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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심리학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지킬 게 없는 사회

  •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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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은 ‘내 목을 자르는 한이 있어도, 내 상투를 건드릴 수는 없다’와 같이 자신이나 가족의 안녕을 희생할 정도로 지키고자 하는 어떤 가치나 상징이 있었던 것 같다. 당파적이고 비효율적이고 구시대적으로 비치는 선비의 모습에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사소한(우리 눈에?) 무엇이 존재했다. 상투, 예법, 절차, 의식 등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간 것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쓸데없는 짓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추구하는 무엇인가를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에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3년 동안 묘소를 지키는 것이나 전통 결혼식에서의 수많은 의식은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구습이나 미신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지금의 결혼식에서 신부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인식이나 입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는 생각도 과거의 경우보다 더 효율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사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지금이 과거보다 이혼율은 훨씬 더 높은데도….

우리가 잃어버린 것

한국인에게 자신과 가족의 성공과 안녕을 포기하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게 있는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9·11 테러와 같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자살테러는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희생이다. 물론 그 방법이 옳다는 얘기도 아니고 그 목적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아마 우리의 조상이 목숨과도 바꿀 만큼 소중하게 지키려 했던 가치를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잃어버렸을 것이다. 흔히 식민지배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얘기할 때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것을 예로 든다. 식민지배를 통한 경제적 피해, 자원의 수탈, 노동력 착취, 문화자원 손실 등이나 전쟁을 통한 기간시설 파괴, 경제 시스템 붕괴, 발전 기회 상실, 인적 손실 등을 얘기한다. 이러한 손실은 너무나 거대하면서 동시에 명백하기에 그 규모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그에 대한 보상에 명시되는 경우가 많고, 역사적인 논의도 이러한 물질적 손실에 집중하게 된다. 더러 피해 국가의 국민이 겪었을 정신적 고통이나 정신적 외상 등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보상이나 사과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식민지나 전쟁이라는 비극이 한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빼앗아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일제는 우리의 문화, 언어, 가치를 없애려 갖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역사 왜곡과 한국적인 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비난으로 우리의 과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무려 30년 넘게.

광복 이후 우리의 가치와 역사를 되찾기도 전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한 사회의 국민 수준을 끌어내리는 결과를 낳는다. 생존이 위협받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 대부분은 자신이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일도 한다. 아무리 고결한 사람도 상한 음식을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죽은 자의 물건을 빼앗고, 스스로 살기 위해 주변사람을 배신하고 버리게 된다. 서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긴다고 믿었던 사람도 총알과 폭탄, 굶주림과 두려움 앞에서는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오직 자신과 가족의 생존만이 중요해지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때로는 가족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과 그것을 지켜보는 모든 이에게 인간의 존엄성, 상징적 가치, 사회적 규범의 허무함과 상대적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비극적 경험의 심리적 파장

이런 심리적 손실이 일어나는 과정은 인지부조화 이론과 태도의 중요도로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신념과 태도가 행동을 결정한다고 믿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어떤 대상이나 행동을 좋아한다면 그 태도를 반영하는 행동을 한다.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행동이 신념이나 태도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때로는 상황적 제약이나 외부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태도와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태도, 믿음, 신념에 반대되는 행동은 심리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 하고, 절체절명의 상황은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그래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가족을 지키는 게 우선이야’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는 받아들여질 거야’ ‘다른 사람은 더 하는데 뭐’…. 이런 합리화는 그 순간 마음을 편하게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어떤 숭고한 가치, 종교적 교리, 사회적 규범도 생존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말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받기 전에는 너무나 쉽게 ‘나는 죽어도 그건 못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 때문에 죽을 처지에 놓인다면, 죽음을 택할 사람은 별로 없다. 실제로 평소 남의 물건을 훔치고,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 척하고, 썩은 음식 때문에 다른 사람이랑 싸우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이런 소신을 지키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런 심리적 갈등과 합리화, 그리고 인식의 변화 과정이 바로 인지부조화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많은 사람은 지연과 학연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며 후보의 자질이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갖춘 후보와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후보 중에 선택하라는 쉬운 문제가 주어지지 않는다. 항상 충돌하는 가치 중에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더 중요한 걸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선택의 결과는 인지부조화를 통해 그 중요성을 더 강화하는 선(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전통적 택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영국(왼쪽)과 일본의 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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