전했습니다.”
맥주와 소주, 된장, 요구르트, 치즈 등을 이용한 빵 만들기에 매달린 끝에 중학교 3학년 때 ‘맛과 발효력이 향상된 자연발효빵 제조 방법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건포도 발효빵’ 제조 과정을 담은 이 논문은 전국과학전람회에서 특상(과학기술부장관상)을 받았다. 천안의 한 제빵업체는 고군이 개발한 빵을 제품화할 계획이다. 이 열일곱 살짜리 자연발효 빵 전문가는 요즘 로또에 당첨되는 상상을 자주 한다.
“누룩이나 과일 발효과정에서 생성된 특정 균을 분리하고 독성(毒性)을 실험하려면 비싼 기기가 필요해요. 또 균주 한 개를 분리해내는 데만 100만~200만원이 들어요. 그동안 아는 교수님이 계시는 대학 실험실을 이용해 두 개의 균주를 분리했는데, 본격적인 연구와 실험을 하고 싶어요. 고압살균기 같은 장비도 사고 싶고요. 자연발효 식품은 제조과정에 인위성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예측불허의 결과를 가져오는, 살아 움직이는 세계예요. 그게 단점이자 매력이라 자꾸 빠져들게 돼요.”
자신이 개발한 상품을 들고 포즈를 취한 전북대 신동화 교수.
짠맛, 신맛, 쓴맛, 단맛이 어울려 오묘하고 깊은 맛을 내는 우리나라 발효식품은 웰빙 열풍과 함께 세계인의 입맛을 유혹하고 있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는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 각지로 간장, 된장, 고추장을 수출해 272억원을 벌어들였다. 김치는 929억원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한국 발효식품의 위상은 세계 최초로 국제발효식품엑스포를 출범시켜 올해로 4년째를 맞은 성과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지난해 열린 제3회 전주 국제발효식품엑스포에 참가한 업체는 16개국 220개. 특히 해외업체의 참가 숫자는 전년도에 비해 두 배로 늘었다. 출품된 발효식품을 보면 서양권은 요구르트 등 유제품, 동양권은 장류나 젓갈류 등이 주종을 이뤘다. 한국에서는 김치와 청국장, 된장, 젓갈, 장아찌 등을 출품했다. 국내 발효식품은 엑스포 기간에 42억원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총 거래규모는 232억원.
엑스포조직위원회 사무처장인 전북대 신동화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장류가 발달했다고 한다. 다음은 신 교수의 설명.
“신라시대 폐백 물품 목록에 장이 올라 있을 만큼 장류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백제인에 의해 우리 장류 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졌는데, 일본은 벌써 일제 강점기에 장류의 과학화를 시도했다. 이를 바탕으로 10여 년 전부터 일본의 ‘미소’(된장)와 ‘소유’(간장)가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이 때문에 서구인들은 간장, 된장의 종주국을 일본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6·25전쟁을 거치며 뒤늦게 장류 공장이 번성했다. 전쟁 중에 군대 급식을 위해 대량 생산이 요구됐고 과학화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발효식품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매운맛이 인기를 끄는 지금 고추장을 시급히 표준화해 국제공식상품으로 등재해야 한다.”
약진하는 발효 연구
2002년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회의에서 한국 김치가 일본‘기무치’를 따돌리고 표준규격으로 인정받아 종주국임을 확인했다. 지난해 열린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NICE 분류’ 전문가회의는 발효채소식품으로 ‘Kimchi’의 신상품 등록을 결정했다. 내년에 열리는 WIPO 총회에서 절차상 승인만 남겨둔 상태다. 김치가 NICE 분류 목록에 등재되면 해외에서 김치를 대상으로 한 상표등록이 수월해질 뿐만 아니라 김치수출 증대 효과도 가져올 전망이다.
식품·농업·의약·환경 등 응용범위와 활용분야가 넓은 BT(Bio Technology)산업은 기술·지식을 집약한 특허 및 신기술 의존도가 높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21세기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첨단산업이다. 이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일찌감치 주도권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발효식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바이오산업이다. 발효과정에서 수십만가지 미생물과 효소를 생성시키는 발효식품은 천연 신물질의 보고(寶庫)이자 연구·개발 신개척지로 남아 있다. ‘질병 없는 장수’를 꿈꾸는 세계인들이 발효식품에 주목하며 엄청난 연구비를 쏟아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1994년부터 2007년까지 3단계 바이오산업 육성 계획을 수립해놓고 있다. 2000년에는 바이오산업을 IT산업과 함께 국가 핵심전략 산업으로 육성, 발전시키고자 생물산업발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현재 우리나라 바이오 기술수준은 선진국 대비 60~70% 수준. 이 가운데 생산기술 분야의 발효기술 수준은 선진국의 90%까지 올라 격차가 상대적으로 작다. 산·학·연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한 바이오산업 육성 계획에 따라 전국의 많은 대학(전문대 포함)이 발효 관련 연구소를 설립했고, 관련 학과도 속속 신설되고 있다.
전남과학대학 김치발효전공학과는 김치발효기능사 양성을 목적으로 개설됐다. 전주기전대학 식품생명과학과는 양조발효식품전공 과목을 가르친다. 호서대는 벤처전문대학원에 발효식품과학과를 개설했다. 이 외에 전북대 응용생물공학부 식품공학전공이 있고, 경북과학대 전통발효식품전공, 대구보건대 첨단발효건강학과, 강원대 축산식품학과(발효유전공) 등이 발효 관련 전문인력 양성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충북 증평군에 있는 청주과학대 김치식품과학과 학생들은 지난해 졸업작품전에 자신들이 개발한 백년초 백김치, 가시오가피 백김치, 도라지 포기김치 등 기능성 발효식품을 출품했다. 전주기전대학 식품생명과학과 졸업작품전에서는 그린막걸리, 석류요구르트, 된장모닝빵, 백년초치즈 등이 눈길을 끌었다. 개발한 작품 중 실제 제품으로 연결된 경우도 있다.
발효식품학 박사인 경북 경산 대경대 호텔조리학부 권오진 교수는 “발효식품 관련 전문인력을 배출하는 것이 시급하지만 당장 그들이 졸업 후 진출할 곳은 많지 않다”고 안타까워한다. 국가 정책만 수립돼 있지 현장의 첨단화, 산업화 진행은 느리다는 것. 영세한 업체가 많고 국내 식품산업 전반의 사정이 열악하다 보니 대학에서 배출한 전문인력이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 큰 식품업체들도 아직은 연구개발(R·D)에 적극 투자해 상품개발을 하려들지 않는다. 권 교수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웰빙의 삶을 추구하고 ‘발효식품=건강식’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어 발효식품 산업의 미래는 매우 밝다”고 내다본다.
최근 농어업예술위원회가 주최한 ‘엔틱농수산물전’이 눈길을 끌었다. 전시회를 추진한 김진흥 박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발효식품은 와인이나 외국의 여느 저장식품과는 달리 세월이 흐르면서 결정체가 만들어져 예술성을 지닌 조형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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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묵은 장, 부르는 게 값
간장의 경우 오랜 세월이 흐르면 응결되는 소금결정체가 바닥에 가라앉아 오닉스(검은색의 매끈하고 불투명한 원석) 같은 형상의 나트륨 결정체인 장석(醬石)을 만드는데, 그 모양이 매우 다양하다. 간장에 따라 장석의 빛깔이 희귀 보석의 모든 색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또 간장의 빛깔은 세월이나 발효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농담으로 표출된다. 김 박사는 “오래 묵은 간장은 주인의 솜씨와 자연의 작용이 결합해 끊임없이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것이 창작되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예술품”이라고 강조했다.
전시회에 출품된 발효식품은 순정효황후 윤씨가 사용하던 왕궁의 마지막 음식인 낙선재 간장(80년 추정), 창녕 조씨 사정공파 대종가의 61년 묵은 된장, 수백년 동안 간장의 종균을 계승해 배양해온 보성 선씨 종가의 간장, DMZ 청정지역에서 발굴된 엄선옥 농가의 12년 된 송이고추장, 된장에서 약향(藥香)이 나는 서혜숙 농가의 17년 약된장 등 120여 종.
모두 오랜 시간만큼이나 저마다의 사연이 깊이 스며 있다. 비운의 조선 황후 순정효 윤씨가 사용하던 창덕궁 낙선재 간장은 윤 황후 집안과 사돈관계로 얽힌 이병덕(78)씨가 황후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다. 6·25전쟁 발발 당시 대학 2학년이던 이씨는 경찰에 투신해 윤 황후를 모셨고, 3개월간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함께했다. 이씨가 윤 황후로부터 간장을 선물 받은 것은 부산 피난 직전인 1950년 11월이었다.
허정숙(74)씨는 가슴시린 사연이 깃들인 식초를 출품했다. 허씨는 평소 애주가인 아들의 지나친 음주벽을 우려해 집에 있던 약초술을 감춘 뒤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술로 인해 아들은 결국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약초술은 그뒤 식초로 변해 발견됐다. 아들 대신 손자들을 돌보고 있는 허씨는 전시회에 식초를 내놓으면서 “아들이 그렇게 세상을 뜰 줄 알았다면 이 술을 숨기지 않는 건데…”라며 눈물지었다.
짧게는 10여 년, 길게는 100년이 넘은 장류 식품은 수십만원에서 최고 1억을 호가했다. 50년 전 작고한 시어머니가 담가둔 간장(60년 묵은 것으로 추정)을 출품한 윤사분씨도 ‘명품 간장’ 주인이다.
일본 전시회를 계획 중인 김진흥 박사는 “항아리에 담긴 상태로 오랜 세월 사람 손을 한 번도 타지 않은 간장, 된장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한다.
“전시회에 나온 간장 중 감청색을 띠는 장석이 형성된 것이 있었는데, 미국인 친구가 그걸 보고 신비한 음식이라며 감탄했다. 간장 때문이 아니라 ‘보석’이 탐나서 간장을 담글 거라고 했다.
일본인은 오래 묵은 한국의 간장, 된장을 몰래몰래 사가고 있다. 일본에는 한국처럼 오래 묵은 장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장 속에 담긴 천연 신물질에 관심이 많을 뿐 아니라 그 클래식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 장류를 브랜드화해 명품으로 만들어야 농가도 살고 한국의 발효음식이 세계적 음식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미생물과 효소, 자연조건과의 상호작용으로 무궁무진한 신비의 물질을 탄생시켜 우리 몸을 이롭게 하는 발효식품은 건강한 장수를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