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호

우리 이제 무엇으로 먹고살까?

  • 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입력2009-01-02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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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이제 무엇으로 먹고살까?

    ‘제조업이 나라를 살린다’<br>에몬 핑글턴 지음/ 안춘식 옮김/ 지식여행/ 326쪽/ 1만2500원

    인간은 물건이 아니야. 회사는 사원을 위해 있는 거야.” 인간 중심 유토피아 경영신화를 만든 일본 미라이공업 창업주 야마다 아키오씨가 최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는 하나도 바뀐 게 없어. 물건을 만들어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기본은. 미국이 잘못한 것은 금융주의랄까. 정확히 말하면 디리버티브(derivertives·파생금융상품)가 실패한 것이겠지. 돈을 움직이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자본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줘서 집을 만들게 하고, 빌려준 돈을 증권화해서 반복해서 팔고 팔아 돈을 번다는 것. 아메리카 식으론 이것도 자본주의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자본주의란 물건을 만들어 돈을 버는 것이지. 본래의 자본주의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만 아직 멀었어. 돈으로 석유를 사고, 옥수수를 사고, 밀가루를 사고. 여전히 돈을 움직여 돈을 벌려고 하는 버릇은 고쳐지질 않았어.”(조선일보, 2008.10.11)

    야마다 사장이 ‘머니게임’을 비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땀을 흘리지 않으니까. 이 대목을 읽는 순간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에몬 핑글턴 ‘제조업이 나라를 살린다(In Praise of Hard Indu- stries)’. 한국어 초판 발행일이 2000년 10월. 원서 출간은 1999년이다. 벌써 10년 전 책이다.

    경제 칼럼니스트인 에몬 핑글턴이 이 책을 쓸 즈음 미국은 ‘탈공업화’의 장밋빛 미래에 환호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MS)와 같은 기업은 눈부신 성공을 거듭했다. 1998년 하반기 MS의 주식 평가액은 3254억달러로 인도 국민총생산에 필적하는 규모였다. 미국의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린이들이 미국 대통령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빌 게이츠는 알고 있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7년간 미국 소프트웨어산업은 연 12.5%라는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같은 시기 미국 경제성장률의 2.5배에 해당한다. 또한 이 무렵 소프트웨어업계 종사자들의 평균 연봉은 5만7300달러. 이는 당시 미국 노동자 평균연봉 2만7900달러보다 2배 이상 많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매스컴들도 일제히 세계를 번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제조업이 아니라 컴퓨터·소프트웨어나 오락·금융과 같은 정보산업이라고 예찬했다. 이처럼 가시적인 성과에도 핑글턴은 탈공업화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함정이 있다고 말한다.



    1. 고용 밸런스가 나쁘다 2. 소득 신장이 둔하다 3. 수출경쟁력이 약하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다시 MS사의 예로 돌아가보자. 정보산업을 주도하는 MS의 성공모델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회사가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컴퓨터 OS의 표준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핑글턴은 1980년대까지 이 분야를 주도한 것이 IBM이라면 업계의 주도권을 인수받은 MS는 ‘지폐를 인쇄할 권리’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다른 소프트웨어사들은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또한 1997년 당시 MS의 미국 내 종업원 수는 1만5000명. 포드사의 20분의 1에 불과하다. 노동시장에서의 공헌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더욱이 소프트웨어산업은 대표적인 두뇌집약형 산업으로 최고 인재만을 필요로 한다. 경제 정보화가 진전됨에 따라 미국 전 노동인구의 20%가 사실상 고용을 잃게 된다는 전망도 있다.

    탈공업화의 물결 그 이후

    이처럼 탈공업화의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가 희생되더라도 대신 국민소득은 상승한다는 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통계는 정확히 반대 결과를 보여준다.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6년간 OECD 가입 26개국의 국민소득 신장률을 비교하면 한국, 일본, 독일, 스페인, 아일랜드처럼 제조업을 강화해온 국가들이 예외 없이 미국(국민소득 신장률 134%, 13위)을 앞섰다. 반대로 미국과 같이 열심히 탈공업화를 진행시킨 나라들, 대표적으로 영국은 같은 기간 국민소득 신장률이 106%로26개국 중 21번째였고, 비슷한 처지의 캐나다는 81%로 만년 최하위인 멕시코에 이어 밑에서 둘째 성적을 기록했다.

    탈공업화의 셋째 함정은 무역수지 악화다. 여기서도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 MS사를 예로 든다. 이 회사는 1996년 총 매상의 60% 이상을 해외에서 올렸지만 수출실적은 총 매상의 25%에 불과했다. 이 말은 해외 매상의 반 이상은 수출이 아니라 해외 자회사에서 나온 것으로, 대부분 그 지역에서 소비되며 실제 미국으로 유입되는 액수가 매우 작음을 의미한다. MS 총 종업원 수의 32%는 해외 자회사에서 근무한다. 즉, 미국 내 고용창출이나 무역수지 공헌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거대화된 기생물 금융

    탈공업화산업 가운데에서도 핑글턴이 가장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금융산업이다. 그는 미국 금융시장을 ‘거대화된 기생물’이라고 했다. 금융 부분 중에서도 성장률이 높은 분야의 대부분이 일반 국민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생산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해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을 따져보면 정확한 예측이 아닐 수 없다.

    많은 경제학자가 자유로운 금융시장이 효율적이고 금융자산의 가치를 보다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믿어왔다. 자본이 가장 알맞은 투자처로 흘러들어가 최대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한다는 논리. 그러나 결과는 금융시장의 자유화가 진전될수록 시장은 불안정해지고 자산가치에 대한 평가도 합리성을 잃고 있다.

    예를 들어 1987년 10월19일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블랙 먼데이) 때 주가는 한 번에 22.6%나 급락했다. 만일 주가가 기업의 미래 업적에 대한 타당한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주가의 급격한 변동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주가 폭락 당일 미국 경제계의 장래에 심각한 문제로 예측되는 실물경제상의 사건은 없었기 때문이다. 주가 폭락을 가져온 것은 비이성적인 집단심리다.

    환율의 움직임도 합리성으로는 설명하기 힘들 만큼 널을 뛴다. 경제학에서 환율을 결정하는 기본 요인은 각각의 무역상품에 관한 각국의 비교경쟁력이다. 국가 경쟁력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몇 년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에 엔화나 달러화 같은 통화의 환율은 1년에 기껏해야 몇 퍼센트 이내의 작은 폭으로 변동해야 한다. 하지만 1995년과 1998년 엔화에 대한 달러화의 가치가 한번에 80%나 뛰어오르는가 하면, 2개월도 채 안 돼 달러화에 대한 엔화의 가치가 30% 이상 급상승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경제학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외국환 시세가 실물경제와 일치하지 않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미국 경제 침체기에 외국환시장에서 달러 가치가 크게 상승하기도 하고, 일본 경제의 성장률이 저조할 때 급속한 엔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반대로 일본이 주요 선진국 중에서 최대 성장률을 기록한 1996년에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9% 이상 하락했다.

    핑글턴은 외국환시장에서 이러한 폭등과 폭락은 외국환 딜러에게 직장을 제공해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더욱이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두 가지 마이너스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우수한 두뇌를 가진 딜러의 재능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율의 상승과 하락은 장래를 예측하여 장기적인 경영방침을 세우려는 기업 총수에게 예기치 못한 위험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누구를 위한 금융거래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비난의 화살은 애널리스트 등 고임금 금융 전문가들에게로 향한다. 월가의 금융 애널리스트가 특정 주식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기관투자가들은 앞 다퉈 그 주식을 매입하고, 몇 개월 후 그 주식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취하면 기관투자가들은 일제히 그 주식을 내다판다.

    금융계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여 일반투자자들을 끌어모으고 높은 수수료를 지급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거둔 실적은 초라하기만 하다. 한 조사에서 1986년부터 1995년까지 10년 동안 여러 투자신탁의 연간 이익률은 주가지수를 1.8%나 밑돌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나마나한 투자를 위해 투자신탁회사는 높은 급료를 지급하고 포트폴리오 매니저를 고용하여 평균 주가 이상의 이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우량주를 찾아내는 작업에 투입했다. 투자신탁회사는 연간 예치자산 잔고의 약 1.7%라는 거액의 운용비용을 쓰면서도 결국 제로 섬 게임을 한 셈이다.

    적어도 제조업은 정직하다

    10년 전 이런 지적을 다시 꺼내 보며 무릎을 치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 책이 제시하는 것처럼 탈공업화산업이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하이테크 제조업이 미래의 성장동력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야마다 회장의 말대로 적어도 ‘물건을 만들어 돈을 버는’ 제조업은 정직하다. 돈이 돈을 버는 허상의 상품을 만들어 팔지는 않기 때문에다. 이 책은 전세계가 ‘머니게임’에 휩쓸리는 동안 잃어버린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미국의 경제 칼럼니스트 마이클 루이스가 쓴 ‘라이어스 포커’(위즈덤하우스, 2006)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내 아버지 세대는 확고한 믿음으로 성장했다. 그 믿음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한 사람이 벌어들이는 돈은 대체로 그 사람이 우리 사회의 복지와 번영에 기여한 수준에 비례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입사 2년차가 22만5000달러를 받는 것을 보면서 돈에 대한 당신의 신념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기여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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