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11월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사이먼 래틀 경의 지휘에 맞춰 브람스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사람들이 와르르 웃는다. 좌중의 오랜 친구는 또 그 소리야, 하는 듯 손사래를 친다. 왁자한 웃음은 그러니까 내 ‘불쌍주의’가 익살로 들린다는 의미다. 불쌍해 보이지 않는 내가 불쌍하기 그지없다. 작업실로 돌아와 문을 여는데 저 반대편에 놓인 리스트와 모차르트 흉상이 뚱한 얼굴로 나를 건너다본다. 그들도 불쌍하다. 리스트, 모차르트가 왜 불쌍한지 나는 당장 360가지는 댈 수 있다. 아, 이 공간 안에는 온통 불쌍한 존재들로만 가득 차 있건만 왜 사람들은 그것을 사치인 양 작란(作亂)인 양 여기는 걸까. 불쌍하고 가긍하도다, 나여.
‘내가 사랑을 노래하려 할 때 그것은 슬픔으로 변했다.’ 슈베르트가 일기장에 남긴 구절이다. 번역에 문제가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일기장에 이런 문투로 쓰지 않는다. 내가 아는 슈베르트로 재구성해보자면 이렇다. ‘젠장, 왜 나는 연애 한번 못해보는 거야. 아무리 껄떡대봤자 나 따위를 쳐다보는 년은 하나도 없구나. 슬흐다, 슬허!’
연애 못해 불쌍한 슈베르트
추측건대 슈베르트는 연애를 못해서 죽었을 것이다. 서른두 살 젊디젊은 나이였다. 사인(死因)이 매독이다. 빈의 뒷골목 밤거리 여인에게나 고독한 육신을 의탁해야 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사내 키가 152cm라면 볼장 다 본 것이다. 통통한 몸집에 똥배가 엄청나게 튀어나왔고 까불이 수다쟁이였다고 한다. 교사가 꿈이었지만 계속 낙방했다. 결국 취직 한번 못했다. 생전에 음악가로 유명세를 타본 일도 없다.

“이 지상에는 내가 있을 곳이 없나요?”
청춘기를 슈베르트로 지내보지 못한 사람은 ‘불쌍’이 몸에 익은 의상처럼 익숙한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불쌍해야만 자기 같다는 기분에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마흔 살에 병으로 죽은 내 친구 한정수는 멋쟁이였다. 화가였던 녀석은 첨단의 ‘댄디’였고 잘생겼고 부유하기까지 했다. 그의 화실에 얹혀살며 나는 청춘기의 많은 시간을 죽였다. 친구의 동료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내 눈에는 한결같이 세련돼 보였고 주고받는 농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할 그들 세계만의 독특한 언어였다. 가령 그들은 “쌀티난다” 혹은 “그 친구 쌀이야 쌀! ” 같은 말을 자주 썼다. 그게 프랑스어를 변용시켜 만든 ‘유치하고 천하다’라는 의미인 것을 깨닫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화실에 놀러온 어떤 암사슴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신 아주 친절했다. 아랫것이나 식객에게 대하는, 무리에 포함시키지 않는 과잉된 예절이 그것이다. 나는 언제나 구석에 놓인 전축을 벗 삼아 판을 틀고 연탄불을 갈았다. 오갈 데 없는 나는 비참하고 불쌍했지만 기묘하게 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사한 사람들 속에서 ‘불쌍’은 내 고유의 영토였다.
지금 나는 얹혀살기는커녕 화실을 닮은 공간의 주인장 노릇을 하고 있다. 간혹 찾아오는 일행 속에 낯모르는 슈베르트가 곁다리로 묻어온다. 슈베르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쭈뼛거리며 날 선 자의식을 감추는 그에게 속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래, 초라해 하고 쪽팔려 하려마. 네 불쌍은 너만의 것이야. 지금 네 눈에는 나의 불쌍이 전혀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는 불쌍족(族)이고 불쌍 동지야. 전국불쌍동지연대라는 시민단체는 없을까. 나만의 불쌍, 자기연민을 미워하지 말라고. 그것조차 품지 않는다면 태생이 불쌍한 자의 다음 단계, 누추한 비루와 뻔뻔한 천박이 찾아올 수 있다네,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