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내정자

스캔들·부패·이중성…온갖 비판 극복케 한 힘은‘야망’

  • 허문명│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입력2009-01-05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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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국무장관은 대북정책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격이나 스타일을 분석하는 일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미국 여성해방의 현대적 상징인 힐러리의 두 얼굴을 보는 일은 그래서 유의미하다. 그런데 그녀가 ‘팜파탈’이라고?
    2008년 11월22일자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 측근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오바마가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에 내정한 것은 ‘실수’”라고 보도했다. 물론 힐러리는 장관직을 잘 수행하겠지만 문제는 그동안 그녀가 걸어온 행보로 볼 때 대통령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힐러리를 ‘팜파탈’(fem- me fatale·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상대를 죽음이나 위험에 빠뜨리는 악녀)로 일컬으며 잠재적으로 ‘오바마 성공’에 치명적일 수 있다 했다.

    반(反)힐러리주의자들

    미국에는 ‘힐러리’를 비판하는 내용의 책이 많다. 힐러리가 대학시절 급진 좌파운동에 관여해 이념적 성향이 의심스럽다는 내용에서부터 겉으로는 페미니스트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남편의 후광으로 모든 것을 얻은 ‘운 좋은 아내에 불과하다’는 평가까지 다양하다.

    힐러리 공격은 주로 그녀가 영부인이 된 후부터 시작됐다. 자신이 책임을 맡았던 의료보험 개혁이 실패하면서 비난이 빗발친 데 이어 힐러리가 각종 권력형 비리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발생한 각종 권력형 비리사건의 몸통이 사실은 힐러리였다는 폭로가 잇따랐다.

    힐러리만을 겨냥한 비판서는 그녀가 대통령후보 출마 뜻을 밝히면서 2005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책은 힐러리 부부를 20여 년 동안 보좌해온 정치 컨설턴트 딕 모리스가 쓴 ‘역사 다시 쓰기(Rewriting history)’였다(여기서 ‘역사 다시 쓰기’란 ‘거짓으로 가득한 힐러리의 자서전을 다시 쓴다’는 의미다).



    딕 모리스는 이 책에서 “내가 가까이서 지켜본 힐러리는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었으며 이념적으로도 위험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이중적인 성격이 있긴 하지만 힐러리에게는 유독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두 개의 모습이 강하게 있었다면서 그녀의 자서전에서 그려진 것 같은 선량하고 진취적인 모습은 사실은 허상(虛像)이며 반쪽의 모습이라고 맹공했다.

    힐러리의 실제 모습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규칙을 바꾸고 이를 변신이나 유연성이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세상을 적과 동지로 갈라 보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반드시 쟁취하고 마는 부도덕하고 위험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딕 모리스는 이런 힐러리가 ‘앞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지 아예 “미국의 여성 대통령은 힐러리가 아닌 콘돌리자 라이스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두 여자를 비교하는 ‘콘디 대 힐러리’(우리말 번역서는 ‘나는 이기기 위해 도전한다’)란 책까지 낸다.

    한편 뉴스위크 편집인 출신인 에드워드 클라인이 쓴 ‘힐러리에 관한 진실’역시 ‘(힐러리가) 좋은 아내도, 어머니도 아니면서 겉으로 그런 척하고 자기 인생목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비정한 인간’이라는 맹비난을 담고 있다.

    미국에서는 힐러리뿐 아니라 정치인 비판서가 현직이냐 퇴직이냐에 상관없이 많이 출간된다.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전력투구하면서 유권자에게 거짓 환상이나 신화를 심어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고 이것이 또 하나의 독서시장을 만들고 있다.

    스캔들로 위기를 극복한다

    힐러리는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화이트워터 부동산 투자 관련 의혹, 자신이 소유한 로펌의 회계장부 소실, 백악관 여행 담당 직원 해고 연루설, 영부인 시절 고가의 사적인 선물을 받았던 일들이 그것이다. 힐러리 스캔들은 공직자나 공직자 아내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윤리와 도덕’에 관한 일이 많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정치평론가 딕 모리스는 “힐러리는 오히려 스캔들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며 성장했다”고 평한다. 어떤 분야의 일을 통해 업적을 쌓아가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성숙해나가는 게 아니라 위기가 터지면 그것을 봉합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전(?)시켜나갔다는 것이다.

    이런 스타일은 그녀가 ‘목표 돌진형’이라는 데 기인한다. 일단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몰아가는 힘이 스캔들이 터져도 굴하지 않고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나가는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스캔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일단 터지면 되도록 뻔뻔하게(?), 그리고 대중이 충격 받을 정도로 전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대처해온 힐러리식 위기 돌파법은 남녀를 불문하고 야망을 갖고 성취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솔깃한 대목이다.

    에드워드 클라인이 책에 쓴 대표적인 스캔들 몇 가지를 소개한다. 힐러리는 빌의 아칸소 주지사 첫 임기가 끝날 무렵 평판이 좋지 않은 선물거래 중개인에게 1000달러를 투자해 10만달러를 벌었다. 본인은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경제지를 구독하며 얻은 경제정보를 바탕으로 한 재테크”라고 했지만 당시 아칸소 정가에서는 새 주지사의 환심을 사려고 주변에 모여든 정재계 실력자들이 힐러리에게 정보를 흘려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면서 불법거래 의혹을 제기했었다.

    두 번째 스캔들은 그 유명한 ‘제니퍼 플라워스’ 사건이다. 1992년 클린턴의 뉴햄프셔 주 대통령 예비선거 기간 중에 술집 가수 출신인 제니퍼 플라워스라는 여성이 클린턴과 무려 17년 동안 연인 사이였다고 폭로함으로써 정계를 뒤흔든 일이다.

    부패한 힐러리

    클린턴은 즉각 CBS 시사프로 ‘60분’에 나와 해명했고 옆에는 부인 힐러리도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편 편을 들려고 나온 게 아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결혼생활의 시련과 극복기를 상세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시청자의 동정을 사는 데 성공했다. 이날 방송을 탄 클린턴의 결백은 나중에 제니퍼가 옛날 클린턴과 나눈 통화 내용을 전격 공개함으로써 또 한번 정가를 떠들썩하게 했다.

    ‘힐러리 비리’는 1993년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더 크게 터져 나왔다.

    우선 의료보험 개혁 실패다. 대통령 클린턴은 새로 구성한 행정부 주요 사업 중 하나로 의료보험 개혁에 착수하면서 특별위원회 위원장에 힐러리를 앉혔다. 힐러리는 여기서 국민 전체를 의료보험에 가입시키고 의료 보장비를 낮추는 획기적인 마스터플랜을 제시했다.

    실행만 된다면야 아주 좋은 정책이었지만 문제는 ‘돈’(세금)이었다. 결국 민주당 내 분열과 공화당의 맹공으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더구나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독단적인 성품과 비공개 행정처리를 선호하는 스타일이 구설에 올랐다.

    결국 힐러리의 정치적 실패는 중간선거에서 상하 양원 모두 공화당이 승리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그녀는 이후 4년간이나 정치 무대에 설 수 없었다.

    ‘힐러리는 무려 1000쪽이 넘는 보건의료 법안을 마련한다는 미명하에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관료조직을 눈덩이처럼 불렸다. 그 과정에서 민주당 의원들을 포함한 의회 전체와 보건의료 부문 전문가들은 물론 언론까지 따돌리고 독주로 일관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주창한 개혁안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이는 자신의 커리어에 큰 오점이 되었다.’(딕 모리스 ‘콘디 대 힐러리’)

    정실인사 논란도 있다.

    1993년 힐러리는 “백악관 여행국(旅行局) 직원들이 제대로 관리가 안 된다”며 직원들을 집단해고했지만 사실은 남편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 사귄 친구 부부에게 백악관 여행국 사업을 떼어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의혹을 샀다.

    힐러리는 이 사실을 당장 부인했지만 의혹이 터져 나온 얼마 뒤 ‘힐러리의 해고 명령을 무시한다면 엄청난 후환이 닥칠 것’이라는 백악관 행정 담당국장 메모가 공개되면서 결백은 빛을 바랬다.

    같은 해에는 백악관 안에서 ‘사기꾼’으로 통할 정도로 평판이 나빴던 한 경호원이 공화당 정적들에 대한 수백건의 FBI 비밀서류를 수집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배후에 힐러리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문제가 불거지자 힐러리는 경호원을 “만난 적도 없다”고 부인했지만 한 백악관 인턴이 “두 사람이 백악관 복도에서 다정하게 인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증언함으로써 또 거짓으로 판명됐다.

    힐러리는 백악관 새 안주인이 되면서 인테리어 비용에만 40만달러를 썼는데 예산보다 25만달러나 초과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본인은 “개인 기부금으로 충당했다”고 했지만 의전비서관이 “예산을 초과했을 뿐 아니라 역사협회 기금에까지 손을 댔다”고 폭로함으로써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중적인 페미니스트?

    힐러리 개인의 능력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었다. 행정 경험은 물론 정부에 몸담았던 적도 없이 한 남자의 아내로서 백악관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문성도 전혀 없고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 관료도 의원도 아니었고 임명 절차를 거친 것도 아니었지만 보건의료 개혁이라는 엄청난 책임과 권력을 맡았던 것은 다름 아닌 ‘대통령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힐러리의 성공은 항상 남편과 함께였다. 이는 힐러리가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일관된 것이었다.

    힐러리가 닉슨 대통령을 조사하는 워터게이트 위원회에서 법률자료 조사원으로 일하다 1973년 갑자기 실직했을 때 그녀를 아칸소 법대 동료들에게 소개한 사람이 클린턴이었다. 힐러리는 촉망받는 예일 법대 졸업생이긴 했지만 워싱턴 DC 변호사 자격시험에 떨어지자 시험이 비교적 쉬운 아칸소 주로 가서 합격했다. 마침 클린턴이 아칸소 주 정치계에서 입지를 펴나갈 때였다.

    클린턴이 나중에 검찰총장으로 선출되자 힐러리는 아칸소 주에서 가장 유명했던 로즈(Rose) 로펌에 들어갔다. 그리고 클린턴이 주지사가 되자 로즈 로펌 최초의 여성 파트너가 된다. 클린턴이 잘나갈 때는 그를 지지하고 보좌함으로써, 또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는 그를 구제함으로써 성공에 따른 보상을 누려왔다.

    그녀는 여성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강조한 강한 페미니스트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누린 권력은 늘 부차적이고 파생적이었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페미니스트’라는 평가를 듣는다.

    남자, 아니 남편을 발판으로 한 성공을 위해 그녀가 희생해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르윈스키 스캔들’로 온 천하에 바람을 피운 사실을 들킨 남편을 걷어찼어야 옳았을 아내 힐러리가 오히려 세상의 기대(?)를 깨고 남편 곁을 지키자 많은 사람이 “정치적 야심 때문에 아내로서의 자존심을 버린 행위”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르윈스키 스캔들이 일어났을 때 보여준 힐러리의 침착을 넘어선 냉담함은 사실상 ‘일관된 것’이었다는 게 앞서 언급한 에드워드 클라인의 지적이다.

    클린턴은 양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였던 것처럼 ‘여자중독’이었다. 그러나 힐러리는 클린턴이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며 스캔들을 일으켜도 길길이 날뛴다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상대 여자를 만나 “내 남편을 가로챈 년”이라며 담판을 짓지도 않았다.

    딱 한 번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일 때 남동생을 시켜 남편과 바람피운 여자들을 거의 스토킹하다시피 해 마을에서 쫓아내는 일이 있었을지언정 남편에게 대놓고 “바람피우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힐러리를 남자로 대한 클린턴

    이런 힐러리의 관대함에 대해 “독실한 감리교도로서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힐러리의 보수적 가치관이 이혼을 거부하게끔 이끌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클라인은 “힐러리는 남편의 여성 편력을 정치적 권력의 대가로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냉소적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애초 힐러리와 클린턴의 만남부터 거슬러가 살펴야 하는 뿌리 깊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즉 힐러리는 클린턴을 처음부터 성적(性的) 관계를 토대로 한 배우자가 아니라 뜻을 같이한 동지로 보았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끌림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일반적인 연인(戀人)이나 부부 사이라기보다 만나면 사회문제에 대한 이슈를 화제로 삼으며 세미나와 토론을 하는 관계였다.

    클린턴은‘여자중독’이었지만 성적인 해소는 다른 여자들과 충분히 할 수 있었으므로 힐러리와의 섹스를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스럽지 못하고 거친’ 힐러리의 태도는 클린턴에게 전혀 단점이 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바로 힐러리가 맘에 들어 하는 요소가 됐다. 당시만 해도 자신을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으로 인정해주는 남자는 캠퍼스에서 별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자라온 힐러리 아닌가.

    힐러리는 미국 내 페미니스트 1세대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여성의 권리에 대해 자각하긴 했지만 어차피 여자 혼자 힘으로 뭔가를 얻어낸다는 게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동물적으로 알고 있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지적 관계로서 남편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현실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클린턴은 적격(適格)이었다.

    그러다 보니 힐러리가 클린턴과 살면서 ‘이혼’을 생각하던 때는 “사랑이 식었다” 유의 낭만적 이유가 아니라 클린턴이 야망을 잃고 낙담해 있는 경우였다. 선거에 지거나 하던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남편이 방황하고 헤매는 모습을 보면서 ‘아니, 이 잘난 내가 지지한 남자가 겨우 이 정도였나’ 하는 실망을 하면서 이혼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힐러리가 뭇 여성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바람기가 만천하에 공개되면서였으니 이 역시 역설적이다.

    ‘모니카 르윈스키가 없었더라면 힐러리는 그저 각종 스캔들에 얼룩져 인기 없이 스러져가는 평범한 퍼스트레이디로 남았을 것이다. 정치적 미래라는 것도 물론 없었을 것이다. 이런 그녀를 하루아침에 가여운 국가적 순교자로 만든 것이 바로 르윈스키였다. 힐러리가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구해낸 것은 남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딕 모리스 ‘콘디 대 힐러리’)

    힐러리는 페미니스트였지만 정치 역정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될 때는 그 꼬리표를 과감하게 버렸다.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첫 임기 시절 유권자는 힐러리가 남편 성(姓)을 따르지 않고 결혼 전 성을 그대로 쓰는데다 여자답지 않은 옷을 입자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클린턴이 재선에 실패하자 “힐러리 때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희생자’가 돼 표를 얻다

    힐러리는 고민 끝에 ‘변하기로’ 결심한다. 우선 페미니스트 이미지를 벗겨내기로 한다. 1982년 남편이 주지사 선거 재출마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두꺼운 뿔테안경을 벗어던지고 콘택트렌즈를 끼고 헤어스타일도 스트레이트 파마와 밝은 염색으로 바꾸고 스타킹도 속이 비치는 것을 신고 나타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이름을 갖고 말이 많은데) 저는 원래부터 ‘빌 클린턴’ 부인이었습니다. 변호사 일을 할 때만 ‘힐러리 로댐’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빌 클린턴 부인’으로만 살겠습니다.”

    그가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부부관계’를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에 대해 정치 참모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도 흥미롭다.

    1992년 4월 말 참모들은 “(힐러리에 대해) 남성 유권자들은 급진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싫다고 하고 여성 유권자들은 권력 욕심에 남편의 여자관계를 묵인한다는 사실 때문에 싫어한다”고 직언했다. 당시 만들어진 비밀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현재 두 사람의 결혼생활과 그들 가족에 대한 평판은 부정적이고 왜곡되어 있다. 힐러리는 애정, 자녀, 가족의 의미는 별로 없어 보이고 커리어와 권력에만 몰두하는 이미지로 집중되어 있다. 그런 문제점은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조지 부시 상대편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 힐러리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덜 드러내야 한다. 드러낼 때는 남편과 딸에 대한 애정 등 가족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

    결국 사생활을 조작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이 보고서는 대부분 채택되었다. 힐러리의 이런 전략적 사고는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 절정에 달한다.

    자서전 ‘살아 있는 역사’를 통해 ‘1998년 8월15일 아침에 남편이 침실에서 자신을 깨우고는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시인했다. 나는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간신히 숨을 진정시키고 나서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고 말했던 대목은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사실을 알고 대책반을 꾸려 이끌고 있었으며 클린턴의 법정증언 준비회의도 주재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녀는 르윈스키 스캔들을 통해 자신의 인생 사전에는 없었던 ‘희생자’라는 말을 새로 끼워 넣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잘난 여자’가 아니라 남편에게 감정적으로 학대받는 아내가 동정심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힐러리가 자신들을 깔보고 있으며 가정을 중시하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평범한 여자들은 힐러리도 역시 남편이나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희생자로 동일시하면서 우군으로 받아들였다. 4년 동안 무대에서 사라졌던 힐러리의 인기를 회복시킨 것은 이처럼 존경이 아니라 동정이었고 인간으로서의 심오함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품위에 대한 인정이었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세상에서 가장 큰 모욕을 받은 아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회 외교통일통상위원장인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자타 공인 ‘외교통’이다. 청와대 해외공보비서관으로도 활약했던 그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때 통역을 맡으면서 힐러리와 인사를 나눈 뒤 숱한 국제회의에서 만나면서 교분을 이어왔다고 한다. 박 의원은 최근 힐러리 내정자에 대해 이렇게 코멘트했다.

    “치밀한 성격과 승부욕까지 가진 지도자다. 핵심을 찔러 말하는 사람이다. 그와 외교적 대화를 나눌 때 애매한 표현은 금물이다. 우리가 뭘 원하는지 우선순위와 분명한 로드맵을 준비해야 한다.”

    외교적 수사가 느껴지는 단어가 많지만 한마디로 힐러리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두(序頭)에 소개한 이상돈 교수는 아예 “힐러리가 국무장관을 맡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 “(오바마가)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임명한 것은 그녀가 2012년 대선후보로 나올 것을 막기 위한 사전 포석(布石)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떻든 이 글의 목적은 북한이라는 체제와 이념이 다른 동족과 대치 중인 특수한 환경에서 우리와 무관치 않은 사람이 된 힐러리의 여러 면모를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힐러리를 둘러싼 신화만 너무 많이 소개되어 균형감각을 잡아보자는 의도였다. 글을 시작하며 ‘악녀인가’라는 말을 던졌지만 ‘악녀’가 나쁜 게 아니다.

    적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힘든 세상에서 뭔가를 성취해내려면 지지자들보다는 반대자들의 저항을 물리쳐 나가는 게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타인을 통제하고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나가기 위해 때로는 거짓과 위선조차 일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은 야망과 성취만을 이야기하지 그 과정에서 당사자가 치러야 할 대가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힐러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온 위기들을 헤쳐나가고 오늘의 성취가 있기까지 겉으로 보이는 완벽한 이미지와는 달리 숱한 실수와 비난이 있었다. 힐러리의 스타일은 옳다 그르다를 떠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 세상일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이 ‘여자’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으로 힐러리가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인생살이의 지침은 다음과 같다.

    ‘시련이 닥치더라도 살아남아라. 절대로 희생자가 되지 말라. 누가 너를 때리면 그 사람을 더 세게 쳐주어라.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라.’

    야망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은 힐러리의 위기 돌파법을 배워야 한다.

    힐러리의 성공은 항상 남편과 함께였다.

    참고도서

    힐러리의 진실(에드워드 클라인 지음, 서영조 옮김, 행간)
    나는 이기기 위해 존재한다(딕 모리스 지음, 손지애 박소정 옮김, 리더스북)
    세계 최고의 여자 힐러리論(길 트로이 지음, 정성희 옮김, 늘봄)
    살아 있는 역사 1, 2(힐러리 로댐 클린턴 지음, 김석희 옮김, 웅진씽크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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