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호

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아편전쟁과 광저우 앞바다의 유니언잭

“이렇듯 불명예스러운 전쟁은 없다”

  • 입력2018-07-08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백련교도의 난, 정비의 난은 청(淸)의 몰락을 예견하는 비바람이었다. 광저우 앞바다에 대영제국 깃발이 펄럭였다.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등 민초의 거센 저항에도 대청(對淸)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의 후예 장동(壯洞) 김씨가 장악한 조선 조정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샤먼 전투(Battle of Xiamen)에서 청군을 물리치고 샤먼을 점령하는 영국 육군 제18보병연대.

    샤먼 전투(Battle of Xiamen)에서 청군을 물리치고 샤먼을 점령하는 영국 육군 제18보병연대.

    중국 서부 신장(新疆)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톈산산맥 북쪽에 중가르 초원지대가 있다. 중가르 서쪽은 이리분지(伊犁盆地)다. 1634년 초로스부(몽골화한 투르크족) 출신 카라쿠라가 오이라트족(초로스, 도르베트, 토르구트, 호쇼트부) 대부분을 묶어 이리분지를 중심으로 중가르 칸국을 세웠다. ‘중가르’는 몽골어로 왼쪽이라는 뜻이다.

    새로 얻은 땅, 신장(新彊)

    카라쿠라의 손자 갈단(1649~1697)은 ‘제2의 칭기즈칸제국’ 건설을 염원했으나 청(淸) 강희제와 치른 전쟁에서 패한 후 알타이 산록에서 병사했다. 청은 옹정제 시기에도 중가르를 계속 공격했다. 그만큼 중가르는 청에 위협적이었다. 건륭제가 1754년과 1757년 두 차례 출병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오아 조혜(烏雅兆惠)가 지휘한 제2차 중가르 원정 시 그때까지 살아남은 중가르인 60만 명 거의 모두가 청군과 전투하다가 죽거나 천연두로 사망했다. 

    중가르인이 사라진 후 톈산산맥 이남에 거주하던 위구르족이 이리 지방으로 넘어왔다. 이리 지방에 살다가 17세기 초 중가르 칸국에 밀려난 토르구트족(케레이트부의 후손)은 카스피해 북서부까지 이주, 러시아연방 칼믹 공화국의 기원이 됐다. 

    톈산산맥 북쪽이 라마불교 중가르의 세계라면, 톈산산맥 남쪽은 이슬람교 위구르의 세계였다. 이곳에는 9세기 중반부터 몽골고원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족이 종족 단위로 오아시스 도시국가를 이뤘다. 

    청군은 중가르 정복의 여세를 몰아 1758년 다시 출병해 톈산산맥 이남 위구르 국가들을 모두 정복했다. 건륭제는 톈산남북(天山南北) 영토를 새로 얻은 땅이라 해 ‘신장(新彊)’이라 이름 지었다. 건륭제는 이닝(伊寜) 주재 이리장군(伊犁將軍)으로 하여금 신장을 통치케 했다. 



    건륭제 시기 조선 왕은 영조 이금(李昑)이다. 이금은 청나라 초기 조선팔기를 이끌던 김여규의 손자 김상명(金常明)의 도움을 받아 소론·남인이 반대했는데도 세제(世弟)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김상명은 군기대신(軍機大臣) 등 최고위직까지 올랐는데, 어머니가 세조 순치제의 유모인 까닭에 순치제의 아들 강희제와 친구처럼 지냈다. 김상명의 친족 김간(긴기얀·金簡)은 청나라 상서(上書)가 됐으며 조선과의 외교에도 관여했다. 

    구미국가(歐美國家)들은 청 왕조를 중국 왕조로 생각하나 한국, 북한과 몽골 등은 동의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만주족 청나라가 한족 명나라를 정복했으므로 청과 조선, 몽골, 베트남 간 관계는 중국과 조선, 몽골, 베트남 간 관계가 아니라 만주와 조선, 몽골, 베트남 간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그레이트 티베트’ 초석 놓은 치송덴첸

    티베트는 1911년 신해혁명 직후 혼란기에 독립해 1951년 중국군에 점령당할 때까지 독립국 지위를 유지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1911년 이전에도 티베트의 국가 정체성은 유지되고 있었다. 

    7세기 초 티베트 고원을 통일한 송첸간포 찬보(찬보는 티베트어로 왕이라는 뜻) 시기 중국과 인도를 통해 들어온 불교가 밀교(密敎)로 발전했다. 8세기 치송덴첸 찬보는 티베트가 오늘날의 시짱(티베트) 자치구뿐만 아니라, 칭하이와 서부 쓰촨, 남동부 간쑤, 서부 윈난을 포괄하는 그레이트 티베트(Great Tibet)로 발전하는 초석을 놓았다. 

    안·사의 난으로 당(唐)나라가 혼란에 처한 763년 티베트는 장안을 점령했다. 신장과 네팔, 파키스탄 일부를 차지한 후의 일이다. 티베트불교는 쇠퇴하다가 11세기 인도 출신 승려 아티샤의 쇄신 운동으로 부흥했다. 이후 아티샤 직계 제자들을 카담파라 했으며, 기존 계열을 닝마(홍모)파라 했다. 카담파, 닝마파 외에 카규파와 샤카파라는 종파가 새로 생겨나 4개로 갈라졌는데, 신흥 종파들은 닝마파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밀교의 성격을 혼합한 교리를 발전시켰다. 현재 티베트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겔룩(황모)파는 카담파 계열로 14세기 후반 새로 생긴 종파다. 

    13세기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 집권기 파스파로 대표되는 샤카파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정교일치(政敎一致) 정권을 수립했다. 이 시기 티베트 고승과 원나라 황제 사이에 종교적 지지와 정치·군사적 원조를 교환하는 최왼(단월·檀越) 관계가 맺어졌다. 최왼 관계를 통해 몽골은 티베트를 몽골제국에 편입시켰으며 샤카파는 티베트에서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5세기 칭기즈칸 가계를 부활시킨 다얀 가한과 여걸(女傑) 만투하이(1448~1510) 부부의 손자 알탄 가한(1507~1582)은 1578년 새 정복지 칭하이로 티베트불교 제3대 고승 쇼냠 갸초를 초청해 ‘달라이 라마’로 존칭했는데, 달라이는 ‘큰 바다’라는 뜻의 티베트어 갸초(Gyacho)를 몽골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정(政)·교(敎) 일치 통치자가 됐다. 

    달라이 라마 계승은 전생활불(轉生活佛)이라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부처가 사람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내려오며, 달라이 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고,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이들의 육신이 사라지면 다른 사람의 육신으로 영혼이 옮겨간다. 

    17세기 라마 계승법(繼承法)을 두고 닝마파와 겔룩파 간 분쟁이 생겼다. 겔룩파는 중가르 칸국의 무력을 배경으로 새로 계율을 정하고 닝마파를 몰아냈다.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를 최고 지배자로, 판첸 라마를 다음 순위 지배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이들 2대 활불(活佛)에게 종교와 세속을 모두 관장하게 했다.

    ‘중세 교황’과 비슷한 영향력 행사한 ‘달라이 라마’

    현 달라이 라마(82)는 14세다. [위키피디아]

    현 달라이 라마(82)는 14세다. [위키피디아]

    달라이 라마는 몽골, 신장, 티베트, 칭하이, 윈난, 간쑤 등에 거주하는 몽골계 부족 사이에 중세 가톨릭 교황에 준하는 영향력을 갖게 됐다. 달라이 라마가 몽골 계통 국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자 중가르 칸국 등 많은 나라가 이를 이용해 제2의 칭기즈칸제국 건설의 꿈을 키웠다. 

    청나라는 몽골계 부족들의 무력과 달라이 라마가 가진 종교적 통합력이 결합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옹정제는 티베트 주재 주장대신(駐藏大臣)으로 하여금 달라이 라마를 감시하게 했다. 

    건륭제 시기 달라이 라마 후계자 문제를 두고 티베트에 내분이 일어났다. 네팔 구르카족까지 개입해 혼란이 가중됐다. 네팔은 1788년, 1791년 2차에 걸쳐 판첸 라마가 거주하는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 소재 타시룬포 사원을 침공하는 등 티베트 내정에 간섭했다. 1790년 청나라 군대가 라싸에 진입했으며, 1792년에는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육박했다. 네팔은 평화조약 체결을 간청했다. 건륭제는 내정 불간섭 정책이 오히려 분쟁을 조장한다고 생각해 주장대신으로 하여금 티베트의 행정·군사권을 장악하게 했다.

    ‘가망 없는 나라’ 조선

    베트남 해적을 묘사한 그림.

    베트남 해적을 묘사한 그림.

    18세기 조선으로 가보자. ‘송자(宋子)’라고 불린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는 1709년 보령 한산사(寒山寺)에서 인성(人性)·물성(物性) 동질 여부에 대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주도했다. 호락논쟁은 훗날 노론이 인성·물성 간 차이점을 강조한 벽파와 인성·물성 간 동질성을 강조한 시파가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호락논쟁은 오랑캐 만주족도 문명을 이룩할 수 있느냐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호(湖·충남)를 대표한 한원진(韓元震)과 달리 락(洛·한강지역)을 대표한 이간(李柬)은 만주족 청나라도 문명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간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박지원, 홍대용 등을 중심으로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북학운동이 일어났으나 북학파도 성리학의 테두리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명나라에서 주류이던 양명학조차 조선에서는 18세기에 시작돼 19세기나 돼서야 심도 있게 연구됐다. 조선은 맹목(盲目)의 산림(山林·성리학자)이 국가 경영을 주도하는 가망 없는 나라가 됐다. 

    1786년 발생한 타이완 토호 ‘임상문(林爽文)의 난’은 삼합회(三合會)라고도 부르는 천지회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임상문의 난은 만주팔기가 아니라 채대기·손사의가 지휘하는 한족 녹영(綠營)의 힘을 빌려 2년 만에 진압됐다. 임상문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저민(浙閩·저장과 푸젠)에 주둔하던 팔기군은 무기력의 극치를 보여줬다. 채대기는 공을 세우고도 건륭제의 총신(寵臣) 니오후루 화신의 중상모략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팔기의 전력 약화는 오삼계 주도 ‘삼번(三藩)의 난(亂)’ 때 이미 드러났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일어난 백련교도의 반란을 토벌한 것도 팔기가 아니라 향용(鄕勇)을 앞세운 녹영(綠營)이었다. 

    만주족의 나라가 한족 군대가 없으면 유지되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금성에서는 한어(漢語)만 들렸다. 만주족은 스스로 해체했다. 

    건륭제는 1789년 서산당(西山黨) 완문악·완문혜 형제의 반란에 직면한 베트남 여씨(黎氏) 왕조의 지원 요청을 받고, 양광총독(兩廣總督) 손사의가 지휘하는 대군을 파병했다. 청나라 20만 대군은 홍하에서 베트남군에게 섬멸됐다. 버마 원정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서산당 정권을 수립한 완문혜와 그의 아들 완광찬은 해도입국(海盜立國) 기치 아래 해적질을 적극 지원했다.

    淸 몰락 예견한 ‘봄비’

    베트남 해적은 광둥·광시·하이난뿐 아니라 푸젠과 저장에도 출몰했다. 이를 전기(前期) 정도(艇盜·해적)라 하는데, 베트남이 국가 사업으로 운영한 만큼 대형 선박인 데다 탑재한 대포도 많아 청나라군은 대처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청나라와 베트남의 충돌은 메콩 델타를 중심으로 세력을 뻗어온 프랑스와 태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완복영이 1802년 완광찬을 죽여 서산당 정권을 멸하고, 베트남 최후의 완(阮)왕조를 수립하면서 끝났다. 완복영이 정권 안정을 위해 청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후기 정도(艇盜)는 채견(蔡牽)이 중심이 돼 일어났다. 채견이 단순한 해적인지 반(反)만주주의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푸젠 제독 이장경(李長庚)은 1803년 동중국해 딩하이(定海) 해전에서 채견을 격파했다. 채견은 선단을 재건해 타이완과 푸젠 해안을 계속 습격하는 등 맹위를 떨쳤으며 1804년 원저우(溫州) 해전에서 청나라 해군을 대파했다. 이장경이 1807년 타이완 해전에서 전사하고, 채견 역시 1809년 동중국해 위산(漁山) 해전에서 전사해 ‘2차 정비(艇匪)의 난’은 막을 내렸다. 

    육지에서 일어난 백련교도의 난과 함께 정비의 난은 다가올 서양의 침공과 청나라의 몰락을 예견하는 봄비와 같은 사건이었다. 

    나가사키(長岐)만 개항한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마찬가지로 청나라도 광저우(廣州)만 개항했다. 서양 문물 유입에 숨통을 틔워놓은 일본·청나라와 달리 조선은 문을 걸어 잠그다 못해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 등 17세기 조선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들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청의 경우 외국인은 호부(戶部)에 소속된 월해관(粤海關)이 관할하는 이관(夷館)에만 광저우 체류를 허용했다. 외국인 접촉은 무역 허가를 받은 민간 조직인 행(行)이 전담했다. 즉 외국인↔행↔월해관을 연결하는 구조였으며, 13개 행은 민관 사이 완충 장치였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상사(商社)가 외국인과 거래해 결과를 관세청에 보고하고, 관세청의 지시를 외국인에게 통보하는 형태로 무역이 진행됐다. 다만 청나라는 상하 관계의 조공만 있을 뿐, 대등 관계의 통상은 없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도자기·茶 수출로 번 ‘銀’, 아편 수입으로 탕진

    18세기 중국에는 아편 중독자가 창궐했다.

    18세기 중국에는 아편 중독자가 창궐했다.

    산업혁명 덕분에 국력이 증강된 영국이 청나라 진출을 노렸다. 조지 3세는 1793년 매카트니로 하여금 건륭제를 알현하게 했다. 매카트니는 청더(承德)에 머물던 건륭제를 찾아가 조지 3세의 친서를 전했다. 영국은 △상관 설치 △상하이 앞바다 주산열도(舟山列島)와 톈진에 상선을 정박할 권리 △기독교 포교 권리 등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건륭제를 계승한 가경제는 1796년 아편 수입을 금지했다. 아편 수입량에 비례해 은의 유출이 극심해지자 청나라 경제의 근간이던 은본위제(銀本位制)가 붕괴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차(茶)와 도자기 수출로 유입된 은이 아편 수입 때문에 거의 다 유출됐다. 단기간에 은가(銀價)가 2배나 상승해 동전 가격이 급락했으며, 은을 갖고 국가 전매품 소금을 사서 동전을 받고 팔던 소금 상인들이 파산하기 시작했다. 농민 반란의 기운이 감돌았다. 살길이 없어진 백성들은 백련교 등 비밀 종교 단체에 가입해 반란의 불길을 당겼다. 

    1796년 1월 후베이성에서 백련교도의 반란이 최초로 일어났다. 반란은 산시(陝西)성과 쓰촨성으로 번졌다. 청나라 정부는 향용(鄕勇)을 앞세워 반란 발생 10년 만인 1805년에야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백련교도 반란은 팔기의 군사적 무능을 다시 한번 폭로했다. 

    소금을 밀거래하던 사염(私鹽) 상인이 아편도 거래하기 시작했다. 국가에서 엄금하는 아편을 목숨을 걸고 거래한 이들은 악명 높은 갱 조직인 삼합회(三合會)의 전신인 천지회(天地會)와 연결됐다. 아편 중독으로 인한 사회문제와 함께 은의 유출로 인한 경제 위기는 국가 안위를 걱정할 정도로 심각했다. 가경제를 이은 도광제가 아편에 중독된 적이 있을 만큼 아편 중독은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만연했다. 

    아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온건론과 강경론이 제시됐다. 허내제(許乃濟)의 이금론(弛禁論)과 황작자(黃爵滋)의 엄금론(嚴禁論)이 그것이다. 후광총독 임칙서(林則徐)도 엄금론을 주장했다. 이금론은 아편을 금지할수록 밀수가 늘어나고 관리의 부패도 심해지므로 아편 수입세를 부과하는 동시에 수입량을 줄이기 위해 양귀비 재배도 허용하자는 주장이다.

    대청제국, 대영제국에 굴복하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는 조선 철종 13년을 배경으로 삼았다. 조선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 형국이었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는 조선 철종 13년을 배경으로 삼았다. 조선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 형국이었다.

    오늘날 네덜란드와 미국 일부 주(州)는 대마초 흡연을 허용한다. 독일은 마약중독자가 주사기를 여러 번 사용함으로써 AIDS 등 치명적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저한 통제하에 1회용 주사기를 제공한다. 이는 이금론의 일종이라고 하겠다. 

    아편 중독을 극복한 경험이 있는 도광제는 엄금론에 기울었다.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해 아편 문제에 대처하게 했다. 임칙서는 아편의 해악을 잘 알았으며 이론뿐 아니라 실무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 광저우 지사(支社)는 아편도 거래했다. 광저우에 부임한 임칙서는 1839년 영국 상인들이 보유한 아편 1425t을 몰수해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호수에서 소석회와 섞어 용해시켰다. 임칙서는 압수한 아편에 대해 차엽(茶葉)으로 보상했다. 

    임칙서는 아편은 엄금했으나 통상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며 국제법도 잘 알았다. 스위스의 저명한 국제법학자 에머리히 드 바텔의 ‘국제법’을 한어(漢語)로 번역하게 하는 등 법률 논쟁에도 대비했다. 

    아편 상인들은 임칙서의 조치를 악의적으로 영국에 보고했다. 1840년 영국 자유당 내각은 청나라 원정을 결정했다. 아편 무역의 비도덕성을 두고 비난이 제기됐으며 거대한 청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에도 의회는 내각이 제출한 군비 지출안을 찬성 271표, 반대 262표로 통과시켰다. 윈스턴 처칠과 함께 위대한 총리 중 하나로 평가되는 윌리엄 글래드스턴(1809~1898)이 반대 토론을 했다. 

    “원인이 이렇게도 부정한 전쟁, 이렇게도 불명예가 되는 전쟁을 나는 여태까지 알지 못한다. 광저우 앞바다에 휘날리는 유니언잭(Union Jack)은 악명 높은 아편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펄럭이는 것이다.” 

    전쟁은 당초 예상과 달리 영국의 일방적 승리로 진행됐다. 함포를 앞세운 영국 해군이 상하이 앞 주산열도(舟山列島)를 점령하고, 동중국해와 황해를 거슬러 올라가 보하이(渤海)만 톈진 앞바다까지 진격했다. 청나라 정부는 영국의 위세에 겁을 먹고 임칙서를 파면했으며 베이징 부근을 관할하는 직례총독 아이신고로 기선으로 하여금 영국과 교섭하게 했다. 

    홍콩 섬 할양 문제로 교섭이 지지부진하자 포틴저 제독은 1841년 광저우를 공격했으며 1842년 주산열도를 다시 공격하고 대안(對岸)에 위치한 닝보와 진하이 등을 점령했다. 이어 창장과 강북 운하로 연결되는 요충지 진장(鎭江)을 인도 식민지군이 포함된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점령했다. 

    영국군은 난징에 육박할 기세를 보였다. 청은 결국 영국군의 공세에 굴복했으며 1842년 8월 콘윌리스호 함상에서 난징조약에 조인했다. 청나라는 전비(戰費)와 아편 몰수 대금을 배상해야 했으며 홍콩 섬을 할양하고, 광저우와 샤먼(아모이),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항해야 했다.

    亡國으로 가는 열차

    건륭제 중기 이후 관료와 팔기·녹영의 부패, 토지제도 붕괴로 인해 농촌 사회의 위기가 극단으로 치달았다. 토호(土豪)인 신사(紳士), 대지주와 부상(富商) 등이 토지를 집적해 4억 인구의 3분의 2가 한 뼘의 토지도 갖지 못한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일반 농민은 전체 농경지 중 겨우 30%만 차지했으며 생산한 곡물의 50% 이상을 지대(地代)로 납부했다. 

    농민의 몰락은 사회 불안의 근원이 됐다. 농촌 사회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강희·옹정·건륭 3대의 성세(盛世)를 배경으로 급격히 늘어난 인구다. 조세 경감, 농업 기술 발달과 함께 신대륙으로부터 감자와 옥수수가 도입돼 벼 또는 밀농사가 불가능하던 땅에도 농사를 짓게 된 것도 인구 증가의 원인이다. 18세기 중엽 1억8000만 명이던 인구가 19세기 중엽에는 4억 명으로 급증한 데 반해 경작지는 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아편의 급격한 유입에 따라 은이 해외로 유출돼 은의 가치가 급상승했다. 납세 수단으로 사용되던 은과 거래 수단으로 사용되던 동전의 교환가치가 1대 2에서 1대 3으로 상승했다. 동전을 취급하던 중소상인을 중심으로 피해가 속출했다. 피해를 본 이들은 반체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백련교도의 난으로 청나라가 곤경에 처한 무렵 조선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평안도 출신 몰락 양반 홍경래가 1812년 1월 가산에서 봉기했으나 그해 5월 정주에서 정부군에 패배했다.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을 포함한 민초들의 거센 저항에도 대청(對淸)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의 후예 장동(壯洞) 김씨(구안동 김씨와 구분되는 신안동 김씨는 서울의 서촌인 장동에 대대로 살아 ‘장동김씨’로 불렸다)가 장악한 조선 조정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국 서남부 오지(奧地) 광시(廣西)에는 다양한 종족이 섞여 살았는데 민족 간 대립이 생겨났다. 첫째, 토착 한족과 중원에서 이주해온 하카(客家)가 대립했다. 둘째, 한족에 의해 산악 지역으로 밀려난 좡족(壯族)·야오족(瑤族) 등 소수민족은 한족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지방 통치자들에게 극도로 분노했다. 

    태평천국 주모자 중 하나인 석달개(石達開)의 어머니는 좡족 출신이다. 철제품이 대량 수입되면서 철광석 광부와 숯구이 등이 실직했다. 상당한 무력을 갖고 있던 이들의 불만은 혼란에 기름을 끼얹었다. 해산된 향용(鄕勇)이 각지에 방치돼 있었으며 반체제 천지회는 주장(珠江) 델타의 해적들과도 연계됐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목표로 한 천지회의 반란으로 광시의 혼란은 더욱 심화됐다. 

    1836년 야오족 출신 백련교도 남정준의 난과 1847년 역시 야오족 출신으로 백련교 및 천지회와 연계된 뇌재호의 난이 후난, 광시, 구이저우 등지를 휩쓸었다. 명·청 시기 야오·먀오족 등 소수민족 봉기는 홍콩 영화 ‘동방불패(東方不敗)’에 잘 소개돼 있다.

    태평천국, 나라를 세우다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 Taiping Rebellion)은 1850~1864년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다. 교전 상대는 만주족 황실의 청나라 조정과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 태평천국이었다.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 Taiping Rebellion)은 1850~1864년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다. 교전 상대는 만주족 황실의 청나라 조정과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 태평천국이었다.

    아편전쟁 패배로 상하이와 닝보 등 5개 항구가 개항되면서 무역의 중심이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옮겨갔다. 그 여파는 광시에까지 미쳤다. 

    태평천국 지도자 홍수전(洪秀全)은 1814년 광저우시 화현(花懸)에서 출생한 과거 낙방생이었다. 홍수전은 1840년대 고종사촌이자 친구인 풍운산(馮雲山)과 함께 광시성 계평현에서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창시하고, 은광 광부들을 대상으로 포교에 나섰다. 숯구이 양수청(楊秀淸), 빈농 소조귀(蕭朝貴), 지주 위창휘(韋昌輝), 부농이자 지식인 석달개(石達開) 등 태평천국군 핵심 간부가 된 인물이 모두 이 시기에 배상제회에 가입했다.
     
    행동가형 양수청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배상제회는 반란의 색채를 나타냈으며 천지회와 결합해 파괴력을 키웠다. 계평현을 중심으로 반란의 불길이 번졌다. 청나라 조정도 이들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1850년 초 임칙서를 다시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배상제회 진압을 명했다. 임칙서는 광시에 도착하기도 전인 1850년 10월 사망했다. 임칙서의 후임으로 임명된 양광총독 이성원(李星沅)도 곧 사망하고, 후임에는 대학사 새상아(賽尙阿)가 임명됐다. 

    1850년 12월 배상제회를 중심으로 봉기한 태평천국군은 1851년 9월 광시성 영안주성(永安州城)을 점령한 후 통치제도를 갖췄다. 홍수전은 천왕(天王)을 칭했으며, 동왕 양수청, 서왕 소조귀, 남왕 풍운산, 북왕 위창휘, 익왕(翼王) 석달개 등 5명의 왕이 임명됐다. △성고(聖庫)라는 공동 소유제 △엄격한 군율과 금욕주의 △여성차별 및 전족(纏足)을 비롯한 악습 폐지 등 경제·사회 개혁도 추진했다. 홍수전과 농민반란군이 세운 태평천국은 14년(1851∼1864)간 국가로 존속했다. 

    광시성에서 나라를 일으킨 태평천국군은 창장의 남쪽 지류 샹장(湘江) 흐름을 타고 우창(武昌) 방향으로 북진하기 시작했다.


    백범흠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