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당일, 이 후보 측에서 ‘후보님 집무실에 들어가선 목례를 한 차례 한 뒤 후보님 쪽으로 걸어가서 악수할 것, 인터뷰 시간 엄수할 것, 서면질의 외에 추가질의 하지 말 것’이라는 취지의 주문이 전달됐다. 당시 이 후보는 제왕적 후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권 보좌역은 나중에 이런 주문이 전달된 것을 알고는 기자에게 무척 미안해했다.
이후 그는 2004년, 2008년, 2012년 총선 때 서울 노원에서 출마해 각각 졌고, 이겼고, 졌다. 그 중간에 서울시 부시장을 했다. 비박계로 알려진 그는 올해 친박의 아성 대구에서 새누리당 시장 후보가 되더니 ‘김부겸 바람’을 잠재우고 당선됐다.
최근 대구시장 집무실에서 권 시장을 만났다. 그는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며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서로 알고 지낸 사이지만 어린 시절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 부분부터 물어봤다.
사회주의자의 변신
▼ 학창 시절 어떤 학생이었나요.
“공부 좀 하는 말썽쟁이?”
▼ 성적은?
“전교 2등과 200등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갔죠. 공부 잘하는 친구, 싸움하는 친구, 운동하는 친구 다양하게 사귀었어요. 집이 경북 안동이었는데 방학 때마다 배낭 메고 친구 두세 명이랑 전국을 여행했어요.”
▼ 가정 형편은.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 나오셔서 작은 사업을 하셨어요. 세 번 부도난 회사를 맡아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죠. 아주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리 궁핍했던 것 같지도 않아요. ‘장남답게 동생들에게 헌신하라, 우리 집안이 선비집안이다,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을 일 하지마라’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말씀을 귀에 달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는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 주변에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 386정치인이 많은데, 권 시장께선 대학원에 가서 학생운동을 한 것 같더군요.
“학부 시절 소위 언더에서 북한 바로 알기 운동,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 학생운동의 전면에 나섰죠. 고려대 대학원 총학생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고 서울대, 연세대, 부산대 이렇게 여러 대학을 돌며 전국대학원총학생회를 조직했어요. 사회주의가 우리의 대안일 수 있다고 여기면서 지식인 사회가 대중운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봤어요.”
▼ 지금은 사회주의자가 아니겠죠?(웃음)
“철학적으로 급선회한 게, 사회주의 국가들이 추풍낙엽처럼 몰락하는 걸 지켜보면서부터였어요. 당시엔 노동운동이 학생운동을 좌지우지했죠. 노동운동세력은 늘 대중, 대중을 이야기하면서도 내게 내려오는 지시는 대중의 이익보다 자기 세력의 이익과 논리를 강압하는 쪽이었어요. 저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돌아가 공부를 새로 했죠.”

“결국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 차이 같아요. 사회주의 인간은 운명이 결정된 인간이죠. 선인과 악인이 나눠집니다. 어떤 그룹은 절대 선으로서 이 사회를 지배해야 하고 어떤 그룹은 소멸해야 하죠. 타협이란 없어요. 적대적 투쟁만 존재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인간은 이성적이지만 부족한 점을 갖고 있는 인간이죠. 오류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점을 인정해요. 이에 따라 관용을 바탕으로 타협과 양보를 통해 나아가죠.”
소장개혁파 탄생 산파
권 시장은 통일부에서 6년여 동안 공무원 생활을 했다. 그는 “밖에선 그림만 그렸는데 통일부에선 벽돌을 차근차근 쌓았다”고 말했다. 연형묵 북한 총리가 왔다 가면서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고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지고 남북협력기금이 생기고 통일연구원이 설립되는 과정에 깊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는 “많은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정치논리로 통일정책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서 ‘결국 정치구나’라는 걸 느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