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량진미폭음(膏粱珍味暴飮)의 습벽으로 나날이 불어나는 살. 나이가 들었다고 S라인을 찾고 싶은 마음까지 포기하랴. 모질게 마음먹고 추석연휴 단식원에 들어갔다. 마침내 7kg 감량. 일주일 후 체중계 바늘이 보여준 기적 같은 변화다. 지방흡입 수술은 가라! 비만탈출에다 건강까지 되찾는 단식의 세계….
입소 전, 체중이 57kg일 때 찍은 사진(왼쪽). 단식 7일째 모습(체중50.5kg)이다(오른쪽).
9월18일 통보받은 건강검진 결과다. 수치가 보여주는 진실은 이렇다. 다른 부위는 정상이지만 ‘배둘레햄’이 대(大)자 사이즈로 둘러진 몸매라는 것. 사우나 남탕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맹꽁이배 체형의 여성 유형이랄까. 20년 넘게 언론 현장에서 밥을 먹었으니 그 정도 수치는 약과라며 웃을 이도 있겠다. 맞다. 웃어도 된다. 배꼽티는커녕 허리 벨트를 매본 게 언제던가. 불룩한 허릿살을 완벽하게 가려주는 XL사이즈 티셔츠와 엠파이어 라인의 웃옷만 줄기차게 찾은 세월은 또 얼마인지.
‘언젠가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말이다! 장롱에 굳세게 걸어놓은 허리 25인치 시절의 그 벨트를 차고 나서보리라.’ 어리석은 바람 끝에 내다버리지 못한 허리띠는 또 몇 개란 말인가. ‘아줌마’란 이름으로 불려도 백번 천번 당연할 이 나이에 S라인을 찾고 싶은 맘을 들킨들, 그리하여 누가 웃은들 그게 뭐 어떻다고.
‘그래, 어쩌라고’ 스스로 묻고 배 퉁기며 검진결과지를 받은 날 저녁에도 술자리에 나갔다. 올 추석 연휴를 앞두고 2권의 주간지를 마감하며 가진 저녁모임과 기름진 회식은 도합 5차례. 그 2주일 사이 체중계 눈금은 또 조금씩 위로 향했다. 당연하지. 눈물나게 맵지 않으면 짠 음식, 기름에서 갓 건져낸 바삭 고소한 튀김류를 좋아하는데다가 ‘무주공산 유주명산(無酒空山 有酒名山)’이라고 ‘내 귀에 도청장치’는 늘 공명(共鳴) 중이니 할 말이 없지. 음주 후 꼭 찾는 뜨거운 국물은 또 어떤가. 나름대로 위를 줄여보겠다고 끼니를 건너뛰다 먹는 소나기밥은 또 어떻고.
사실 몸은 이미 1년 전에 심각한 경고를 보낸 바 있다. 정기검진 결과지에 기록된 체중 63kg.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해야 할 지 모르겠으나 좀체 체중계를 믿지 못하는 현상이 낳은 결과였다. 거울을 봐도 ‘음 괜찮구만, 이만하면’, 흡족까진 아니지만 불만스럽지 않은 몸매라고 생각했더랬다. 대학 3학년 때 46kg에서 쭉 50kg대 이하를 고수하다가 결혼, 출산을 거치고 30대 중반까지 결코 53kg 이상을 넘겨본 적 없었기에 체중계 눈금이 아무리 늘어나도 늘 3kg을 줄인 수치로만 인식하는 현상이 만든 자기 최면? 아니면 체중계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할까.
바넘 효과는 대다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취향을 유독 자신만 그러하다고 확신하는 상태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이런 경향은 특히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좋은 것일수록 강해지기 때문에 착각인 줄 모르고 제 편한 대로 규정하고 정당화한다는 것. 체중계 바늘까지 낮춰 본 착각도 다 그 속이리라.
하여 지난해 5월 1차 단식을 감행한 바 8kg의 체중감량에 성공했으나 고량진미폭음(膏粱珍味暴飮)의 습벽은 고치지 못했다. 그러니 황금의 연휴라는 추석 연휴 일주일을 앞두고 불어날 체중은 어떨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제사를 모셔온 지 10년째인 큰며느리가 차례상을 등진다는 게 될 일은 아니지만 올 추석은 남편에게 주부의 짐을 지우기로 하고 2차 단식의 장도(壯途)를 떠나기로 했다.
D-1일 : 단식 기념 소주 한 병 자작
이틀 전부터 단식에 대한 부담감이 엄습했다. 토요일 0시30분 마감을 끝내고 집에 들어와 씻고 나니 새벽 1시 반. 마감에 시달린 위(胃)가 뭔가를 넣어달라는 신호를 마구 보낸다. 피곤한 날은 잠도 안 오는 법이다. 늘 하던 대로 냉장고에서 술병과 안주거리를 뒤졌다. 더욱이 이 술은 단식 전 마지막 술일 터. 한 잔 한 잔이 각별했다. 그렇게 DVD 한 편을 보며 먹다 남은 치킨 두 조각으로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취침은 새벽 4시. 오전 10시에 일어나 간만에 대청소를 하며 허기를 달래다(단식해야 하니까) 결국 식욕을 못 이긴다. 오후 3시 박형진 시인의 책 ‘변산반도 쭈꾸미 통신’에서 배운 비법대로 라면을 끓여 먹고 밥 한 공기를 더 먹었다. 1차 단식 후 1년 넘게 이미 위는 늘어날 만큼 늘어났다는 증거다.
지압 중인 단식원 장익수 원장. 지압은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다. 오른쪽 사진은 단식원 첫 일과인 건강체크.
기필코 안 먹으려던 걸 먹었으니 맹세코 저녁은 먹지 말아야지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아까 참의 실수를 또 반복한다. 드라마 ‘사랑과 야망’을 보며 프라이팬에 버터 두르고 묵은지 쫑쫑 썰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드라마에선 태준의 재혼 통고에 미자가 울부짖고 있지만 밥은 맛있게 넘어간다. 자기 전 체중을 달아봤다. 57kg이다. 이어지는 후회의 뱃고동 소리.
제1일 : 단식 전 구충제 복용은 필수
일요일 오전이다. 갈등 중이다. 아침을 먹고 싶은데 차라리 오늘 푸지게 먹고 월요일 입소할까. 남편이 된장찌개를 데우나보다. 구수한 냄새. 에이, 그래 먹자 먹어. 청양고추 대여섯 낱을 씻어 밥상 앞에 함께 앉는다. 먹는 낙에 산다더니 어찌 이리 꿀맛인지. 된장찌개에 김치, 김, 콩자반, 풋고추에 된장뿐이지만 너무 맛있다.
배가 좀 차니 정신이 든다. 마음을 다잡고 구충제를 먹은 후 일주일치 짐을 쌌다. 단식하기 전 구충제 복용은 필수다. 칫솔 치약을 포함한 세안 세발용품, 여벌 옷 따위를 꾸리고 집을 나서 예약해둔 단식원으로 향했다. 1차 단식 때 효과를 본 그곳이다.
오후 1시 반, 서울 혜화동에 있는 J단식원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체중을 쟀다. 56kg다. 6박7일의 단식 경비(35만원)를 내고 회원카드를 작성했다. 굶고 살 빼는 데 웬 돈? 하겠지만 한창 단식 붐이 일던 7∼8년 전에는 싸게는 70만원에서 100만원을 호가하던 시절도 있었다. 장익수(張益洙·62) 원장이 주는 설사약을 먹고 배정받은 502호로 올라갔다. 약을 먹는 까닭은 장 안에 남아 있는 변을 몽땅 쏟아내기 위해서다.
이 단식원은 150명까지 수용한 적이 있던 큰 규모인데 오늘은 입소자가 몇 안 된다. 502호 4명, 501호 1명뿐이다. ‘마(魔)의 일주일’을 지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심란하다. 1층으로 내려가 원장 진료로 건강진단을 받았다. 혈압 80/110, 눕힌 상태로 배 부위를 진찰하니 간, 신장, 위가 모두 안 좋단다. 점수로 치면 평균 70점대 이하?
재차 온 덕에 직업병 셈인 견비통으로 오랫동안 고생해온 걸 잘 아는 원장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지압을 해준다. 우측 갈비뼈 6, 7, 8번 쪽이 왼편보다 많이 튀어나와 있고 등도 불룩하다니 장애에 가깝다 할까. 인체는 고무줄과 같아서 어느 부분의 긴장이 장시간 누적되면 쓰는 쪽이 반드시 오그라든다는 게 원장의 설명이다. 마우스를 쥐는 오른팔 근육이 한 방향으로 쏠리다보니 등이 틀어졌다는 얘기다. 뒷목과 척추 요추의 경혈을 누르는데 손끝이 닿는 데마다 으드득으드득 소리가 난다. 물론 건강한 이에게선 절대 날 리 없는 소리다.
장 원장은 감옥 시절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지압해준 이다. 1995년 5·18특별법으로 수감된 후 5공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27일간 옥중단식을 한 전 전 대통령이 탈진하다 못해 사지가 뻣뻣하게 굳자 장안의 유명한 지압사를 초청했던 것. 지압 후 2층 컴퓨터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단식원에서 새로 만들었다는 핀란드식 사우나에서 땀을 내고 나니 배고픈 줄 모르고 오후가 다 갔다.
제2일 : 죽염에서 고기 맛이…
단식원에선 통성명이란 없다. 데면데면 어색한 눈웃음을 주고받은 후 서로 눈을 피하는 것이 첫째 날과 둘째 날 벌어지는 풍경이다. 낯선 잠자리에서 좀 살쪘거나 좀 비만한 낯선 여인들과 첫 밤을 보내고 안내방송에 눈을 뜬다. 첫 일과는 건강 체크다. 1층 거실로 내려가니 커피 여과기에서 갓 내린 원두커피 향에 고픈 배 대신 코가 부르다. 연한 원두커피 한 잔에 죽염 한 알을 쿠키라 생각하고 먹는데, 혀로 굴려 먹는 죽염에서 어째 고기 맛이 난다. 죽염은 인체대사와 숙변배출을 돕는 기능을 하지만 하루 두 알 이상은 금물이다.
오전 마지막 일과인 피부 마사지. 각질 제거부터 각종 팩까지 일주일 단계로 진행돼 단식원 입소자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화려한 수사(修辭)는 대개 실속 없는 법. 효과가 그 정도일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첫 마사지를 받아보니 좋긴 좋다. 최소한 견비통은 잡겠다 싶었다. 내친 김에 오전 일과의 옵션 격(格)인 약돌 마사지 외에 추가로 ‘배둘레햄’ 제거(아니면 축소라도)에 기대를 걸고 제값(4회 시술 20만원)을 내고 복부 마사지도 받기로 했다.
타인의 손길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러브 어페어(Love affair)에만 이런 황홀이 있는 줄 알았다. 오전 3시간 내내 무방비인 전신을 남의 손에 맡긴 동안 이것이 진정한 휴가라는 생각을 했다. 원래 지압은 하는 이도, 받는 이도 진기(眞氣)를 빼앗기는 것. 황홀이 가시기도 전에 방으로 돌아오는 무릎이 풀린다. 침대는 과학이 아니라 쓰러지라고 있는 거다. 정말이지 눕는 일 외엔 어떤 일도 못할 것처럼 온몸 온 신경이 누우라고, 쓰러지라고 침대로 떼민다.
주린 배 대신 밀려온 졸음은 달았다. 잘 자면 살도 더 잘 빠진다고 한다. 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화증(火症)이나 근심을 안고 단식하면 효과가 반감한다.
두 시간의 휴식 후는 산책. 성북동 쪽으로 올라가 북악산 성벽 길을 돌았다. 단풍이 채 오시지 않은 북악산 언덕, 조선의 성벽에 감기는 것은 가을일까 석양일까 못다 이룬 사직(社稷)의 회한일까. 그 길을 살 빼기 위해 걷고 있는 우리라니.
단식원으로 돌아오면 다시 한 시간의 휴식이 있고 요가와 사우나를 마치면 일과가 끝이다. 35만원=특급 호텔 1박=중저가의 백화점 정장=국내 고급 브랜드 시계=가죽 부츠 한 켤레=핸드백 하나. 얼추 뽑아본 대한민국의 35만원 가치(價値)들이다. 이 돈으로 7일간 어디서 이런 호사를 누리겠는가. 이 돈으로 어느 병원서 5kg의 살을 빼겠는가.
목표치 5kg 중 900g이 줄었다.
제3일 : 눈으로 먹는 즐거움
단식은 3∼4일째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 분당에서 온 B씨(43·미혼)가 거의 실신 직전이다. 어젯밤부터 머리가 아프고 구토가 인단다. 규칙적인 배식에 길든 몸이 단식을 거부하는 현상이다. B씨 만큼은 아니라도 누구나 힘든 시기를 거치는데, 이런 경우 대개 사탕 한두 알이나 식혜 등을 마시면 금방 기운이 난다.
증세가 심한 B씨에게는 죽이 처방됐다. B씨는 빈혈에 맥박도 약하고 혈압도 높은 편인데다 심장 약까지 복용 중이었으나 단식 3일째인 오늘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B씨의 원기를 보충하려 원장이 알 큰 포도송이까지 사왔는데 정작 본인은 어지러워 침대에서 못 일어난다 하니 B씨 덕에 나팔 분 이는 성한 사람들뿐이다.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말 중에 단식에 관한 구절이 있다. ‘단식은 인간의 신체를 대청소하고 난치병과 만성질환의 근본원인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 중국에서도 암을 비롯한 난치 질환자에게 벽곡(壁穀·곡기를 끊고 기를 먹고 사는 수행법)을 권한다고 들었다. 그래서일까. 같은 502호를 쓰는 꽃꽂이 강사 K씨(46) 역시 고혈압과 심박 이상으로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단식으로 체중을 줄인 이후 거짓말처럼 건강해졌다고 했다.
이런 사례는 많다. 두 달 전 입소했던 이추자(65)씨는 ‘발작성 상실성 빈맥, 발작성 심방 빈맥, 빈맥-서맥증후군(pause= 3.1ch), 이섬유속 차단(RBBB+LPFB)’이란 복잡한 병명이 적힌 두툼한 진료기록지를 들고 마지막으로 단식원을 찾은 경우다. 병 치유를 위해 벌써 여러 군데의 병원을 전전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왔다고 했단다. 이형협심증에다 고혈압, 1분에 40회(정상 60∼100회)밖에 안 뛰는 맥박으로 길 걷다가도 졸도하기 예사였다. 일주일간 머물면서 6kg(66.7→60.7kg)를 빼고 난 후 병증의 예후는 씻은 듯 사라졌다. 하도 희한해 최종 진료한 병원에서 재검을 해봤는데 병이 없자 의사도 고개를 갸웃하며 “살을 더 빼면 건강이 훨씬 좋아지겠다”고 한 얘기는 이추자씨 부부가 인사차 직접 들러 해준 말이다.
오후엔 풍광 좋은 곳을 찾아 1~2시간 산책을 한다. 한적한 추석날 산책길로 잡은 창경궁과 종묘길.
예시한 두 사람은 모두 단식의 효과를 절감하고 병을 고친 답례로 자신들의 질환 기록을 필요한 경우 얼마든지 사용하라고 자료를 보내왔다고 한다.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방간 정도가 1차 단식 후 많이 좋아졌던 걸로 기억한다. 역류성 식도염이 있었는데 올 검진에선 그 항목도 없다.
돌리는 방송채널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먹는 신’들의 행렬, 도저히 먹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는 광고의 홍수로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즐거운 3일을 보내고 있다. 눈으로 그 음식들을 열심히 먹고 있는 중이다(흐흐, 때로 상상은 현실로 통하는 법). 연애할 때도 못 와본 북악 스카이웨이를 산책 삼아 갔다 왔다. 희희낙락 연휴 맞은 커플들과 가족들은 죄다 먹거나 마시거나 먹을거리를 들고 있는 장면만 줌인된 날, 떡볶이와 아귀찜과 이북만두가 날아다녀도 잠은 자야 한다. “꿈이로다 꿈이로구나” ‘먹는 꿈’ 타령을 그칠 날을 위해 말이다. 먹는 타령을 해서일까, 오늘은 700g 감량.
제4일 : 물은 하루 두 되 이상 마셔야
어제 허기증에 죽을 먹은 B씨를 빼면 이번 팀은 성적이 매우 좋은 편이다. ‘마(魔)의 3일’을 못 참고 현장을 이탈한 이가 한 명도 없다. 지난해 단식 때는 유명하다는 ‘혜화동 칼국수’나 청국장 백반, 삼겹살까지 몰래 먹고 오는 이들을 봤다. 이는 어느 단식원이나 예외 없는 현상인데 이번 연휴 단식 팀은 독하다 해야 할까.
단식 중 빈속은 물로 채워야 한다. 단식 중에는 인체에서 수분이 먼저 빠져나가므로 하루 두 되 이상의 물을 마셔야 한다. 물은 노폐물을 제거하며 소화 장기가 들러붙는 것을 막아준다. 인체는 단식 상황에 놓이면 에너지원으로 저장탄수화물을 사용하는데, 근육단백질을 포도당으로 전환해 쓰다가 생체에 필요한 만큼의 근육단백질만 남긴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체내지방을 끌어다 쓴다고 한다.
단식은 길어지면 위험하다. 지방이 포도당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케톤체(ketone體)’라는 유독물질 때문이다. 케톤체는 생체 내에서 물질 대사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때 생성·축적되는 아세톤군(群)을 일컫는다. 이들은 체내에 축적되다가 뇌로 흘러들어가 중추신경계를 망가뜨리는데, 앞서 언급한 전 전대통령이 탈진 마비됐던 이유도 케톤체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가물어가는 몸과 정비례하듯 정신은 점점 맑아진다. 배도 고프지 않다. 경희대 의료원 한방재활의학과 신현대 교수 팀의 HRV 검사 결과에 따르면 단식 초기에는 자율신경계가 심각한 불균형과 무기력 상태를 보이다가 2차 검사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였다고 한다. 502호 동료인 동갑내기 ‘아줌마’ Y씨(43)가 일본인 신랑과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다. 물론 일어 통화다. 결혼한 지 3년차인 신혼부부는 수시로 서로를 확인한다. “오니상, 아이타이, 이마 나니 시떼루(오빠, 보고싶당, 지금 모해)?” ‘닭살 애교’ 통화에도 끄떡없는 내 정신의 항상성…. 맑기가 순도 100%다.
오늘은 오전 일과 후 청계천변을 걸었다. 순수의 결정체처럼 변해가는 몸에 맞춰 후각도 예민하기 그지없다. 청계광장에서 출발해 오간수교까지 다리 아래를 지날 적마다 진동하는 시궁창 냄새가 괴로웠다. 세운교부터 나기 시작한 냄새는 산책길 끝까지 코를 쥐게 만들었지만 그늘을 찾아 그 다리 아래서 뭔가를 먹으며 휴식하고 있는 사람들로 보건대 내 코의 기능은 비정상이거나 슈퍼울트라급(級)이 됐거나 둘 중 하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여자 사립고등학교 2학년생이 또 입소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혼자 유학했다고 한다. 성장기의 동양인이 기름진 서양음식만 먹었으니 살이 안 찔 수 없다. 158cm 키에 69.9kg이다. 요가시간에 보니 비만해도 신체 유연성은 끝내준다. 그 어렵다는 ‘옥주현 요가’를 동작 하나 안 틀리고 다 따라 한다.
800g 감량으로 현재 체중 53.6kg다. 다들 하루에 1kg 이상씩 빠지고 있는데 딴 사람에 비해 감량 속도가 너무 완만하다. 단식 중 온다는 정체기인가?
제5일 : 식(食)에 대한 집착의 끈
위장이 비면 잠도 없어지는 걸까? 502호 손님들 중 제일 큰언니인 L씨(59)는 초저녁잠이 많은 대신 새벽 세 시면 깬다. 일어나 잠깐 용무를 보고 방으로 되돌아와 다섯 시까지 한잠을 더 주무시고는 “밤새 잠이 안 와 혼났다”고 꼭 한마디 한다. 잠 안 온 탓에 L언니의 숙면 궤적이 밝혀진 날이다. 가늘게 코까지 골며 자는 L언니를 제외한 세 명은 푸지게 수다를 떨었다. 이틀 전 서로에 대한 탐색은 이미 끝났다. 수다의 주제는 죄 살과 음식에 관한 얘기다. 간혹 불륜(반드시 남 얘기다)이나 남편들도 등장하긴 하지만….
먼저 ‘살’에 관한 수다. 일본댁(Y)과 플라워 아티스트인 언니(K)는 그 방면의 내공이 상당하다. 둘 다한창 유행하던 IPL(레이저로 일시적 화상을 준 후 피부를 재생하는 기술)을 받았는데, 1회만 받은 Y와 달리 수차례 시술을 받은 K언니는 경상도 말로 “얼굴을 베리뿟다”고 했다. IPL을 받으면 석 달간 자외선을 피해야 한다. 백인 피부에 맞게 개발된 치료법이라 멜라닌이 많은 동양인들은 빛에 노출되면 금방 얼굴이 기미 낀 듯 검어진다고.
IPL 외에 형광등 빛도 쬐면 안 돼서 석 달간 얼굴 전체를 커버하는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한다는 신피 재생술, 콜라겐 주사, 해초 박피, 다이아몬드 필링, 폴라리스, 아이투피엘(I2PL), 필러 등등 난생 처음 들어보는 피부과 용어들이 줄줄이 등장해서 어안이 벙벙하다. 박피나 필링까지는 알겠고 나머지 용어들엔 적당량의 미소를 섞어 들어주었다(아는 척하기도 쉽지 않다). 폴라리스와 I2PL은 IPL의 확장 버전이고, 필러는 얼굴주름을 메워주는 신기술이란다. 연예인들은 허벅지나 배의 지방을 빼내 얼굴에 주입, 젊은 피부로 유지한단다. 요즘 돈 좀 쥐고 사는 이들은 보톡스보다 필러를 선호한다고. 보툴리누스 독(毒)이 주성분인 보톡스는 소변으로 배출된다고는 하지만 잔류물질이 체내에 남는 탓에 아무래도 인체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는 것. ‘믿거나 말거나’ 수다이므로 의료진을 통한 사실 확인은 생략했다.
지방제거(흡입)술은 아마 모든 단식원의 공통 화제가 아닐까 한다. 복부비만이 대세인 중년 여인들에겐 특히 혹할 주제이기 때문이리라. 지난해 1차 단식에서 만난 여자 고속관광버스 기사 K씨(47)는 레이저로 아랫배 지방을 여러 덩이로 절개해 끄집어냈다며 사우나에서 10cm에 가까운 수술자국을 보여주기도 했다. Y는 지방흡입술은 절대 받지 말라고 만류한다. 수술 후 한 달간 복대 착용은 필수요, 매일 초음파 치료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부체질에 맞지 않아 수술 부위가 빨래판처럼 변한 여자도 보았다고 했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지만 때로 입소문이 더 정확할 경우도 있음을 상기하기를.
K언니에게 전수받은 요리 레시피 11가지는 수첩에 잘 적어놓았다. 콩나물은 데친 후 반드시 찬물에 식혀 요리하기, 단호박과 토란은 살짝 삶은 후 껍질을 벗기면 수월하고 미역국은 소금 간보다 멸치액젓이 더 낫다는 것까지, 결혼 20년차 요리달인의 비법이 ‘살’ 얘기보다 솔깃했다. 보식기간이 끝나면 살면서 아직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은 만두 빚기에 도전해보련다. 찹쌀밀가루에 올리브유 약간 넣어 치대다가 상온에서 숙성시키는 동안 소를 준비하면 끝나는, 매우 간단한 일인 것을 왜 여직 못해봤을까.
‘식(食)에 대한 집착의 힘든 끈’, 단식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무용가 홍신자 씨가 어디선가 한 말이다. 남산 산책길에서, 먹어야 살고 살기 위해 먹다가 길디긴 시간 후 다시 먹이가 되는 ‘지구적 가오스’ 속 인간에 대해 어림하다 끝내는 ‘만두’로 생각이 튀고 만다.
오늘 일과는 끝났다. 방송 화면엔 볼이 미어져라 갓 쪄낸 송편을 먹고 있는 리포터가 보인다. 고 야들야들한 송편껍질, 딱 한 입만 먹었으면 원이 없겠다. 집에선 남편이 차례 음식 준비를 열나게 하고 있겠지. 5일째의 허기는 미안하다거나 보고 싶음 따위의 감정치레를 용납하지 않는다. 900g이 줄었다.
제6일 : 쇄골본색(碎骨本色)의 기쁨
드디어, 거울 속의 내가 내가 아니다. 얼굴 부기가 내리니 피부까지 얇아졌나보다. ‘대두(大頭)족’의 비애는 진정 오늘 내일로 끝이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솟는다. 쇄골본색(碎骨本色), 빗물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제 모습을 찾은 사랑스러운 쇄골이여. 내친 김에 웃옷을 들춰 약돌 마사지를 3회 받은 배도 비춰본다. ‘약간 줄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휴일에는 일과를 진행하지 않는다. 11시까지 휴식하다가 대형 불가마 사우나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땀내는 걸 싫어해 목욕탕말고 찜질방이란 데가 왜 필요한지 반문했던 지난날들에 사과한다. 일행이 간 곳은 서울 월곡동의 7층짜리 대형 사우나다. 온 국민의 총체적 레저를 책임지는 곳처럼 식당가부터 즐길거리, 볼거리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4시간 동안 불가마 한증막과 얼음방을 7차례 오갔다. 중간에 지치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어도 누구 하나 개의치 않아 맘이 편했다. 사우나에서, 태어난 후 가장 땀을 많이 빼서인지 몸무게가 많이 줄었다. 1.4kg 감량, 감격스러운 51kg대 진입이다.
제7일 : 놀라운 단식의 힘
마지막 날이다. 장 원장이 9월 초에 받았다며 영문 자료 한 권을 보여준다. 국제암센터 한국대표이자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강대희 교수팀이 보내온 독일 국제암학회 발표 문건이다. 자료에는 지난해 이 단식원을 방문한 여성 450명의 단식 전·후 혈액을 채취한 후, 이 중에서 50명의 혈액을 선별해 분석한 ‘단식이 인체에 주는 영향’이 기록돼 있다.
결과는 놀라웠다. 과잉 생산된 유해산소를 억제하고 ‘자연살해세포’로 불리며 암세포를 직접 파괴하는 면역세포인 NK세포가 생성됐다. 몸에 남아 있는 약물이나 농약류, 방부제 따위의 인체 유해 독소가 제거됐다. 단식이 지방분해 작용과 혈액순환도 촉진했던 것.
인간의 의지와 별도로 몸은 스스로 방어하고 치유하는 생명력을 가졌다.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알렉시 카렐은 ‘단식은 몸을 정화시키고 조직을 개선하며 독소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능을 한다’고 했다.
사람의 몸에 쌓이는 독은 음식 섭취로 인한 것과 인체 스스로 화학작용해서 만들어내는 독, 두 가지로 나뉜다. 이제는 단식이 비만치료용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다. 이런 독소의 배출과 질병까지 낫게 하는 힘이 바로 단식이다.
7일간의 기아 체험은 종료됐다. 현재 체중은 50.5kg이다. 일주일간 담배를 완전히 끊고 체질을 바꾼 청일점 아저씨도, 헛구역질하던 B씨도 밝은 얼굴로 단식원을 나선다. 같은 날 들어온 502호 ‘통통녀’들은 품이 한줌이나 넘게 줄어 옷이 다 헐거워 보인다. 단식원 단골인 일본댁은 다음에 올 땐 66사이즈에 도전하겠지.
덜어낸 살만큼 차디찬 정신이 들어왔을까. 몸 가득 채워진 이 충만(充滿)은 뭐란 말인가. 가을햇살에 비로소 은화(銀花)처럼 반짝거리는 온전한 내 정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