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대 곁에 야구방망이 놓고 잔다
- 중학 입시 탈락 재수, 고졸로 신문사 수석 합격
- 고문과 공해 취재, 르포, 탐사보도에 관심
- 정형근과의 만남으로 反北으로 돌아서
- 한때 북한도 조갑제 기사 통해 정보 얻었다
- “그는 氣가 센 남자” 스스로를 긴장시켜 주변을 장악한다
- 反北과 親박정희라는 확실한 타깃 설정이 성공 비결
- 60, 70대를 업고 ‘명예혁명’을 꿈꾸는 남자
- ‘사실’보다 ‘이념’에 투철한 기자… 보수 진영에서도 부담
헌법 제66조 2항에는 분명히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라고 규정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김대중 노무현씨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김대중씨가 ‘북한 경비정이 NLL을 넘어와도 그들이 먼저 쏘기 전에는 절대 쏘지 말라’고 했기에, 2002년 6월29일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에 경고방송을 하던 우리의 참수리 고속정이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선제사격을 받아 격침되었습니다. 노무현씨는 북한과 NLL 문제를 논의하자고 했습니다.
물론 NLL은 정전(停戰)협정에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NLL을 양보하거나 NLL을 놓고 북한과 협상한다면, 우리는 독도 영유권도 일본에 양보하거나 협상해야 할 것입니다.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에는 독도 영유권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직에 있는 자가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일본과 협상하겠다고 하면 과연 우리 국민이 가만히 있겠습니까?(‘옳소’ 하는 함성과 박수)
북한이 핵을 개발해온 것은 누구를 위협하기 위해서입니까. 북한 미사일이 미국까지 날아갑니까. 김영남씨 사례에서 드러났듯 그들이 납치해간 사람이 어느 나라 국민입니까. 이렇듯 북한은 우리 국민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는데, 대통령직에 있는 자가 헌법 규정을 외면하고 국적(國賊)인 김정일에게 이로운 짓을 허용하고 있으니, 이것이 반역(反逆)이고 반국가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또다시 함성과 박수).
우리는 헌법의 힘, 법률의 힘으로 이들을 단죄해야 합니다. 이들이 여적죄를 저지른 혐의가 있는지에 대해 법률적 심판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헌법을 지켜내야 합니다. 좌파들은 바로 이것이 두려워 1998년 이후 헌법을 무력화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또다시 박수가 쏟아짐).”
7월1일 조갑제(趙甲濟·61) 전 월간조선사 대표의 연설엔 높낮이가 없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인지라 듣다보면 졸음이 쏟아지기 십상일 것 같은데, 조목조목 따지는 화법에 금방 말뜻을 알아들어선지 조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월 한 차례씩 조선일보 광화문빌딩 9층 강당에서 ‘조갑제의 현대사 강좌’를 펼치고 있다. 1만원을 내야 들을 수 있는 유료 강의인데도 입추의 여지 없이 방청객이 꽉꽉 들어찬다.
자극적 문구 가득
강의가 끝난 후 좌석을 세어보았다. 13개의 의자를 놓은 줄이 20개이니 260석이다. 그런데도 자리가 모자라 일부 방청객은 서서 듣거나 돌아가야 했다. 좌석이 워낙 빨리 차는 바람에 강연은 예정 시각인 오후 2시에 정확히 시작한다. 1만원을 낸 방청객들은 조씨가 월간조선사 퇴직 후 세운 ‘조갑제닷컴’ 출판사에서 낸 책을 선물로 받는다. 최고 인기 책자는 그가 직접 쓴 ‘김대중의 정체’.
60, 70대 방청객으로 꽉찬 조갑제의 현대사 강좌. 작은 사진은 그가 쓴 ‘김대중의 정체’라는 책.
지난 3월 초쇄를 찍은 이 책은 두 달 만에 6쇄를 인쇄하며 도합 2만부가 발매됐다고 한다. 서울 지하철역 판매대에서도 팔리고 있으니 상당히 인기가 좋은 편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측의 반응. 김 전 대통령측은 조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고소하거나 이 책의 발매를 중지하라는 가처분신청을 낼 것도 같은데 전혀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김대중과의 불화
조씨는 햇볕정책을 추진한 김대중 정부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는 기사뿐만 아니라 대중연설을 통해서도 김대중 정부에 맹공을 퍼부었는데, 김대중 정부 시절의 한 사정기관이 비밀리에 그의 금융계좌를 조사했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은 사정기관에 특정인의 금융정보를 제공한 금융기관은 그 사실을 10일 이내에 특정인에게 통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씨의 부인 임귀옥(任貴玉·60)씨는 “1998년인가 거래하던 금융기관으로부터 남편 계좌 정보를 사정기관에 제공했다는 통지서가 날아왔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 말년인 2003년과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4년은 그와 정권과의 불화가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2004년 일부 단체가 그와 김용서 전 이화여대 교수를 내란선동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으나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내란을 선동할 범의(犯意)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작금의 그의 발언 수위를 보노라면 그 같은 대립이 다시 일어날 것 같다. 현직 대통령을 향해 여적죄 혐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여간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위험 발언을 하는 그는 방어수단을 갖고 있는가. 현역 기자 시절 그는 세 번 해직되고 수사기관의 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임씨는 1991년 7월27일자 ‘조선일보’ 사보 ‘가족석’에 위트를 섞어 이러한 사실을 공개한 적이 있다.
‘남편이 가장으로서 가장 잘 하는 것은 문단속과 야구방망이를 놓고 자는 것이다. 방망이가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지만 나는 영 불안하다. 남편의 잠꼬대는 좀 난폭하기 때문이다. 주로 ××자로 표기해야 할 단어가 마구 튀어나오는가 하면 발길질이 예사다. “도둑놈 뒤통수에 떨어져야 할 방망이가 혹시 내 머리에…” 이런 걱정 때문에 밤을 설칠 때도 있다.’
7월5일 임씨를 취재하기 위해 자택을 방문했을 때 특별히 안방 침대를 보여줄 것을 부탁했다. 시트를 걷자 침대와 벽 사이에 알루미늄 야구배트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가리키며 “조 대표는 지금도 방망이가 있어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죠? 연세가 있는데 위급 상황에서 이 방망이를 휘두를 수나 있을까요”라고 묻자, 임씨는 웃으면서 “그러게요. 꺼내든 적이 없어서 나도 있는지 몰랐네요”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그는 관보에 ‘마산만에서 어패류 채취를 금지한다’는 수산청 고시가 실린 것을 보고, 오염 때문에 이러한 조치를 내렸을 것으로 판단했다. 마감 시간이 임박했기에 더 이상의 확인을 포기하고 ‘바다 오염으로 마산만에서의 어패류 채취가 금지됐다’는 기사를 송고했다. 보도가 나가자 깜짝 놀란 수산청이 거꾸로 그 보도가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조갑제씨는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흥미있는 것을 들으면 바로 메모한다. 조씨의 메모수첩.
1979년은 뒤숭숭한 해였다. 10월 중순 마산과 부산에서 유신을 종식하라는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부마항쟁), 박정희 정부가 이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10월20일). 그리고 1주일이 채 안 된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절명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12월12일에는 10·26사태 수사를 담당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합동수사본부장)이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함으로써 신군부의 등장을 예고했다.
해가 바뀐 1980년 4월21일, 강원도 사북에서 광부들이 대규모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사북사태). 5월이 되자 서울의 각 대학에서는 10·26 직후 발령된 비상계엄을 철폐하라고 외치는 ‘서울의 봄’ 시위가 일어났다. 대규모 시위대는 서울역에 집결해 광화문으로 진출을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경이 버스에 치여 사망하는 등 양상이 매우 복잡해졌다.
정부는 5월17일 비상계엄을 확대해 시위를 누르려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광주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맞붙으면서 초대형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조갑제는 혼자 광주로 들어갔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조씨는 “회사에는 병가(病暇)를 내고 광주에 들어갔다”고만 말한다. 친구 정순태씨는 이 일에 대해 “조갑제는 아프지도 않은데 병가를 냈다. 그리고 혼자 광주로 들어갔다”고 좀더 상세히 설명했다.
당시 광주에서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사람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씨는 지금도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그는 “비상계엄이 확대되었고, 경상도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광주에 들어갔다. 그러나 광주에서 경상도 사람이라고 해서 봉변을 당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에서는 최맹호(崔孟浩) 기자 등이, 조선일보에서는 조남준(趙南俊) 기자 등이 광주로 내려가 현지 주재 기자와 함께 취재를 했다. 그는 광주에서 우연히 본사 취재반과 만나 같이 취재를 했다. 그리고 부산으로 가는 시외버스 파우치 편에 기사를 본사로 송고했다.
병가를 낸 조 기자가 그냥 광주로 갔다 왔으면 모를까 기사를 보냈으니, 사회부장(현재 부산 모대학 교수)의 처지가 매우 곤란해졌다. ‘광주 무단 취재’가 동티가 돼 그는 의원해임 형식으로 또다시 해직되었다.
세상은 흉흉해져 갔다. 신군부는 그해 8월 전국 언론사에 문제 기자를 쫓아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순태씨도 해직기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는 “그때 해직대상자 방이 붙었는데 그 방에 이미 해직된 조갑제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회사는 이미 해직된 조갑제를 확인사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제신문도 오래가지 못했다. 전두환(全斗煥)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도(道)1사(社)’ 원칙을 만들어 난립한 지방지를 정리했다. 1980년 11월25일 국제신문은 지령 10992호를 끝으로 그보다 부수가 적은 ‘부산일보’에 통합되었다. 국제신문은 전두환 정권이 끝난 다음인 1989년 2월1일 복간했으나 과거의 영광은 되찾지 못하고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위연은 제갈공명 사후(死後) 그를 배신했다가 마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제갈공명은 위연의 목덜미에 거꾸로 솟은 뼈를 보고 반골(反骨)임을 짐작하고 미리 마대를 그의 심복으로 심어 놓았다고 한다.
반골은 원래 모반을 일으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조갑제는 가끔 ‘기자는 반골이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도 뒤통수가 좀 튀어나왔지”라고 말했다. 그의 반골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제3부 잡지 르네상스 시대의 주역
조갑제는 국제신문에서 해직된 것을 억울해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그 이유를 “그후로 내 인생을 망쳤으면 몰라도 오히려 잘됐는데 왜 원망하는가. 사실 그때 나는 부산이 좁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서울로 올라가서 큰물에서 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지면이 넓은 월간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 진학을 앞둔 10대 후반에도 생각해보지 않던 서울행을 그는 36세 때 단행했다. 월간중앙은 1980년 6월 정부 명령으로 폐간됐기 때문에 1981년의 월간지다운 월간지는 신동아뿐이었다. 그 전해 창간한 월간조선은 아직 미약한 존재였다. 그는 신동아 1981년 1월호와 5월호에 ‘르포 심장 기형 어린이의 삶과 죽음’ ‘르포 신체장애자의 실태’란 기사를 투고했다.
이러한 때 박정수씨가 새로운 개념의 월간지 ‘마당’의 창간을 준비했다. 그는 월간중앙을 나온 허술씨를 편집장에 임명했다.
당시의 월간지는 사진을 거의 쓰지 않고 교수와 원로 언론인의 글만 주로 게재했으므로 준(準) 논문집에 가까웠다. 이러한 월간지 제작은 일본 잡지를 모델로 한 것인데 박정수-허술씨는 이런 편집 관행을 깨뜨리려고 했다. 즉 월간지의 상징이던 세로쓰기를 하지 않고 가로쓰기를 하고 한글을 많이 쓰는 사실상의 한글 전용 잡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미국 잡지처럼 시각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원칙을 세워 디자인과 사진파트를 강화했다. 표지에도 그림이 아닌 사진을 싣고 기사 속에도 큰 사진을 넣어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허술씨는 전문적인 필자를 확보하기 위해 조갑제씨 등 해직기자 출신을 채용했다.
아트디렉터로 안상수씨(현재 홍익대 미대 교수)를 임명해 미국식 잡지처럼 편집하도록 했다. 사진기자로는 윤평구(현 서울경제 사진부장)·정정현씨 등을 채용했다. 또 신입사원으로 김동현씨를 뽑았는데 김씨는 지금까지 조갑제와 함께 함으로써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진용을 갖춘 ‘마당’은 1981년 9월 소설가 박경리씨 손을 찍은 사진을 표지로 한 창간호를 내놓았다.
‘마당’은 발간 즉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조갑제는 여전히 르포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중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부산 김근하(金根夏)군 유괴 살인 사건의 내막-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는 기사였다.
1967년 부산에서 김근하라는 소년이 유괴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수사에 나선 경찰과 검찰은 해병대 출신의 건장한 청년 김기출씨를 범인으로 체포해 살인 유괴 혐의로 기소했다. 그런데 법정에 선 김씨는 범행을 부인하고 변호사의 노력으로 고문받은 사실이 밝혀져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검사는 법원 판결이 있은 후 “재판 결과가 어떻든 범인은 피고가 틀림없다”고 주장해 또 다른 파문을 일으켰다. 석방된 김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곧 사망했다.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므로 1982년은 김군 살해범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해였다. 이 사건의 진원지가 부산인 만큼 조갑제는 이 사건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김군 살해범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시기를 택해 이 기사를 작성했다. 그는 “공명심에 가득 찬 검사와 경찰이 어떻게 고문을 해 사건을 조작했는지가 내 관심사였다. 그 고문으로 인해 전과(前科)도 없는 건실한 한 젊은이의 인생이 어떻게 망쳐졌는지를 추적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검찰에서는 고문에 의한 무리한 수사의 사례로 종종 이 사건을 거론한다. 연극인 김동훈(작고)씨는 이 기사를 토대로 연극을 만들어보자며 ‘신화 1900’이라는 제목의 연극 시나리오를 써 공연에 들어갔는데, 이 연극이 그해 상을 휩쓸었다.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MBC 드라마 ‘수사반장’의 작가 윤대성씨도 이 기사를 토대로 드라마용 시나리오를 썼다.
조갑제씨는 허술씨에 이어 ‘마당’의 2대 편집장이 되었다가 1983년 10월 월간조선으로 옮겨간 허술씨를 따라 월간조선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씨는 MBC 해직기자 출신인 오효진(吳?鎭·63·전 충북 청원군수)씨도 월간조선으로 불러들였다. 조갑제 후임의 ‘마당’ 편집장은 서울에 올라와 해운 관계 일을 하고 있던 정순태씨가 맡았다.
이때 부산일보에 근무하던 부인 임귀옥씨가 ‘경향신문’으로 옮겨옴으로써 그는 비로소 가족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장남이기 때문에 부산에서도 양친을 모시고 생활했는데 그의 부모도 함께 올라왔다.
그는 “조선일보에 들어온 후 취재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조선일보 입사가 나로서는 가장 소중한 날개를 단 격이었다. 지방지와 자유기고가로 활동할 때는 취재원에게 나에 대해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동아에만 있던 기자들은 누구를 만나자고 해도 무시당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자산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월간조선 기자가 된 후 그는 르포 취재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생소한 영역이던 탐사보도 쪽으로 비중을 옮겼다. 탐사(探査)보도란 영어로 investigative report로, 수사기관이 수사를 하듯이 기자가 하나하나 진실을 추적해가는 것이다. 탐사보도를 하면 진실을 아는 사람은 기자 한 사람뿐이므로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이를 기사화한다. 따라서 기존에 알려진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뒤집기 기사’를 써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1년 12월 신동아가 해낸 ‘수지킴 사건 진실’ 보도다.
3공 비화 추적
조갑제·오효진의 영입으로 1980년 4월에 창간된 월간조선은 신동아를 추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신문은 1979년과 1980년에 벌어진 엄청난 사건들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은 박정희가 통치했던 3공화국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과 비화(秘話)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5·16 때 총을 들고 일어났다가 10·26 때 총을 맞고 쓰러진 박정희만큼 흥미진진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두 월간지는 신문이 쓰지 못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10·26사태 때 피고인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를 취재해 10·26사태를 재구성하는가 하면, 부마항쟁의 원인과 경과를 상세히 추적한 보도를 내놓음으로써 부마항쟁과 김재규 그리고 10·26사태 간의 관계를 설명했다. 월간지 기자들이 보도자료가 없는 공간에서 발로 뛰어가며 진실을 추적하는 탐사보도가 시작된 것이다. 1980년대라고 하는 ‘잡지 르네상스’가 열리는 전주곡이 울린 것이다.
잡지 르네상스는 해직기자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해직을 당해봤기에 탐사보도라는 위험한 취재에 도전할 자세가 돼 있었다. 이 시기 신동아에서 현대사를 추적한 대표적인 기자가 강성재(姜聲才·작고) 이경재(李敬在), 윤재걸(尹在杰), 김대곤(金大坤)씨였다. 이중 김씨를 제외한 세 사람이 해직기자 출신이다. 월간조선에서는 해직기자 출신인 조갑제와 오효진 기자가 주 공격수를 맡았다.
3공화국 비화를 추적한 1984년 후반부터 두 잡지의 판매율은 상승곡선을 그리다 1987년 정점에 올랐다. 이 시기 두 잡지를 이끌던 부장이 서울대 사학과 동기동창인 김종심(金種心·신동아), 유정현(劉正顯·월간조선)씨였는데, 두 사람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3공 비사를 추적하는 탐사보도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1987년 10월 두 부장은 이종각(李鍾珏)과 오효진 기자를 내세워 이후락(李厚洛) 전 중앙정보부장 인터뷰를 성사시켜 40만부 발매라는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다. 신동아는 이씨를 먼저 인터뷰했고 기사 양도 훨씬 많았으므로 이 보도로 관훈언론상을 수상했다.
3공 비화 추적과 관련해 조갑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하기 전,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을 나온 원산 출신의 이모 여인과 동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이 여인은 박정희와 헤어진 후 푸줏간을 하던 사람과 결혼해 살다가 작고했다. 이 여인과 박정희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이 육 여사와 결혼하기 전 고향(경북 선산)에서 부모가 맺어준 여인과 결혼해 딸을 낳고 이혼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또 다른 여인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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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박정희에서 親박정희로
이 정보는 박정희와 육영수를 중매한 예비역 장군 출신 인사가 제공한 것이었다. 기자는 지난해 우연히 이 인사를 만나, ‘박정희와 이 여인이 동거하다 헤어진 이유와 그 사실을 조갑제에게 알려준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예비역 장군은 박정희 시절 투옥된 경력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박정희를 근대화를 이룩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는 “조갑제가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면서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싶다고 해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두 번 해직됐던 조갑제는 3공 비화를 취재하면서 반(反) 박정희에서 친(親) 박정희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조씨는 이러한 변신에 대해 “박정희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수성을 느끼면서 그의 권력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로 간략히 설명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정순태씨 설명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그는 조갑제에 이어 월간지 마당 편집장을 하다 정경문화를 거쳐 월간중앙 부장을 하며 현대사를 추적한 기자다.
“기자가 된 직후인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를 해보곤 유신 내내 단 한 번도 대통령선거를 해보지 못했다. 유신이 선포됐던 1970년대의 박정희는 너무 강했기에 젊은 우리들은 심정적으로도 그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해직까지 됐으니 그를 좋아할 수 없었다. 조갑제도 박 정권에 대해서는 매우 강하게 저항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3공 비화를 추적하면서 박정희는 일본의 일류교육, 미국의 장교교육을 받은 실용적인 리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갑제는 ‘마당’에 있을 때 이미 박정희의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때 우리는 독자가 박정희 시대의 비화를 밝히는 것은 좋아하지만, ‘박정희는 여자를 좋아했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면 싫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볼펜을 들고 있는 ‘먹물’보다 시장에 있는 국민이 진실을 먼저 본 것이다. 하루 두 끼를 먹던 국민은 박정희 덕분에 세 끼를 먹게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은 이러한 역사 발전은 박정희였기에 할 수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조갑제는 후진국의 리더로서 박정희만한 사람이 없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박정희의 대변자가 돼갔다.”
1985년 양대 월간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보도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보도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다음인 1988년, 국회에서 광주특위와 5공특위가 열리게 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두 특위가 열렸을 때 의원들은 두 잡지의 기사를 인용해가며 증인들을 추궁했다.
광주서 불매운동 당해
흔히 수치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을 가리켜 ‘머리가 좋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조갑제는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다. 신문사 조사부는 기사를 주제별로 분류해놓는다. 조씨의 부인으로 경향신문 조사부에 근무하던 임씨는 “기자들이 요구한 자료를 검색하다 찾지 못하면 할 수 없이 그 사건이 발생한 무렵의 신문을 뒤질 수밖에 없다. 이때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건이 언제 있었지?’라고 물으면 그는 ‘몇 년 몇 월에 있었다’고 대답해주었다.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조씨의 말이다.
“1980년 5월 4일간 광주에 체류하면서 내가 확인한 사망자의 시신은 105구였다. 내가 빠져나온 후 다시 계엄군이 들어가 유혈사태를 빚으며 시위를 종식시켰으니 그때 또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광주사태가 끝난 후 정부는 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내가 추정한 수치와 비슷하다. 그러나 1985년 각 월간지가 광주사태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국민은 광주사태 사망자가 2000여 명이라는 항간의 이야기를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사상자가 200여 명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
그로 인해 광주에서는 불매운동이 일어나 월간조선의 판매율이 크게 떨어졌다. 광주사태는 그후 여러 차례 재조사가 반복되고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실종된 사람에 대한 신고를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확인된 사망자 숫자는 군경을 포함 200여 명이고 행방불명자는 50여 명이었다. 행방불명자를 더해도 희생자는 250여 명이 아닌가. 진실을 보도하고 판매에서 지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랑스러운 패배였다.”
1980년대의 잡지 르네상스는 3공 비화와 광주민주화운동 추적 보도만으로 열리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라고 하는 5공의 비화를 추적하고, 아울러 미국이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기에 잡지 르네상스는 열릴 수 있었다. 3공과 5공, 미국에 대한 취재는 자연 군과 정보기관에 관한 취재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12·12 세력은 권력을 잡은 후 자신들의 대표인 전두환(全斗煥)씨를 홍보하기 위해 소설가 천금성씨로 하여금 ‘황강에서 북악까지’란 제목의 전씨 전기를 쓰게 했다. 5공은 인기가 없었으므로 당연히 ‘황강에서 북악까지’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조갑제는 천씨를 주목했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천씨가 5공 세력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취재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2001년 기자는 해양작가이기도 한 천씨와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해외순항 훈련을 동행했는데, 이때 활달한 성격의 천씨는 조갑제씨가 어떻게 5공의 집권 과정을 취재했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다.
“‘황강에서 북악까지’에 못 쓴 이야기가 많지. 전두환씨의 라이벌이 김복동씨인데 두 사람이 어떻게 경쟁했는지를 들었지만, ‘황강에서 북악까지’에 쓸 수 있나? 조갑제씨는 이러한 것을 많이 물어갔다.”
워커 주한 미대사의 분노
1986년 조갑제 기자는 월간조선 2월호에 ‘한국 내 미 CIA의 내막’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리서치 유닛(Research Unit)이라는 이름의 미 CIA 한국거점이 어떻게 구성돼 있고 어떤 활동을 하며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분석하고, 이들의 사무실 전화번호까지 밝혀버린 것.
주한 미대사관이 발칵 뒤집혔다. 이러한 정보는 CIA와 늘 접촉하는 안기부 관계자가 아니면 알기 힘든 것이다. 화가 난 워커 주한 미대사가 장세동(張世東) 당시 안기부장에게 항의 전화를 걸었다. 조갑제는 임의동행 형식으로 남산에 있던 안기부 대공수사국 대공수사단의 지하 조사실로 들어가 취재 경위를 조사받았다. 이때 대공수사단장이 현재 한나라당 의원인 정형근(鄭亨根) 검사였다. 조씨의 설명이다.
“영장 없이 임의동행한 것이라 48시간 조사를 받고 나왔다. 대공수사단의 조사는 부산 중정지부의 조사보다 훨씬 치밀했다. 경찰 수사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수사관들이 계속 교체돼 들어와 묻고 자기들끼리 회의를 해 미진한 부분을 추려 다시 조사를 했다. 그들의 조사 속도는 매우 빨랐고 조사 태도는 열성적이었다.”
▶ 주로 어떤 것을 묻던가.
“취재원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나는 취재원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진술 조서는 많이 썼는데 그들은 그것을 재빨리 분석한 후 내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잠도 자지 않고 조사를 했다. 매우 효율적으로 수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 방어하기가 힘들었겠다.
“그들은 내 기사를 한 문장 한 문장씩 따지면서 캐물었다. ‘긴 기사를 썼기 때문에 고통도 세게 받는구나’란 생각을 했다.”
▶ 수사관들이 안 잤으니 조 대표도 자지 못했겠다.
“작은 침대에서 자게 해주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안기부는 영장이 없음에도 노모(老母)가 혼자 지키고 있던 그의 집으로 수사관들을 보내 관련 자료를 몽땅 가져갔다. 부인 임씨는 “가족으로서는 그때가 가장 긴장됐던 때”라고 기억한다.
▶ 기자도 가끔 쓴 기사와 관련해 국정원과 기무사로부터 항의를 받아봤다. 그런데 그들은 취재원이 어디인지 알고 항의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치밀하게 조사해서 여럿이 덤비는 수사관보다 내가 머리가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는가. 수사관들이 나를 봐줬다고 생각한다. 이미 기사는 나왔고 취재원을 찾아내봤자 또 골치 아픈 일만 생기니 찾아내지 못한 척 넘어가준 것으로 본다.”
한국 내 미 CIA를 완전히 까발린 것은 지금의 조갑제 관점에서 보면 국익을 해치고 북한을 도와준 것이 된다. 그는 치밀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만 눈여겨보면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조사 과정에서 조갑제와 정형근이처음 만났다. 정형근 의원은 조갑제와 동갑인 1945년생으로 경남고를 나왔다. 그러나 대학 학번은 1년 빠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해 일부 인사들은 정형근 단장이 조갑제 기자의 뺨을 때리며 직접 조사했다고 말한다. 뺨을 때렸다는 데 대해 두 사람 모두 부인한다. 정형근 의원이 오래전 기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정형근과 조갑제의 만남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판단이 매우 정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 북한의 실상과 한반도 안보상황을 정확히 알려주면 제대로 쓰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후 조갑제씨에게 한반도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도록 했는데 이것이 그의 사상을 변하게 했다. 앤티(anti) 김일성이 된 것이다.
요즘은 좌파가 기득권을 가진 세상이다. 이러한 때 조갑제 대표라도 있으니 현실을 직시하는 보수 세력이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좌파에 맞서 어떻게 싸웠다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 조갑제 대표는 후대에 평가받을 것이다. 나와 조갑제는 시대를 앞서갔다.”
조씨는 안기부 간부 시절의 정 의원과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가란 질문에 “내 취재원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 그는 나와 비슷한 국가관(觀)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이 최고라는 생각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10·26사태 막전막후에는 군과 정보기관이 얽혀 있다. 광주사태의 앞뒤에도 군과 정보기관 권력이 깊게 개입해 있다. 그는 권력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 내 CIA 거점 취재를 통해 안기부와의 ‘진한 만남’을 가졌는데, 이를 통해 그는 시야를 한국에서 한반도로 넓힌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는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로 돼가던 시절에도 이념에 어긋난 사실이 밝혀지면 이를 보도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사실은 이념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인데 1989년 3월호에 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제하의 기사가 그것이다.
이수근은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을 하던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귀순했다. 그가 남쪽으로 넘어올 때 판문점에 있던 북한군은 그의 월남을 막기 위해 총격을 가했다. 귀순용사 이수근은 한국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여교수와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베트남으로 나갔다 체포된 후 위장간첩으로 몰려 1969년 7월2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이 기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수근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 그는 남쪽에서도 자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홍콩과 베트남을 거쳐 제3국으로 나가려고 했다가 검거된 것이다. 그는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준 대로 연설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이러한 그가 검거되자 김형욱 중정부장은 조잡한 암호문 등을 만들어 그를 위장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지금 북한 위정자에게는 조갑제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북한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갑제를 보았다. 함영준씨는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내고 퇴직했다. 그는 조갑제의 ‘한국내 미 CIA’ 보도가 있은 후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을 취재하러 갔다가 만난 50대의 북한 ‘민주조선’ 기자와 나눈 대화를 잊지 못하고 있다.
“조갑제는 스파이 50명보다 낫다”
“내가 조선일보 기자라고 했더니 ‘민주조선’ 기자가 자꾸 조갑제 선배에 대해 물어왔다. 아는 대로 이것저것 답변해주니 ‘참 대단한 사람이네… 스파이 50명 보다 훨씬 나아’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그가 북한 인권탄압에 대해 많은 것을 보도한 1990년대 중반 다시 판문점 취재를 갔더니 북한 기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조갑제 선배를 비난했다.”
조갑제는 한국 문제에 관심이 많은 주한 일본특파원들의 관심도 끌었다.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와 마이니치 신문의 시모카와 마사하루 기자가 그와 가깝게 지내며 그를 통해 한국 문제에 대한 견해를 넓혔다. ‘마당’ 시절의 조갑제씨를 만나 25년째 그와 교류해온 구로다 특파원의 말이다.
“10·26과 12·12, 광주사태 등은 매우 미묘한 사건인데, 조갑제 기자는 이념적인 오염 없이 탐사보도 형식으로 취재해 썼기에 우리는 그의 기사를 인용해 보도할 수 있었다. 조갑제씨는 일본의 ‘문예춘추(文藝春秋)’를 모델로 한국식 월간지를 만든 사람으로 본다. 그는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항상 진지했다. 항상 자기 테마를 갖고서 집요하게 추적했는데, 이는 국적을 막론하고 스쿠프(scoop, 특종)하는 기자의 공통점이다.”
▶ 일본에서 유명한 잡지 저널리스트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66)인데, 그와 조갑제 기자를 비교하면 어떤가.
“1974년 ‘문예춘추’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연구-그 금맥과 인맥’을 써서 그해 연말 다나카 총리를 낙마시키고 2년 후 록히드 사건을 터져나오게 한 다치바나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다치바나는 작가이고 조갑제는 저널리스트다. 다치바나는 주제를 정하면 광범위한 자료를 섭렵한 후 인터뷰에 들어간다. 그러나 조갑제는 먼저 사람을 만나고 나중에 자료를 취합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저널리스트라고 하는 기자는 직접 기사를 쓴다. 그러나 다치바나는 직접 쓰지는 않는다. 그는 스태프를 거느리고 있어 스태프로 하여금 자료를 구하게 하고 이를 정리해 필요한 사람을 인터뷰한다. 그리고 다시 정리해 출판하는 작가적 에디터(editor)로 활동하고 있다. 조갑제와 비교할 만한 일본의 저널리스트는 ‘산케이’의 시바타 미노루(작고), ‘아사히’의 후나바시, ‘마이니치’의 고모리 기자 등이다.
특종 기자는 회사에 대한 충성보다는 ‘일에 대한 충성’ ‘기사에 대한 충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가족과 친구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시간과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차갑다’ ‘쌀쌀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차갑다는 느낌은 취재 잘하는 저널리스트, 잘 쓰는 작가, 똑똑한 정치인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자기 목표 달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상대가 원하는 것, 재미가 없더라도 상대 이야기를 들어주는 배려 같은 것에는 관심이 적은 경우가 많다.”
1980년에 활약한 잡지 기자 중에서 1990년대까지 활동한 기자는 조갑제와 정순태뿐이다. 왜 조갑제는 살아남았을까. 1970년대 그는 직장인 국제신문과 불화했으나 1980년대 조선일보사(社)에서는 화합할 수 있었다. 박정희를 이해한 그는 신문사 간부들의 세계도 이해한 것이다. 그의 말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 기사로 인해 조선일보의 회장과 사장, 역대 출판국장과 ‘월간조선’ 부장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분들께서는 내게 외부에서 이러한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차단해주셨다. 젊은 기자들은 자신이 쓴 기사로 언론사가 빛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기자의 힘보다는 간부들이 보이지 않게 쳐주는 방벽이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본다. 나는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나는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 해본 기자가 될 수 있었다.”
제4부 보수를 주도한 ‘10년 편집장‘
언론사 생활 만 20년을 코앞에 둔 1991년 초 조씨는 월간조선 부장이 되었다. 정열적으로 활동해온 기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는 “부장이 되고 싶었느냐”는 질문에 “해보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신문기자와 잡지기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듯이 기자와 편집장(또는 부장) 사이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편집장, 특히 월간지 편집장은 기자와 외부필자들이 쓴 다양한 주제의 방대한 원고를 짧은 시간에 읽어내야 한다.
매달 월간지에는 단행본 3권을 만들 수 있는 3500매 정도의 원고가 게재되는데, 편집장은 이를 닷새 사이에 읽어내야 한다. 신문을 만드는 편집국의 부장이 한 달 동안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원고를 닷새 사이에 읽어낸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읽듯이 슬슬 읽어서는 안 된다. 문장을 바로잡아주고 기사가 안고 있는 오류도 잡아내는 정독(精讀)을 해야 한다. 편집장이 발견하지 못한 오류는 잡지가 발매된 후 그대로 소장(訴狀)이 돼 날아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조갑제는 이 일을 비교적 수월하게 해냈다. 빨리 읽으면서도 핵심을 정확히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독특한 독서 습관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 부인 임씨는 조선일보 사보에 ‘남편은 새벽 1, 2시에 책, 신문, 잡지를 한 보따리 싸안고 집에 돌아와 화장실로 들어가버린다. 그리고 함흥차사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한바탕 하려고 전의를 불태우다가도 내가 먼저 지쳐 잠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조씨는 사적(私的) 관계보다 공적(公的) 관계를 중시한다. 친구나 동창·동향(同鄕)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는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고 취재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는 공적인 관계가 사적인 관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1차 북핵 위기가 한창이던 1994년, 월간조선에 근무했던 기자는 유명 역술인과 무속인을 찾아다니며 김일성(金日成) 사주를 본 적이 있다. 김일성이 태어난 연월일(年月日)은 북한인명록에 나와 있는 것을 토대로 음력으로 환산했고, 시(時)는 모르는 상태에서 봐달라고 했는데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역술인과 무속인 모두가 ‘올해(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다’고 예언한 것.
기자는 이를 5월호 월간조선에 기사화하며 리드를 음력 5, 6월에 김일성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무속인 심진송씨 이야기로 잡았다. 그런데 그해 7월10일 김일성이 진짜로 사망했다. 북한은 다음날 ‘위대한 수령’의 사망을 발표했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김일성은 음력으로 5월30일 죽었고, 6월1일 사망 사실이 발표됐다. ‘신이 선택해준 특종’이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심씨는 일약 유명인사가 돼 그를 만나려면 1년 반 전에 예약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일성 사망이 발표된 후 추가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 때 만난 모든 무속인과 역술인에게 사무실로 나와달라고 했다. 그때 신문사에 처음 와봤다는 심씨가 눈빛으로 조 부장을 가리키며 “저 안쪽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부장이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기가 센데, 저 사람한테서 나오는 기가 가장 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잡지는 신문과 내용이 확연히 구분되고 타깃을 분명히 정해야 이목을 끈다. 이를 증명한 것이 1980년대의 잡지 르네상스이다. 1980년대 월간지는 민주화라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매진했기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987년에 나온 6·29선언은 이 목표가 달성됐음을 알리는 ‘반가운 종소리’면서 동시에 목표 상실로 인한 월간지의 퇴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조갑제는 민주화 달성이 초래할 잡지시장의 변화를 누구보다 정확히 예측한 사람이 되었다. 부장이 된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북(對北)’을 주 취재 대상으로 삼았다. 다른 월간지는 그의 선택을 과소평가했다. 대북은 3공 비화나 5공 비화, 광주사태 등에 비해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냉전체제가 사라졌는데 대북을 타깃으로 설정한 조갑제의 선택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는 과거와 다른 방법으로 북한에 접근했다. 북한에서 나온 사람을 직접 취재함으로써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작업을 펼친 것. 그는 북한이라고 하는 넓은 주제 중에서도 인권 탄압을 주 타깃으로 삼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범 수용소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는 기자를 주로 투입했다.
시작은 북한군 최전방 부대에서 소대장을 하다 막 귀순한 김남준씨(작고)를 만나 그가 방문했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기사를 쓰게 했다(1991년 1월호 별책부록). 그러나 김씨의 정치범 수용소 경험은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 기사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듬해 그가 바라던 탈북자가 들어왔다. 강철환씨가 한국에 온 것이다.
민주화를 대체한 타깃, 對北
강씨는 지난해 6월14일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평양의 어항’이란 책을 건넨 탈북자다. 북송 재일교포의 아들인 강씨는 부모와 함께 함남 요덕군에 있는 15호 수용소(일명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1992년 안혁씨와 함께 탈북해 한국에 들어왔다. 정치범 수용소 출신으로는 최초의 탈북자인데, 당시 언론은 그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해 가을 기자는 조 부장의 지시로 두 사람과 장시간 대화를 나눈 후 이를 두 사람의 육성 수기로 정리해 보도했다(1992년 11월호). 그후 조 부장은 김용삼(金容三) 기자로 하여금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게 했는데, 이것이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과 일본 언론이 북한의 심각한 인권 탄압을 거론하게 된 것. 그 결과 두 나라는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게 되었고, 부시 미국 대통령은 조선일보 기자가 된 강씨를 백악관으로 초대했다.
대북 문제에 집중한 김 기자는 1997년 3월호에 북한을 탈출한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노동당 비서 망명 직후, 그가 KLO 부대장 출신의 이연길(李淵吉)씨와 탈북을 위해 주고받은 편지와 논문을 공개함으로써 이목을 끌었다(이 시기 조씨는 잠시 부장 역을 쉬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대북 문제 보도로 인해 월간조선은 가장 보수적인 잡지란 평가를 받았다.
1992년 5월호부터 8월호까지 그는 여러 기자를 동원해 북한이 팠을지도 모르는 장거리 땅굴 관련 사실을 취재하게 해 이를 집중보도했다. 이른바 월간지식 ‘이슈 메이킹(issue making)’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와 육군이 땅굴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자 그는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겸한 설명회를 열었다. ‘포항석유는 가짜다’라는 논문을 만들어 뿌릴 때와 유사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는 “지금도 땅굴이 있다고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단정적인 보도는 하지 않았다. 통일이 돼봐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992년 9월호부터 12월호까지는 이선실 간첩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기자들로 하여금 안기부 대공수사국 수사관들을 직접 만나게 해 취재하도록 했는데, 이는 잡지가 신문을 리드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그러나 땅굴과 이선실 보도는 안보상업주의적인 보도라는 거센 비판을 불러왔다.
1992년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 땅굴과 이선실 간첩 사건 보도는 김영삼 후보에게 유리한 기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친YS’로 평가되던 조 부장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 얼마 후 그를 공격하고 나섰다. 김영삼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직접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란 제목의 기사를 써가며 김영삼 정부를 비판했다(1993년 11월호).
이 기사에 대한 반발은 안팎에서 밀려왔다. 조선일보 노동조합은 그해 10월29일자 ‘조선노보’에서 ‘기자가 어디까지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으며 특히 필자가 한 부서의 책임자인 경우 그 한계는 어떻게 되는가’란 의문을 던지며 이 기사를 비판했다. 월간중앙과 문화일보 경향신문도 이 기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논란을 계기로 조 부장은 ‘친(親) 박정희’와 ‘반(反) 북한’ 세력을 ‘월간조선’ 주 독자층으로 끌어들였다. 잡지 타기팅을 더욱 분명히 한 것이다.
긴장으로 불화를 잠재우다
그는 대식가(大食家)다. 그런데도 살이찌지 않는데 이는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을 긴장시키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리고 그 긴장으로 취재원과 후배기자를 긴장시켜 몰아붙인다. 빠른 시간 내에 그가 엑스(진액)를 뽑아 올리는 비밀은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선(善)하면 약(弱)’한데, 그는 ‘선하면서 강(强)하고 지독(至毒)’했다. 선하면서 지독한 그의 카리스마 때문에 후배기자들은 숨막혀했다. 반김정일, 친박정희 일변도로 잡지를 만드니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화를 그는 성실이라는 긴장으로 장악했다.
잡지가 나온 후 그는 부원들을 끌고 단체로 영화 관람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영화보다는 감독이 그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더 관심이 많은 듯했다. ‘클리프 행어’란 영화를 보았을 때 그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 영화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떠올려봐라. 앉아서 대화하는 게 아니고 걸어가면서 대화한다. 카메라맨도 카메라를 땅에 고정해놓고 찍지 않고, 들고 두 사람을 따라가면서 찍었다. 그로 인해 화면이 계속 흔들리는데 그 흔들림 때문에 별것 아닌 대화를 나누는데도 보는 사람은 긴장하게 된다. 잡지 기사도 그런 식으로 구성해야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살인자의 변호인을 만나서 변호사의 논리로 살인자의 살인 혐의를 입증하라’는 식의 요구도 했다. 이는 살인자가 살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정확히 밝히라는 주문이었다. 살인한 이유를 밝힌 사람은 결국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써야 깊이가 있고 독자도 읽어준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야만 ‘당신은 살인자’라고 써도 소송을 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심층취재의 본질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안기부도 속이는 담대함
그는 폭로기사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폭로기사를 다룰 땐 대담하고 교묘한 트릭을 쓰기도 했다. 5공 시절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지낸 김성익(金聲翊)씨가 대통령의 언행을 기록하는 통치사료 비서관을 맡았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전두환씨는 백담사로 장기 유배를 갔다왔었고 이 시기 노 대통령은 6·29선언은 자신의 업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때 조 부장은 김씨를 만나 6·29선언이 있기 전 전두환-노태우씨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 통치사료를 근거로 6·29선언 아이디어는 전두환씨가 낸 것이라는 기사를 쓰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기사를 준비하면 안기부가 작심하고 막아설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 기사를 다룬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내부 보안부터 강화했다.
김씨가 쓴 기사는 다른 기사와 달리 여러 기자가 돌려 읽으면서 수정케 하지 않았다. 그와 권영기 차장 둘이서만 읽었다(덕분에 이 기사는 교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한때 안기부는 인쇄소에 들어가 인쇄 중인 잡지를 보고 윤전기를 세우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의식한 그는 이 기사가 실린 대지를 별도로 인쇄했다. 이 기사가 들어간 표지와 목차도 따로 만들게 했다.
조씨 강연을 듣는 방청객 가운데는 간혹 젊은 사람과 할머니들도 보였지만 대부분 깊은 주름이 팬 남자 노인네들이었다. 차림새와 행동거지로 봐서 한눈에 중산층 이상임을 짐작케 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보수성향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 소장파가 가장 위험”
강연이 끝나자 몇몇 노인 방청객이 상당한 식견과 역사 인식을 토대로 그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때마침 다음 대선(大選)의 향방과 언론의 임무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념과 가치관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나라당 소장파가 가장 위험한 세력이다. 이들은 좌파 투쟁을 한 사람들에 대해 열등감과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불의에 맞서 싸우지 않는 서울 강남 사람들과 같은 정서도 갖고 있다. 온실에서만 살아왔기에 선거철을 제외하고는 시장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데,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가장 한심한 오렌지족이다. 이러한 자들을 안고 있는 한나라당에 목을 매고 있을 이유가 없다.
좌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교양 있는 국민이다. 본받을 만한 실력과 건전한 삶을 살아온 교양 있는 국민은 좌파의 섣부른 선전 선동에 절대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교양 있는 국민이 해야 할 것이 애국운동이다.
여기 계신 많은 분께서 조선-동아일보가 나라를 지켜달라고 주문하신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는 것은 언론이 해야 할 본연의 임무가 아니다. 한나라당이 해야 할 임무를 피하다 보니 국민께서 대신 언론에 그것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때는 김영삼·김대중씨가 잘 싸웠고 언론은 반보(半步)쯤 뒤에서 이 싸움을 확대해갔는데, 야당과 언론의 그러한 공조가 민주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김대중씨가 집권한 1998년 이후 야당인 한나라당은 조선-동아일보의 뒤에 숨어버렸다. 지금 한나라당이 좌파 정권에 맞서 농성과 단식투쟁을 벌여야 언론은 기사를 써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데, 그들은 온건 노선만 유지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주고 있는 애국운동단체를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보수꼴통이라고 한다.
조선-동아로 대표되는 언론은 최고 상한선을 가고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면 언론이 아니라 정당이 된다. 조선-동아에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두 언론을 보고 정권을 잡으라고 주문하는 것과 같다. 물론 우리 언론이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차선(次善)은 해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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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합본 단계에서 가짜 기사와 가짜 목차, 가짜 표지를 버리고 진짜 기사와 진자 목차, 진짜 표지를 합쳤다. 그리고 이 잡지가 교보문고 등 큰 서점에 배송된 것을 확인한 뒤 몸을 감췄다(1992년 1월호). 다음날 월간조선의 모든 기자는 안기부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들은 “상부에 보고라도 해야 하니 이 기사의 내용과 이 기사가 어떻게 해서 실리게 되었는지라도 알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가 부장에 임명될 때만 해도 “그는 기자지 행정가가 아니다”라며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행정가로서도 역량을 보였다. 그가 부원들을 통솔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기자들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은 일을 함으로써 불만이 있어도 따라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기자들은 편집방향 등에 불만이 있어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월간조선에 이어 조선일보도 반북(反北)으로 돌아서면서 조선일보는 보수의 대명사가 되었다. 북한은 이를 적대시하며 조선일보 간부들을 테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암시를 했다. 1997년부터 1998년 사이 경찰은 몇몇 조선일보 간부의 집을 보호했는데 그중 한 명이 조갑제였다. 10년 전 북한 기자로부터 ‘스파이 50명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던 조갑제는 이제 그들의 적이 된 것이다.
언론계에는 ‘10년 국장’이라는 말이 있다. 편집국장을 10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똑똑한 사람이 많은 언론계에서 ‘10년 국장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10년 편집장’을 해냈다. 그는 2000년 말까지 월간조선 편집장을 하다 분사(分社)해 월간조선사를 만들고 편집장 겸 사장을 하다 2004년 9월 김연광(金演光)씨에게 편집장을 물려주었다.
중간 공백이 있긴 하지만 1991년부터 2004년까지 무려 13년간 잡지 편집장을 한 것은 전무후무할 기록이다. 그가 월간조선 사장에서 물러난 것은 과도한 시국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김정일, 반핵, 반김대중 집회에 앞장서면서 기자보다는 대중 운동가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했으니 회사측도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그는 과격한 발언으로 일부 좌파 단체로부터 내란선동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월간조선사를 퇴직했지만 그는 언론인임을 자임한다. 그는 자신의 사이트를 통해 취재한 것을 보도하는 ‘1인 언론사’의 기자다. 조선일보라는 거대한 울타리 밖으로 나왔음에도 대북, 대(對)좌파 투쟁의 불길을 사그라뜨리지 않고 있다.
김정일을 사탄, 김대중을 한국 현대사의 검은 그림자라고 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여적죄 혐의로 조사하라고 하는 그는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 그는 기자인가 운동가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크기만 한 ‘그림자’를 갖고 다닌다. 몸이 크면 그림자도 크고, 작으면 그림자도 작다. 자기주장이 뚜렷한 만큼 조갑제는 역공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종요로운 시기에 보수적인 관점에서 주목되는 발언을 내놓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비판이 따라 붙는다.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그의 발언에 ‘귀’를 열어 놓고 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비판이 많다는 게 아니라 그가 ‘아이쿠’하며 겁을 먹을 정도로 싸늘한 비판이 드물다는 점이다.
조갑제씨를 논리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쓴 진중권씨(중앙대 독문과 겸임 교수)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강교수는 2005년 7월호 ‘인물과 사상’에서 ‘조갑제씨가 만약 직장을 운동권으로 옮겨서 그 환경 속에서만 살았다면 그는 극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다’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조갑제 비판론
그는 이 글에서 ‘조갑제는 사실 또는 팩트라는 옹고집 방패가 있다’라며 ‘조갑제씨는 사실 물신주의(fetishism of facts)의 위험, 개개인의 보는 눈의 입장에서 세계를 생각하는 시각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다’며 조씨가 몸 담아온 조선일보를 주목했다.
강 교수는 ‘자동차(car)가 운전자를 감싸는 누에고치(cocoon)이 돼 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카쿤(carcoon)이라는 조어가 있듯이, 조갑제씨는 조선일보(chosun)라고 누에고치에 갇힌 초쿤(chocoon)이라고 표현했다. ‘조갑제=조선일보’로 보고 비판을 가한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씨의 해석은 좀 다르다. 지난 4월 그는 정치웹진 다요기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평가를 내렸다.
“조갑제씨는 옛날엔 꽤 큰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스스로 희화화(戱畵化)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는 게 황당하다. ‘쌀가마니를 매단 풍선을 북한에 보내자’는 수준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라’는 말이나 ‘강남 부자들이 친북 좌파들보다 못하다’는 발언을 보면 코미디언 비슷하게 돼 버린 것 같다. 보수진영에서도 그를 부담스러워 하고 조선일보도 이 분하고 거리를 두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이를 전체 보수진영 논리로 채색해, 보수 전체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교수는 ‘조갑제=조선일보’로 봤는데, 진씨는 조선일보와 조씨가 헤어졌다고 정리한 것이다.
일본 언론의 분석도 흥미롭다. 독도 문제를 놓고 한일간에 마찰이 컸던 지난 4월 조씨는 ‘부자 나라 일본과 대립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었다. 조씨는 친일파일까. 지난 2002년 봄 조씨는 일본에서 일어로 발행되는 ‘현대 코리아’ 지면을 통해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의 주역인 니시오 칸지(西尾幹二) 교수와 논전을 벌이며 이렇게 주장했다.
‘일본이 식민통치 기간 중 한국에 근대 기업, 교육, 관료 제도를 가르쳐주었고 도로, 철로, 공장, 댐을 지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제도와 인프라가 광복 후 한국이 국민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감사할 마음이 없다. 식민통치하에서 이뤄진 건설과 교육은 일본의 국익과 식민통치의 편의와 영속(永續)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놓고,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 그 노예에게 음악을 가르쳐주고는 “너에게 정신적, 문화적 영향을 끼친 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 글에 대해 일본 지식인들은 ‘객관적으로 쓰는 저널리스트도 국가 문제에 대해서는 민족주의 성향을 보인다’며 관심을 보였다.
기자인가 운동가인가
그가 쓴 ‘김대중의 정체’ 138쪽에는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될 때 김대중씨가 수첩에 남긴 다음과 같은 메모가 실려 있다.
‘나는 통일조국을 세계대국의 열(列)에 끌어올리며, 나는 세계의 새로운 내일의 방향을 위하여 미래상을 제시하며, 나는 약소국과 불행한 인류의 권리를 위한 선도자가 된다. 나를 위하여 매일 기구(祈求)하는 가족과 나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국민을 잊지 말자.’
1973년 김대중씨는 47세였다. 박정희와 맞붙은 대통령선거에서 패해 도쿄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심신이 대단히 고달팠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10월유신이 펼쳐졌으니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국민이 자신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고 믿고 행동했다. 불굴의 투지를 가진 것이다.
납치 사건 이후 한국에 돌아와 오랜 연금 생활을 하던 그는 1980년 서울의 봄 때 자유를 맛보며 국민과 접촉했으나 광주사태 후 신군부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5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해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선거를 계기로 한국은 민주화를 향한 대장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역정을 거쳐 그는 대통령이 되었으나 상당수 국민을 실망시켰다.
1970, 80년대 김대중씨 뒤에는 청년들의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조갑제 기자와 호흡을 같이하는 것은 주로 60, 70대의 노년층이다. 그는 이들을 ‘교양 있는 애국시민’으로 정의하고 궐기를 촉구한다. 그는 과연 김대중씨와 같은 대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할 것인가.
그러나 김대중과 노무현은 그가 싸울 궁극적인 상대가 아니다. 그는 김정일과의 일전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조갑제 기자는 실수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명분을 놓치지 않았기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는 김정일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잡아놓고 도전하고 있다. 워낙 명분이 좋아 어떤 행동을 해도 웬만한 것은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사탄’ 김정일과 궁극적인 승부를 준비하다보니 사실보다 이념에 투철한 기자가 돼가고 있다.
그가 쓰고 있는 박정희 전기의 제목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이다. 그는 ‘자기 무덤에도 침을 뱉으라’는 자신감으로 이념과 사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해외 여행에 나선 조갑제-임귀옥 부부. 두 사람은 언론사에서 만난 기자 부부이다.
한나라당에 뭔가를 기대하는 분들은 한나라당이 바른 길로 가도록 채찍을 퍼부어야 한다. 한나라당도 교양 있는 국민의 말은 들을 수밖에 없으므로, e메일을 보내고 전화도 걸어야 한다. 지금의 한나라당은 대안(代案)세력이 아니다.”
그는 지난 3월30일 월간조선사를 퇴직하고 현재는 기사만 투고하는 사외 편집위원으로 있다. 이 때문에 자기주장을 펼치는 주무대를 퇴직 후 세운 출판사 ‘조갑제닷컴’과 1999년부터 운영해온 사이트(www.chogabje.com)로 옮겼다. 두 매체를 통해 그는 월간조선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노무현 정부의 정책 등을 비판하고 있다. 그 밖에 그는 상미회여행사의 이사로 활동한다. 비교적 고급 여행객을 모집하는 이 여행사에서 여행을 가면, 그는 역사를 설명하는 가이드로 따라가기도 한다.
남북정상회담 6주년인 지난 6월15일 그는 국민행동본부 인사들과 함께 6·15선언 폐지를 주장하며 서울역에서 서울시청까지 처음으로 시가행진을 벌였다. 6월22일에도 유사한 시가행진을 했다. 출판과 인터넷을 통한 주장에 머물지 않고 거리의 투사로 나선 것. 그는 “월간조선사에 근무할 때는 현역 기자였기 때문에 실외 연설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부담이 없어 거리낌없이 연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 조갑제는 한국 최고의 기자였다. 1980년대 그가 월간조선에 쓴 심층기사는 기자를 비롯한 젊은이의 마음을 움직였었다. 기자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월간조선에 근무하며 부장이던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 배운 기술로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그가 확실한 보수로 돌아서자 젊은 시절 그를 좋아하던 많은 이가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자기 노선을 견지했다. 이때부터는 젊은이가 아니라 노인들이 그의 팬이 되었다. 개발연대의 주역인 60, 70대를 등에 업은 그는 좌파적 성향이 강한 30, 40대의 386세대와 전선(戰線)을 형성했다.
10여 년 전 그에게서 5년간 배우며 지낸 경험을 토대로 조갑제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그의 삶 속에는 한국 잡지사의 일부분이 녹아 있다.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그를 분석하려면 시간 순으로 그의 삶을 추적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필요한 곳엔 문답을 넣어 추가로 의문점을 풀어보았다.
제1부 기독교인 조갑제
조갑제를 대표하는 키워드 중의 하나는 기독교이다. 그의 본관은 함안이다. 그의 선조는 임진왜란 때 난리를 피해 경북 청송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그의 아버지(趙鏞伊·작고)와 어머니(金二祚·작고)는 일본으로 건너가 장사 등을 하며 7년을 살았다.
모두 10남매를 낳았는데 그중 넷이 어려서 죽고 여섯이 살아 성인이 되었다. 조갑제는 1945년 10월24일 도쿄 북쪽에 있는 사이타마(埼玉)현에서 태어났다. 위로 누나 셋을 두고 밑으로 여동생과 남동생을 둔 2남4녀의 장남이다. 그러나 출생신고가 한 해 뒤에 이뤄졌기에 호적상으로는 1946년생이다. 1946년 그는 부모를 따라 청송군 안덕면으로 돌아왔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는 그후 어머니를 따라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부인 임씨는 불교 신자였으나 시어머니의 감화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는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집에서 성장했으므로 일찍부터 교회에 다녔다. 대학생 때까진 주일학교 반사를 할 정도로 열심히 나갔지만 곧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월간조선사 대표를 할 때 다시 교회에 나갔다. 지금은 부인과 함께 종로구 무악동에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의 서울영천교회에 나가고 있다.
“김정일은 사탄이다”
기독교계는 그가 반(反)김정일 강연을 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북한이 미사일을 쏜 7월5일에도 그는 천안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에 내려가 ‘좌파와 기독교의 숙명적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는 기독교에 심취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불교는 신라가 3국통일을 하는 원동력이었고, 기독교는 한국을 근대화로 이끈 힘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과 관용을 가르쳐주었다. 인권과 사람의 생명이 지구보다 무겁다는 것도 가르쳐주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가르침만큼 기자에게 용기를 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김정일을 사랑할 수는 없는가.
“기독교는 모두를 용서하라고 하진 않는다. 기독교에는 용서할 수 없는 사탄이 나오는데, 원수는 용서할 수 있어도 사탄은 용서할 수 없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 하면 김정일은 반역자이고 사탄이므로 절대 용서할 수 없다.”
▶ 김정일은 사탄이라고 치자. 그러나 북한 주민은 우리가 품어 안아야 할 대상이다. 문제는 김정일과 북한 주민들 사이에 있는 세력이다. 인민군 장교와 노동당 간부들은 용서 못할 사탄인가, 용서해야 할 원수인가.
“김정일의 직접명령권, 다시 말해 김정일로부터 바로 명령을 받아 이행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김정일과 같은 사탄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용서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경남중 떨어져 中入 재수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가 살던 마을에 미 공군기가 폭탄을 떨어뜨렸다. 마을에 인민군이 없는데도 잘못 알고 공격을 한 것이다. 담배 말리는 건조장으로 숨어든 그는 화약 연기가 밀려들어오자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산으로 도망쳐 올라간 기억과 오폭(誤爆)으로 죽은 닭을 동네 청년들이 잡아줘서 얻어먹은 기억을 갖고 있다. 이 전쟁에서 그는 아버지와 인민군의 만남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자존심이 강하고 가족에게는 헌신적인 분이셨다. 인민군이 우리 마을에 들어오기 전 아버지는 청년단 단장이었는데, 청년단 단장은 동네 청장년을 부역(賦役)에 동원하는 일을 했다. 아버지는 그 일을 슬기롭게 하셔서 우리 마을 사람 가운데는 공산당에 붙어서 원한 진 사람을 죽이는 것 같은 험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국군이 수복했을 때도 부역(附逆)을 했다고 곤욕을 치른 사람이 없었다.”
1945년생인 그는 제 나이에 맞춰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호적 나이로 따지면 한 살 먼저 입학한 것이다. 국민학교 2학년이던 1953년 그의 아버지는 자녀 교육을 위해 부산으로 이주했다. 덕분에 바로 위 누나부터 4남매는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부산에 오니 사람들이 ‘밉다’ 는 말을 마구 하더라. 고향에서 밉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에 ‘밉다’라는 말을 쓰는 부산 사람들이 아주 싫게 느껴졌다”고 기억했다.
위의 두 누님은 중학교에서 학업을 끝냈지만 셋째누나는 사범학교를 나와 국민학교 교장을 하고 퇴임했다. 그는 수산대를 중퇴했으나 1998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여동생은 부산교대를 졸업해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고, 막내인 남동생(趙聖洛)은 부산대 의대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속편한 내과’를 개업해 운영하고 있다.
그는 부산 수정국민학교에 다니다 4학년 때 인근에 새로 개교한 수성국민학교로 옮겨가 1회로 졸업했다. 그리고 경남중학교 입시에 도전해 1차인 학과시험엔 합격했으나 면접을 하는 2차에서 탈락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떨어뜨린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가 청송까지 가서 내가 실제로는 1945년생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를 갖고 오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보결입학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보결입학생을 받기 위해 나를 일부러 떨어뜨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중입 전기(前期)시험에 떨어지면 대부분 후기시험에 응시했다. 여간해서는 재수를 하지 않았는데 그는 너무 억울하게 떨어진 탓에 후기시험을 보지 않고 재수에 들어갔다. 인근에 있는 좌성국민학교에서 6학년을 더 다닌 것. 그런데 몇 달 후 장티푸스에 걸려 등교를 중단해 이 학교에서는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 부산중학교 시험에 합격하고 동일계 진학에 따라 부산고까지 다니게 되었다.
미·일 프로야구에 푹 빠져
부산중에 들어가니 국민학교 동기생이 2학년이 돼 있어, 한동안 서먹서먹했다고 한다. 일반 독자는 조갑제 하면 혈기 넘치는 인물일 것으로 상상하는데 실제의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필요한 말만 하는 극히 내성적인 사람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술과 담배를 아예 하지 않는다. 그는 술을 무서워한다고 할 정도로 회피한다. 부인 임씨에 따르면 서울로 올라온 1980년대 초 그는 억지로 술을 마시고 귀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위경련을 일으켜 새벽 대여섯시까지 통증을 견디며 뒹굴었다고 한다.
부산중 시절 그는 공부를 가장 잘 했을 때 반에서 4등까지 해봤고 부산고에서는 8등까지 해봤다고 한다. 기자는 대부분 문과 출신인데 그는 이과반으로 진학했다. 그는 기자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 그가 푹 빠졌던 것은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중계방송 듣기였다. 시장에서 구한 단파 라디오로 하루 4~6시간씩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중계를 들었다.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 선수의 타율과 승률을 기록한 표를 만들 정도로 집중했기에 자연 영어와 일어에 귀가 트였다.
그는 “대학교 1학년이 되자 영어와 일어가 귀에 들어왔다. 덕분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타임(TIME)’ 등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일어는 심각하지 않은 토론을 해낼 정도가 되었다”고 말한다.
고3이 되어 진로를 결정해야 했을 때 그는 바다와 세계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국립 해양대 진학을 생각했다. 해양대는 사관학교와 같은 기준으로 신입생을 뽑았다. 나안(裸眼) 시력이 1.0 이상만 응시할 수 있었는데 그의 시력은 0.6이었으므로 원서를 내보지도 못했다.
두 번째로 육사 진학을 고려했으나 나안 시력 1.0에 걸렸다. 그래서 역시 바다를 다룰 것이라는 생각에 부산수산대(현재는 부경대)에 도전해 수석 합격했다(1965년). 그는 배를 탈 수 있는 어로과 진학을 원했으나 그 학과 또한 시력 1.0 이상을 요구했으므로 통조림 등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제조학과에 들어갔다.
그는 화학식이 많이 나오는 학과 공부에 곧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석 입학자인지라 1학년 과대표를 했다. 이 시기 대학가는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한 데 대한 적개심이 강했으므로 대다수 국민은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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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제7회 한국기자상 수상자는 취재부문에 국제신보의 조갑제(오른쪽), 사진부문에 조선일보의 최영호(왼쪽에서 두 번째) 기자 두 사람이었다. 두 수상자는 부인과 함께 시상식에 참가했다.
서울 지역 대학생들은 1964년 3월부터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6월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6·3사태) 회담을 계속해, 이듬해인 1965년 6월22일 일본과 기본조약을 맺었다. 기본조약 체결이 임박하자 수산대 학생회는 과별로 시위에 참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조갑제는 사태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었다.
“나는 박정희가 일으킨 5·16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노래 잘하고 미국에 대해 할말을 다 하는 김종필(金鍾泌)을 좋아했다. 나뿐 아니라 당시의 많은 젊은이가 김종필을 좋아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데모로 가지 않고 토론회를 하자며 동급생들을 불러 모았다. 토론회에서는 시위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수였으므로 나는 알아서 참여하라고 한 후 토론회를 끝냈다.”
수산대 2학년을 마치고 난 1967년 3월1일 그는 병 161기로 공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훈련소 시절 늑막염에 걸려 군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163기와 함께 훈련소를 나오게 되었다.
대전통신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은 그는 경북 영양군 일월산에 있는 레이더 기지에 배치되었다. 조갑제는 키가 176㎝로 당시 사람으로서는 좀 큰 편이지만 체중은 60㎏으로 마른 편이다(그는 지금도 이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일월산 부대에서 초병 근무를 할 때 헌병대 소속의 162기가 그에게 ‘후배’ 노릇을 할 것을 요구하며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이에 그가 못하겠다고 해 싸움이 벌어졌다. 그는 “162기 헌병을 두들겨 팼다”고 말했다. “두들겨 팼다는 게 어느 정도를 뜻하나? 헌병도 한 덩치할 텐데 완전히 KO가 되겠느냐”고 묻자, 그는 “내가 덜 맞았다는 것이지 뭐…” 하고 웃어 넘겼다.
헌병대장이 조사를 나왔다. 그는 “군번으로도 내가 선배인데, 선배가 맞으면 그게 군대냐”라고 반문했다는데, 헌병대장이 이 말을 수용해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후로도 161기 대접을 받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1·21사태로 바뀐 인생
일월산 부대에서는 침투한 적 전투기를 요격하기 위해 발진한 아군 전투기를 관제하는 일을 했다. 관제사는 따로 있었으므로 그는 조수 역할을 맡았다. 그곳에는 미 공군도 함께 근무했으므로 그는 이들을 상대로 실전 영어를 익혔다. 일본 항공자위대와 교신하기도 했다. 그는 항공자위대와는 일본어로 대화하며 일본어를 연습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군 특공대가 청와대를 기습하고(1·21사태), 이틀 후에는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해군 첩보함인 푸에블로함이 북한 해군에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1월에는 중대 규모의 북한군 특공대가 침투한 울진·삼척사태가 터졌다. 1969년 4월에는 미 공군의 첩보기 EC-121이 북한이 쏜 미사일을 맞고 격추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만 3년이던 사병 복무연한이 갑자기 3년4개월로 늘어나 그는 1970년 6월말 제대하게 되었다.
예정대로 2월말 전역했으면 3학년에 복학할 수 있었는데 그 시기를 놓친 것. 그는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 있는 집에 들어가 가정교사를 했다. 당시 부산 최대 일간지는 37만부를 찍던 ‘국제신보’였다(1976년 ‘국제신문’으로 제호 변경). 어느 날 그는 이 신문에서 고졸자 이상을 대상으로 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해 1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3학년으로 복학할 수 있던 1971년 2월 학업을 포기하고 국제신보에 입사했다. 함께 합격한 4명 중 한 명이 금방 퇴사해 3명이 동기가 되었다. 고대 영문과를 나온 안주홍(安柱洪) 씨와 서울대 중문과를 나온 정순태(鄭淳台·61) 씨가 그들이다.
대학교를 중퇴한 친구가 쟁쟁한 대학을 나온 사람을 제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것은 곧 사내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는 입사하는 순간부터 주목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국제신보에 입사함으로써 그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란 고민을 떨쳐버리고 천직(天職)을 얻었다. 중입 재수로 한 해 늦어진 인생을 오히려 1년 앞당기는 결과도 얻었다.
제2부 反骨 지방기자 조갑제
요즘 신문사에서는 수습을 끝낸 기자를 주로 사회부에 배치해 취재 요령을 익히게 한다. 그러나 1970년대 신문사에서는 노련한 고참 기자들이 사회부에서 일했다. 조갑제는 문화부에 배치되었다.
조 기자는 경남고 출신인 동갑내기 정순태 기자와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정씨는 일곱 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조씨는 중입 재수를 했으므로 대학 학번으론 2년 차가 벌어져 있었다(정순태씨는 63학번). 이후 두 사람은 언론계에서 35년을 보내며 긴 우정을 쌓는다.
조갑제는 크렘린
이 시기 그가 만난 또 한 명의 반려자가 조사부 기자이던 임귀옥씨다. 그는 성균관대 도서관학과를 졸업하고 해양대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다 조 기자보다 1년 앞서 국제신보에 들어왔다. 수습 시절 조 기자는 조사부를 돌았는데, 이때 선배인 임 기자와 친해진 것. 둘은 사내 연애 끝에 1972년 4월 결혼했다. 이때 임 기자 집에 함을 지고 갔던 정순태 기자의 이야기이다.
“조갑제는 ‘크렘린’이다. 그가 장가간다고 할 때까지 두 사람이 연애하는 것을 정말 아무도 몰랐다. 임 기자네는 잘사는 집이었다. 혼자 함을 지고 가자 한 상 잘 차려주고 함값도 많이 주었다. 그 돈을 받고 조갑제에게 ‘한잔 하자’고 했더니 ‘난 술 못 하지 않나. 니 혼자 해라’고 해서, 혼자 취하도록 마신 기억이 있다. 그러고도 돈이 남아 다음날 친구들을 불러 또 한잔 마셨다.”
정 기자는 조-임 기자 결혼식 사회를 보았다. 그리고 정 기자가 결혼할 때는 조 기자가 사회를 보았다. 오랫동안 조갑제를 지켜본 정씨는 조갑제가 어떤 인물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35년을 사귀었지만 솔직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해서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야 ‘그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텐데,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그가 취한 모습, 화를 내며 감정을 폭발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소곤소곤 대화하는 것만 즐겼다.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도 자꾸 남에게 묻고, 흥미롭다 싶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메모를 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남이 알고 있는 것을 다이제스트로 뽑아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다.
국제신문 시절 나는 그에게 100번도 넘게 돈을 빌렸는데 그는 ‘돈 없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빌려주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돈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난 후 돈을 갚으면 그는 ‘어, 공돈 생겼네’ 하며 받았다. 여러 차례에 걸쳐 빌린 돈을 순서를 바꿔 갚아도 정확히 기억하는 눈치였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받은 느낌은 반항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와도 충돌하지 않았다. 그는 남에게 자기 약점을 절대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조 기자는 문화재 취재를 담당했는데 1973년 경주에서 천마총 고분이 발굴됐다. 천마총 발굴은 대단한 뉴스였으므로 전국 각지의 언론사에서 문화부 사회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연히 조갑제도 경주로 달려갔다. 정씨의 이야기다.
“그때는 전화로 기사를 불렀는데 조갑제가 불러주는 기사는 일목요연했다. 선배들이 부르는 기사 중에는 문장이 되지 않는 것이 허다했는데 그는 달랐다. 스트레이트, 해설, 낙수, 1면, 문화면으로 딱딱 나눠 불러주는데, 다 적고 나면 노트 한 권 분량이 넘었다. 그가 부르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절로 공부가 되는 재미가 있어 팔이 아프도록 받아쓴 기억이 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기자가 다 모인 가운데서 그는 연속해서 특종을 뽑아냈다.”
어릴 때 장티푸스와 늑막염을 앓았지만 이 때의 조갑제는 강골(强骨)이었다. 그는 이 체력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까지 그는 병원에 간 적이 없어 건강보험조합으로부터 선물을 받기도 했다. 2000년 목 디스크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는데 그때가 처음 병원에 간 것이라고 한다.
조갑제는 운동을 거의 하지 않지만 야구에는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국제신보 시절에는 동료들을 불러모아 야구시합을 즐겼고, 서울에 올라온 다음에는 야구연습장에서 100여 번 이상 배팅을 했다. 그것이 그가 한 운동의 전부이다. 운동을 하지 않는데도 강한 체력을 유지한 것에 대해 그 자신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듬해인 1974년 조갑제는 초대형 특종을 낚아 올렸다. 당시 그는 공해 문제에 관심이 많아 중금속 오염 실태를 취재해 기사를 연재했는데, 이 기사로 입사 4년차인 만 29세에 한국기자상(7회)을 수상한 것. 그는 어떻게 특종을 낚았을까.
“중앙지는 보도할 자료가 넘치지만 지방지는 항상 정보가 부족했다. 나는 이것을 대학 도서관에서 메웠다. 부산대 등 몇몇 도서관을 정기적으로 순례하며 새로 나온 논문이 있는지 조사하는 것이다. 논문 리스트를 살피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1975년 그는 부산대 미대 실기시험 제목이 유출된 것을 보도해 또 한 번 특종을 낚았다. 그는 이 특종은 제보 덕분이라고 했으나 제보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기사 운(運)이 좋았다. 사건이 날 때 사건 현장 가까이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제보자가 많았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 신문기자를 하며 낙종을 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좋은 운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치열하게 노력할 때 운도 따른다. 조갑제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겸손함과 성실함 그리고 진지함에 감탄한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그는 항상 맑은 정신으로 취재원을 상대하는데 이것이 취재원에게 신뢰감을 준다. 제보자 신원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공받은 정보는 반드시 기사화하는 집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자세가 많은 제보자를 불러모았다.
그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은 10월유신 시기와 겹친다. 유신독재가 장기화한 1974년, 서울에서는 동아일보를 필두로 독재에 항거하는 언론자유화운동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부가 광고 게재를 못하게 하는 것으로 탄압하자, 동아일보는 이른바 ‘백지 광고’로 저항했다. 이에 독자들은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줌으로써 언론자유화운동이 본격화했다.
중앙지에서 벌어지는 가열찬 언론자유화투쟁이 국제신보에도 상륙했다. 조갑제는 여기에 적극 동참했다. 그는 기자협회 국제신보 분회의 언론자유실천대책위 간사로 활동하며 자주 반정부 발언을 했다. 반(反)박정희 노선에 참여한 것이다.
1975년 그는 사회부로 옮겨가 경찰과 공해 취재를 담당하게 되었다.
포항 석유 경제성 없다는 논문 작성
문화부 시절인 1972년 그는 울산 앞바다에서 이뤄진 6광구 시추를 취재했는데 이를 계기로 석유개발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1973년 세계적으로 오일쇼크가 일어났으므로 많은 사람이 해저(海低) 광구 탐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석유시추에 대해 공부했다.
6광구는 미국 쉘사(社)가 시추하고 있었다. 그는 쉘사 사무실 쓰레기통에서 전통지(텔레타이프)를 찾아내 정보를 모았다. 그 덕분에 다른 신문보다 빨리, 그리고 자세하게 석유 탐사에 대한 보도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가 사회부에 배치될 무렵 한국 사회의 큰 화두는 포항에서 발견된 석유였다.
그로 인해 많은 국민이 ‘한국도 산유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들떠 있었고 유전과 관련된 주식의 값이 올랐다. 포항 석유에 대해 심층적으로 취재하던 그는 곧 ‘포항석유는 유전(油田)이 아니고 유징(油徵)만 발견된 것으로 전혀 경제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포항 석유 시추를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중정은 박 대통령이 실망할까봐 사실 보고를 하지 않았다. 중정은 각 언론사에 포항 석유 관련기사를 내보내지 말라고 요구해놓고 있었다.
1995년 11월 조갑제씨는 이스라엘 라빈 총리(왼쪽)와 최후의 인터뷰를 했다. 이 인터뷰를 하고 34시간 후 라빈 총리는 암살당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의 서울 특파원인 이나바 가즈아키(稻葉和亮) 기자가 이 논문을 토대로 한국의 포항 석유는 경제성이 없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조갑제는 이나바 특파원과 일면식이 전혀 없다).
곧바로 중정 부산지부에서 그에게 ‘좀 보자’고 했다. 그는 중정 부산지부 정보과에서 논문을 쓰게 된 경위와 자금 마련 등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영장 없이 진행된 조사이므로 그를 구속할 수는 없었다. 중정이 국제신보에 대해 조 기자를 해임하라고 요구하자 회사는 사표를 받는 형식으로 그를 해직했다(1976년 6월).
조갑제는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고 논문을 만들어 돌린 것일까. 그는 당시의 행동에 대해 “석유탐사에 대해서는 내가 최고라는 치기 어린 생각으로 한 행동이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언로가 막히면 다른 길을 찾아서라도 보도하려고 하는 조갑제의 행동은 그후로도 반복된다. 조갑제닷컴을 통해 ‘김대중의 정체’를 펴낸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이에 대해 정순태씨는 “그는 취재한 것이 있으면 쓰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쓰고재비’이다”라고 말했다.
국제상사 기획실 직원
실업자가 됐지만 다행히 부인이 직장에 다니고 있어 밥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해직에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분노하고 좌절했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더욱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취재해놓은 다른 기사를 월간중앙에 투고했다.
당시 월간지는 대학교수나 원로 언론인이 주로 기고하는 ‘무거운 잡지’였다. 월간지 기자들은 기사를 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편집자 업무만 했다. 신문 기자들도 투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는 과감한 투고로 이 벽을 허물었다. 이러한 조갑제를 눈여겨본 이가 월간중앙 기자로 있던 허술(許鉥)씨다. 허씨는 그에게 “노는 동안 프리랜서(자유기고가)를 해보라”고 했는데 그는 프리랜서란 말을 이때 처음 들었다고 한다.
그는 월간중앙에 동족부락(同族部落, 같은 姓을 쓰는 마을이라는 뜻)의 연구, 고래 이야기, 석유를 주제로 한 기사를 투고했다. 그러나 월간지 고료로는 생활을 할 수 없어 당시 세계 최대의 신발공장을 운영하던 국제상사 경력사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국제상사는 기자 출신인 그를 중용해 기획실에 배치했다. 그리고 세계 신발시장에 대한 견문을 넓히라고 미국 연수 기회도 주었다.
1976년 12월3일 중정 부장이 신직수씨에서 김재규씨로 바뀌었다. 그러자 중정 부산지부에서 언론을 담당하던 이모씨가 “신 부장이 떠났으니 조용히 복직해보라”고 권유했다. 이씨의 도움으로 그는 1977년 10월 국제신문으로 돌아왔다. 조갑제를 롤백시키는 데 관여한 이씨는 국정원 공보담당관을 지내고 퇴직했는데, 공보담당관 시절 그는 기자에게 조갑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준 바 있다.
‘돌아온 기자’는 또다시 특종 사냥에 나섰다. 1979년 5월, ‘마산만이 오염돼 어패류 채취가 금지됐다’는, 그 지역에서는 깜짝 놀랄 사실을 터뜨린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어떻게 포착했을까.
정부에서 내는 관보(官報)에는 각 부처가 보도자료에 공개한 것뿐만 아니라 공개하지 않은 것도 실린다. 정책으로 확정된 것과 정책이 될 것도 들어 있는지라, 이를 열심히 읽으면 보도자료가 없어도 정부 정책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조갑제는 보도자료 부족이라는 지방지 기자의 한계를 관보를 읽으면서 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