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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의 세상읽기

국격(國格)을 높이고 싶으시다면

국격(國格)을 높이고 싶으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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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조선(대한제국)은 나라를 잃었다. 그로부터 꼭 한 세기가 지난 2010년 대한민국은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의장국이 됐다.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과 가난, 독재의 터널을 뚫고 산업화와 민주화로 세계 중심국가 그룹의 일원이 된 것이다. 자랑스럽지 않은가? 자부심을 느낄 만하지 않은가? 당연히 그렇다고 답해야 옳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벗어난 나라들 중에 대한민국만큼 성장 발전한 나라가 없다는 점에서 이는 결코 낯부끄러운 자화자찬(自畵自讚)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많은 한국인은 한국이 세계경제의 주역으로 떠오른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썼다. 이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G20 회의에 협조한 한국인의 깊은 속내를 잘 모르고 한 소리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G20 회의의 성과를 내세우고 싶은 대통령과 정권 측에는 야속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많은 한국인’이 G20 회의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G20 회의는 보고 즐길 수 있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축구가 아니다. 환율과 경상수지는 그렇다 쳐도 ‘양적 완화’ ‘환율의 유연성’ ‘예시적 가이드라인’ 등에 이르면 무슨 소리인지 선뜻 알아듣기 어렵다. 일상의 삶이 고단한데 무슨 뜻인지도 모를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백수에게, 노후가 불안한 장년에게, 개발도상국과 빈국의 지속성장이 무슨 관심사이겠는가. 하여 정부가 앞장서 “자랑스러워하고 자부심을 느끼자”고 해도 심드렁했을 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G20 회의의 경제효과가 수조원(또는 수십조원)에 달하고 국격(國格)이 높아진다고 해봐야 대중의 피부에는 와 닿지 않는 얘기다.

이 같은 대중적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대중은 역사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다. 일상적 삶의 존재다. 그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그들이 관여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문제에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국가적 행사의 성과(당장 이뤄진 것은 없다고 해도)가 나라의 인지도(認知度)를 높이고, 나라의 성장발전에 이익이 되고, 길게 보면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 ‘국격 상승’ 같은 과도한 의미 부여는 오히려 대중을 소외시킬 수 있다. 그 어떤 국가적 행사도 ‘정권의 잔치’가 되면 대중은 소외된다. 대중이 소외된 잔치는 ‘그들만의 잔치’가 된다.

이번 정상회의 기간에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과의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일단 중지하는 결단을 내렸다. 미국 측이 당초 한국 정부가 재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기로 했던 쇠고기 개방을 추가로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우리 정부는 쇠고기 문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지만 미국 측의 압박으로 재협상 테이블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이 2년 전 ‘촛불시위’에서 학습효과를 얻었든, 그것과는 상관없든 잘한 일이다. 그야말로 국격을 높인 일이다. 우리 정부가 또다시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갔다면 국민의 소외감은 분노로 바뀌었을 것이다. 국민이 소외되지 않는 잔치가 되려면 구체적으로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뒷받침돼야 한다. 쇠고기 수입개방 협상을 일단 중지시킨 것은 그 좋은 예다.

아무튼 잔치는 끝났다. 잔치 뒤에는 그동안 잔치의 스포트라이트 뒤로 밀려나 있던 여러 문제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외교적 성과가 내치(內治)의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판가름 날 것이다.



미국인으로 일본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더글러스 러미스는 저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김종철·이반 역, 녹색평론사)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는 민중, 또는 인민에게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력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큰 모순입니다. 민주주의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공동생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모두가 의논해서 한다, 그러한 힘입니다. 모두가 결정한다, 모두가 참가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생활의 세세한 면보다 큰 틀에 대하여, 즉 어떠한 공동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정치권력의 본래 의미입니다.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인민 자신, 국민 자신이 그러한 결정을 한다, 또는 적어도 참가한다,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즉 그 사회의 기본적 구조, 가장 기본적인 경향을 국민이 바꾸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모두가 결정하고 참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기에 대의(代議)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대표성이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예컨대 정치 혐오, 의회 불신이 만연한 현실에서 국민 참여의 협치(協治)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국민이 무력감을 갖게 해선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그의 말은 깊은 통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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