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중국 횡행천하(橫行天下)한 ‘한류천후(韓流天候)’ 장나라

“만년 명랑소녀? 다음엔 사이코가 뭔지 보여드리죠”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06-11-07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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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횡행천하(橫行天下)한 ‘한류천후(韓流天候)’ 장나라
    중국 횡행천하(橫行天下)한 ‘한류천후(韓流天候)’ 장나라


    거세게 불던 한류(韓流) 바람이 주춤해졌다. 중국과 일본에선 오히려 ‘반(反)한류’ ‘혐(嫌)한류’가 일고 있다. 그 와중에도 중국에서 탄탄하게 뿌리내린 연예인이 있다. 가수 겸 연기자 장나라(25)다.

    2002년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귀엽고 명랑한 이미지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연기와 노래를 넘나들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아오다 2004년 9월, 중국으로 진출했다. 그 후 2년 동안 한국에서 드라마 한 편에 출연한 것말고는 중국 활동에만 전념했다.

    장나라는 지난해 중국의 양대 음악제전인 ‘아시아태평양 뮤직어워드’와 ‘중국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아시아 최고여자가수상과 최고인기가수상을 석권했다. 또한 중국 드라마 ‘댜오만 공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중국 언론에선 그를 여성천황이란 뜻의 ‘천후(天侯)’로 부른다. ‘천후’는 일본의 ‘사마(樣)’처럼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붙이는 칭호다.

    최근 장나라의 아버지 주호성씨가 딸의 중국 활동과 중국 한류의 실태를 담은 책 ‘장나라의 횡행천하’를 펴냈다. ‘횡행천하’는 게가 비록 비틀거리며 위태롭게 걷지만 결국 천하를 간다는 뜻이다. 장나라가 위장병, 다래끼, 탈진, 비행기 공포증에 시달리면서도 결국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한류 스타로 성공한 것을 비유한 제목이다.



    한국에 잠시 들른 장나라를 모로코 스타일의 인테리어가 몽환적인 청담동 카페 ‘모우’에서 만났다. 귀여운 모습은 여전했지만 2년 사이에 훌쩍 성숙한 느낌이었다.

    “중국에서 드라마 ‘굿모닝 상하이’ 촬영을 막 끝내고 이틀 전에 귀국했어요. 내일 또 홍콩으로 가 드라마 OST 작업과 뮤직비디오 촬영을 해야 해요. 그러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가 새 앨범을 녹음할 예정이고요.”

    귀국해 사흘간의 짧은 체류 일정을 작곡자, 프로듀서 등 음반관계자를 만나는 데 다 보냈다고 한다.

    “한국에 와도 중국에 가져갈 짐 챙기다보면 어느새 떠날 시간이 돼요. 친구나 친한 연예인들 만나기도 힘들어요. 겨우 2, 3일 어렵사리 짬을 내서 오니까요.”

    그만큼 중국 일정이 빡빡하다는 뜻이다. 그는 이르면 11월경 5집 앨범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2004년 봄에 4집 앨범이 나왔으니 2년 6개월 만이다.

    중국 횡행천하(橫行天下)한 ‘한류천후(韓流天候)’ 장나라
    중국 횡행천하(橫行天下)한 ‘한류천후(韓流天候)’ 장나라


    따뜻한 한류 이미지 부각

    장나라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2004년 9월 중국 드라마 ‘은색연화’에 출연하면서부터지만 중국 활동을 염두에 둔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라고 한다.

    “데뷔하기 전부터 일본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그 무렵엔 일본 진출이 유행이었거든요. 그런데 왠지 끌리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데뷔 후 대만과 중국에 팬클럽이 생겨 몇 번 공연을 갔는데 그곳 분위기가 저랑 맞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중국에서 활동할 준비를 한 거죠.”

    대개 한류 스타들은 국내에서 주로 활동하고, 중국이나 일본에선 일회성 이벤트를 갖는다. 장나라 역시 처음부터 중국에 ‘올인’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다보니까 점점 재미있어지고 욕심도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제대로 준비했다. 무엇보다 ‘외국 뜨내기’가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하는 연예인’임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드라마 ‘은색연화’ 출연료와 관련 공연 수익금 전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해 ‘따뜻한 한류’ 이미지를 심는 한편, 중국 1집 앨범 ‘이장(一張)’ 발매 때는 중국 신인가수들과 함께 무대 인사를 하며 ‘특별손님’이 아니라는 인상을 줬다. 또한 여느 중국 가수들처럼 광활한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30개가 넘는 지역에서 콘서트 투어를 했다.

    “우리는 방송국이 서울에 몰려 있는데다 전국방송이라 방송활동만 열심히 해도 되잖아요. 중국은 안 그래요. 베이징과 상하이 방송에 나왔다고 전국에서 다 아는 게 아니에요. 저도 첫 음반을 내면서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전국 기자들을 다 모아놓고 발표했지만, 한 달 뒤 광둥성 광저우에 갔더니 제 팬들조차 음반 나온 걸 모르고 있었어요. 그 정도로 넓고, 각 지역이 독립적이에요. 다 돌아다니며 방송에 나가고, 공연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 결과 2집 앨범 ‘얼장(二張)’이 나왔을 때는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사인회장에서는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바람에 산소용접기로 창살을 절단하고 빠져나와야 했다.

    ▼ 이젠 정상에 섰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중국에 연예인이 얼마나 많은데요. 최고가 되려면 아직 멀었어요. 적어도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하겠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한창 사랑을 받을 때도 쟁쟁한 선배들에 비하면 저는 올챙이였을 뿐이에요.”

    ▼ 어느 정도가 되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나요.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 때 중국 CCTV1에서 ‘춘절완회(春節晩會)’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데, 정말 ‘별 중의 별’들만 출연해요. 대만, 말레이시아 같은 중화권 국가의 톱스타도 출연하기 힘들어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할 만큼 대단한 프로그램이거든요. 중국인은 춘절이면 무조건 이걸 봐야 해요. 춘절 기간 내내 폭죽 터뜨리고 놀다가도 이 프로그램 하는 시간이 되면 모두 집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봐요. 여기 출연할 정도는 돼야죠.”

    중국 횡행천하(橫行天下)한 ‘한류천후(韓流天候)’ 장나라

    장나라는 드라마 ‘댜오만 공주’에서 엽기적이지만 당당한 댜오만 공주역을 맡아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화장실’에서 벌어진 만두 파티

    ▼ 중국 진출 초기에는 외롭고 힘들었겠네요.

    “쉬는 날이면 친구도 없고 갈 데도 없으니까 그간 한국에서 제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봤어요. 제가 보기에도 민망한 게 많더라고요. 할 때는 몰랐는데 안일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충 즐거워하고, 대충 얘기하고, 대충 웃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프다는 이유로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한걸음 밖에서 보니까 확연히 보여요. 민망하고, 내가 어리긴 어렸구나 생각했어요.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중국 연예인들과는 친해졌습니까.

    “‘댜오만 공주’ 마지막회 촬영을 끝내고 펑펑 울었어요. 함께 했던 연기자, 스태프들이랑 연락도 하고, 가까운 데 있으면 불러서 만나기도 해요. 친해질 수밖에 없는 게, 한국에선 촬영이 끝나면 각자 흩어지잖아요? 여기는 촬영장이 너무 멀어 출퇴근이 불가능해요. 출연진과 스태프가 수십일 동안 24시간 함께 모여 살다보니 대화를 많이 하게 돼요. 중국에선 분장실을 ‘화장실’이라고 하는데(웃음), 화장실에 다같이 모여 만두도 먹고, 촬영 끝난 후엔 맥주도 마시고 그래요. 또한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지 모두 평등해요. 감독님부터 막내 스태프까지 다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요.”

    ▼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을 꼽는다면.

    “힘들면서도 재미있었던 것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일이었죠. 중국은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움직여야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비행기 공포증이 있어 상하이에서 베이징까지 기차를 탄 적이 있는데, 초고속 급행열차인데도 12시간 걸리더라고요. 기진맥진했죠. 이동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스트레스지만,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각 지방의 특이한 음식을 먹는 게 즐거웠어요.”

    속상한 일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 가령 상하이에서 ‘한중 문화교류행사’가 있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갔더니 사실상 상점 홍보행사였다는 것.

    “도저히 참여할 수 없어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왔는데, 한 지역 언론에서 주최측 보도자료에만 근거해 ‘장나라가 25만위안을 요구해 기자회견을 못 했다’는 식으로 보도했어요. 더 기가 막힌 건 거의 같은 시각에 한국 언론에도 그렇게 보도된 거예요. 중국 언론은 다시 우리 언론 보도를 인용해 크게 보도하고요. 그거 해명하느라 정말 고생했어요. 그 자리에 있던 중국 기자들이 해명해주기까지 했어요.”

    ‘제값 한다’ 소리 듣고 싶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립싱크를 해 중국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만취상태에서 드라마 촬영을 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중국 신문에 제가 생각해도 자랑스럽고 기쁜 기사가 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건 한국 언론에 거의 안 실려요. 반면 제가 잘못한 것이 없어도 나쁜 일이면 크게 나오더라고요. 그것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제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만큼 빠른 시간에 기사화돼요. 정말 놀랐어요. 결국 제가 행동을 조심하는 수밖에 없겠죠.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돈 많이 버는 게 아니에요. 돈을 번답시고 물을 흐리고 다니면 중국인들이 한국 연예인을 어떻게 보겠어요. 나중에 다른 연예인이 와서 활동할 때 ‘장나라와 일할 때 좋았어’ ‘한국 연예인들, 참 괜찮은 것 같아’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게끔 처신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출연료는 얼마나 받습니까.

    “다른 배우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합니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좋은 값을 받는 건 기쁜 일이지만 상식선을 넘으면 다른 배우들은 물론 팬들에게도 위화감을 갖게 한다고 봐요. 특히 드라마는 제작 여건이 뻔한데 출연료가 너무 높으면 결국 제작비를 깎아먹는 거잖아요. 하지만 사극을 하시는 분은 다른 드라마보다 좀더 받아도 될 것 같아요. 고생을 너무 많이 하니까요.”

    중국 횡행천하(橫行天下)한 ‘한류천후(韓流天候)’ 장나라

    장나라는 중국 1집 앨범 발표 후 30곳 넘는 지방을 순회하며 TV출연과 공연을 하는 노력 끝에 중국의 대표적인 음악제전 2곳에서 수상의 기쁨을 안았다.

    ▼ 중국에서 열심히 활동하다보니 국내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다 잊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은 갖지 않았나요.

    “즐겁게 일하고 열심히 했다는 것에 만족해요. 인기, 시청률, 그런 것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그러다 폐인이 되어가는 연예인을 많이 봤어요. 성격도 이상해지더라고요. 2년 동안 중국 무대에 서면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안일함에 젖어 있었다는 반성도 했고, 데뷔 초와는 다른 새로운 성취감을 얻게 됐어요. 더 잘해서 ‘한국 연예인은 제값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한국에서는 한일 갈등이 고조되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이 일본인들의 입에서 나오길 바란다. 지난해부터는 한중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동북공정’에다 중국 생선의 납 검출 파문, 마늘파동, 김치전쟁 등이 이어졌다. 중국 언론에서도 그에게 이런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 그를 난처하게 하진 않았을까.

    “저를 어리게 봐서 그런지 그런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별로 물어보지 않아요. 중국에서 제게 가장 궁금해하는 건 제가 중국인 남자친구를 사귈까, 안 사귈까 하는 거예요. 제가 남자친구가 없잖아요.”

    ‘한류’와 ‘문화침략’

    한중 갈등엔 반(反)한류도 한몫한다. ‘문화침략’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중국 당국에서도 한국이 중국 드라마를 수입하지 않으면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 방영을 제한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 중국에서 반한류 움직임을 실감하나요.

    “솔직히 체감 못해요. 제가 만나는 분들은 다 저를 따뜻하게 대해주시니까요. 사실 중국 전체가 한류에 물든 건 아니에요. 한류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인구가 워낙 많은 나라이다보니 한국에서 보면 커 보이는 것이죠. 그래도 일본이나 다른 나라 문화보다는 한류가 넓게 퍼져 있어요.

    교류라는 의미를 되새겨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물건을 거래하는 걸 교역이라 하고 대중문화가 오가는 건 교류라고 하잖아요. 교류는 이윤에 치중한 장사가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서로 공유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그릇된 우월감에 젖어 상대를 얕잡아본 건 아닐까요. 그런 실수 때문에 중국인들이 우리를 오해하고 마음 상한 부분이 있지 않나 싶어요. 우리 언론에서 ‘중국제패’ ‘점령’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자주 쓰는데, 우리야 기분 좋을지 몰라도 중국에서는 반감 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이죠.”

    ▼ 한류 보도를 보면 의문이 갈 때가 많아요. 예컨대 국내에서도 별로 인기가 없는 신인 그룹이 중국의 5만 관중 앞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했다는 보도가 종종 나오는데, 한류 열풍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그 질문에 사실대로 답했다간 저 매장될 걸요(웃음). 중국에서 외국 가수 공연이 성공하기란 정말 어려워요. 대만 등 중화권 스타도 상하이 공연이 여러 번 무산된 적이 있어요. 중국에서는 연찬회(콘서트)에 등급이 있어요. 500석 전후의 소극장, 3000석 전후의 대극장, 2만석 전후의 체육관, 5만석 전후의 대형 연찬회가 있어요.

    단독공연의 경우 2만석 이상 공연은 중국에서 10년 이상 활동한 톱가수나 가능할 만큼 유료관객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요. ‘인지도’와 ‘인기도’는 다르죠. 얼굴을 안다고 돈 주고 표를 사서 구경오는 게 아니잖아요. 한국 가수들이 자신의 인지도만 믿고 공연을 추진했다 표가 안 팔려 취소한 경우가 많아요. 언젠가는 표가 안 팔리니까 ‘악천후 때문에 취소한다’고 핑계를 댄 적이 있는데, 그날 날씨 참 좋았거든요.”

    사이코, 아줌마 연기 해봤으면

    연극배우 주호성씨와 탤런트 출신인 이경옥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나라는 부모의 끼를 물려받은 때문인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연예인을 꿈꿨다고 한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하지만 너무 이르다고 판단한 아버지가 “고등학생은 돼야 여자다운 몸매가 만들어진다. 그때부터 활동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며 완곡하게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그로부터 1년 뒤 고등학생이 된 장나라가 하루는 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다”며 면담을 청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저, 고등학생인데요” 단 한마디였다.

    중국 횡행천하(橫行天下)한 ‘한류천후(韓流天候)’ 장나라

    지난 2년 동안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장나라는 오는 11월 5집 앨범 발표를 계기로 국내 활동도 적극 벌여 나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예인이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로부터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혹독한 연기, 춤, 노래수업을 받았지만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여러 기획사를 전전하고 각종 오디션 응시와 탈락을 거듭하다 4년 만인 대학 2학년 때에야 비로소 데뷔 앨범을 낼 수 있었다.

    “좌절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계속했죠.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데뷔 전까지 흘린 눈물이 아마 목욕을 하고도 남을 정도일 거예요.”

    그래서였을까. 그의 데뷔곡 제목은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였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찮았던 모양이다.

    그가 시청자의 눈길을 끈 것은 MBC 시트콤 드라마 ‘뉴 논스톱’에 출연하면서. 거기서 얻은 지명도를 바탕으로 후속곡이 연이어 히트, 그해 신인 여자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그는 명랑만화에서 톡 튀어나온 것 같은 귀엽고 명랑한 소녀 캐릭터로 시청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이런저런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여느 여성 연예인에게 식상한 시청자들이 순수하고 깨끗한 그의 이미지에 매료된 것. 이후 그는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연기력도 웬만큼 인정받았고 라이브를 고집하며 실력 있는 가수로도 평가받았다.

    그의 명랑한 캐릭터는 중국에서도 통했다. ‘엽기적인 공주’로 번역할 수 있는 ‘댜오만 공주’나 새로 시작하는 ‘굿모닝 상하이’ 모두 장나라 특유의 이미지를 살려냈다.

    ▼ ‘장나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똑같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저 역시 하나의 캐릭터만 유지하고 싶진 않아요. 이런 연기, 저런 연기를 다 해보고 싶죠.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강한 인상을 받으면 계속 그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나봐요. 하지만 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요. 다양한 연기를 잘해낼 자신이 있거든요. 앞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줄 작정이에요.”

    ▼ 꼭 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다면.

    “뭐랄까, 좀 이상한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동성애자 역할이에요. 사이코도 재미있을 것 같고, 아줌마, 아이엄마 역할도 빨리 해보고 싶어요.”

    ▼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하네요.

    “결혼은 잘 모르겠어요. 빨리 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 하잖아요. 지금까지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 뭉치는 것도 힘든데, 결혼은 둘만의 관계가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니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 일에 치여 남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요. 만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죠. 만날 수 없을 땐 전화로 마음을 전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아직은 오랫동안 관계가 지속될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요.”

    ▼ 출연료 등 돈 관리는 누가 합니까.

    “어머니가 하세요. 저는 전혀 몰라요.”

    ▼ 기부를 많이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가요.

    “연예인이 되기 전에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연예인을 해서 잘되면 나누는 일을 많이 하자고요. 아버지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2005년 3월경 인터넷 홈페이지에 그때껏 후원한 액수가 19억여 원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그 후에도 꽤 많은 액수의 후원을 한 것으로 압니다. 다 얼마나 되죠?

    “저는 계산하는 게 싫어요. 민망해요. 그런데 만일 제 통장에서 현금으로 19억원을 빼서 하라고 했으면 어려웠을 거예요. 누구나 수중에 들어온 돈을 다시 내놓기는 힘들잖아요. 그래서 광고를 찍거나 행사출연을 해서 받기로 한 돈을 바로 후원해요. 다른 사람들이 시설에서 자원봉사하는 마음으로 저는 광고를 찍고 행사에 참가하는 거죠.”

    북한에 우유·생리대 보내

    그는 ‘명랑소녀 성공기’ 출연료 전액을 북한 어린이 돕기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지원을 많이 하고 있다. 2003년 말엔 우유와 생리대 광고출연료로 5억원어치의 물품을 지원했는가 하면, 올해도 중국 의류회사로부터 광고료 대신 방한복을 받아 중국 빈민과 북한 주민에게 절반씩 지원할 계획이다.

    “북한의 경제상황이 너무 열악하다보니 생리대도 부족해 여성들의 위생상태가 안 좋다는 거예요. 저도 여자라서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잖아요. 남자들은 안 겪어봐서 몰라요. 위생이 청결하지 못하면 질병에 걸리기 쉽거든요.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웠어요. 우리나라에선 마트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인 게 생리대인데, 그걸 북한에 보내면 어떨까 생각한 거죠. 더 가슴 아팠던 건 갓난아이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는 거였어요.”

    ▼ 분유와 생리대를 북한에 보내기 위해 광고를 찍은 건가요.

    “생리용품 회사도 그렇고 우유회사도 그렇고, 서로 요구가 딱 맞아떨어졌어요. 더 감사한 것은 그 회사들이 제 출연료보다 더 많은 양을 북한에 보내주셨다는 거예요.”

    ▼ 북한 주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데, 최근 북한의 핵실험 사태가 터져 당혹스러웠겠군요.

    “저는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만 알지 정치는 잘 몰라요. 다만 바람이 있다면 정치 하시는 분들이 남한이든 북한이든 서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이번 일도 그렇게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고요.”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묻자 그는 앨범이 나오면 국내에서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하는 것뿐 아니라 내년 초에는 드라마에도 출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중국 무대에만 매달렸지만 앞으로는 중국과 한국에서의 활동을 절반씩 조절하며 하겠다는 것이다. 그 말에서 그의 중국 연예계 활동이 이젠 안정권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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