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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속 인생, 괄호 속 웃음의 세계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괄호 속 인생, 괄호 속 웃음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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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속 인생, 괄호 속 웃음의 세계

‘웃는 동안’<br>윤성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312쪽, 1만1000원

오랜만에 윤성희의 단편소설을 읽는다. 아니,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늘, 아니 매일, 어쩌면 하루에 한 편 이상, 소설들, 그중에는 반드시 한 편 이상의 한국 소설을 읽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윤성희의 소설은 문예지에 발표될 때마다 읽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낯설다. 처음 읽는 것 같다. 문예지는 작가에게 현장이고 무대다. 화가가 몇 년 동안 작업한 그림들을 날 잡아 갤러리에서 전시하듯, 작가는 한 달 혹은 1년 동안 쓴 작품들을 문예지에 발표한다. 그리고 일정량이 모이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다. 하여, 단편소설이 모인 책을 소설들의 집이라 하여, 소설집이라 부른다. 문예지에 발표했을 당시 읽은 작품과 한 권의 책으로 묶인 작품은 동일하다 해도 감회가 다를 수 있다. 문예지에 발표할 당시의 작품은 그 순간의 작가와 작가 주변, 작가가 속한 사회, 그러니까 세계의 상황 속에 놓인다. 작가도 작품도 독자도 세계도 동시성을 갖는다. 이러한 것을 하나로 꿰뚫는 말이 있으니, ‘정황(情況, circumstances)’이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조카의 휴대폰에는 129명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삼촌은 왜 이렇게 아는 사람이 없어.” 나는 조카에게 새해가 되면 1년 동안 한 번도 통화를 하지 않은 사람의 번호를 지운다고 말해주었다. 내 휴대폰에는 34명이 저장되어 있었다. … 조카의 휴대폰에는 재미있는 이름이 많았다. 자기 아빠는 도돌이표. (나와 열일곱 살 차이가 나는 큰형은 진짜로 잔소리가 심했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형의 이름을 도돌이표로 바꾸었다.) 엄마 이름은 칼보조제. (키가 작은 형수는 조카에게 하루에 우유를 세 잔씩 먹였다.) - 윤성희, 문학과지성사, ‘웃는 동안’(‘웃는 동안’ 수록) 중에서



윤성희의 신작 소설집 ‘웃는 동안’에는 10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돼 있다. 표제작 ‘웃는 동안’은 2008년 한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 한국 소설 문단에서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펼치는 작가가 소설집을 출간하는 주기는 보통 2, 3년. 소설집 말미에 밝힌 작품 발표 출처를 보면 수록작 중 ‘어쩌면’은 2007년에, ‘구름판’은 2011년 가을에 발표했다. 2011년 12월에 한 권의 소설집으로 묶어 출간했으니, 전작집인 ‘감기’(2007) 이후 5년 만이다. 한국 문단에서 성실하기로 소문난 이 작가에게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

소설가가 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골방에 틀어박혀 문장과 씨름하고 있는 문청들에게는 사치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소설가라고 소설 쓰기가 지겨워지지 않을 수 없다. 몇 십 년 경력의 작가라 해도 매번 새 소설을 시작할 때면 첫 소설의 설렘과 막막함, 그리고 부담을 떠안게 마련이다. 설렘으로 치면, 창작은 황홀한 작업이고, 막막함과 부담으로 치면, 저주받은 자의 불행이자 고통이다. ‘옥수수와 나’라는 단편으로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김영하가 수상소감 첫마디로 작가들이 주고받은 농담-“글만 안 쓰면 참 좋은 직업인데 말이야”-을 소개한 것은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실제 김영하는 2011년 문예지에 단 한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그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노마드 작가인 그는 한 곳에 뿌리내리고 쓰지 않고 세계의 여러 곳을 거쳐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한국 소설의 최전선으로 세계 문학의 흐름 속에 자신의 역량을 견인하는 과정에 있다. ‘옥수수와 나’는 그러한 작가의 삶과 문학의 호흡과 리듬 속에 생산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소설에 관한 한, 특히 단편에 관한 한, ‘옥수수와 나’를 경계로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조짐은 그가 뉴욕 체류 초기에 출간한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2010)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가는 매순간 변화를 꿈꾸지만 작품으로 나타나는 것은 매우 미미하다. 그것이 속성이며, 순리다. 변화도 확장도 작가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가치관, 세계관의 결을 따라 표출되고 방향의 가닥을 잡아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한국 소설이라기보다 세계 소설의 선두 작품으로 읽힌다. 한국 소설은 한국 독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세계 소설은 처음부터 세계 시민을 독자로 상정한다.

작가의 삶과 문학의 호흡

한 정신병원에서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 믿는 남자가 있었다. 오랜 치료와 상담을 통해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납득한 이 환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귀가 조치되었다. 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죽겠습니다.” …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환자는 말했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슬라보에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동유럽의 농담) - 김영하, 문학사상사, ‘옥수수와 나’(‘2012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수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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