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인류역사와 함께해온 인문학은 위기를 모르는 학문이다. 위기를 통해 더욱 강해진다. 위기를 겁내지도 않는다.
대학도 덩달아 춤을 춰왔다. 상당수 대학이 ‘세계화’나 ‘국제화’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대학은 너나없이 모두 영어교육을 구호로 내걸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국제화, 특성화 바람이 분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대학, 특성화에 성공한 대학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대학은 고시, 취업 준비생의 공부방으로 전락했다.
요즘 대학에선 ‘이공계 기피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이공계는 위기’라고 한다. “기초학문을 비롯한 여러 이공계 분야가 죽게 됐다. 이공계 지원책을 마련하겠다”고 야단이다. 이공계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공계 기피 현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대학은 말로만 위기라고 하지, 그 위기를 해소할 방법은 전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엔 ‘인문학의 위기’가 부각되고 있다. 학술진흥재단이 ‘인문주간’을 정해 행사를 벌이고, 모 대학 인문대 교수들은 집단적으로 위기라고 말했다. 급기야 전국의 인문대학장들이 모여 엄숙한 표정으로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했다. 인문학에 몸담고 있는 필자가 이 위기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멀리서나마 마음을 함께하려 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의 ‘집단적 위기 선언’에 자괴심을 갖게 됐다. 아니, 분노했다. 이들은 성스러운 인문학을 위한다며 비(非)인문학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인문학자들의 非인문학적 행보
이들이 말하는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들의 위기’다. 오랜 인류역사와 함께해온 인문학은 위기를 모르는 학문이다. 위기를 통해 더욱 강해진다. 위기를 겁내지도 않는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을 문학적·역사적·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그야말로 모든 학문의 ‘지하수’이자 기초학문이다. 삶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죽음을 온몸으로 안기도 하고, 자연을 노래하는가 하면 우주의 신비를 상상하기도 한다. 어제의 지혜를 찾아 순례의 길을 가는가 하면 이제와 미래를 그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농업혁명이라는 신석기 시대의 거대한 역사변동을 거치면서 잉태되어 과학혁명, 산업혁명, 근대국민국가 등장, 제국주의 팽창이라는 인류사적 변화와 위기를 돌파하며 그 폭을 더욱 넓히고 그 깊이를 더욱 심오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삶을 성찰하며 앞날을 준비하는 학문으로 성장해온 것이다. 오늘도 이 땅의 수많은 인문학자가 비록 가난하지만 이러한 인문정신과 자부심으로 신자유주의의 풍랑과 맞서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에 대해 번민하고 고뇌한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인문학 위기 선언’에는 인문학적 담론(談論)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번뇌나 고뇌 대신에 인문학 안팎에서 삶을 꾸리는 이른바 인문학자들의 세속적 관심만을 담고 있다. 이들은 일자리로서 인문학, 밥벌이로서 인문학, 권력에 기대는 인문학을 추구하고 있다고 선언한 셈이다. 참으로 참담하다.
‘인문학 위기 선언’에 동참한 이들은 권력을 향해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애걸했다. 이들은 자못 엄숙하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 선언에 자기 성찰적 정신은 없었다. 단지 모든 것이 인문학을 위협하는 외부 환경 탓이고, 모든 것이 인문학에 무관심한 권력 탓이며, 모든 것이 인문학을 경시하는 사회 탓이라고 했다.
삶 속에 뛰어든 젊은 학자들이 희망
이들은 대학 안팎의 젊은 인문학자들,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연줄이 없는 인문학자들, 인문학 교양강의를 도맡아 하는 시간강사들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지에 대한 선배 인문학자로서의 고민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선언’을 한 이들에게서 희망을 보지 못한다.
젊은 인문학자들은 권력과 재력에 기대기를 거부할 것이다. 권력이 베푸는 시혜로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이들보다는 가난하나 참다운 인문학자로 남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있다. 젊은 인문학자는 학생 수가 많아 강의하기 힘들다고 선배들이 기피하는 교양과목을 담당하며 우리 삶과 인문학을 이어주고 있다. 선배들이 상아탑 안에 안주하며 위엄을 떨 때 이들은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선배들이 몸 사리고 있을 때, 이들은 세계의 인문학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선배들이 자기 학문의 울타리에 갇혀 있을 때 이들은 과감하게 이웃 학문을 넘나들며 인문학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왔다.
바로 이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인문학적으로 돌파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일방주의의 허상과 맞설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 전부를 인문학의 마당으로 삼는다. 이들에게는 대학 연구실만이 연구공간이 아니고, 대학 강의실만이 교육공간이 아니다.
이들은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연구하고 교육한다. 이 시대의 담론을 만들고 때로는 여럿이 공동체를 만들어 이른바 ‘강단(講壇) 인문학자들’이 시도하지 않는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보고 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같은 인문학 공간이 그런 곳이다. 스스로 위기를 극복해본 이들이, 자신감 넘치는 이들이, 인문학적 상상을 한껏 만끽해본 이들이 바로 인문학의 희망이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강단 인문학자들’과 대학 밖에 있는 ‘비강단 인문학자들’ 사이에 학문적 긴장의 마당이 펼쳐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상아탑 안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정통 인문학’을 지켜온 이들과 상아탑 밖에서 인문학적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쳐온 이들이 함께 만나 경쟁하는 가운데 인문학이 발전할 것이다.
인문학계엔 이상한 전통이 있다. ‘순종’을 이상하리만큼 좋아한다. 신임교수를 뽑을 때 학사, 석사, 박사를 한 분야에서 한 사람을 뽑는 경향이 있다. 역사학 학사를 받고 경제학 석사를 한 후 역사학으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 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채용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다른 나라 학계에서는 여러 학문을 나들이한 사람이 더 인기가 있다. 인접 학문의 시각과 방법을 참고할 수 있는 능력은 넓은 학제적 연구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계는 학제적 연구를 외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학제적 연구나 학문간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국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이 내놓은 21세기 과학교육을 위한 백서의 내용이 흥미롭다. 미국의 대표적 과학자들이 모여 오랜 연구와 논의를 거친 끝에 발표한 이 백서는 21세기 과학발전을 위해서는 인성교육(perso-nality)과 인문교육이 필연적이라고 선언한다. 과학자에게 인성교육을 강조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를 놀라게 한 대목은 ‘과학적 상상력(scientific imagination)’이 고갈된 과학의 위기 돌파를 위해서는 ‘인문학적 상상력(literary, historical and philosophical imagination)’이 필요하다고 선포한 대목이다. 경제, 정치, 과학 등 모든 학문은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을 포함한 인간의 문명은 사고의 문제, 의식의 문제, 상상력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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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는 인문학을 위해, 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을 위해, 더 나은 인류의 삶을 위해 여러 학문의 서로 다른 시각과 방법을 만나야 한다. 역사는 이런저런 생각, 이런저런 시각 그리고 이런저런 세력이 서로 만나 긴장하고 갈등할 때 발전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는 이공계 기피다, 인문학의 위기다, 소리 질러대며 권력과 사회에 애걸해선 안 된다. 인문학자는 인문학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기업이, 정부가 우리 공동체의 삶과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하여 스스로 인문학의 가치를 깨닫게 하면 되는 것이다.
인문학자는 배움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비인문학적 인문학 위기 선언을 할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정신으로 시대를 꿰뚫지 못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학자, 인문학도의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