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가 단절된 시기였다. 이로 인해 왜곡된 근대화 과정으로 정치·경제·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게 됐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기생도 희생됐다. 우리는 기생에 대해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 시각을 갖고 있다. 기생은 봉건시대의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로는 현대의 대중문화 스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1930년대 평양 기생학교 전경.
근대화 과정에서 평양 기생 출신 왕수복(1917∼2003)은 대중스타로 변모했다.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왕수복이 태어난 시기는 3·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종래의 무단정치 대신 표면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때였다. 일제는 서둘러 관제를 고치고 조선어 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등 타협적 형태의 정치를 펴는 듯했으나, 내면으로는 민족 상층부를 회유하고 민족분열 통치를 강화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우리말 신문이 간행된 게 바로 이러한 문화정치의 산물이다.
왕수복은 12세에 평양 기성권번의 기생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음반 대중 가수로 진출했다. 왕수복은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에서 폴리돌 레코드로 소속을 옮겼는데, 폴리돌에 와서는 ‘유행가의 여왕’이 되고자 했다.
왕수복은 건장한 몸집에 목소리도 우렁차고 좋았다고 한다. 특히 평양 예기학교, 즉 기생학교를 졸업한 만큼 “그 넘김에는 과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레코드 문예부장 왕평(王平)의 회고가 있다. 특히 본 성대가 아니라 순전히 만들어낸 소리로 부른 ‘고도의 정한’은 대중으로부터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당시 가장 인기를 끈 조선 유행가였으며 음반 판매량에서도 최고를 기록했다. 왕수복이 세상이 알아주는 대가수가 되자 콜롬비아, 빅터 등 음반 회사들은 평양 기생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10대 가수 중 3명이 기생 출신
1930년대는 한국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다. 대중음악이 등장한 전환기였고 그 획을 그은 이가 기생 왕수복이다. 송방송(宋方松)이 ‘한국근대음악사의 한 양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 대중가요의 뿌리에 해당하는 유행가, 신민요, 신가요, 유행소곡 등과 같은 새로운 갈래의 노래들이 당시 작사자와 작곡가들에 의해 창작되어 불려졌다. 이 중 신민요(新民謠)는 성악의 한 갈래로서, 전통 민요와 유행가의 가교였다. 신민요의 등장은 근대화의 한 사례다. 전통적인 문화에 외래적인 문화가 더해진 문화적 종합화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봉건적 잔재인 ‘기생’이 근대의 표상으로 일컫는 대중문화의 ‘대중스타’가 된 것이다. 축음기의 보급은 대중음악의 탄생을 불렀으며, 기생은 그 음반 가요의 주요 소비자였다. 기생들은 음반을 들고 배운 노래를 술자리에서 불러 유행의 확산에 도움을 줬으므로 음반회사에서 보면 큰 고객이었다.
이는 음반회사가 기생 출신을 가수로 발탁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기생 출신의 가수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는 삼천리(1935년) 잡지가 선정한 10대 가수에 오른 5명의 여자 가수 중에 1, 2, 5위를 차지했다.
1937년 21세의 왕수복은 폴리돌 레코드 회사와 결별한 뒤 일본 우에노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했다. 조선민요를 세계화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성악을 전공한다. 왕수복은 43세 때인 1959년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왕수복의 일생에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메밀꽃 필 무렵’ 작가 이효석이고, 또 한 사람은 한때 시인 노천명의 약혼자였던 김광진(金洸鎭)이다. 김광진은 북한에서 김정일에게 정치경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왕수복은 이효석이 죽은 뒤인 1947년 열네 살 연상인 김광진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다. 왕수복은 1973년 남편이 김일성 훈장을 받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왕수복은 1955년 7월 김일성과 처음 만난 뒤 그 다음 달에 열리는 소련 공연에 북한 대표로 발탁되면서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게 된다. ‘조선가요의 여신(女神)’이란 별칭까지 얻은 그는 1977년 환갑, 10년 뒤 칠순, 다시 10년 뒤 팔순에 김정일에게서 생일상을 받기도 했다.
遊女, 娼妓, 藝者…
기생의 역사에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를 빼놓을 수 없다. 1927년 국학자 이능화가 저술한 풍속에 관한 서적으로, 기생을 종합적으로 다룬 첫 역사서이다. 이방인이 기생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발간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여성 학자 빈센차 두르소는 1997년 독일 함부르크대에서 ‘조선기녀’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2002년 일본 학자 ‘가와무라 미나토’도 ‘말하는 꽃 기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해어화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 취급을 받은 기생에 관한 자료를 모았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는 물론 야사나 각종 문집까지 참고했다. 이 책은 기생의 기원과 시대별 제도, 기생의 생활, 유명한 기생들,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인 성격 등을 다뤘으며 각종 일화와 시조, 시가도 소개했다. 이 책에 따르면 기생은 천민층이었으나 매우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또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구실을 했다. 기생 중에는 의료에 종사한 의녀도 있었다.
기생을 가리키는 명칭 중에 ‘해어화’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기생이라는 직종은 신라 24대 진흥왕 때 여자 무당이 유녀(遊女)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과 이익은 고려시대에 생겼다고 본다.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는 것이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난 곳은 서울 평양 성천 해주 강계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다. 조선시대에 문학 작품을 남긴 기생으로는 황진이 이매창 문향 매화 홍랑 홍장 계섬 소백주 구지 명옥 다복 소춘풍 송대춘 계단 한우 송이 강강월 천금 등이 꼽히며, 이들의 시조 작품 20여 수가 전해 내려온다.
사실 ‘기(妓)’는 형성문자로 뜻 부분인 ‘계집 녀(女)’와 음 부분인 ‘가를 지(支)’로 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생을 이르는 말은 다 다르다. 중국에는 기생이라는 표현이 없으며 대신에 ‘기(妓)’ 또는 ‘기녀’ ‘창기(娼妓)’를 널리 사용했다.
일본에도 기생이라는 어휘는 없으며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기(藝妓)’도 일본에서 기생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였다. 즉 예자(藝者, げい-しゃ, 게이샤)로 통용된다.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1704년경에 생긴 제도로 본래는 예능에 관한 일만 했으나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 두 종류로 나뉘었다. 질 높은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기 위해 그들은 일본 전통예술 훈련을 받는다. 기품 있는 게이샤는 매력적이면서 우아했다. 예전에 게이샤는 남자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여자로 바뀌었으며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예능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음악, 서예, 다도, 시, 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세 종류의 악기 연주를 익힌다.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얼굴을 하얗게 하고 입술을 아주 빨갛게 칠하는 화장을 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게이샤 활동 금지령이 내려진 일도 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게이샤의 수는 크게 늘어나 지방도시로까지 퍼지게 됐다. 근대에 와서는 예능 기량과 관계없이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게이샤의 이름으로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어휘인 기생(妓生, a gisaeng(-girl) ;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로 규정할 수 있으며 ‘예기(藝妓)’란 말도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기생’의 ‘생(生)’은 접사로 서생(書生), 선생(先生), 학생(學生)과 같은 경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기생의 ‘기’를 ‘妓’외에 ‘伎’로도 표기했다. ‘妓’의 경우는 창기, 간기, 기첩 등 부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기(伎)의 경우는 기악(伎樂) 등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관기를 기첩(妓妾)으로 맞아들여 집마다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공물(公物)이면서 사물(私物)로서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했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관료는 수청(守廳)을 들게 했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구별됐는데,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관기의 딸은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관기가 돼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생청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춰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 시, 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기생청의 기능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뒀던 조합이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활동무대인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기능도 담당했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내야 했으며,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 엄격히 구분돼 있었다.
일제 강점기, 자동차 옆에서 포즈를 취한 기생들. 서울 한강변은 ‘기생과의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좋았다.
1930년대에는 스포츠가 볼거리와 유흥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미국 영화의 상영으로 도시적 감수성, 서구화한 육체와 성(性)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이에 따라 ‘모던 걸’과 ‘모던 보이’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에 맞추어 ‘카페’도 확산됐다. 요릿집보다는 카페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권번의 기생들이 차츰 화류계에서도 밀리는 상황을 맞게 됐다. 결국 1942년 8월 17일 종로·조선·한성 등 3대 권번은 종로권번 중심으로 통합해 낙원동에서 ‘삼화권번’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일제의 전시동원 체제에 의해 급조된 삼화권번은 유명무실한 그 명맥조차 잃게 되어 얼마 뒤 영업 제지를 당해 문을 닫았다.
광복 이후 유명 요릿집 ‘명월관’ ‘천향원’이 재개업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5000여 명에 이르는 권번 기생도 부활했다. 당시 서울 4대 권번은 삼화·한성·서울·한강으로 예전과 같은 부흥을 꾀했으나 이번엔 일제 잔재인 ‘공창’의 단속과 맞물려 청산 대상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 이후 권번의 명맥은 서울의 한성·예성 권번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1948년 당국은 가무음곡을 금지하면서 ‘접대부(接待婦)’라는 제도에 권번 기생을 강제 편입시켰다. 이로써 우리 역사에서 기생은 사라져버린다. 다만 그 후 기형적인 요정(料亭)이 생겨나고,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관광’이 나타나면서 기생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됐다.
1930년대 일반인은 서양에서 들어온 라디오, 축음기, 영사기 등의 ‘기계’와 전람회, 박람회, 운동회, 영화관, 유람단 등에 의해 근대화를 경험했다. 여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권번 기생들이다. 일본식 명칭인 ‘권번’은 정식 국악교육기관이 아니었으나 민속음악 계승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조선 권번 출신 이난향의 회고에 따르면 1909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고 기생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요릿집들은 매일 밤 손님들로 성시를 이뤘다. 그런데 골치 아픈 일이 차츰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손님이 기생을 찾으면 해당 기생에게 일일이 연락을 넣어 불러와야 했다. 한 기생을 놓고 신분의 고하가 있는 몇 사람이 서로 차지하려고 으르렁대는 경우도 생겼다. 기생이 손님에게 실수를 하거나 손님이 너무 무례해 시비가 벌어지면 요릿집 주인이 책임을 져야 했다. 이와 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 나타난 것이 기생조합이다.
기생조합은 출신 지방별로 형성됐다. 광교 쪽에 자리잡은 광교기생조합엔 서울 출신과 남도 출신이 많이 모였다. 다동 기생조합은 거의 평양과 서도 출신들로 구성됐다. 이러한 조합이 일제에 의해 1914년 ‘권번’으로 바뀐 것이다.
권번 기생, 대중문화 핵심 코드
권번은 등록된 기생을 요릿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는 일을 맡았다. 권번에서는 매일 ‘초일기(草日記)’라는 기생명단을 요릿집에 보내 단골손님이 아닌 사람도 기생을 부를 수 있게 했다. 물론 특정 기생을 미리 점찍어두는 사전 예약도 가능했는데, 일류 명기(名妓)의 경우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만날 수 있었다.
권번은 기생의 등용문 구실도 했다. 권번에서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인물이나 태도, 가무, 서화 등을 심사해 채용했다. 좋은 권번에서 예의범절을 익히고 노래와 춤을 배우고 지체 높은 양반의 눈에 들기만 하면, 팔자 고치는 것은 시간문제라 시집가기 위해 권번을 찾는 여성도 많았다. 권번에 들어오려면 입회금을 10~20원씩 내야 했고, 일단 이름을 올려놓으면 매월 50전씩 회비를 내야 했다.
권번 기생은 대중문화의 핵심 코드가 됐다. 이들은 라디오의 음악방송에 주로 출연했고, 왕수복처럼 음반을 취입해 대중적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초창기 영화도 기생 출신의 영화배우가 중심이었다. 각종 전람회와 박람회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예능의 기예도 각 권번의 기생들이 맡았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조선의 특산품으로 기생을 출품하려 했을 정도였다.
경인철도 개통 초기에 손님이 거의 없자 철도회사는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평양명기 앵금’ ‘인천기생 초선’ 하는 식으로 주요 역 마당에 기생 이름을 적은 푯말을 꽂아놓고 일종의 라이브 공연을 벌였다. 더 나아가 기생들이 기차 칸마다 타고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오가기도 했다. 당시 신문에 실린 제품광고 및 잡지의 표지 사진, 행사 포스터에 거의 모두 기생이 등장했다.
권번 기생들은 방송, 음악, 영화, CF, 이벤트 행사의 주역으로서 현재의 연예인과 유사한 활동을 한 셈이다. 권번은 지금의 연예인 기획사, 매니저 노릇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생과 권번은 화대를 대개 7대 3으로 배분했다. 권번 기생은 당국으로부터 ‘기생영업인가증’을 받아야 했는데, 오늘날 ‘개인사업자 등록증’과 같다. 이렇듯 권번 기생은 정식 직업이었다.
당시 미술대학에서는 동양화, 서양화의 모델로 권번 기생을 주로 찾았다. 이당 김은호 선생이 1939년 남원 광한루에 있는 춘향사당에 모실 춘향의 초상을 그릴 때도 조선 권번에 나가던 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기생이 요릿집에 불려갈 때는 인력거를 이용했다. 도심 내의 웬만한 거리는 택시보다 요금이 저렴했다. 대부분 인력거를 타면 전면에 휘장을 내리지만, 기생들은 자신을 선전하고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휘장으로 가리지 않았다. 특히 인력거꾼들이 기생의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딸을 기적에 올리는 일도 많았다.
상류사회 특권, ‘기생과의 드라이브’
실제로 1930년대 기생은 당시 다른 직업군보다 수입이 훨씬 더 많았다. 기생은 1시간당 1~1.2원의 실수입을 올렸다. 한 자리에서 서너 시간 일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당시 쌀 1가마에 7~8원이었으므로 화대는 싼 편이 아니었다. 한 달 화대 수입은 평균 200~300원이었다. 1937년 통계를 보면 종로권번 기생 최금란 1875원, 조선권번 기생 박소향 396원, 한성권번 기생 정월 523원으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 시기 일반인에게는 전차가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전차보다 비싼 인력거를 이용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가용 인력거를 갖고 있었다. 자동차는 워낙 비싸서 최상류층만 소유할 수 있었다. 자동차 수가 늘어나면서 서울 교외로 드라이브하는 것이 유행이 됐다. 여기에 빠짐없이 등장한 것이 기생이다. 요릿집에서 1차를 한 뒤 기생들을 태우고 드라이브하며 서울 교외의 경치 좋은 곳에서 2차 주흥을 즐기는 것이 상류사회의 문화가 됐다. 일반 시민들도 ‘콜택시’를 불러 1~2원을 주면 한강변이나 절로 드라이브를 나갈 수 있었다. 주로 찾는 절은 동대문 밖 개운사, 우이동 화계사, 청량리 청량사, 보문동 미타사와 탑골승방 등이었다.
그러나 자동차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인식돼 일반인에게는 부정적으로 비쳐졌다. 기생들을 함께 태우고 가는 택시의 경우에는 당시 신문 사회면에서 몹쓸 일을 저지르는 것처럼 보도되기도 했다. 급기야 총독부가 “경성에 있는 권번기생은 자동차에 타면 처벌한다”는 조치를 내릴 정도로 사회 문제가 됐다.
일제 강점기 권번은 전통예능 교육의 산실이었다. 하규일이 운영하던 조선권번에서는 여창가곡·가사·시조·남도소리·서도소리·경기십이잡가·잡가 등을 가르쳤고, 악기로는 가야금·거문고·양금·장구 같은 악기를 배우게 했다. 또 춤은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망라하고 있었고 서양댄스, 서화도 교습 과목에 있었다. 권번은 이 같은 예능 종목은 물론 일반교양도 가르쳤다.
옛 조선의 기생은 궁중 향연에 나가는 ‘선상기(選上妓)’가 되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수양에 온몸과 정신을 기울이는 기생이 많았다. 그러나 권번의 기생들은 돈 많은 남자를 사귀지 못하면 그날그날의 생활이 문제였다. 그들은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몸치장을 해서 뭇 사나이에게 잘 보여야만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권번의 기생은 일종의 노동자였다. 이렇게 벌어 부모를 먹여살리고 동생을 공부시키는 갸륵한 기생도 있었던 반면에,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주인공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부모의 명령으로 어려서 결혼한 남자들이 구식인 아내에 대한 불만으로 신여성인 기생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미혼 청년이 기생한테 애정을 느껴 결혼을 약속했다가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목숨을 끊는 일도 생겼다.
“왜 사랑의 따뜻함을 모르겠나”
일반인이 보기에 기생의 생활은 화려하기만 했다. 당시 화류계에선 기생을 일시적인 희롱의 대상으로 여기는 풍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기생도 많았다. 손님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놀 때에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만,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싫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생의 목표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부지런히 돈을 모으자’는 것뿐이었다. 상당수 기생은 ‘여러 남성이 너에게 사랑을 속살거려도 귀 기울이지 마라. 그것은 대개 다 헛것이오,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일시적으로 인기가 좋고 명기 소리가 높아도 그것의 영원성을 믿지 마라. 봄이 가고 꽃이 늙어지면 문전이 냉락하리라’고 하며 스스로 경계했다.
기생들은 “우리도 왜 사랑의 따뜻함을 모르겠습니까.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에 쓰라린 눈물이 있고 아픈 한숨이 있습니다”라고 토로했다. 그렇다고 연애나 결혼생활을 아주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남성을 대할 때마다 그중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변하지 않고 일생을 같이할 남자를 찾아보는 것도 이들의 현실이었다.
“무엇을 하든지 모아놓고 보겠습니다.” “이 황금만능 세상에 돈 많이 있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돈 모아서 잘살아보겠습니다.” “23세까지만 기생 노릇을 하고 그 다음에는 공부한 후에 상당한 남자와 결혼하여 나도 사회의 일을 해보겠습니다.” 권번 기생들은 저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당시 평양은 ‘화류계의 평양’ ‘가수의 평양’으로 알려져 있었다. 패성(浿城), 즉 평양은 예부터 이른바 풍류객이 많이 태어나고 운집해온 땅이었다. 풍광절미(風光絶美)의 고장으로 통했다. 평양의 풍토, 습관, 전통이 예술적 소질을 기르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다음은 ‘삼천리’ 1935년 11월호에 게재된 가수 김상룡의 글 ‘도시 평양’의 한 대목이다.
“평양의 여자란 어떠한가? 섬약한가, 강인한가, 어떠한가. 나는 여기서 한마디로 평하기를 주저치 않겠다. 평양 여자의 기풍은, 좀스럽지 않은 것이 특징이요, 얼굴이 요염하지는 않지만, 대개 평양의 산수처럼 수려하다는 점이다.
이런 말은 내가 평양에 앉아 하기에는 부적당하겠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평양 사람이 다른 지방 사람보다 음악적 천분(天分)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평양엔 문인은 적게 나도, 음악가는 많이 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본래 기생이란, 맨 먼저 얼굴이 예뻐야 한다. 기업가의 자본주의적 상품으로서 시장에 내놓음에 있어서, 이왕이면 레코드 가수로 택하겠는데, 더구나 음악적 전통까지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시켜보면 한결 잘한다. 음성도 음성이려니와 얼굴까지 예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더구나 평양기생 하면, 듣기만 해도 노래는 잘 부를 걸로 상상된다.”
기생, 관광객에게 선풍적 인기
1930년대 조선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가 기생이었다. 그런데 ‘조선색 농후한 전통적 미를 가진 기생’을 볼 수 있는 곳은 평양기생학교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양 기생학교는 본래 명칭이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 기생양성소’인데 3년 학제였다. 대동강 부근에 있었고 그 일대에 산재한 10여 군데의 대규모 요릿집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평양 기생학교의 학생 수는 210명이었다. 1년 3학기였으며 매년 3월 학기말 시험을 통과해야 됐다. 이 기생학교는 평양의 명물이 되어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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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소리내는 법을 익히기 위해 3, 4개월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연습했다. 교사가 맞춤소리의 맞춤법, 무릎 치는 방법 등을 일일이 시범을 보이며 가르치면 여학생들은 이를 따라 했다. 기생들의 관심사인 서비스 방법, 손님 다루는 방법은 ‘예의범절’과 ‘회화’ 시간에 가르쳤다. 걷는 법, 앉는 법, 인사법 , 술 따르는 법, 표정 짓는 법, 배웅하는 법 등 연회 좌석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뤘다.
기생들은 남자의 마음을 끄는 기술에 관한 한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아는 재능이 있었다. 뛰어난 선배들이 모범을 보이고, 학교는 권번사무소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으며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기생 이야기뿐인 환경이었으므로 이 학교 상당수 학생은 겉과 속이 모두 기생다운 기생으로 양성되었다.
기생은 일제 강점기에도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 문화의 계승자요 선도자 기능을 해 왔다. 기생의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잡아야 하며 기생 문화 또한 복원될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