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한 켤레씩의 신발을 가진 남매가 있다. 오빠가 누이동생의 꽃신을 잃어버려, 둘은 너덜너덜한 운동화 한 켤레를 번갈아 신기 시작한다. 지독한 가난. 남매는 서로 배려하며 상황을 헤쳐간다. 신발 한 켤레도 못 사는 지긋지긋한 현실에서도 아이들은 맑다. 그렇지만 서럽다. 아이들에게 ‘행복한 가난’은 과연 있는 걸까.
현대사회의 물질적 풍요는 인격적 가치나 노력과 무관하게 부자와 빈자로 개인을 규정하게 만들었다. 돈이 모든 인간행위의 척도이고 인간과 인간의 직접 관계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돈의 위력은 엄청나다. 돈은 단순한 교환수단이나 재화 축적수단 이상의 복합적 의미를 지녔다. 돈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며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돈이 우리 삶에서 사랑과 평화와 같은 가치를 제치고 최고의 가치가 될 수는 없다.
그간 대입 논술시험에선 경제와 관련해 ‘현대사회에서 돈이 가지는 의미와 삶의 질과의 관계’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 ‘부익부 빈익빈 현상’ ‘부의 세습’ 등에 대한 견해를 묻는 문제가 출제됐으며, 요즘 정치의 화두인 ‘양극화’와 관련된 논제가 출제될 것으로 예상된다.
‘천국의 아이들’은 신발을 잃어버린 남매를 소재로 순수한 동심의 세계와 남매의 따뜻한 정을 아기자기하게 그리고 있다. 동생에게 새 신발을 마련해 주기 위해 오빠가 어린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는 내용으로 1등도, 2등도 아닌 3등을 해야 상품으로 운동화를 받을 수 있다는 재미있는 설정이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닌 지난(至難)한 삶의 일상을 담아냈다.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어느 날 친구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그는 옆집에 사는 남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친구는 “신발이 떨어지자 부모에게 새 신발을 사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한 켤레를 가지고 나눠 신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어떻게 애들 신발 한 켤레도 못 사줄 만큼 가난할까?”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말을 들은 마지디 감독은 새 신발 한 켤레조차 신을 수 없는 현실이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얼마나 엄청난 비극인지를 설명했고,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그것이 ‘천국의 아이들’의 시작이었다.
잃어버린 꽃신
‘천국의 아이들’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하얀 풍선’같이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란 영화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 유년기의 순수를 바라보며 성년의 타락을 반추(反芻)하게 하는 작품이다. 매우 작은 것으로 그려내는 아이들의 커다란 이야기인 ‘천국의 아이들’은 그 해맑은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며 때론 웃음을, 때론 울음을 주는 동화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잊고 있던 마음 깊은 곳의 생생한 감정들이 살아 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노인이 아이의 낡은 구두를 꿰매는 손놀림이 클로즈업되어 비친다. 구두를 수선해 들고 나온 알리(미르 파로크 하스미안 분)가 신발이 담긴 봉지를 재래식 식료품 가게의 바깥 과일 상자 위에 얹어놓고 안으로 들어간다. 감자를 고르고 있는 사이에 청소부가 신발 봉지를 청소 리어카에 싣고 가버린다. 이 구두는 여동생 자라(바하레 시디키 분)의 하나밖에 없는 구두다. 테헤란 남쪽의 가난한 가정에 사는 초등학생 알리가 엄마의 심부름을 갔다가 여동생 자라의 분홍색 꽃구두를 잃어버린 것이다. 가게에서 감자를 골라 외상으로 들고 나온 알리는 신발 봉지가 보이지 않자 열심히 찾기 시작한다. 그러다 과일 상자를 엎질러버린다. 주인에게 혼이 나면서 집으로 돌아온 알리는 여동생 앞에서 울먹이며 말한다.
“솔직히 말할래. 채소가게에서 신발을 잃어버렸어.”
“정말이야?”
“엄마한텐 비밀로 해줘.”
“그럼 내일 학교엔 뭘 신고 가?”
알리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다. 아버지는 막일을 하고,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 부모와 한방에서 책상도 없이 공부하는 알리와 자라는 공부하는 척하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화하는 사이 잃어버린 신발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아버지에게 들킬까봐 말은 못하고, 공책에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가며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아랍 문자의 필기 순서는 어떤 경우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다. 동생 자라가 공책에 글씨를 쓴다.
‘오빠… 나 어떡해? 구두가 그거 하나뿐인데 내일부터 학교에 뭘 신고 가?’
‘슬리퍼 신고 가면 안 돼?’
‘오빠가 잘못하고선 무슨 소리야?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그러면 너도 맞아. 집엔 돈이 없단 말이야.’
‘그럼 어쩌라고?’
‘이렇게 하자. 내 운동화를 같이 신자. 난 오후반이니까, 교대로 신으면 돼.’
동생 자라가 오빠 알리의 대답이 적힌 노트를 보면서 자신의 몽당연필을 만지작거리자 알리는 자기가 쓰고 있던 긴 연필을 건네며 “이거 가져” 하고 살짝 말한다. 자라는 긍정적인 화답의 표시로 연필을 집어든다.
자라가 등교한다. 오전반이다. 오빠의 다 떨어진 헐렁한 신발을 신었다.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구두를 신고 있다. 오후반인 알리가 학교에 등교할 시간이다. 슬리퍼를 신고 동네 어귀에서 신발을 바꿔 신기 위해 동생을 기다리고 있다. 등교시간 때문에 초조해하는 알리. 오전반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라는 숨 가쁘게 뛰어서 오빠가 기다리는 곳으로 온다. 급히 신발을 바꿔 신고 학교로 뛰어가는 알리. 하지만 지각이다. 매를 들고 선 훈육선생님의 눈을 피해 가까스로 교실로 들어간다.
수업을 마친 알리는 수돗가에서 물로 허기를 채운다. 수돗가에서 그릇을 씻고 있던 자라는 오빠 알리와 함께 냄새나는 운동화 한 짝씩을 비눗물에 묻혀 정성스레 빨면서 손 위에 비눗방울을 만들어 불어본다.
“자라에게 구두를 사줘요”
오전반인 자라가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다. 감독하는 선생님에게 연신 “몇 시예요?”라고 물어보는 자라는 시험문제를 빨리 풀고 나서 오빠를 위해 달음질친다. 개천을 따라 뛰다가 헐렁한 신 한 짝이 벗겨져 개천에 빠져 둥둥 떠서 흘러간다. 운동화를 따라 뛰어가는 자라. 급한 물살을 따를 수가 없다. 마음을 졸이게 하는 장면이다. 따라가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자라. 개천을 청소하던 아저씨가 삽으로 신 한 짝을 건져준다.
알리를 만난 자라는 울먹이며 물에 젖은 운동화를 벗어준다. 알리가 학교로 힘껏 뛰어가지만 또 지각이다. 훈육선생님께 주의를 듣고 교실로 들어가자 담임선생님이 지난번 시험 성적을 발표한다. 만점을 받은 알리. 수업을 마친 알리는 동생 자라에게 뛰어가서 가방을 열고 뭔가를 꺼낸다. 금색 볼펜이다.
“선생님이 상으로 주셨어. 너 가져. 선물이야. 받아.”
“정말 주는 거지? 아빠한테 안 일렀어.”
오전반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고 있다. 이번 주는 시험 기간이다. 줄을 서서 주의사항을 듣고 있던 자라는 우연히 건너편 다른 반 여학생이 자신의 잃어버린 꽃구두를 신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1교시 시험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그 여학생을 찾는다. 뒤를 따라가 보니 남루한 집으로 들어간다.
오후반인 알리는 또 지각이다. 훈육선생님에게 또 걸린 알리는 교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내쫓긴다. 운동장으로 걸어나가는 알리를 만난 담임선생님이 훈육선생님에게 말해 교실에 들어가게 된다.
수업을 마치고 알리는 자라와 함께 잃어버린 꽃구두를 신고 있던 여학생의 집으로 찾아가 멀리서 대문을 쳐다본다. 문이 열리자 그 여학생이 아버지를 부축해 나온다. 그 소녀의 아버지가 맹인이며,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집에서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리와 자라는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선다.
알리의 아버지는 일용 근로를 나간 곳에서 소독하는 통을 얻어 부잣집 정원의 나무에 약을 치는 일감을 찾기로 한다. 주말에 아버지는 자전거에 아들 알리를 태우고 부업에 나선다.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부자동네가 보인다. 지금까지 알리가 사는 가난한 동네를 보여주다가 으리으리한 저택이 들어선 동네를 비추면서 화면은 이란 사회의 극심한 빈부 격차를 드러내 보인다. 이 장면에서 논술의 주제인 자본주의의 문제점, 빈부격차, 양극화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이 집 저 집 초인종을 누르며 정원 관리를 권유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손자를 키우는 부잣집의 정원 관리를 하게 된다. 아버지가 정원을 손질하는 사이 알리는 그 집의 손자와 즐겁게 놀아준다. 정원을 손질해주고 난 다음 할아버지로부터 생각보다 많은 일당을 받은 아버지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오면서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부푼 꿈에 젖어 알리에게 말한다.
“휴가 때는 매일 와야겠다. 공장보다 벌이가 나아. 여유가 생기면 필요한 걸 사자꾸나. 자전거, 다리미도 사고 엄마가 노래하는 커다란 냉장고도 사고, 넓은 집이 생기면 또 뭘 살까? 넌 뭘 사고 싶니?”
“자라에게 구두를 사줘요.”
1등보다 3등
다음날 알리가 학교에 가니 운동장에서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마을에서 열리는 어린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할 선수를 모집한다는 내용을 알리고 있다.
“모두들 주목! 알려줄 게 있다. 올해 처음으로 개최되는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가 우리 마을에서 열리게 됐다. 관심 있는 학생은 방과 후에 참가 신청하고 테스트를 받아보도록!”
이 말을 듣고 알리는 자신의 낡은 운동화를 쳐다본다. 집안 형편 때문에 신발을 사달라는 말을 못하는 알리와 자라는 이어달리기 식으로 신발을 바꿔 신으면서 번갈아 등교한다.
알리가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다본다. 운동장에서는 마라톤에 참가할 학생들의 테스트가 한창이다. 알리는 테스트를 신청하지 않았다. 마라톤 대회에 선발된 선수 명단이 적힌 벽보를 알리가 쳐다보고 있다. 확정된 참가 선수 명단 아래 입상자가 받는 부상이 적혀 있다.
‘1등 : 2주 캠프, 운동복 한 벌. 2등 : 2주 캠프, 학용품. 3등 : 1주 캠프, 운동화.’
‘운동화’가 적힌 문구에 시선을 집중하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 알리. 그는 마라톤 담당 선생님을 찾아가 “선생님, 전 정말 자신 있어요. 출전하게 해 주세요. 우승을 약속할게요. 이번 대회에 나가서 꼭 상을 받아야 해요. 나가게 해 주세요” 하면서 울먹이며 호소한다. 결국 운동장에서 테스틀 받는 알리. 그는 매일 신발을 바꿔 신고 학교에 급히 등교하며 달리기를 생활화한 덕에 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한다. 집으로 뛰어온 알리는 자라에게 즐거운 표정으로 말한다.
“나 마라톤 대회에 나가. 어린이 마라톤 대회 상품이 있어. 3등 상품이 운동화야.”
“3등이 아니면?”
“1, 2등엔 관심이 없어. 3등이 운동화야.”
“남자 운동화잖아.”
“여자 걸로 바꿔줄게. 네 발에 딱 맞는 걸로.”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 여러 학교에서 출전 선수들이 다 모였다. 말끔한 운동복과 반짝이는 운동화로 무장한 부잣집 어린이 육상 선수들은 부모의 격려를 받으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사이에 혼자 쓸쓸히 참가해 낡은 셔츠와 바지,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은 알리가 보인다. 알리는 선생님이 건네주는 학교 마크가 새겨진 티셔츠로 갈아입고 자신의 낡은 운동화 끈을 조여맨다.
출발 신호가 울린다. 중간쯤 달리던 알 리가 선수들을 하나하나 앞지르기 시작한다. 알리는 점점 지쳐가지만 그동안 운동화 때문에 빚어진 동생과의 사연을 떠올리면서 이를 악물고 계속 달린다.
선두 그룹에서 3∼4명의 선수와 각축을 벌이는 알리. 낡은 운동화를 신고 뛰다가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뛴다. 알리를 포함한 다섯 명의 선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결승선을 향해 숨을 몰아쉬며 뛰고 있다. 결승 테이프를 끊은 다섯 명의 선수가 지쳐 쓰러진다. 선생님이 알리를 일으켜 세우며 말한다.
“만세! 알리, 네가 1등이야!”
“3등 아니에요?”
“웬 3등? 1등이라니까. 우승한 거다. 우승!”
아름다운 맨발
선생님의 어깨에 올라탄 알리는 시상대에 놓인 3등 부상인 운동화에 눈길이 가 있다. 1등 시상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지만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울먹거린다. 다른 사람들은 기쁨의 눈물로 알지만….
알리의 아버지가 시장에 들러 식료품과 함께 알리와 자라의 운동화를 사서 자전거에 싣는 모습이 비친다.
풀이 죽은 채 수돗가에 있는 자라에게 다가온 알리. 둘 다 아무 말이 없다. 자라는 오빠 알리가 여전히 신고 있는 낡은 운동화를 쳐다보기만 하고…. 수돗물로 목을 축인 알리가 운동화를 벗는다. 밑창이 다 떨어진 운동화. 양말을 벗자 상처가 나고 물집이 생긴 발이 드러난다.
수돗가에 조그마한 인공 연못이 있다. 연못 사이를 누비는 금붕어들. 연못은 그들의 안식처이고 금붕어는 자신들의 자화상이다. 이때 카메라 앵글이 연못 속 광경을 잡는다. 알리가 아픈 발을 연못에 담그자 금붕어들이 발 주위로 몰려든다. 금붕어들이 물집 잡힌 발등을 치료하듯이 감싸주는 아름다운 영상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테헤란 태생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은 배우 출신으로 이란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3세대 대표 감독이다. 1970년대 이란 영화의 뉴 웨이브를 이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다리우스 메흐르쥐, 바람 바자이 등이 이란 영화의 1세대 감독이며, 혁명 이후 배출된 모센 마흐말바프가 2세대 감독이다.
‘천국의 아이들’의 눈부신 매력은 알리 역을 맡은 미르 파로크 하스미안과 자라 역의 바하레 시디키의 순수한 연기다. 테헤란의 초등학교를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 이 소년 소녀는 실제로 영화 속 알리와 자라처럼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평범한 어린이들이다. 두 어린이는 장면마다 진실과 순수의 감동 어린 연기로 가득 채운다. ‘천국의 아이들’은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관객상을 석권했으며, 파지르 국제 영화제에서도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 영화 속 논술·구술 워밍업
쪻‘천국의 아이들’은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서 빈부 격차가 심한 당시의 이란 사회상을 비추고 있다. 빈부 격차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자.
▼ 핵심 기본 논제 1
쪻‘천국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빈부 격차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와 같은 소득 격차의 불균형에 대한 견해를 논술하시오.
▼ 예시 답안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물결을 급속도로 타고 있다.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 유연화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 프로그램은 대외적으로는 자주성 상실과 국부 유출의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으며, 대내적으로는 대량 실업과 ‘20 대 80 사회’라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켰다. 부와 빈곤이라는 주제가 낯설지 않다. 왜 어떤 사람들은 부귀와 축복을,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빈곤의 저주를 받는 것인가.
소득 격차는 소득 분배 구조가 개선되지 않아 소득 불평등이 심화돼 나타난 결과다. 물론 부분적이나마 사회안전망 구축 시도가 있었고 부동산 투기 억제, 재벌 체제의 폐해를 고치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작업이 너무 불충분하거나 핵심을 비낀 나머지 긍정적 결과보다는 부정적 결과가 더 많이 나왔다.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도 바로 그중 하나다. 소득 불평등과 관련한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실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동력의 80%를 차지하고 정규직 노동자가 20%를 차지함으로써 사회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20대 80 사회’에서는 20%의 소수가 사회적 부의 80%를 차지하고, 80%의 다수가 그 나머지인 20%를 놓고 아귀다툼을 해야 한다. 둘째, 주거비 육아비 교육비 의료비 등 필수 생활비용이 급상승했다. 이러한 비용은 모두에게 닥치는 것인데, 가난한 계층에게는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셋째, 소득 재분배 기능을 수행해야 할 조세 정책의 실패가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조세 정책은 한편으로 정부 재정의 확보, 다른 한편으로 소득 재분배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소득세와 상속세의 누진세 시행이 불철저하고 나아가 탈세, 누세(漏稅)가 더욱 교묘한 형태로 이뤄짐에 따라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자영업자나 전문직 종사자들은 ‘유리 지갑’을 가진 근로자들보다 세금을 덜 낸다. 넷째, 교육 기회나 정보 접근의 불균등도 빈부 격차 심화에 기여한다. 대학 진학에 있어 사교육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부잣집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높다. 또 정보화와 관련해서도 컴퓨터 구입이나 사용 능력의 차이, 지적 재산권 효과 등으로 빈부 격차는 더 커진다.
앞으로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고 사회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 및 노동 기회 균등화, 학력 차별 타파, 기본 생활비의 사회 보장화, 조세 정책 민주화 등 여러 과제를 다각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 핵심 기본 논제 2
쪻양극화와 불평등의 극복에 대해 논술하시오.
▼ 예시 답안
양극화 현상이란 사회의 희소가치가 불균등하게 배분되고 이것이 제도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사회 계층 현상에 대해 능력에 따른 보상은 사회 발전을 꾀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지나친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는 사회 전체를 긴장에 빠뜨리고 사회의 자원을 낭비하게 만든다.
양극화 현상은 개인의 ‘삶의 기회’와 ‘생활양식’을 규정한다. 하층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삶의 기회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생활양식에도 차이가 난다. 양극화 현상은 개인들의 삶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회의 구조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 하층계급의 ‘상대적 박탈감’이 고조되고 갈등이 증폭되어 사회는 불안에 빠지게 된다.
갈등은 평화적, 점진적으로 해결될 수도 있지만 혁명적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건 사회에는 구조적인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혁명적 방식으로 양극화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그러한 구조적 변화가 정치, 경제,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프랑스대혁명이나 사회주의혁명 등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노사 갈등, 심각한 농업 위기, 도시 빈민화, 정경 유착에 기반을 둔 부정부패 만연, 학벌 위주의 교육 풍토 등 여러 종류의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러므로 계층간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안정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중요한 일이다. 양극화 현상에 따른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고 해소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재분배와 사회 안전망 확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 관련 기출문제
※다음 두 글에 제시된 삶의 방식을 비교하고, 그것이 오늘날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논술하시오. (여기서 ‘비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씀. 두 글에 제시된 삶의 방식이 대안으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할 경우 그 이유를 밝히고 자신의 견해를 개진할 것.) 1,100∼1,200자 (건국대 2001 정시)
▼ 제시문
(가) 지난 겨울부터 산 아래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기름보일러를 장작이나 연탄보일러로 개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어려운 경제사정은 산촌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어제 장터에서 만난 김씨는 보일러를 고치고 나니 기름 값에 쫓기던 마음이 한결 놓인다고 하면서, 장작 타는 냄새에 옛 정취를 느끼게 되더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시련은,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고갈되고 탕진된 민족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어떤 고난도 그 뜻을 이해하면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생긴다.
복진타락(福盡墮落). 복이 다하면 굴러 떨어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우리는 경제성장의 흐름을 타고 소중하고 귀한 것을 등진 채 함부로 버리면서 잘못 살아왔다. 가진 것이 늘어 편리해진 반면 인간의 정신과 덕성은 말할 수 없이 피폐됐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아름다운 인정과 풍습이 사라지고 민족의 기상도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졌다. 안으로 자율적인 능력을 잃으면 밖에서 타율적인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 우주의 흐름이다. 이래서 재충전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자리를 잃으면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일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삶이 권태롭거나 무료하지 않다. 꿈과 희망의 자리에 한탄과 원망과 후회가 들어설 때 우리는 늙고 병든다. 체면이나 일의 대가를 따지지 않는다면 일거리는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일자리가 있고 나서 일거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일거리를 찾아낸다면 바로 그것이 내 일자리 아니겠는가.
생각을 돌이켜보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으니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으며,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우리는 벌어들이는 수입 안에서 살면 된다. 할 수 있다면 얻는 것보다 덜 써야 한다. 절약하지 않으면 가득 차 있어도 반드시 고갈되고, 절약하면 텅 비어 있어도 언젠가는 차게 된다. 덜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덜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더 많이 존재할 수 있다.
오늘과 같은 경제난국에서 우리가 크게 각성할 일은 그동안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태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직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우리들의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는 결정된다.
현실이 곧 우리의 스승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오늘과 같은 시련이 없다면 우리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할 때, 우리 자신과 후손들의 건전한 삶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거쳐가야 할 관문이라고 여겨진다.
소욕지족(少欲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그 끝이 있다. 오늘의 어려움을 재충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이고 낡은 문이 닫히면 새 문이 열리게 마련이다. 얼어붙은 대지에 봄이 움트듯이 좌절하지 말고 희망의 씨를 뿌리자.
- 법정, ‘가난을 건너는 법’에서
(나) 우리는 모든 일에서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리가 처음에 십 년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우리 삶의 중심 원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 우리가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을 절반쯤은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윤 추구의 경제에서 할 수 있는 한은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대공황은 몇 백만이 넘는 가장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사실 이것은 시장에서 생필품을 사다 쓰는 사람들을 늘 위협하고 있는 문제였다. 일당이나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은 스스로의 일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자기들과 상관없이 경제 정책이 결정되고, 정책을 수행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뽑지도 못한다. 다시 말해 이때의 수많은 실업자는 자기 잘못으로 일자리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모든 생필품과 살림살이들을 돈 주고 사야만 하는 경제 구조 속에서 그이들은 직장을 잃은 것이다. 수입은 끊겼지만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모아놓은 돈은 바닥났고, 결국 그이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이렇듯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구조 속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그 두려운 일들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내야만 했다. 우리가 생각해낸 대안은 절반쯤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이었다.
둘, 우리는 돈을 벌 생각이 없다. 또한 남이 주는 월급을 받거나 무언가를 팔아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바람은 필요한 것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손수 생산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일차 목적이다. 한 해를 살기에 충분할 만큼 노동을 하고 양식을 모았다면 그 다음 수확기까지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돈을 번다’거나 ‘부자가 된다’는 생각은 사람들에게 매우 그릇된 경제관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경제 활동을 하는 목적은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것이다. 돈을 먹고 살 수는 없으며, 돈을 입을 수도 없고, 돈을 덮고 잘 수도 없다. 돈은 어디까지나 교환 수단일 뿐이다. 식의주(食衣住)에 필요한 물건을 얻는 매개체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이지 그것과 맞바꿀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우리는 필요한 현금에 맞추어 돈을 벌려고 했다. 필요한 것이 마련되었다고 판단되면, 그 해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돈을 더 벌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고자 했으며, 이렇게 일단 기본 생활 수단이 마련되면 다른 일들에 관심을 돌려 열중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회 활동,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와 작곡 같은 취미 생활이었다.
셋, 우리는 모든 일에 들어가는 비용을 우리가 가진 돈만으로 치를 것이다. 은행에서는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을 것이다. 땅이나 집을 담보로 넣어 융자를 얻은 뒤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제 구조에서도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은 배를 두드리며 편히 산다. 개인이든 은행 같은 기관이든, 돈을 빌려주고 담보를 잡으며, 이자와 경매 처분으로 얻는 수익금으로 살을 찌운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산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길 수 있다.
한편 돈을 빌려다 쓰는 생산자들은 이자를 꼬박꼬박 내야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기의 모든 재산을 잃는다. 대공황 때 몇 천 명에 이르는 농부와 가장들이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이나, 어느 날이나, 어느 달이나, 어느 해나 잘 쓰고 잘 보냈다. 우리가 할 일을 했고, 그 일을 즐겼다. 충분한 자유시간을 가졌으며, 그 시간을 누리고 즐겼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을 할 때는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결코 죽기 살기로 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많이 일했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사람에게 노동은 뜻 있는 행위이며,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일이고, 무엇을 건설하는 것이고, 따라서 매우 기쁨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요일이 되면 평소와는 달리 먹고살기 위한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를 보냈다. 일요일 아침에는 대개 음악을 감상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종종 함께 모여 토론을 벌였다. 누군가 소리 내어 책을 읽기도 했는데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나무 열매를 쪼개거나 콩 껍데기를 벗겼으며, 바느질이나 뜨개질 같은 자질구레한 자기 일을 하기도 했다.
- 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에서
▼ 문제 해결을 위한 Tip
●논제는 두 제시문에 담긴 삶의 방식에 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현대사회의 대안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는지 여부이다. 두 글은 현대 산업사회 또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한 사회 경제적 상황을 배경으로 삼아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삼은 (가)는 마음(소유욕)을 다스리는 것을 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개개인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는가에 따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시각이다. 그 대신 이 글에서는 사회 경제적 체제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히 문제 삼고 있지는 않다. 이에 비하여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배경으로 삼은 (나)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이윤 추구 및 잉여 자본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면서 다분히 자본주의 체제에 반하는 삶의 방식을 대안으로서 내걸고 있다. 특히, 단순한 방안 제시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 실천을 통해 그 현실적 가능성을 확인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주목되는 점이다. 이와 같은 차이점과 함께 두 글은 현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에 대해 부(富)에 대한 현대인의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면서 근검과 절제의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공통점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제시문 (가)는 법정 스님의 수필 ‘가난을 건너는 법’이고, (나)는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가 함께 쓴 ‘조화로운 삶’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둘 다 대중성과 함께 사상적 깊이를 갖추고 있는 글이다.
▼ 예시 답안 1 (가) 제시문에 동의한 경우
현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물신주의와 비인간화로 규정할 수 있다. 인간을 위한 하나의 유용한 도구일 뿐인 돈이 도리어 인간을 옥죄고 구속하는 배금주의는 현대인이 풀어야 할 난제의 하나이다. 크게는 우리가 직면한 구조조정의 문제에서 작게는 사소한 인간적 배신, 사기, 협잡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돈의 질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돈의 질서에 대한 전면적 성찰을 강요하고 돈의 질서와 바람직한 삶의 구성이라는 문제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
(가)와 (나)의 제시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점은 정신적 가치를 물질적 가치에 대비시키고 전자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보다는 오히려 정신에서 우리의 바람직한 삶을 찾을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 정신적 가치란 (가)에서는 소욕지족, 즉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존재지향적인 생활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에서는 필요한 만큼의 자급자족, 그를 통한 정신적 평화로 제시되고 있다.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은 둘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다. 그것은 돈의 질서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반면에 두 제시문은 중요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가)의 제시문이 시장경제원리의 틀 안에서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면 (나)의 제시문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가)가 돈의 질서가 아무리 인간을 배반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정신적 가치를 지켜내고 펼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적극적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면, (나)는 그 삶의 방식이 비록 완전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기존 체제 내에서의 변화를 꾀하고 있지 않다는 도피적인 삶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 (가)가 절약과 절제를 통해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고 그리하여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적극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나)는 비현실적이라고도 여길 수 있는 방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삶을 표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보다는 (가)의 삶의 방식이 돈의 질서 앞에 선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돈의 질서에서 떠날 수도 없고 떠나서도 안 된다. 비바람 속에서 피는 꽃이 더욱 아름답고 더러운 진창에서 핀 연꽃이 더욱 화려한 법이다. 비온 뒤에 날이 개고 땅이 굳듯이 시련은 시련의 한복판에서 이겨내야 한다.
▼ 예시 답안 2 (나) 제시문에 동의한 경우
오늘날의 사회와 경제는 여러 측면에서 심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자본과 이윤에 대한 끝없는 추구는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들었고, 부의 불공평한 분배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문제를 증폭시키고 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세계 경제는 호황과 불황 사이에서 춤추면서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글 (가)와 (나)에는 현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나름의 해법이 제시돼 있다. 두 글은 공통적으로 부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계하면서, 욕심을 다스리고 절제하는 방식의 삶을 천명하고 있다. 자아의 결단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그러면서도 두 글의 시각에는 차이가 있다. (가)에서 객관적인 조건에 대한 별다른 고려 없이 개개인의 ‘마음가짐’의 변화를 내건 데 비하여, (나)에서는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서 찾으면서 그 객관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방향의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둘 중에서 대안으로서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마음가짐이 훌륭한 삶을 위한 중요한 조건임은 분명하지만, 객관적 조건에서 연유한 문제가 주관적 결단을 통해 해결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것은 상황에 대한 순응을 통하여 모순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이에 비하면 (나)는 개인의 결단과 더불어 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와 달리 문제의 본질에 훨씬 깊이 다가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의견의 제시에 그치지 않고 실천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높이 살 만한 사항이다.
(나)에 대해 그러한 특수하고 일탈적인 차원의 저항이 이 거대한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적 시각이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바로 파악하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일이다. 그러한 도전을 통해 세상은 바뀔 수 있다. 만약 현 상황에서 이런 식의 도전이 다 멈춰버린다면, 앞서 말한 사회 경제적 모순은 더더욱 심화될 것이다.
니어링 부부의 도전은 보나마나 실패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함부로 예단할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 삶의 방식이 그들 자신에게 있어 의미 있게 실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러한 삶의 방식이 전체 사회 차원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바로 우리가 검증해야 할 몫이다. 현실 상황을 직시하는 가운데 그 선례를 소중히 돌아볼 때다.
▼ 관련 기출문제
※‘선분배 후성장’과 ‘선성장 후분배’ 중 어느 것이 옳다고 보나. (서울대 2003 정시)
▼ 문제 해결을 위한 Tip
●어느 의견이 더 적절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두 가지 견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논리적으로 견해를 피력해야 할 것이다.
●경제 성장은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을 소수의 사람만 향유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되고 이는 사회 불안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한편 최소한의 성장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분배 정의라는 말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나눌 것이 있어야 분배의 정의도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장과 분배는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두 축이다. 물론 성장과 분배 중 어느 쪽에 좀 더 비중을 둘 것인가는 국가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 예시 답안
거시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성장이냐, 분배냐의 문제는 핵심 과제이다. 경제 정책은 흔히 두 마리 토끼에 비유되기도 한다.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성장과 분배는 상충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동시 달성이 어렵다는 게 보편적 시각이다. 즉 두 가지를 모두 쫓다 보면 결국 둘 다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에 귀결된다.
‘성장 우선론’은 먼저 성장을 하고 난 후에 분배 문제를 고려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이다. 분배를 일찍부터 강조하면, 사회 구성원의 성취동기가 떨어져서 결과적으로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성장 우선론에서는 성장이 계속되면 소득이 고소득 계층에서부터 저소득 계층까지 확산돼서 분배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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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 우선론’에서는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오랜 기간 유지되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고른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경제성장을 해도 분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근로 의욕을 떨어뜨려서 경제적 효율성이 낮아진다고 믿는다. 분배 우선론에서는 ‘일단 성장이 되면 자연스럽게 분배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성장 우선론은 대책 없는 낙관론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두 주장에는 나름의 논리적 타당성이 있지만 한계도 있다. 성장 우선론의 경우 ‘과연 어느 시점부터 자연스러운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분배 우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부자는 더 부자가 되려 한다. 어느 정도 부자가 됐다고 해서 이익을 내놓지는 않는 것이 인간의 욕구이다.
이를 무시한 채 성장 우선 정책을 펴게 되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 심화되고, 그것은 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분배 우선 정책을 펼 경우에 초래될 경제 효율성 하락도 무시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 국가는 처음부터 분배 중심의 경제 정책을 폈지만 결국 낮은 경제 성장률을 극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