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그 좋아하던 미술을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하려 했다. 당시 미술교사이던 강태성 선생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영혼, 결코 꺾이지 않는 근면과 성실을 행동으로 보여주며 내가 화가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주셨다.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화가 임옥상’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임옥상 화백(오른쪽)은 지난해 6월 강태성 선생과 합동전시회 ‘사제동행’전을 열었다.
나는 충남 부여중학교를 다녔다. 2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전학했기 때문에 윤완호 선생님과의 인연은 2년에 불과하다. 그 뒤로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내가 선생님을 찾았을 때는 이미 유명을 달리하신 후였다.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미술 이외의 어떤 과외활동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며 치른 미술 실기시험에서 내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은 했지만 미술선생님의 호명은 없었다. 나로서는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미술반 활동만 하겠다는 희망이 첫걸음부터 무너진 것이다.
첫 미술시간. 선생님은 미술반에 들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주저하다 결국 손을 들지 못했다. 퇴짜를 맞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중심으로 연필 스케치를 해온 두 지원자의 그림 솜씨는 놀라웠다. 시골 출신인 나는 비교가 안 되는구나 싶어 꿈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둘은 부여초등학교를 나온 정행수군과 백제초등학교를 나온 임영우군으로 이미 유명한 신동들이었다. 교내 모든 미술상을 휩쓸었다고 한들 한 학년이 1∼2개 반에 불과한 초미니 시골 학교를 다닌 내가, 한 학년이 10개 반에 육박하는 읍내학교에서 교내 미술상을 휩쓴 아이들과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
5월 초였다. 어느 날 선생님의 발걸음이 내 책상 옆에서 멈췄다. 나는 그냥 계속 그림을 그렸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선생님은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나는 부담스러웠지만 감히 선생님을 올려다볼 수도 없었고 말을 걸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야 임마! 너 왜 미술반 안 들어오냐?”는 말이 들려왔다. “네?” 나는 너무 놀라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그 길로 나는 미술반에 합류했다. 꿈같은 일이었다. 윤완호 선생님은 신출내기 미술교사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부여중학교가 첫 부임지였을 것이다. 얼마나 꿈에 부풀었겠는가. 우리 미술반 친구들을 마치 친동생처럼 사랑해주셨다. 집에 데려가 밥도 먹이고, 부여 곳곳을 누비며 우리를 가르치셨다.
우리는 커다란 이젤과 스케치북을 들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볐다. 부소산 자락에도 오르고 백마강 백사장으로도 나갔다. 때론 부여고등학교까지 가서 고등학교 형님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문화원에서 선생님과 전시회도 열었다. 선생님은 유화를 출품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그림은 아마추어를 벗어나기 힘든 수준이었던 것 같다. 매우 몽환적인 풍경화였는데, 다르게 보면 그냥 뭉갠 그림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들 눈에는 최고의 그림이었다. 선생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이는 그대로만 그리지 말고 사물을 잘 관찰해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일 것이다. 파고들어라. 열정이 있어야 한다. 끝까지 집념이 필요하다. 즐겁게 그려라. 억지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내 그림을 평가하셨다.
“옥상이 그림은 기법이 재미있다. 점으로 툭툭 찍은 것이 인상파 중에서도 후기인상파 그림 같은데 이것을 좀더 발전시켜봐라.”
임옥상 화백은 “강태성 선생에게서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예술가의 자세를 배웠다”고 말한다.
선생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그리고 그 근본은 인격에 있다고 늘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어미닭이었고 우리는 병아리들이었다.
계절감각을 익힌 것도 미술반 활동 덕분이었다. 화폭에 담기는 계절은 훨씬 더 명확했다. 비 갠 후 화사한 봄빛을 받으며 만개한 벚꽃, 살구꽃을 그리던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야, 오늘은 모두 100점이다. 구도도 좋고 색깔도 살아 있고.”
체구는 작았지만 선생님의 목소리는 매우 컸다. 호방한 성격이어서 늘 웃으시고 즐거워하셨다. 2학년을 마치고 집이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나는 선생님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때의 슬픔은 너무 컸다.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을 그 어디에서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영등포중학교로 전학을 온 나는 역시 미술반에 들어갔다. 영등포중학교 미술반의 분위기는 부여중학교와는 완전히 달랐다. 거기는 미술선생님이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 선배들이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김정수 선배를 만났다. 나는 다시 한 번 넓은 세계가 있음을 실감했다. 그는 황홀한 천재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내게 그는 예술의 혼과 정열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나는 윤완호 선생님의 가르침에 김정수 형의 지도 덕으로 홍익대 주최 전국 미술실기대회에서 특선을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 용산고등학교에 진학한 나는 미술반 활동을 포기했다. 화가의 길을 걷는 게 꿈이었지만, 연로하신 아버지(이미 회갑을 넘기신 연세에 피혁공장에서 말만 공장장이지, 거의 막노동을 하고 계셨다)와 단칸 셋방을 전전하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그것은 너무도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공부냐, 그림이냐
아마추어 화가로 남겠다고 결심하고 대학 입시에 대비한 학과공부에 전념했다. 성적이 좋아 서울대 상과대학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선 학비가 저렴하니까 꼭 서울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내 미술실기대회가 5월에 열렸다. 나는 평소 실력대로 그림을 그렸다. 다음날 복도에서 고3 선배들이 나를 찾는다고 교실이 술렁거렸다. 나는 하얗게 질려 선배들 앞에 섰다.
“네가 임옥상이구나. 너 미술반에 들어와라. 이번 미술대회에서 네가 일등을 했더라.”
김응래 선배는 상냥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대해주셨다. 나는 즉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마음은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굳은 결심을 그렇게 금세 접는다는 게 스스로 부끄러워 선배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한동안 버텼다. 나는 1학년 때만 한시적으로 활동하기로 하고 미술반에 들었다. 미술반을 찾은 나를 강태성 선생님은 덤덤히 맞으셨다.
“그래, 잘해봐라.”
싱거운 대면이었다. 물론 실기대회 심사는 선생님께서 도맡아 하셨다. 선생님께서 뽑은 일등이 왔는데도 전혀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조각 전공인 선생님이 그림을 얼마나 잘 본다고 날 이렇게 무시하나 싶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내 그림은 탁월한 작품이 아니라 그저 상대적으로 괜찮은 정도여서 뽑아주셨다고 한다.
선생님은 깡마른 체구에 뾰족한 턱, 약간 나온 입술로 평소 표정도 밝은 편이 아니었다. 조금 숙은 허리, 고개를 들고 딱히 초점도 없이 허공에 시선을 던진 그런 자세로 걸으셨다. 늘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잠을 더 자야 할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미술시간에 특별히 열성적으로 가르치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가끔 몹시 화를 내시곤 했는데,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남에게 대신 시켜 그려냈다거나 준비를 몇 번씩 안 해오는 아이들은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잔소리로 들릴 정도로 오랫동안 꾸짖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선생님을 전형적인 ‘꼰대’라며 무시했다. 사실 입시 위주의 고등학교에서 미술선생님은 미술반원을 빼놓고는 존경을 받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강태성 선생님에 대한 평가가 더욱 낮았던 이유는 수업 종료종이 울린 후에 꼭 꾸중을 들었던 당사자를 다시 불러 ‘내가 화가 난 것은…’으로 시작되는 일종의 사과를 하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화를 낸 것이 미안해 아이의 마음을 달래려 하신 것인데, 아이들은 “차라리 한 대 맞으면 깨끗이 잊고 말겠는데 웬 변명이냐”고 투덜댔던 것이다.
“저 꼰대, 쪼다 아냐.”
나는 답답했다. 아이들의 자기과시용 언사이긴 해도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속상했다. 나의 미술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욕을 먹는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매우 근면하셨다. 전교의 환경미화를 손수 다 하셨다. 미술반원을 시키는 일은 결코 없었다. 글씨도 잘 쓰셨고, 분수가에 오줌 누는 분수 동자상을 만들어 세우는 등 학교 구석구석 선생님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미술반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도 않으셨다. 그냥 짧은 말로 “열심히들 혀” 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처음 1년은 선생님과 가까이 지낸 기억이 없다. 방과 후에는 잡무를 빨리 마치고 사라지셨다. 자연히 미술반은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스스로 약속한 대로 미술반 활동을 접었다. 이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별반 말씀이 없었다. 연례행사로 다시 미술대회가 열렸고 나는 또 일등을 했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놓고 “이게 일등은 일등인데 그림이 영 마음에 안 든다. 내가 손을 좀 대야겠다. 이거 그대로 걸기가 뭣하다” 하시면서 몇 번의 붓 터치를 넣으셨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림이 그냥 확 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러곤 또 끝이었다.
‘쪼다 선생’에서 ‘영웅’으로
미술반 활동을 접은 나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공부가 통 안 되었다. 성적은 날로 곤두박질쳤고 그럴수록 미술실에 잠깐이라도 들르고 싶어졌다. 미술반으로 옮겨지는 발걸음을 억제하느라 생땀이 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만 간다 하면서 미술반에 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지가 약한 것에 스스로 화가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을 핑계로 꿈을 버린다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런 갈등 속에서 1년이 지났다. 2학년 말 성적은 참담했다. 서울대 상대는커녕 인문대도 갈 수 없는 수준으로 뚝 떨어져버린 것이다. 방법이 없었다. 다시 미술대학으로 진로를 바꿀 수밖에.
그렇게 다시 미술반에 돌아왔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내게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수업시간에 만나는 선생님은 예전과 똑같았고, 늘 약간 피곤한 기색으로 무엇인가를 계속 찾는 표정이셨다. 아직 다하지 못한 숙제를 곱씹고 또 곱씹는 모습이었다.
선생님의 무관심은 너무한 바가 없지 않았다. 내가 세종대(당시 수도여사대) 주최 전국 미술실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와도, 각종 실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와도 그냥 ‘잘했다’고 할 뿐 대수롭지 않게 대하셨다.
그런데 하루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생전 따뜻한 미소 한 번 보여주시지 않던 선생님께서 일요일에 동작동 국군묘지로 소풍을 가자는 것이었다. 그때 처음 우리는 선생님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소풍은 소풍이었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여전히 ‘별로’였고,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셨다. 우리들만 즐겁게 두 꼬마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았고 사모님이 손수 바리바리 싸오신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숙제에 묻혀 있는 듯 좀처럼 현실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우리는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작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작업실이 학교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작업실에 우리를 부른 적이 없었기에 어디서 어떻게 작업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팔뚝은 깡말랐지만 근육만은 확실했다. 석조 전공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가끔 우리들이 묻을라치면 “힘들어, 여간 힘들지 않아” 하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 10월이었을 것이다. 대사건이 벌어졌다.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강태성’이란 이름이 박혀 있었다. ‘국전 대통령상 강태성.’ 다음날 만난 선생님은 “어부지리로 됐어”라고 하셨을 뿐이었다. 기쁜 표정이었지만 의기양양한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국전이 뭐 별거냐는 듯 고양된 표정도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이 양패로 나뉘어 팽팽히 맞서다가 정치적 색채 없이 작업에만 몰두해온 선생님을 뽑기로 타협을 봤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나는 적이 놀랐지만 그런 선생님이 여간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상은 상이고 내 작품은 내 작품’이라는 화고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다. ‘해율’이란 작품 제목도 멋졌고 대중성도 충분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에게 회자됐다. 특히 학교는 완전히 뒤집혔다. 평소 ‘쪼다’라며 선생님을 우습게 보던 학생들까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영웅 대하듯 환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전의 권위는 대단했다.
40년 만의 사제전시회
“돌을 쪼다보면 어느덧 새벽이 온다. 어떻게 시간이 간지도 모르게 무아경에 빠져 작업한다. 가장 행복할 때는 결코 구멍이 뚫릴 것 같지 않던 돌덩어리에 희미한 빛이 감지되는 순간이다. 그때만큼 기분이 좋은 때는 없다. 작품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흔들릴 일이 아니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가면 된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자신이다. 자기가 스스로에게 점수를 줄 수 있어야지, 남이 인정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돌 속에 작품이 숨어 있다. 돌 속에 갇혀 있는 이미지를 끄집어내는 것이 내 작품이다. 무엇이 숨어 있는지 나도 모른다. 씨름에 씨름을 거듭하다보면 어느새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생님은 처음으로 당신의 작품에 대해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충청도 출신이다. 말씀이 느린데다가 더듬더듬 이어지고 또 발음이 약간 샌다. 그래서 오히려 신뢰가 간다.
그 후 선생님의 일상은 더욱 바빠지셨다. 거의 뵐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예의 그 허공을 향한 시선과 구부정한 허리에 걸음걸이는 여전했고 얼굴엔 피곤함이 함께했다. 또 밤을 새우신 모양이구나, 돌 속에 숨은 영상을 찾아 헤매시는구나,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고 작품 속에 사시는구나 하고 느낄 뿐이었다.
그 후 나는 서울대 미대에 진학하고 선생님은 이화여대 교수가 되셨다. 윤완호 선생님이 미술을 매개로 삶을 풍요롭게 엮으셨다면 강태성 선생님은 예술 속으로 삶을 밀어 넣으셨다. 나는 그 두 극단의 중간에 서 있다. 삶과 예술을 화해시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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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성 선생님은 구도자다. 마치 구름 위를 걷듯 현실의 계도를 벗어난 삶을 살고 계시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정치가 질곡으로 빠져들든 괘념치 않으신다. 아니 초연하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사셨다고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작품에 대한 열정은 결국 시대에 대한 분노였는지도 모른다. 자기식의 절대적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강인함을, 결코 꺾이지 않는 근면과 성실함을 배웠다. 지금도 작업을 멈추지 않는 선생님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지난해 6월 정동 경향갤러리에서 40년 만에 처음으로 선생님과 함께 ‘사제동행(師弟同行)’전을 연 것은 내겐 큰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