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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좋은 재판’

  • 정재민 | 전 판사·소설가

‘좋은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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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신임 대법원장이 지난 9월 25일 취임하면서 ‘좋은 재판’ 실현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좋은 재판이 무엇인지는 “독립된 법관이 공정하고 충실한 심리를 통해 정의로운 결론에 이르는 재판”이라 정의했다.이 정의를 이루는 단어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 독립에서는 최근 불거진 ‘법원 내부로부터의 독립’ 문제를, 공정에서는 판결의 정치편향성 시비와 전관예우 문제를, 충실한 심리에서는 사실심 충실화와 상고심 사건 체증 문제를, 정의로운 결론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회자되는 세태를 극복해보겠다는 결기가 읽힌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좋은 재판’을 강조한 것을 두고 기존에 법원이 ‘나쁜 재판’을 했다고 비판하거나 자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취지는 아마도 사법행정권을 대법원장의 위상 강화나 재판 아닌 다른 것에 쓰는 일을 줄이고 재판을 지원하는 데 더 집중하겠다는 뜻일 게다. 세상에 어느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하지 않고 싶겠는가. 판사들이 나쁜 재판을 하려고 매일같이 야근을 하겠는가.

나 역시 좋은 재판을 하고 싶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재판을 한 줄로 정의 내리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좋은 재판을 수식하는 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당사자가 지더라도 승복하는 재판’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재판’ ‘당사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재판’ ‘당사자들을 몰아세우지 않는 재판’ ‘설득력 있게 소통하는 재판’ 등 끝도 없다. 독립, 공정, 충실, 정의, 정치적 중립성과 같은 가치는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추가로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실제로는 좋은 재판보다는 좋은 판사가 무엇인지 더 자주 생각했더랬다. 인사권자나 평정권자가 생각하는 ‘좋은 판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거기에 내 자신의 모습을 꿰맞추려고 애써본 적은 없다. 타인의 의견을 끊임없이 참고하지만 내 삶의 지향과 가치관의 핵심을 설정하고 나 자신을 평가하는, 인간의 본질적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9월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취임식을 가진 김명수 대법원장.[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9월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취임식을 가진 김명수 대법원장.[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내가 생각하던 ‘좋은 판사’

동료 판사들과 지내다 보면 간혹 내가 혹시 재판을 받게 된다면 저 판사에게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분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공통점은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이었다. 총명한 판사, 성실한 판사, 정의감이 투철한 판사, 인권 감수성이 예민한 판사, 친절하고 다정한 판사가 모두 좋은 판사겠지만 나는 마음이 편안한 판사를 으뜸으로 쳤다.



아무리 똑똑하고 성실하고 겉으로 친절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판사에게 재판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특정 신념에 편향돼 있거나, 습관적으로 타인들의 흠을 적발해서 가혹하게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과 자신을 자꾸 비교하고 인정욕구가 강하거나, 피해의식과 불안 때문에 쉽게 분노하거나, 오로지 일밖에 모르는 일중독증자이거나, 판사가 제일 잘나고 똑똑하고 높은 사람이라고 여기거나, 그 밖에 강박·집착·콤플렉스·조급증으로 얼룩진 마음을 가진 판사다. 판사가 그런 얼룩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재판하면 합리적으로 판단하게 되고 재판을 받는 당사자들도 판사에게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이 아주 편치만은 않아서 마음 편한 판사에게 점수를 많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국민이 보는 법원과 판사

그러한 좋은 재판과 좋은 판사에 대한 생각이 올해 초 판사를 사직하고 법원을 떠난 뒤로 대폭 수정됐다. 나는 현재 법률가가 아닌 일반 행정부 공무원으로서 공학·회계·군사·재정·국제 등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다양한 출신·신분·학력·배경의 사람과 함께 일하고 있다. 조선, 항공, 자동차, IT 분야의 크고 작은 기업체에서 일하는 분들도 자주 만난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일반 국민은 법원 내부 사정에 별 관심이 없음을 알게 됐다.

신임 대법원장이 취임하기까지 언론에 그렇게 자주 노출되었고 그로부터 시간이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내 주변에서 대법원장이 어떤 분인지는 물론 이름조차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그런 사람들에게 ‘법원 내부로부터의 독립’이나 ‘법관 관료화’ 같은 단어들은 그저 새로 나온 외제 최고급 승용차의 모델명처럼 낯설고 멀게, 심지어 기이하게 들린다.

‘법원’이라는 단어를 던지면 “끌려가면 안 되는 곳” “콧대 높은 곳”이라는 말만 들리지 인권을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기관이라는 반응은 들어본 적 없다. ‘판사’라고 하면 그저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사람”, “갑 중의 갑” “나중에 변호사 개업하면 전관예우 받아 돈도 많이 벌 수 있어 좋겠네”라는 말만 듣게 된다. 반듯하고, 정의롭고, 청렴하고, 점잖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판사들끼리 서로 주고받거나 판사일 때 누군가가 면전에서 해주던 평은 판사를 그만두고 나니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

일반 국민은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고 눈앞의 일을 막아내기 바쁘다. 조금이라도 ‘갑’에게 덜 시달리고, 직장에서 덜 피곤하고, 경제적으로 한 푼 더 벌거나 덜 쓰고, 타인에게 무시와 모욕을 덜 받고, 이미 생긴 가슴속 상처를 어떻게든 해소해보려고 버둥거리는 데 관심이 쏠려 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도 없이 이런저런 사람 눈치를 보면서,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살아간다. 교통순경이 손짓하거나 구청 공무원이 전화만 해도 또 무슨 불이익을 당할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판사는 그저 저 멀리 구름 위에 있는 존재다. 정의? 인권? 민주주의 수호? 국민을 섬기는 기관? 그런 번지르르한 말들은 다 모르겠고 그저 제발 더 자기를 부르지만 말아달라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판사일 때는 미처 몰랐다.

‘엉터리 판결’의 기준

내 주변 공무원마저 판사가 온전히 독립적으로,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이가 많다. 언론에 부각되는 중요한 사건은 법원장이나 그 윗선과 조율해서 판결하리라고 믿고 그것이 그리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전관 변호사를 선임하면 법원이나 검찰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결과가 나온다고 믿는다. 그것은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상당수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판사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일부 극우, 극좌 판사가 존재하고 그들의 정치 성향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고 믿는다. 현찰은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김영란법’ 이후에는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접대나 선물을 심심찮게 받았을 거라 믿는다. 그것은 판사들을 유독 부패한 집단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힘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 그런 식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제 내게 좋은 재판은 단연 ‘정확한 재판’이다. 좋은 판사는 ‘정확한 재판을 하는 판사’다. 법원 밖에 나와 보니 사실과 다른 ‘엉터리 판결’을 받았다고 불평불만인 사람이 너무 많았다. 판결이 정확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판결의 사실관계 인정이 진실에 부합함을 의미한다. 그것이 틀리면 독립, 공정, 중립, 충실한 심리, 정의로운 결론이 죄다 의심받는다. 판사가 아무리 독립적으로 공정하고 충실하게 재판해도 판결이 정확하지 않으면 전관예우를 받았느니, 지인의 청탁을 받았느니, 서면과 증거를 제대로 안 보았다느니,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느니,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느니, 여혐 또는 남혐이 엿보인다느니 하는 의심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반대로 사실인정만 정확하면 그밖의 법적 판단의 차이에 대해서는 쉽게 불만을 제기하지 못한다.

물론 김명수 대법원장이 말하는 ‘충실’이나 ‘정의로운 결론’에는 정확한 사실관계 인정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관적 경험으로 법원 밖에 나오니 사실관계의 정확성이 절실하게 느껴져서 강조하는 것이다. 또 하나 깨달은 것은 “독립된 법관이 공정하고 충실한 심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정의로운 결론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국민은 “독립된 법관이 공정하고 충실한 심리”를 했다고 해서 진실의 과녁을 맞히지 못한 판결에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국민이 보는 ‘좋은 재판’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이 1649년 발표한 
유화 ‘솔로몬의 재판’. 
솔로몬은 사태의 진상을 
꿰뚫어보고 진실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 
판결로 ‘좋은 판사’의 
전범을 이뤘다. [동아DB]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이 1649년 발표한 유화 ‘솔로몬의 재판’. 솔로몬은 사태의 진상을 꿰뚫어보고 진실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 판결로 ‘좋은 판사’의 전범을 이뤘다. [동아DB]

나는 판사일 때 재판은 최선을 다하면 족한, 법에서 말하는 ‘수단 채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국민 눈에는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만 하는 ‘결과 채무’다. 의사가 아무리 친절하고, 인품이 좋고, 설명도 잘 해주고, 성실하게 치료해도 오진을 해서 사람을 잡았는데 누가 좋은 의사라 하겠는가. 그저 돌팔이일 뿐이다. 차라리 불친절하고 성의 없어 보여도 병만 정확히 진단해서 확실히 치료해준 의사가 진짜 의사다. 그런데도 나는 재판을 하면서 때때로 증거 없이 자기주장만 반복하는 당사자에게, 판사가 신도 아닌데 증거가 제출되지 않은 그런 사정까지 다 어떻게 알겠느냐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내 말이 소송법적으로는 맞다 하더라도 국민에게 당당히 할 말은 아니었다. 지금은 당사자의 불충분한 증거 제시로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에 부합하지 않았다면 판사로서는 미안해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점술가의 말은 그날이 올 때까지 정확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때가 되면 대개 예전의 예언은 잊히고 만다. 그러나 판사의 사실관계 확정이 정확한지 여부는 곧바로 드러난다. 당사자들은 진상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가 사실관계를 잘못 인정하더라도 당사자들이 그 잘못을 입증하고 따지기 어려울 뿐이다. 엉터리 판결이 나오면 거짓말한 사람은 속으로 웃고 참말을 한 사람은 피눈물을 흘린다.

돌아보면 그런 피눈물을 볼 기회가 별로 없던 판사 때에는 좋은 재판의 기준을 너무 판사 위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내 판결의 내용이 실제 일어난 사건과 부합하는지보다는 내 판결 자체가 논리적 완결성이 충분한지, 그래서 상급심에서 흠이 잡히지 않을지에 더 초점을 맞췄다.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처럼 분쟁의 한가운데 깊숙이 뛰어들어 진상을 적극적으로 캐려고 하기보다는, 사건의 진상을 경험하지 못한 판사가 섣불리 넘겨짚어 추측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논리를 방패 삼아, 실체의 주변부에서만 얼쩡거리는 것을 정당화했다. 실체에 부합하지 않는 판결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변론주의, 입증책임, 증거법칙 등 기술적 ‘룰’과 양 당사자 사이의 기계적 중립에 어긋난 판결을 하지 않으려고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잘 모르겠으면 안전한(?) 입증책임에 기대어 판결함으로써 진실을 직면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를 더 내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아쉽고 부끄럽다.

모쪼록 신임 대법원장께서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 보여드리겠다 한 “31년 재판만 한 사람의 수준”을 우리 국민이 더 좋은 재판을 통해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신동아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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