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 전 노스캐롤라이나. 바람 많은 대서양 연안의 오지(奧地) 키티호크에서 고교 중퇴생 형제가 인류 역사의 새 지평을 연다. 그들이 만들어낸 비행기는 인류의 언어와 사상, 가치를 하나로 모아 전세계에 민주주의를 확산시켰고, 나라를 넘나드는 혁명적 경제활동을 가속화했다. 빌 게이츠는 글로벌 시대의 첫 장을 열었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지금의 ‘초고속 인터넷’에 비유한다.
1903년 라이트 형제에 의해 역사상 최초로 12초 동안 하늘을 난 비행기 ‘플라이어’.
그러나 다음 순간 플라이어의 동체가 갑자기 아래로 기울었다. 오빌은 상승키가 지나치게 아래로 젖혀졌음을 직감했지만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었다. 플라이어는 모래벌판을 잠시 날다 곧 기슭에 내려앉고 말았다. 출발 지점으로부터 120피트(약 36.6m) 떨어진 곳이었다. 플라이어는 정확히 12초 동안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플라이어는 바람을 탄 것이 아니라 분명 바람 속으로 날아갔다. 뒷날 윌버는 이렇게 썼다.
“이 비행이 계속된 것은 12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세계 역사상 인간을 태운 기계가 제 스스로의 동력으로 하늘로 떠올라 속도가 떨어짐이 없이 앞으로 비행한 최초의 사례다.”
새처럼 하늘을 날고자 한 인간의 오랜 소망이 성취된 순간이었다. 1903년 12월17일 10시 35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키티호크.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노력한 가장 위대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형제가 이룩한 업적에 대한 찬사는 인간사에 끼친 영향으로 볼 때 이런 말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거창한 선언서나 펄럭이는 이념의 깃발, 혹은 노도와 같은 군중의 함성은 없었지만 분명 크나큰 혁명이었다.
천상의 세계로
바로 이 12초의 드라마로 인간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를 기점으로 수백만년 동안 대지에 갇혀 지내던 인간은 홀연 저 광대무변의 우주를 인간사의 무대로 귀속시키면서 3차원의 세계로 비약한 것이다. 중세 이래 신의 처소로서 오로지 신의 각별한 은총을 입은 자만이 흘낏 엿볼 수 있던 곳, 그래서 파스칼로 하여금 무한한 외경심을 품게 하던 곳, 동양의 시인묵객들이 비속한 현실의 초월적 지평으로 동경하던 곳, 그 천상의 세계가 이제 인간의 일상적 삶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다.
하늘의 정복은 인간의 행동반경을 무한히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삶을 보는 시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물론 인간의 사회적 관계 또한 변화했다. 이제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은 자기 환상에 젖은 철학자의 한가한 객기로만 볼 수 없게 됐다. 키티호크의 세찬 바람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름으로써 인간은 산업혁명 이후 누려오던 자연의 정복자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그 전리품으로 신이 누리던 권능의 향유를 더욱 탐하게 될 것이었다.
인간의 제반 사회적 관계도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바다와 산, 강과 절벽이 갈라놓은 지형적 장애가 무의미해지면서 국가의 경계를 포함한 모든 인위적 장벽 또한 하찮은 것이 되어갔다. 그러기에 1909년 7월25일 블레리오(Louis Blriot)가 영국 독자성의 표상이던 영불해협 횡단 비행에 성공하자 프랑스인들은 열광했다. 미증유의 살상을 초래한 제1차 세계대전도 기실 이 기술혁명으로 재편된 새로운 사회적 질서가 부정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전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세계화·국제화는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플라이어가 키티호크의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키티호크는 낯선 이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뒤바꾼 기술혁명의 진원지 키티호크가 정작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버지니아 체사피크 만 남단에서 대서양을 향해 아래로 ‘혜성의 자취처럼’ 길게 뻗어 내려간 반도를 찾아보라. 이 반도는 노스캐롤라이나의 해안을 봉긋한 젖가슴 모양으로 감싸면서 점점이 섬들로 이어져 저 아래 남단 윌밍턴에 이른다. 그 형상 그대로 아우터뱅크스라 불리는 이 방파제가 남쪽으로 잠시 내려가다가 안으로 넓게 열린 앨버말 만과 만나는 곳, 그 해안가에 수줍은 듯 숨어 있는 작은 도시가 키티호크이다.
바람의 도시 키티호크
라이트 형제가 비행 시험을 한 곳은, 더 정확히 말하면, 키티호크에서 4마일 가량 더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는 킬데블힐스의 모래벌판이다. 이 지역은 오늘날 해안 별장과 콘도미니엄이 즐비한 휴양지로 탈바꿈했지만, 라이트 형제가 오하이오의 데이턴에서 이곳을 처음 찾은 20세기 초엽만 하더라도, 대서양의 거친 파도에 밀려 좌초한 배들의 용골이 흉물스럽게 나뒹구는 해안을 따라 6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라이트 형제가 열어놓은 하늘길을 타고 먼 동방에서 키티호크로 날아온 길손이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공원(Wright Brothers National Memorial)을 찾은 것은 2002년 9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인근의 로아노크 섬에 들러 롤리 유적지를 둘러보고 워싱턴 바움 다리를 건너니 바로 장장 250마일에 이른다는 아우터뱅크스가 좌우로 펼쳐져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길게 뻗은 이 모래벌판의 중앙을 관통하는 지방도 158번을 타고 북쪽으로 20분쯤 달리자 라이트 형제 기념공원이 자리한 킬데블힐스가 보인다.
가로의 양옆으로 들어선 가게와 숙박시설 때문에 바다가 곧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건물 사이로 이따금 보이는 모래벌판과 짙푸른 하늘을 나는 갈매기떼가 바닷가에 와 있음을 실감케 한다. 킬데블힐스는 오늘날 독립된 시가지로 성장했으나, 1900년 초 당시에는 키티호크 외곽의 황량한 모래벌판에 지나지 않았다. 이 모래벌판에 솟아 있던 4개의 작은 언덕 중 제일 높은 곳을 이곳 사람들은 킬데블힐이라고 불렀다. 이런 험악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킬데블’이라는 상표의 럼주 병이 파도에 밀려와 인근 해안가에 쌓이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늘을 정복하고자 꿈을 꾼 다빈치의 후예 라이트 형제가 멀리 오하이오에서 굳이 이 오지를 찾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바람 때문이었다. 비행에 뜻을 두면서부터 형제는 연과 글라이더로 비행 실험을 여러 번 했다. 커다란 연과 글라이더를 띄우기 위해서는 적어도 시속 15마일 정도의 바람이 불어줘야 하는데, 그들의 고향 오하이오 데이턴에는 그런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기상청에 비가 자주 오지 않으면서 바람이 늘 일정하게 부는 지역이 어디인지 거듭 문의했다. 그래서 추천을 받아 정한 곳이 이곳 키티호크였다.
그들을 키티호크로 부른 또 다른 요인은 이곳의 모래벌판이다. 널따랗게 펼쳐진 모래벌판은 글라이더의 파손이나 신체 부상의 위험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무가 별로 없이 모래밭이 적당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점 또한 그들의 마음에 들었다. 이런 기상적·지형적 장점에 덧붙여 키티호크의 격절된 환경 또한 비행 실험 장소로 이상적이었다.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과 이목을 피해 마음놓고 실험할 수 있고 또한 새로운 비행 기술 개발의 소문이 새어나갈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키티호크의 이런 여러 가지 이점은 배를 타야 출입이 가능한 교통의 불편함이나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는 생활 환경의 열악함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최종적으로 키티호크를 실험 장소로 정하고 수많은 글라이더 실험을 계속해가면서 라이트 형제는 그들의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를 이어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온 순박한 키티호크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 형제의 야심찬 도전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묵묵히, 헌신적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실험을 했던 키티호크 인근 ‘킬데블힐스’ 모래벌판.
라이트 형제 기념공원은 바로 158번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440에이커에 이르는 공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풀밭이 싱그러워 보인다. 라이트 형제가 1900년부터 3년에 걸쳐 비행 실험을 한 바로 그 모래벌판 자리이다. 1928년 기념공원을 조성하면서 측량해보니 가장 높은 봉우리이던 킬데블힐이 원래의 장소에서 남서쪽으로 무려 450피트나 이동한 것으로 확인됐다. 강한 바람 때문에 모래가 날려 그렇게 된 것이다.
기실 아우터뱅크스 자체가 한 해에 약 20피트씩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긴 해안을 따라가며 파도가 바닷가 쪽 해안의 모래를 끊임없이 만 쪽 해안으로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래벌판을 원래대로 보존하려던 계획을 바꿔 잔디와 ‘버뮤다 그래스’를 심어 초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9월 초순이지만 짙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의 열기가 아직 강렬하다.
바로 한 세기 전, 라이트 형제 또한 이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비행 실험에 전념했으리라. 그들은 데이턴의 자전거 상점 일이 하한기를 맞는 여름 한 철을 이곳에 와 지내면서 실험을 하고, 데이턴으로 돌아가서는 실험 결과를 토대로 연구를 계속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첫 해에는 텐트를 치고 지냈고, 이듬해인 1901년에 비로소 작업실을 마련했고, 그 이듬해에는 점점 커지는 글라이더를 보관할 격납고 건물을 덧붙여 지었다. 안내센터 건너편에 복원해놓은 소박한 작업실과 격납고의를 통해 일념으로 실험과 연구에 매달린 그들의 금욕적인 삶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어김없이 아침 7시에 일어나 온종일 일을 하고 오후 5시에 멈췄지요. 지금껏 그렇게까지 일에 열중한 사람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키티호크 해안 구조대원으로 그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도와준 존 T. 다니엘스의 술회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비행 실험을 엉뚱한 치기로 혹은 신의를 거역하는 불경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던 이곳 사람들의 헌신적 도움을 이끌어낸 것도 이들의 이와 같은 집념과 금욕적인 작업윤리였다.
윌버 라이트는 1867년 4월16일 인디애나의 밀빌에서, 오빌 라이트는 그보다 4년 뒤인 1871년 4월19일 오하이오의 데이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모라비아교파 교회 목사인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읽기를 즐긴 형제는 유난히 기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다준 장난감 헬리콥터로 말미암아 호기심 많은 두 소년은 비행에 관심을 갖게 됐다. 모형 헬리콥터에 대한 흥미는 그것을 직접 만들어보는 일로 발전했고 그것은 다시 연날리기로 이어졌다.
윌버의 행복했던 소년 시절은 스케이트를 타다가 입은 부상으로 마감된다. 부상이 쉬이 치료되지 않아 윌버는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이 때문에 대학 진학도 포기한다.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한 윌버는 1892년 데이턴에 자전거 가게를 열었고 얼마 후 역시 고등학교를 중퇴한 오빌이 가세했다. 창의적인 운영으로 그들의 자전거 사업은 번창했다. 경제적 여유를 얻으면서 잊었던 비행에 대한 관심도 되살아났다.
형제가 비행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것은 1896년 글라이더 실험 비행으로 주목을 끈 독일인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의 추락사와 미국 스미소니언 연구소 새뮤얼 랭글리(Samuel Langley)의 무인 글라이더 동력 비행 성공 소식을 듣고서였다. 두 사람의 실패와 성공의 틈바구니에서 형제는 자신들의 갈길을 찾은 것이다. 이들은 스미소니언 연구소에 최근의 연구 성과를 문의하는 한편 비행술에 관한 각종 자료를 구해 읽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글라이더를 만들어 직접 날려보면서 최근까지 이룩된 비행 성과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의 성공은 갑작스러운 창안의 결과가 아니라 이처럼 기술적 난관을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상승-추진-균형’을 실현하다
비행은 상승, 추진력, 조종이라는 세 가지 기술이 조화를 이뤄야 가능하다. 라이트 형제는 당시의 항공역학과 기술공학의 성과만으로도 앞의 두 요소, 곧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기를 뜨게 하고 그것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문제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관건은 비행시 방향 바꾸기와 선회의 문제였다.
비행실험에 쓰였던 송풍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골몰한 라이트 형제는 새들을 유심히 관찰하다 그 열쇠를 발견한다. 키티호크 해안에서 쉬이 볼 수 있는, 날개가 5∼6피트나 되는 가마우지는 특히 이들의 각별한 관심 대상이었다. 새들이 선회할 때 날개를 약간 비트는 점에 주목한 이들은 글라이더의 날개를 곡면으로 만들어 실험해보았다. 수십 번의 실험을 통해 그들은 그 관찰이 정확한 것이었음을 확인하고 최적의 곡면각을 얻기 위한 실험을 계속했다.
그들은 이 실험을 위해 송풍기(wind tunnel)를 고안하기도 했다. 비행기의 이륙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인 날개의 길이에 관한 과거의 데이터들이 잘못됐음을 확인한 것도 이 송풍기를 이용한 실험에서였다. 그들이 산출한 부양력과 날개 길이의 비율은 오늘날 큰 오차가 없이 정확한 것으로 판명됐다. 그들은 이처럼 창의성과 분석력을 겸비한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비행기의 추진력 문제 해결에서도 형제는 번뜩이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들은 비행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당시 상용화 단계에 있던 가솔린 엔진을 변형해 최소화하고 그 대신 프로펠러를 달아 극대의 효과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프로펠러는 선박에 이용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쓸 만한 데이터가 거의 없었다. 형제는 다시금 송풍기에 의존한다. 실험을 통해 그들은 공기 중에서는 프로펠러가 물속의 경우와는 달리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마침내 힘이 날개의 전체에 골고루 미치는 왜곡된 형태의 프로펠러를 만들어냈다.
열정의 ‘아마추어’
이렇게 얻은 성과를 수많은 글라이더 실험을 통해 점검하고 재확인하면서 형제는 1902년에 이르러 상승과 추진력 그리고 균형이라는 3차원의 비행 방정식을 이론적으로는 완벽하게 해결한 상태에 있었다. 1903년 시험 비행에 나선 플라이어는 이를 토대로 제작된 것이다.
세계 최초의 유인 동력 비행기로 기록 된 플라이어는 12마력의 가솔린 엔진을 장착하고, 직경 8.5피트의 쌍발 프로펠러를 날개의 뒤쪽에 부착한 쌍엽기였다. 날개의 길이는 40피트 4인치에 달하고, 폭은 6피트 6인치, 날개 전체의 면적은 510평방피트였다. 비행기 전체의 무게는 605파운드(272kg)였다.
첫 시험 비행은 1903년 12월14일에 있었다. 형제는 동전을 던져 첫 비행의 주인공을 정했다. 영광은 윌버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첫 비행은 상승키의 조종 미숙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플라이어는 날아오르는 듯하다가 곧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파손된 비행기를 수선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이윽고 사흘 후인 1903년 12월17일, 두 번째 시험 비행에서 그들은 마침내 인간이 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오빌이 방향타를 잡은 첫 비행은 120피트를 난 데 불과했으나 세 차례 더 계속된 그날의 비행에서 윌버가 행한 마지막 비행은 59초 동안 852피트를 나는 쾌거였다. 그들은 데이턴의 집으로 성공을 알리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 역사적 위업을 사람들은 잘 믿어주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을 보도한 신문은 미국 전역에서 4개의 지방지뿐이었다. 그 엄청난 일을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자전거 수리공 형제가 해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성능이 현저하게 개선된 비행기로 수십 차례의 비행 묘기를 보여준 몇 년이 지나서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비행기의 특허 신청도 이런저런 분쟁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었다. 20여 년 뒤인 1927년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했을 때 미국인들이 보여준 열광과 비교한다면 라이트 형제의 위업에 대한 사회적 보상은 정말 초라한 것이었다.
라이트 형제의 삶은 벤저민 프랭클린을 필두로 해서 토머스 제퍼슨, 헨리 포드로 이어지는 자수성가한 위대한 창조자에게서 우리가 마주치는 하나의 전형적 태도, 곧 비상한 호기심과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여준다.
라이트 형제 기념관에 있는 기념탑.
새로이 제작된 플라이어 2호로 105번의 시험 비행이 행해진 1904년에 체공(滯空) 시간은 최장 5분 4초로 늘어났고 비행거리도 3마일을 넘어섰다. 이어 1905년에 만든 플라이어 3호는 방향 조종은 물론 선회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더욱 향상된 성능으로 체공 시간을 30분 이상으로 늘리고 비행 거리도 최고 24마일을 기록했다.
1909년 윌버가 유럽인들의 탄성을 자아낸 프랑스 순회 비행을 마치고 귀국해서야 비로소 미국사회는 라이트 형제의 위업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고향 데이턴 시민들은 두 형제를 하늘을 정복한 영웅으로 환영했고, 미국 의회는 그들에게 공로 메달을 수여했다. 그해 9월, 윌버는 뉴욕시 창립 300주년 기념제에서 100만명의 뉴욕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맨해튼 상공과 자유의 여신상을 멋지게 선회 비행함으로써 이제 비행은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미국인들에게 생생하게 각인시켰다.
100년 후 ‘디지털 혁명’의 초석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문자의 발명 이후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문화적 업적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비행기는 사람과 언어와 사상과 가치를 하나로 모은 그 시대의 효율적인 세계 인터넷망이 됐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또한 글로벌 시대의 문을 연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항공로는 이제 현실화하고 있는 국제경제의 초고속망이 됐다. 이 초고속망은 국제적 경제활동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고립된 경제 체제의 문을 열게 만들고, 전세계에 민주주의 정신을 확산했으며 모든 정치적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또한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대기권을 넘어서는 여행길로 나서게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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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형제의 업적에 대한, ‘21세기 디지털 혁명의 선도자’ 빌 게이츠의 평가다. 이 예리한 통찰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디지털 혁명이 실상 20세기 항공 혁명의 연장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라이트 형제의 비전과 그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다. 공원의 좌측 중앙에 위치한 킬데블힐에 올라 거기 우뚝 솟아 있는 기념탑을 둘러보며 우리가 느끼는 감동도 하늘을 정복하고자 한 라이트 형제의 꿈에 내포되어 있는 이 같은 원대한 비전의 생생한 현실성 때문이다.
날 수 있다는 확신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그들의 비범한 천재성이 합쳐져서 결국 인간의 미래를 설계한 이 위대한 업적은 이뤄졌다. 풀밭 너머로 아스라이 펼쳐진 짙푸른 바다와 아득한 수평선은 그것이 또한 숱한 실망과 좌절을 묵묵히 견뎌낸 고독한 여정이었음을 말없이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