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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역설 어느 부부의 연대기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결혼의 역설 어느 부부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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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역설 어느 부부의 연대기

가벼운 나날<br>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맨해튼 42번가 타임스퀘어 광장 뒤쪽으로 브로드웨이를 걸어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끝이 까마득한 고층 건물이 창공에 치솟아 있다. 맨해튼 거리를 걷다보면 인간이 개미처럼 작고 하찮은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비현실적으로 내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막강한 고층 건물들의 존재를 인식할 때다.

이 마천루의 어느 한 건물이 출판사 사옥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대학 졸업 후 광화문에 있던 메이저 출판사 M사 편집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나로서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처럼, 이곳의 대형 출판사는 세계 출판시장을 겨냥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금방 수용할 수밖에 없다.

한 달 또는 두 달여 뉴욕에 머물 때면, 온종일 표류하듯, 맨해튼 거리를 산책하곤 하는데, 산책의 묘미 중 하나가 목적하지 않았던 건물에 불쑥 들어가보는 것이다. 그중 건물의 회전문을 즐겁게 밀고 들어갔다 나오는 곳이 바로 브로드웨이의 랜덤하우스다. 대리석 벽에 높은 천장, 널찍한 1층 로비 한가운데에 놓인 둥근 유리 진열대, 좌우 벽을 장식하고 있는 서가, 그리고 표지 전면이 보이도록 배치해놓은 몇몇 고전 또는 신간 몇몇…. 둥근 유리 진열대에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 ‘A Sense of an Ending’(‘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번역 출간)가 전시되어 있고, 왼편 벽의 서가에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아메리칸’이 제왕처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천장 가까이 꽂혀 있는 책들의 등을 하나하나 거쳐가다보면 보석처럼 번쩍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제임스 설터의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두어 달 전, 파리 센 강변의 오래된 영국 서적 서점인 셰익스피어앤컴퍼니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옆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던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이 떠오른다. 나는 습관적으로 조이스의 소설을 집어들었다가 내려놓고 대신 설터의 소설을 반갑게 펼쳤보았다.

아포리즘적 문장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간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트리는 것처럼.

-‘가벼운 나날’ 중에서

제임스 설터는 랜덤하우스의 명편집자 조지프 폭스가 죽을 때까지 옹호하던 작가다. 작가와 편집자는 운명적인 관계다. 일정 수준에 오른 작가를 예로 들면, 그 작가가 어느 출판사의 어떤 편집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사정(세계)이 달라진다. 편집자들은 작가를 발굴하고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준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작가가 있는데, 모두 편집자의 열렬한 지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설터가 랜덤하우스의 명편집자 조지프 폭스를 사로잡은 것은 앞의 인용에서 보듯 오랜 통찰력에서 나오는 투명하면서도 아포리즘을 거느린 절제된 문장 때문이다. 그의 소설의 특장은 매 단락 새로 시작되는 짧은 연극, 또는 옴니버스 단편영화를 보는 듯한 현장감이다. 소설은 생동감에서 그치지 않고, 그 순간을 서사화해서 독자의 의식 깊이 찔러 넣어주어야 한다. 설터는 연극 또는 영화의 미장센(고유한 장면 연출법)과 소설의 서사 미학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드문 작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서사 미학을 창조하는 동력은 바로 현실(사실)을 꿰뚫은 시적인 문장 또는 철학적 사유로 빚어낸 아포리즘적 문장에 있다.

공유한 것은 행복뿐이라는 듯, 그들은 다음날을 계획했다.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기구와 그릇들은 모든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가벼운 나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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