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옥새 연구 40년, 서지민 교수의 옥새 이야기

“노 대통령에겐 영조 옥새, 한 총리에겐 정조 옥새 만들어 줄 것”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입력2006-11-08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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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새(玉璽)가 복원되고 있다. 옥새 연구가이자 궁중옥 전문가인 한 노교수의 열정으로 영조, 정조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옥새가 공개될 예정이다. 이는 과거 몇 차례 등장했던, 금으로 만든 옥새와는 다르다. 세종대왕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제작한 옥새, 한국에서만 나는 남양옥으로 만든 그 옥새가 다시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옥새 연구 40년, 서지민 교수의 옥새 이야기
    옥새는 임금과 국가의 최고 상징물이다. 임금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옥새는 외교문서는 물론 임금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모든 문서에 사용됐다. 다음 임금에게 왕위를 계승할 때 징표로 옥새를 전달했으며, 임금이 행차할 때도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행렬의 앞에서 옥새를 봉송했다.

    (김성호의 ‘옥새, 숨겨진 역사를 말하다’)


    서지민(徐志旻·68) 서울산업대 금속공예학과 명예교수를 만난 건 ‘옥새’ 때문이었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과 한명숙 국무총리에게 기증할 옥새를 제작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정부수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가 국새(國璽)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개인이 대통령에게 줄 옥새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세종대왕과 남양옥

    조선시대에나 사용하던 옥새를 그는 무슨 이유로 만드는 것일까. 그에게 옥새를 만들 자격은 있는 것일까.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그가 만들 옥새를 받기로 했는가. 옥새는 무엇으로 만든다는 것일까.



    ‘옥(玉) 교수’로도 불리는 서 교수는 40년 가까이 궁중에서 사용하던 장신구를 옥으로 제작해온 공예가다. 1998년 오스트리아 빈 주재 한국대사관이 서 교수를 초청해 궁중유물전을 열었을 때 그는 명성황후가 사용하던 보(寶·옥새보다 한 단계 낮은 인장)를 만들어 전시한 바 있다. 2002년엔 일본 왕실 초청으로 도쿄 힐튼호텔에서 궁중옥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린 부산에서 ‘한국의 미’를 알린다는 취지로 그의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여러 옥 공예가 중에서 그가 국내외에서 거듭 주목을 받았던 것은 그만이 가진 남양옥 덕분이다. 남양옥은 중국산 비취옥과 달리 색깔이 좀더 은은하고 고우며, 재질이 견고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세종대왕이 남양옥을 사용해 옥새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올 만큼 왕가에서 사랑받던 옥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남양옥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광물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에 있는 세계 보석박물관엔 그가 남양옥으로 제작한 장신구와 원석이 한국을 대표하는 보석으로 전시돼 있다.

    서 교수의 원래 전공은 역사학이다. 경북대 사범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연세대 대학원에서도 사학을 공부했다. 당시 그의 주된 관심사는 고대의 보물이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 테네시 주립대학에서 고대 보석을 연구하기도 했다. 보석에 대한 그의 열정은 딸에게도 이어졌다. 딸 예명지씨가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든 보석 브랜드 ‘예명지’는 1999년 산업자원부 선정 ‘한국 밀레니엄 상품’에 패션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대학원 재학 시절, 고대 보석을 연구하던 서 교수의 눈에 자주 띈 보석은 옥이었다. 고대 왕의 무덤을 보면 하나같이 왕이 두 손에 푸르스름한 옥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왕가에서 옥은 기운을 맑게 해주는 보석으로 애용됐다. 옛말에도 아름다운 인연을 두고 ‘옥연(玉緣)’이라 했고, 가냘프고 고운 여인의 손을 두고 ‘섬섬옥수(纖纖玉手)’라 했다. 그러고보니 서 교수의 어머니도 외출할 때면 꼭 옥으로 만든 반지를 끼었다. 자신의 삶을 바칠 만한 대상을 발견한 듯싶었다.

    박연 편경의 청아한 소리

    1970년 초, 서울 상도동에 살던 그는 기이한 꿈을 꾼다. 꿈에서 그는 산길을 헤매다가 커다란 비취를 발견했는데, 어디선가 “이건 네 것이다”는 음성을 들었다. 신기했다. 때마침 지인이 경기도 화성에 옥 광산이 있는데 매입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듯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지만, 서울대 지질학 교수와 함께 화성으로 내달렸다. 이미 몇 사람이 이 광산을 매입하려다 실패했다고 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 한 정치인의 딸이 이 광산을 매입해 주변의 길을 닦다가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매각했다. 이를 한 건설업체가 매입했으나, 옥을 가공해 팔아봐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다시 매물로 내놓았다.

    상도동 집까지 처분해 옥 광산을 매입한 서 교수는 화성에서 발견한 옥이 ‘남양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양옥이 어떤 종류의 옥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옛 문헌을 뒤져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훑어봤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조선조 세종대왕 때 서 교수의 직계 조상인 서하시라는 식의(왕의 영양사)가 처음으로 화성의 남양옥을 발견해 박연에게 바쳤다. 박연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돼 악사(樂事)를 맡았던 조선 최고의 궁중음악사.

    박연이 남양옥을 받아들고 부딪치는 소리를 들어보니 중국에서 건너온 옥과는 달리 매우 청아한 소리가 났다. 이를 세종에게 바치자 세종은 박연에게 악기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이에 박연은 남양옥으로 편경을 제작한다. 편경은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타악기로 종묘대제나 문묘제례악 등의 행사에 사용됐다. 백과사전에서 편경을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425년(세종7년) 경기 남양(南陽)에서 질이 좋은 경석이 발견되어 이를 박연과 맹사성 등이 갈고 닦아 중국의 석경보다 좋은 편경을 만들어냈다.’

    남양의 질이 좋은 경석이란 서하시가 박연에게 바친 남양옥이었다. 박연은 남양옥 편경이 중국의 것보다 음율의 하모니가 훨씬 아름다워 감탄했다고 한다. 박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옥책(옥으로 만든 책)을 만들기도 했다. 옥책은 왕의 글을 담는 책으로, 뼈대는 옥으로 만들고, 글씨가 들어간 부분은 금으로 칠한 것이다.

    옥새 못 받은 이성계

    이런 남양옥이 옥새의 원재료가 된 것은 세종의 결단 때문이었다. 세종은 중국 명나라 황실로부터 받은 옥새를 쓰지 않고, 남양옥으로 독자적 옥새를 제작케 했다. 이 얘기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때부터 조선 왕실은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었고, 이 같은 사실은 중국엔 철저히 비밀로 부쳤다. 중국 황실에 알려지면 남양옥을 조공으로 바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 왕들은 등극할 때 명나라로부터 옥새를 받았다. 옥새의 손잡이는 거북 모양으로, 중국의 제후국이란 뜻이 담겨 있다. 서 교수는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해 옥새를 받지 못했고, 태종 때부터 옥새를 받았다”며 “세종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독자적으로 옥새를 제작해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옥새는 왕가는 물론 나라의 보물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옥새를 보물 이상으로 여겼다. 서 교수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왕이 행차할 때, 왕 앞에서 별도의 가마에 태워 보내는 것이 옥새였어요. 그러니까 왕이 옥새를 따라가는 거죠. 선왕이 물려준 것이라 귀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옥새는 국가 그 자체였어요. 왕이 일을 볼 때면 꼭 옥새를 앞에 두었어요. 말하자면 옥새의 맑은 기(氣)를 받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고 할까요.”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보면 옥새는 천하의 주인이 되는 일종의 ‘문’이었다. 옥새를 손에 쥔 사람이 왕이 되고, 빼앗기면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옥새에 관해 재미있게 풀어쓴 책 ‘옥새, 숨겨진 역사를 말하다’의 한 대목을 보자.

    ‘진시황이 만든 옥새는 전국새(傳國璽)로 불렸다. 전국새는 중국의 후한 말(168년 이후)에 일어난 십상시의 난 때 어디론가 사라졌다. 손견이 낙양성의 궁궐로 진입했다가 우물 안에서 전국새를 발견했다. 후에 손견은 유표와 싸움에서 전사하고, 전국새는 그 아들 손책에게 전해졌다.

    옥새 연구 40년, 서지민 교수의 옥새 이야기

    궁중옥 전문가 서지민 교수가 모형 옥새 몇 가지를 살펴보고 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기증할 옥새는 비공개 작업실에서 제작되고 있다.

    당시 유표에게 패배해 근거지를 잃은 손책은 전국새를 원술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군사를 얻어 강동으로 들어가 오나라를 세웠다. 손책에게서 전국새를 얻은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다가 유비와 싸워 진 여파로 죽었다. 전국새는 우여곡절 끝에 조조의 손에 들어갔다.’

    옥새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얘기다.

    다시 서 교수의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남양옥이 매장된 광산을 매입하면서 이전엔 몰랐던 직계 조상 서하시의 일화를 듣고는 남양옥으로 궁중 장신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서 교수는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옥 세공 기술을 익혔다. 특별히 옥 세공을 가르치는 곳이 없어 소문을 듣고 전문가를 찾아 문하생으로 몇 달씩 지내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러면서 틈틈이 옥새에 대해 공부했다. 장차 남양옥으로 세종이 사용했다는 옥새를 만들고 싶었다.

    재벌가 회장 “내 것도 만들어달라”

    이런 소문이 나돌자 기업체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남양옥의 특성과 옥새에 관한 강연을 하고 나면, 재벌가 회장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조선왕조에서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옥새를 만들어줄 수 없냐는 부탁이었다. 집안의 가보로 두고 후대에 물려주겠다는 간곡한 요청에 서 교수는 인장을 만들었다. 왕가에서 쓰던 옥새를 본떠 만들어 재벌가 회장에게 주자 소문을 타고 또 다른 재벌가로부터 주문이 들어왔다. 이렇게 만든 인장이 20여 개를 헤아린다.

    “사대부 집안에서도 인장을 만들어 사용했어요. 도장 하나를 만들면 수백년을 씁니다. 선조로부터 받은 도장의 밑면을 갈아내고 새로운 글자를 넣어 사용했어요. 글은 곧 뜻을 말하고, 이는 가문 대대로 내려와 가풍이 됩니다. 이게 가보가 되고, 혼(魂)이 되죠. 조상들은 도장에 운명을 바꾸는 힘이 있다고 믿었어요. 재벌가에서 인장 주문을 받았을 때도 이런 의미로 받아들였어요. 좋은 기를 불어넣는 가보를 만들어달라는 부탁 아니겠어요?”

    서 교수는 옥새를 만들 수 있는 자료와 세공 실력, 그리고 원재료까지 갖췄지만 선뜻 제작에 들어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강의하고 궁중유물전에 출품할 작품을 만드느라 여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는 1978년부터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 터키 이스탄불, 캐나다 밴쿠버, 멕시코, 영국 런던, 홍콩, 브라질 상파울루, 중국 베이징, 러시아 레닌그라드 등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궁중유물을 알렸다.

    옥새 제작에 뛰어든 계기는 환갑이 넘어서야 찾아왔다. 1998년 오스트리아 빈 주재 한국대사관이 그를 초청해 궁중유물전을 열었을 때 처음으로 명성황후가 쓰던 인장 ‘명성황후보(寶)’를 제작했다. 보는 세자나 왕비가 사용했다. 서 교수가 명성황후보의 거북 모양 손잡이를 직접 깎았고, 글씨 전각은 고(故) 김태호씨가 맡았다. 그간 궁중예술의 극치인 옥새를 내놓지 않고 장신구만 내놓았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옥새 제작이었다.

    “옥새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예요. 명나라가 조선의 왕에게 제후국이란 의미로 거북 모양의 옥새를 줬다고 하지만, 거북은 우리 조상인 동이족이 먼저 사용했어요. 동이족이 살았던 곳에서 삼족오와 거북 모양의 인장이 출토됐거든요. 거북은 수(壽)를 뜻하고, 용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동물로 알려져 있어요. 이런 역사를 복원하고 싶었던 거죠.”

    그렇다면 옥새는 우리 조상이 가장 먼저 만들어 쓴 셈이다. 서 교수는 “메소포타미아나 인도의 고대 문명에도 인장이 많이 나타나지만, 동이족도 옥새 구실을 하는 천부인(天符印)을 사용했다”며 “이는 우리 조상이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 인장을 만들어야 왕실의 권위가 생긴다는 것을 공표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 옥새는 없다?

    이렇듯 옥새는 한 왕조의 뿌리이자 상징이지만 우리는 지금껏 옥새 관리에 소홀했다.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옥새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옥새 이야기를 쓴 김성호씨에 따르면 1945년 일본이 항복했을 때 한국의 지도자들은 일본에 강탈당한 옥새를 가장 먼저 찾았다고 한다. 맥아더 장군의 도움으로 8개의 옥새를 되돌려 받았으나, 그나마 6·25전쟁 때 모두 유실됐다. 전란의 과정에서 없어진 옥새 중 3개를 우여곡절 끝에 되찾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금고에 보관돼 있다고 추정할 뿐이라고 한다. 결국 ‘한국에 옥새는 없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1997년 정부수립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옥새는 만드는 과정에 금이 간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감사원은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의뢰, 중성자를 이용한 정밀검사를 실시한 결과 내부 깊숙한 곳까지 금이 간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뜻만 좋았지, 엉터리로 만든 결과였다.

    서 교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전할 옥새를 제작하고 있다. 우연한 계기로 만난 정부 관계자에게 옥새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각각 옥새를 만들어 제공하겠다고 하자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것. 10월15일 완성되는 옥새는 우선 한명숙 국무총리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정조대왕의 옥새를 본떠 제작한 국무총리용 옥새의 손잡이는 용이다. 여기엔 ‘국무총리’라는 네 글자를 전각한다. 한 총리 개인이 사용할 인장으로는 십장생을 새긴 것을 기증할 예정이다. 국무총리의 직분을 수행할 때는 기가 센 용을 옥새로 써야 하지만, 개인이 사용할 거라면 여성의 부드러움을 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여성 지도자로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담았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할 옥새는 영조대왕이 쓰던 것을 본떴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다.

    “영조대왕은 혜안이 있었고, 의지도 강했어요. 여러 사람을 두루 포용하면서도 밀고나가는 힘이 대단했습니다. 영조대왕은 많은 비를 거느렸지만, 어느 누구를 편애하지 않고 모두에게 깊은 사랑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영혼까지 사랑했던 깊이가 무척 존경스러웠지요. 노 대통령도 이런 점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니 퇴임할 때까지 잘하시길, 그리고 퇴임 후에도 좋은 일을 많이 하길 바라는 마음이죠.”

    예로부터 옥새는 제작과정이 무척 엄격했다. 옥새 전각장이는 왕이 보는 앞에서 옥새를 만들었다. 실수라도 하면 가차 없이 벌을 받았다. ‘나라의 앞날’에 흠집을 냈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옥새를 만드는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했고,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작업을 중단하고 쉬었다. 또 옥새를 완성할 때까지는 어떤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부정 타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위조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서 교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전할 옥새의 원재료를 고르는 데 3개월을 보냈다. 화성 광산에서 고르고 고른 남양옥을 세공장으로 가져와 또 며칠을 보내면서 세심하게 골랐다.

    “원석을 고를 때, 옥새를 가질 사람이 천명(天命)을 받아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내기를 기원하며 축원을 드렸어요. 원석도 사람처럼 첫인상이 중요해요. 처음 봤을 때 마음에 들면 대개는 괜찮아요. 그래도 몇 개의 후보군을 정해놓죠. 이렇게 고른 원석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봐야 합니다. 좀 쉬었다가 다시 보고, 다시 보고 합니다. 돌과 대화하면서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하죠.”

    작업을 시작하고 끝내는 날짜도 중요하다. 시작 날짜를 ‘밝은 날’이라고 하는데, 이는 옥새를 받을 사람의 사주를 보고 결정한다. 서 교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직접 사주를 물어볼 수 없어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8월17일을 시작일로, 10월15일을 종료일로 정했다.

    전통을 이어주는 ‘끈’

    서 교수는 조만간 한국의 옥새에 관한 대규모 전시를 열 계획이다. 그는 “국내 최고의 옥새 전각장인 민홍규씨와 함께 일하고 싶다”며 “조선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고, 민홍규씨가 전각하면 세계적인 작품이 될 것 같다”며 기대를 나타냈다.

    “옥새는 왕가의 전통을 이어주는 끈이었어요. 이 끈은 저 멀리 동이족까지 이어집니다. 우리의 뿌리를 명확하게 알아야 세계화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어요. 우리의 전통을 계승할 비전을 찾아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맑은 정신으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남들도 우리를 존중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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