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신세계’에서 이자성(이정재)이 인천 연안부두를 바라보고 있다.
“신세계! 신세곕니다!”
그 말을 막상 입 밖에 내는 순간, 세 사람 모두 씁쓸한 표정이 된다. ‘신세계’라니. 어쩌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소리다. 그들이 만들려는 세상이 분명 신세계이긴 하다. 그러나 그 신세계를 만들려는 방식이 ‘신세계스럽지’ 않다. 선을 행할 때 악을 차용하면 그 선은 결국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그 장면 하나만으로 영화 ‘신세계’는 지금의 모든 세상사와 자기 동일화를 이룬다. 대개 좋은 영화의 이야기는 특별하게 시작하지만 결국은 보편성을 띠는 쪽으로 흐른다. 특수는 일반이 되고 일반은 특수가 된다. 그 반대도 된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처절한 진실
영화 ‘신세계’의 도입부는 한 남자의 발가락을 해머로 짓이기는 극악한 폭력성으로 시작되지만 곧이어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한 남자의 뒷모습이 등장한다. 조직에서 3인자로 성장한 이자성(이정재)은 멀끔한 양복 차림으로 인천 연안부두 저 너머를 응시한다. 그는 곧 담배를 한 대 물고,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광풍이 불고 있을 터다. ‘원래 이러려고 이런 것은 아닌데….’

인천 연안부두는 국내 최초 개항지지만 어쩐지 덩그라니 내던져진 느낌이 든다.
영화 ‘신세계’를 곰곰이 복기하면, 역설적으로 토마 피케티의 책 ‘21세기 자본론’이 떠오른다. 피케티는 일갈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소수 부유층에게 부가 집중돼 분배 구조가 악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또한 자본주의에서는 노동 소득보다 자본 소득, 곧 부의 세습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한다고.
한마디로 있는 자가 더 많은 돈을 갖게 된다는 얘기인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 주변을 둘러보면 단박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은 원래 돈이 돈을 만들지 노력, 저축, 성실이나 정직 따위가 만들지 않는다. 돈은 ‘원래 버는 놈’이 버는 것이다.
그래서 ‘신세계’의 주인공들은 그 ‘버는 놈들’에게서 돈을 탈취하는 방식을 택한다. ‘버는 놈들’에게 기생하면서 사는 제도권의 공복은 살아남기 위해 ‘버는 놈들’만큼 악랄하고 용의주도해져야 한다. 속고 속이는 게임에 능해져야 한다. 이쯤 되면 여기엔 룰이 없다. 이 아수라장에서 유일한 정의, 그리고 선(善)이란 그 누구도 믿지 말고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곧 패밀리를 지켜내는 것뿐이다. 그래서 사회의 모든 제도와 법이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건 그야말로 처절한 성찰이다. 영화 ‘신세계’는 마피아의 피가 튀기고 살점이 뜯겨나가는 폭력 얘기를 그리는 척, 사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진실을 우회적으로 그리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