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만난 안기수씨와(왼쪽) 김미씨.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39년 임시정부 주석으로 활동하던 백범이 중국 충칭(重慶)에서 장남 인(金仁·1918∼45), 차남 신(金信·84·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과 함께 촬영한 가족사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가족과 보낸 시간이 거의 없던 김구 선생이 두 아들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사진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의 조카손녀 안기수(安基秀·51)씨 덕분이다. 안씨가 집안 대대로 간직해온 이 사진을 최근 사진 속 주인공인 김신 회장에게 기증한 것. 안중근 의사의 자손이 백범 일가 사진을 소장한 배경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한국 독립운동의 두 거두인 김구 선생 가문과 안중근 의사 가문이 오랜 인연을 맺어왔던 것이다.
안기수씨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씨의 손녀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안기수씨의 고모인 안미생씨는 김구 선생의 장남인 김인씨와 혼인했다. 백범 가문과 안중근 의사 가문은 사돈지간에 머물지 않고, 몇 대에 걸쳐 독립운동의 동지로 결합했다. ‘백범일지’에 안중근 의사 집안 사람들(친동생인 공근, 정근, 사촌인 명근, 경근 등)이 대거 등장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사진 기증을 계기로 김구 선생의 손녀 김미(金美·49)씨와 안중근 의사의 조카손녀 안기수씨가 처음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첫 대면에서 마치 헤어진 가족을 찾은 듯 반가웠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만남은 두 독립운동가(家)의 재회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미씨는 백범의 차남 김신 회장의 3남1녀 중 막내딸로, 빙그레 김호연(金昊淵·51) 회장의 부인이다. 김씨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며 재벌 총수의 부인이라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지만, 줄곧 ‘왼손이 하는 일, 오른손도 모르게’를 고집하며 조용히 대외활동을 해왔다. 맹인교회의 도우미로, ‘푸드뱅크’ 주관 노숙자 돕기 행사의 자원봉사자로 일했고, 최근에는 국제 어린이 보호재단인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이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조부의 이름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늘 몸가짐을 조심한다고 한다.
재벌 총수 부인과 프랑스어 번역가
삼성생명 FC(파이낸셜 컨설턴트)로 일하는 안기수씨는 연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한때 프랑스어 번역가로 활동했다. 부친인 안진생(1918∼88) 전 미얀마 주재 대사는 이탈리아 제노아 공대를 졸업한 한국인 최초의 조선공학 박사로 18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안중근 의사와 두 형제(정근, 공근)의 자손 중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안 전 대사 가족뿐이다.
9월29일 백범기념관에서 김미씨와 안기수씨를 함께 인터뷰했다. 두 사람은 ‘잊힌 역사를 기록한다’는 취지에 공감하고 ‘신동아’의 인터뷰 제의에 응했다. 가녀린 몸매에 단아한 기품이 흐르는 김미씨와 갸름한 얼굴에 단정한 인상의 안기수씨는 놀랍게도 친자매처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