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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 연구 40년, 서지민 교수의 옥새 이야기

“노 대통령에겐 영조 옥새, 한 총리에겐 정조 옥새 만들어 줄 것”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옥새 연구 40년, 서지민 교수의 옥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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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편경의 청아한 소리

1970년 초, 서울 상도동에 살던 그는 기이한 꿈을 꾼다. 꿈에서 그는 산길을 헤매다가 커다란 비취를 발견했는데, 어디선가 “이건 네 것이다”는 음성을 들었다. 신기했다. 때마침 지인이 경기도 화성에 옥 광산이 있는데 매입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듯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지만, 서울대 지질학 교수와 함께 화성으로 내달렸다. 이미 몇 사람이 이 광산을 매입하려다 실패했다고 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 한 정치인의 딸이 이 광산을 매입해 주변의 길을 닦다가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매각했다. 이를 한 건설업체가 매입했으나, 옥을 가공해 팔아봐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다시 매물로 내놓았다.

상도동 집까지 처분해 옥 광산을 매입한 서 교수는 화성에서 발견한 옥이 ‘남양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양옥이 어떤 종류의 옥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옛 문헌을 뒤져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훑어봤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조선조 세종대왕 때 서 교수의 직계 조상인 서하시라는 식의(왕의 영양사)가 처음으로 화성의 남양옥을 발견해 박연에게 바쳤다. 박연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돼 악사(樂事)를 맡았던 조선 최고의 궁중음악사.



박연이 남양옥을 받아들고 부딪치는 소리를 들어보니 중국에서 건너온 옥과는 달리 매우 청아한 소리가 났다. 이를 세종에게 바치자 세종은 박연에게 악기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이에 박연은 남양옥으로 편경을 제작한다. 편경은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타악기로 종묘대제나 문묘제례악 등의 행사에 사용됐다. 백과사전에서 편경을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425년(세종7년) 경기 남양(南陽)에서 질이 좋은 경석이 발견되어 이를 박연과 맹사성 등이 갈고 닦아 중국의 석경보다 좋은 편경을 만들어냈다.’

남양의 질이 좋은 경석이란 서하시가 박연에게 바친 남양옥이었다. 박연은 남양옥 편경이 중국의 것보다 음율의 하모니가 훨씬 아름다워 감탄했다고 한다. 박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옥책(옥으로 만든 책)을 만들기도 했다. 옥책은 왕의 글을 담는 책으로, 뼈대는 옥으로 만들고, 글씨가 들어간 부분은 금으로 칠한 것이다.

옥새 못 받은 이성계

이런 남양옥이 옥새의 원재료가 된 것은 세종의 결단 때문이었다. 세종은 중국 명나라 황실로부터 받은 옥새를 쓰지 않고, 남양옥으로 독자적 옥새를 제작케 했다. 이 얘기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때부터 조선 왕실은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었고, 이 같은 사실은 중국엔 철저히 비밀로 부쳤다. 중국 황실에 알려지면 남양옥을 조공으로 바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 왕들은 등극할 때 명나라로부터 옥새를 받았다. 옥새의 손잡이는 거북 모양으로, 중국의 제후국이란 뜻이 담겨 있다. 서 교수는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해 옥새를 받지 못했고, 태종 때부터 옥새를 받았다”며 “세종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독자적으로 옥새를 제작해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옥새는 왕가는 물론 나라의 보물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옥새를 보물 이상으로 여겼다. 서 교수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왕이 행차할 때, 왕 앞에서 별도의 가마에 태워 보내는 것이 옥새였어요. 그러니까 왕이 옥새를 따라가는 거죠. 선왕이 물려준 것이라 귀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옥새는 국가 그 자체였어요. 왕이 일을 볼 때면 꼭 옥새를 앞에 두었어요. 말하자면 옥새의 맑은 기(氣)를 받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고 할까요.”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보면 옥새는 천하의 주인이 되는 일종의 ‘문’이었다. 옥새를 손에 쥔 사람이 왕이 되고, 빼앗기면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옥새에 관해 재미있게 풀어쓴 책 ‘옥새, 숨겨진 역사를 말하다’의 한 대목을 보자.

‘진시황이 만든 옥새는 전국새(傳國璽)로 불렸다. 전국새는 중국의 후한 말(168년 이후)에 일어난 십상시의 난 때 어디론가 사라졌다. 손견이 낙양성의 궁궐로 진입했다가 우물 안에서 전국새를 발견했다. 후에 손견은 유표와 싸움에서 전사하고, 전국새는 그 아들 손책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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