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호

상속의 역사

동서고금 부모가 사는 법

효도계약서는 당연하다!

  • 입력2018-07-08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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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부모 생전에 자식에게 재산을 온전히 물려주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혹시라도 재산을 다 넘겨주고 나면 노후를 어떻게 보낼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로한 부모들은 재산을 넘겨준 뒤 자녀한테서 푸대접받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적지 않았다.
    페르디난드 게오르그 발드뮬러, <grandfather's birthday>, 1849, 개인 소장.

    페르디난드 게오르그 발드뮬러, <grandfather's birthday>, 1849, 개인 소장.

    요즘 들어 ‘효도계약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어르신이 많다. 자식이 부양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넘겨준 재산을 회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전 지구적으로 추세가 그러하다. 

    한국의 법률가들도 ‘효도계약서’를 꼼꼼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다고 연로한 부모들에게 권고한다. 자식에게 어떤 부양을 바라는지 글로 명확하게 정리해 계약서에 명기하라는 것이다. 가령 부동산을 자식에게 증여할 경우, 재산 목록을 작성하고 그에 덧붙여 만약 상속인이 피상속인에 대한 부양 의무를 위반하면 증여한 재산을 반환하게 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기입하라는 조언이다. 

    좀 살벌한 느낌이 든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법률가들의 견해는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함부로 무시할 일이 못 된다. 지난 수백 년간 한국 사회는 효도를 자식 된 이의 당연한 의무로 여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온다. 그러나 서양 사회는 우리와 달랐다. 지금 21세기의 한국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서양식으로 살고 있다.

    치즈 한 덩이까지 기록

    오래전부터 서양인들은 부모의 부양에 관해 부모 자식 간에 계약을 체결했다. 정서적인 부분은 계량할 수 없기 때문에, 계약서에 기록하지 못했다. 부모의 식생활, 주거 및 의생활에 관해서는 달랐다. 자식의 부양 의무를 자세히 기록했다. 멀리 중세 때부터 서양 사회에서는 이런 전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예외가 있다면 20세기뿐이었다. 그때는 국가가 운영하는 복지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중세에는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가 대부분이어서, 계약이라고 하더라도 대개 구두 계약을 맺었다. 근대로 접어들자 사정이 바뀌었다. 차츰 학교교육이 확대돼 시민들의 문자 해독률이 높아졌다. 18,19세기에는 부양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지배적인 흐름이었다. 



    피상속인(부모)의 부양에 관한 문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유언장이다. 도시의 중산층 가정은 유언장에 상속인(자녀)이 피상속인을 어떻게 부양할지 매우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만일 피상속인이 병들면 간호를 어떻게 할지, 사망하면 장례는 어떻게 치를지 자세히 정해두었다. 서양 사회는 계약서를 통해 크고 작은 인생사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유언장에 특히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식생활에 관한 부분이었다. 예컨대 우유는 일주일에 몇 리터를 제공할지, 버터와 치즈는 얼마만큼의 분량을 잡숫게 할지, 또 고기 요리는 한 달에 몇 번이나 식탁에 올릴지도 미리 정해두었다. 

    18,19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유언장에는 이런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내가 읽어본 바로는 이러한 구절이 흔했다. “너(상속인)는 나(와 나의 배우자)에게 우유를 공급해야 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우리)를 돌봐줘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내 재산이 네게 상속될 것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내(우리)가 늙고 병들었을 때 부양한 사람이라야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본래의 약속이 실행될 것이다.” 

    이런 규정을 실제로 엄격히 적용해 상속인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부양에 게을렀던 아들이나 조카를 대신해, 노인을 끝까지 시중들었던 하녀 혹은 이웃 사람에게 재산을 물려줬다.

    은퇴 후엔 오두막으로

    밀레, 만종. [wikimedia commons]

    밀레, 만종. [wikimedia commons]

    서양에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문서가 있었다. ‘은퇴계약서’다. 이것은 주로 농촌 지역에서 작성됐는데, 자신의 명의로 경작지를 소유한 농부뿐만 아니라 소작농민도 이러한 문서를 만들었다. 이 계약서가 완성되면, 노쇠한 농부는 자신의 경작지나 소작지를 아들(또는 딸)에게 맡기고 생업 전선에서 물러났다.
     
    은퇴계약서를 작성하는 시기와 방법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가령 폴란드에서는 농지 규모가 작을수록 은퇴 시기가 빨랐다. 높은 수준의 농업생산성을 유지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세대교체를 하는 편이 좋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한편 스웨덴에서는 대지주가 압력을 행사해 소작농이 임의로 은퇴계약서를 작성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대지주가 직접 차기 소작농을 선택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도 큰 틀에서 보면 은퇴계약서는 유럽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보편적 관습이었다. 간혹 은퇴한 농부가 상속인(아들 또는 딸)과 한집에서 살며 농사일을 돕기도 했다. 이것은 물론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대개 은퇴한 농부는 작은 오두막을 지어 그리로 퇴거했다. 만약 경제 사정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상속인의 집에 눌러 지냈다. 은퇴한 농부는 방 하나를 따로 사용하면서, 농장에서 생산되는 우유와 감자, 고기, 달걀을 일정 분량 지급받았다. 겨울철에는 난방용 땔감도 받았다. 

    은퇴한 뒤라도 부부가 모두 생존하는 동안에는 두 사람의 식사는 스스로 준비했다. 그러다가 만일 농부의 아내가 사망하면, 농부는 상속인의 집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상속인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했다. 농부(와 아내)가 늙고 병들면 상속인은 당연히 모시고 살았다. 병간호도 상속인의 몫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서구에서는 도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그러자 은퇴한 농부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독일 서프로이센 지방처럼 부농이 많은 곳에서는 은퇴한 농부가 도시로 이주했다. 그리고 고향에 남겨둔 상속인으로부터 매달 생활비를 받았다. 그들은 도시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냈다. 

    그러나 유럽의 대다수 농부는 가난했다. 그들은 은퇴한 후에도 상속인의 농사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야만 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은 은퇴자용 오두막에 살면서도 끝끝내 은퇴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은퇴’라는 상황 자체를 끝내 수용하고 싶지 않았던 이들이다. 

    알다시피 서양에서는 ‘장자 상속’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이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랬다. 로마시대의 유풍이었다고 한다. 상속인(장남)는 형제자매들이 부모 슬하를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피상속인(부모)의 은퇴계약서를 작성했다. 많은 경우에는 계약서를 작성한 직후, 피상속인이 차남 이하 상속에서 배제된 자녀(아들 혹은 딸)의 집으로 옮겨갔다. 은퇴 시기는 개인마다 달랐다. 그래도 80세 이전에 농부 대부분이 일을 그만뒀다. 

    그런데 은퇴계약서에는 뜻밖의 조항이 포함되기도 했다. 피상속인의 요구에 따라, 피상속인의 형제와 자매도 부양 대상에 올랐다. 동기간에 우애가 특별히 깊었거나, 여생을 보낼 뾰족한 방법이 없는 동기간이 살아 있을 경우 이러한 특약 사항이 추가됐다. 그 밖에도 피상속인의 ‘은퇴한 하녀’까지 노후를 보장받는 경우가 있었다. 피상속인의 의지 여하에 따라 계약 내용도 신축성 있게 달라졌다. 

    18,19세기 서양 농민들은 은퇴계약서를 통해 노후를 보장받았다. 관련 기록이 가장 풍부한 노르웨이의 경우를 검토해보면, 1875년 당시 전체 농부 중 절반가량이 은퇴계약서를 작성했다. 1900년에는 그 비율이 43%로 줄었으나, 그때까지도 은퇴계약서는 가장 유력한 노후 보장 수단이었다. 

    만일 세대 간 갈등이 커지면 어떻게 될까? 상속인의 가계경제가 위기에 빠지는 것은 물론이다. 은퇴한 농부가 자녀의 농사일을 조금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꼬박꼬박 부양 의무를 요구할 경우, 젊은 농부는 두 집 살림을 감당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세대 갈등이 깊어지면 부모도 자식도 먹고살기가 곤란해졌다. 

    상속인의 어깨는 무거웠다. 은퇴한 부모를 부양하기가 지레짐작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관습에 따라 상속에서 배제된 동기간들이 상속인에게 질투를 느껴 적대적으로 나오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과의 우애를 돈독히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부모 및 동기간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가정경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상속권을 양도했다. 이때 피상속인(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도 함께 타인에게 넘어갔다. 한국 사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문제해결 방식이었다.

    부양 부담 때문에 상속 포기

    말이 나온 김에 은퇴계약서의 소멸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는 이 문서가 점차 소멸됐다. 가령 스웨덴 북부 산간벽지와 같이 산업화의 물결에서 소외된 지역에서는 1910년까지도 은퇴계약서가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러한 계약서가 사라지고 없었다. 화폐경제가 확대·심화됐기 때문에 은퇴자의 노후 보장은 다른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19세기의 대표적 농업국가인 덴마크의 경우를 보자. 알다시피 덴마크는 영국에 버터와 베이컨 등 낙농식품과 육가공품을 수출했다. 1891년, 덴마크 의회는 노인 부양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부심 강한 농민들이 연금 수령을 거부했다. 대신 그들은 일종의 농지연금을 받아 생활했다. 이것은 은퇴 시 농지 가격을 평가해, 상속인이 그에 대한 이자를 해마다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상속인은 자신의 농장 수입을 분할하거나, 아내가 결혼지참금으로 가져온 화폐를 조금씩 나눠 피상속인에게 지급했다.
     
    1880년대부터 독일에서도 농민연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60세 이상의 농부에게 연금을 지급하자는 주장이었다. 연금제도가 시행되면 상속인이 피상속인을 부양하기 위해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차용할 필요가 사라질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연금이 현실화되기는 어려웠다. 다수의 가난한 농부들은 연금저축을 납부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결국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도 덴마크와 같은 방식을 따랐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러서 20세기 전반이 되면,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농민연금법이 시행됐다. 이제 은퇴계약서는 불필요하게 됐다. 도시의 중산층도 유언장에 굳이 부양 조건을 기록할 필요가 없게 됐다. 연금제도가 보편화하자 천년 전통의 부양계약서가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노령화가 급격히 진행되자 인간 사회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국가 채무가 급증하면서 노령연금이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21세기에 ‘효도계약서’가 등장한 배경이다.

    고려 왕조, 父子간 ‘전쟁’

    김득신 수하일가도. [wikimedia commons]

    김득신 수하일가도. [wikimedia commons]

    과거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등 동아시아 사회에는 ‘부양계약서’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굳이 유언장이나 은퇴계약서를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교 사회에서는 효도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있었다. 피상속인인 부모가 노후를 염려해 문서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아시아에서 효도란 실천해도 그만, 무시해도 그만인 허황된 도덕관념이 아니었다. 국가는 효행이 탁월한 이를 발굴해 수시로 표창했고, 심지어 관직을 주어 조정에 등용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불효’에 대한 사회적 감시의 눈길이 매서웠다.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서 ‘멍석말이’(공동체벌)를 할 정도였다. 향약과 동약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요, 어른에 대한 공손한 언행이었다. 

    극히 최근까지도 집집마다 연로한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의식주 전반에 어르신의 취향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부모님께 바치는 상차림에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조선 시대의 유풍은 20세기 중후반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효도는 모든 한국인의 필수적인 의무였다. 

    21세기의 한국은 완전히 다른 사회다. 어르신 학대 사건이 적지 않다. 물려줄 재산이 없는 부모를 장성한 자녀가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오죽하면 부모의 권리를 높여 불효를 예방하자는 사회적 목소리가 일어날 정도일까 싶기도 하다. 

    물려줄 재산이 많아도 문제는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국내 굴지의 어느 재벌가에서 연로한 아버지가 자신의 뜻을 어긴 아들을 법정에 고발한 일도 있다. 상속할 재산 여부에 관계없이 세대 간의 갈등이 도를 넘은 것이 우리의 세태다. 

    성리학(유교)이 전성기를 구가한 조선 시대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럼 유교가 아직 뿌리내리기 전에는 어땠을까? 고려의 왕들은 부자(父子) 갈등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충렬왕(아버지)과 충선왕(아들)의 관계가 그러했다.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그때는 원나라의 간섭이 심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왕보다 더한 권력을 행사했고, 왕은 그 때문에 왕비와 심하게 대립했다. 충선왕은 제국대장공주의 왕자였다. 부왕과 모후의 갈등 속에서 자란 그는 부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왕의 측근 세력을 숙청하는 등 정치적 파란을 예고했다. 

    1298년, 충렬왕은 정치적 위기를 느껴 세자(충선왕)에게 양위한다. 24세의 젊은 충선왕은 관제를 개혁하고, 세력가(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혁신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역풍을 만나 즉위 7개월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후 고려 조정에는 부왕(충렬왕)의 추종 세력과 아들(충선왕) 세력이 심한 갈등을 빚었다. 심지어 부왕 측은 충선왕과 그 왕후(몽골공주)를 이혼시킬 음모까지 꾸몄다. 우여곡절 끝에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자, 충선왕이 다시 왕좌를 차지했다. 말년에 충선왕은 원나라의 수도 연경에 체류하며 ‘만권당’이란 왕립 도서관을 세워 고려가 성리학을 수용할 계기를 마련했다. 

    재물과 권력을 둘러싼 부모 자식 간 갈등은 인류 사회의 보편적 현상인 것 같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끊임없이 경주되어왔다. 유언장과 은퇴계약서 따위가 작성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작금에 새로 등장하는 효도계약서는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지 두고 볼 일이다.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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