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괄호 속 인생, 괄호 속 웃음의 세계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2-02-21 13: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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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호 속 인생, 괄호 속 웃음의 세계

    ‘웃는 동안’<br>윤성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312쪽, 1만1000원

    오랜만에 윤성희의 단편소설을 읽는다. 아니,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늘, 아니 매일, 어쩌면 하루에 한 편 이상, 소설들, 그중에는 반드시 한 편 이상의 한국 소설을 읽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윤성희의 소설은 문예지에 발표될 때마다 읽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낯설다. 처음 읽는 것 같다. 문예지는 작가에게 현장이고 무대다. 화가가 몇 년 동안 작업한 그림들을 날 잡아 갤러리에서 전시하듯, 작가는 한 달 혹은 1년 동안 쓴 작품들을 문예지에 발표한다. 그리고 일정량이 모이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다. 하여, 단편소설이 모인 책을 소설들의 집이라 하여, 소설집이라 부른다. 문예지에 발표했을 당시 읽은 작품과 한 권의 책으로 묶인 작품은 동일하다 해도 감회가 다를 수 있다. 문예지에 발표할 당시의 작품은 그 순간의 작가와 작가 주변, 작가가 속한 사회, 그러니까 세계의 상황 속에 놓인다. 작가도 작품도 독자도 세계도 동시성을 갖는다. 이러한 것을 하나로 꿰뚫는 말이 있으니, ‘정황(情況, circumstances)’이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조카의 휴대폰에는 129명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삼촌은 왜 이렇게 아는 사람이 없어.” 나는 조카에게 새해가 되면 1년 동안 한 번도 통화를 하지 않은 사람의 번호를 지운다고 말해주었다. 내 휴대폰에는 34명이 저장되어 있었다. … 조카의 휴대폰에는 재미있는 이름이 많았다. 자기 아빠는 도돌이표. (나와 열일곱 살 차이가 나는 큰형은 진짜로 잔소리가 심했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형의 이름을 도돌이표로 바꾸었다.) 엄마 이름은 칼보조제. (키가 작은 형수는 조카에게 하루에 우유를 세 잔씩 먹였다.) - 윤성희, 문학과지성사, ‘웃는 동안’(‘웃는 동안’ 수록) 중에서



    윤성희의 신작 소설집 ‘웃는 동안’에는 10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돼 있다. 표제작 ‘웃는 동안’은 2008년 한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 한국 소설 문단에서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펼치는 작가가 소설집을 출간하는 주기는 보통 2, 3년. 소설집 말미에 밝힌 작품 발표 출처를 보면 수록작 중 ‘어쩌면’은 2007년에, ‘구름판’은 2011년 가을에 발표했다. 2011년 12월에 한 권의 소설집으로 묶어 출간했으니, 전작집인 ‘감기’(2007) 이후 5년 만이다. 한국 문단에서 성실하기로 소문난 이 작가에게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

    소설가가 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골방에 틀어박혀 문장과 씨름하고 있는 문청들에게는 사치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소설가라고 소설 쓰기가 지겨워지지 않을 수 없다. 몇 십 년 경력의 작가라 해도 매번 새 소설을 시작할 때면 첫 소설의 설렘과 막막함, 그리고 부담을 떠안게 마련이다. 설렘으로 치면, 창작은 황홀한 작업이고, 막막함과 부담으로 치면, 저주받은 자의 불행이자 고통이다. ‘옥수수와 나’라는 단편으로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김영하가 수상소감 첫마디로 작가들이 주고받은 농담-“글만 안 쓰면 참 좋은 직업인데 말이야”-을 소개한 것은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실제 김영하는 2011년 문예지에 단 한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그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노마드 작가인 그는 한 곳에 뿌리내리고 쓰지 않고 세계의 여러 곳을 거쳐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한국 소설의 최전선으로 세계 문학의 흐름 속에 자신의 역량을 견인하는 과정에 있다. ‘옥수수와 나’는 그러한 작가의 삶과 문학의 호흡과 리듬 속에 생산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소설에 관한 한, 특히 단편에 관한 한, ‘옥수수와 나’를 경계로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조짐은 그가 뉴욕 체류 초기에 출간한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2010)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가는 매순간 변화를 꿈꾸지만 작품으로 나타나는 것은 매우 미미하다. 그것이 속성이며, 순리다. 변화도 확장도 작가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가치관, 세계관의 결을 따라 표출되고 방향의 가닥을 잡아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한국 소설이라기보다 세계 소설의 선두 작품으로 읽힌다. 한국 소설은 한국 독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세계 소설은 처음부터 세계 시민을 독자로 상정한다.

    작가의 삶과 문학의 호흡

    한 정신병원에서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 믿는 남자가 있었다. 오랜 치료와 상담을 통해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납득한 이 환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귀가 조치되었다. 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죽겠습니다.” …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환자는 말했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슬라보에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동유럽의 농담) - 김영하, 문학사상사, ‘옥수수와 나’(‘2012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수록) 중에서

    마치 올리버 색스의 화제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한 대목을 읽는 듯한 도입부인데, 이 소설 전체가 이 에피소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3부 구성 중 처음과 끝만 장식할 뿐, 정작 소설(본체)은 작가를 화자로 삼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소설 창작의 메커니즘을 희화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가만, 윤성희의 이전 소설집 ‘감기’와 신작 소설집 ‘웃는 동안’의 비정상적인 공백을 두고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더듬다가 잠시 샛길로 빠졌다. 샛길이라고 했지만, 사실, 살면서, 아니 쓰면서 샛길만큼 유혹적인 것은 없다. 어떤 사물이나 일의 사정과 사태를 명료하게 헤아리기 위해서는 비교라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 소설로의 샛길 빠지기는 얼마든지 유의미하다. 김영하가 지난 2년여간 세계 체제의 흐름 속에 세계 소설로서의 페이스를 조절하고 있었다면, 윤성희는 단편에서 장편의 호흡과 리듬을 치열하게 조련했다고 할 수 있다. ‘구경꾼들’은 데뷔 11년차 작가 윤성희의 첫 장편으로 웹진을 통한 매일 연재를 거쳐 출간되었다. ‘감기’와 ‘웃는 동안’ 사이에 ‘구경꾼들’이 놓이게, 그렇게 보자면 작가 윤성희는 출간의 흐름을 2, 3년 주기로 꾸준히 유지해온 셈이다. 필자가 이번 소설집에서 흥미롭게 주목한 것은 두 가지, 대화체와 괄호의 사용이다.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먹은 것은 죠스바였어.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던 버스 안에서였지. 반 아이들이 앞에서부터 한 명씩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압정은 끔찍하다는 말을 열 번도 더 내뱉었어. 왜 압정이냐고? 머리가 아주 크거든. “나는 자는 척해야겠다.” 압정 옆에 앉은 라디오가 의자 등받이 조절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어. 그러자 압정의 의자가 뒤로 젖혀졌지. “라디오. 이건 내 의자야. 넌 저쪽 걸 눌렀어야지.” … 라디오는 밤마다 라디오를 들어. … 그 라디오는 60년도 더 된 거야. 딸에게서 딸로 물림 되어온 것이지. - 윤성희, 문학과지성사, ‘어쩌면’(‘웃는 동안’ 수록) 중에서

    위의 인용에서 보듯 ‘웃는 동안’에 수록된 10편의 작품은 모두 단락 안에 대화를 수용하고 있다. 보통 지문에 대화를 쓸 경우, 따옴표를 생략한 채 간접화법으로 처리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 직접화법을 고집스럽게 블록(단락) 안에 가둬놓고 있다. 이는 작가가 소설을 대하는 자세, 정확히는 문장을 부리는 태도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매우 엄격하고 정교하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불러낸 문장들이지만 연필로 한 단어, 한 문장 꾹꾹 눌러 쓴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다. 또 하나는 몇몇 작품에서 구사된 괄호의 사용이다.

    이모는 취하면 현관문을 발로 걷어차곤 한다. 술만 마시면 현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나. 쿵. 쿵. 쿵. 세 번 발로 문을 걷어차고 난 뒤에는 나지막이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나는 티셔츠와 반바지를 대충 걸쳐 입고(잠을 잘 때 나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 몸이 튼튼해야 공부도 잘되는 법이라며 이모는 내게 중학교 입학 선물로 한약을 한 재 지어 주었는데, 그걸 먹고 나서부터 답답한 걸 견디지 못하는 아이가 되었다) 밖으로 나간다. 쿵. 쿵. 쿵. 다시 한 번 이모가 문을 발로 걷어찬다. - 윤성희, 문학과지성사, ‘구름판’(‘웃는 동안’ 수록) 중에서

    위의 대목뿐 아니라, 앞의 ‘웃는 동안’의 인용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윤성희의 단편에서 괄호의 사용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지문에서 괄호란 부연적인 것, 여담적인 것이다. 읽을 시간이 없거나, 읽을 의향이 없으면, 안 읽어도 무방한 것이 괄호 속 내용이다. 수사학에서 괄호는 여담으로 분류되고, 여담은 본 서사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폄하되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새로운 서사의 기능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는 세계, 중심과 주변이 전복되고, 다른 종, 다른 장르가 혼종, 통섭되는 21세기적인 흐름에 적합한 기능으로 간주된다. 곧 (마음) 속말, 속삭임 같은 괄호, 본 궤도에서 자꾸 이탈해 빠져드는 샛길 같은 괄호를 더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 초고속 인터넷 매체 환경으로 밤과 낮의 일상이 뒤바뀌고, 여기와 저기가 동시적으로 놓이는 현실을 재현하는 한 방법이 괄호인 것.

    생각해보면, 괄호 속 내용을 유독 탐하고,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 슬쩍 웃으며 ‘이건 여담인데’라고 덧붙이는 목소리에 유독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여담적인 인간들, 괄호 속의 인생들이 아닌가. 그 괄호 속의 은근하고도 뜬금없는 귀엣말이 일상이라는 거대한 본말(本末)을 잠시 잊게 해주지 않는가. 그리하여 웃게 해주지 않는가.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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