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호

환상극장③

승려와 여인, ‘영원한 꿈’에 살다

  • 윤채근 단국대 교수

    .

    입력2020-12-06 10: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야밤을 틈타 낙산사 대웅전에 몰래 들어선 승려 조신은 다짜고짜 두 다리를 쭉 펴고 불상을 향해 쏘아붙였다. 

    “이보시오, 석가모니. 날 알아보시겠소?” 

    불상은 말없이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조신이 눈물을 흘리며 넋두리하듯 속삭였다. 

    “여기 낙산사 승려도 아닌 이 몸이 지난 몇 달간 새벽마다 찾아와 간절히 기원하고 또 기원했소. 한데, 이러실 수가 있소? 내가 이 절에 바친 공물은 또 얼마였소? 그런데도 이 작은 소원 하나를 들어주지 못하는 거요? 부처가 어찌 그리 속이 좁소?” 

    다리를 오므려서 가부좌를 튼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비구의 몸으로 여자를 탐하는 걸 나무랄 테요? 그런 당신도 결혼했었지 않소? 윤회의 바다에서 떠돌다 한 여자를 사모함은 법계의 숱한 인연 가운데 하나일 뿐이오. 그런 소소한 인연을 막는 게 진정 부처의 자비인 거요? 왜 답이 없소?”

    관복과의 만남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던 조신은 어느새 지쳐 혼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사찰 승려가 새벽 예불을 드리고자 이른 채비를 차릴 즈음, 불당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선 한 젊은 처자가 잠든 조신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려다 상대를 바라본 조신이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태수의 따님이신 김관복! 정녕 관복 처자가 맞소?”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관복이 대답했다. 

    “소녀 관복이가 맞사옵니다. 이곳 명주태수 김흔의 외동딸인 그 김관복이옵니다.” 

    두 눈을 다시 마구 비비며 무릎을 꿇은 조신이 처자의 얼굴에 살짝 손을 가져다 대고 다시 물었다. 

    “정녕 그대가 관복이라면 여긴 어쩐 일인 거요?” 

    “실은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그러니까 여러 달 전 여기 낙산사에서 큰 불사가 있었을 때지요. 스님을 뵙는 순간 소녀의 가슴이 콩콩대기 시작했습니다. 스님 역시 절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언제 또 만날 수 있으려나 이제나저제나 애태우며 지내왔지요.” 

    “그랬구려! 그랬었구려! 소승 역시 관복 처자를 처음 보고난 후 애모의 마음을 떨칠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오. 몇 달을 부처님께 기도하며 그대를 갖게 해달라고 애원했소. 그러다 어제는 그대가 다른 사내와 정혼했다는 소식을 접했지 뭐요.” 

    “그래서 이렇게나 비탄에 빠져 계셨던 건가요? 이 못난 계집 하나 때문에요?” 

    “아니오! 그게 아니오! 어찌 그대가 계집 하나일 수 있겠소? 그대는 이번 생 나의 전부나 마찬가지요! 지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소. 그런데 이 새벽에 어떻게 날 찾아냈소?” 

    “실은 엊저녁에 스님께서 맡고 계신 농장에 찾아갔습니다. 어떤 분께서 이리로 가셨을 거라 알려주시더군요.” 

    “보타사 농장에 말이오? 밤늦은 시각에 거긴 왜?” 

    “실은요. 소녀, 스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정혼한 사내는 눈곱만큼도 맘에 들지 않습니다. 당장 같이 떠나려고 그리했사옵니다.” 

    멍한 표정이 된 채 얼어붙었던 조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대웅전 석가불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뒤틀렸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관복을 왈칵 껴안으며 조신이 속삭였다. 

    “그러려면 지금 당장 떠나야 하오. 아무것도 챙겨 가지 못할 텐데, 그래도 괜찮소?” 

    조신의 가슴에 볼을 비비며 관복이 대답했다. 

    “두 사람이 죽기로 노력하면 먹고사는 게 무슨 대수일까요? 우리 어서 떠나요.”

    사랑의 야반도주

    낙산사 대웅전에서 야반도주한 남녀는 정식 부부가 돼 그로부터 40여 년 동안 신라 땅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처음에는 조신과 친분이 있는 주지들의 사찰 객방에 묵던 부부는 주변 눈치가 보이자 아예 부잣집 종으로 들어가 곁채를 빌려 살기 시작했다. 모진 노동에 시달렸지만 조신은 씩씩하게 일해 꽤 괜찮은 머슴으로 대접받았고, 삯바느질을 익힌 관복은 부지런히 생활비를 벌어들였다.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약간의 저축을 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둘 사이의 정은 조금도 식을 줄 몰랐다. 부부는 뜨겁게 사랑했고 자신들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비극은 첫아이가 태어나면서 시작됐다. 차마 아이를 사노비로 만들 수 없었던 관복은 남편을 설득했다. 

    “이 모든 게 허깨비 같은 꿈이라 해도, 전 우리 아이를 노비로 살게 할 순 없어요. 지금은 이 모양이 됐어도 당신은 어엿한 영월 대찰 세달사의 승려였고, 전 명주태수의 딸이잖아요? 차라리 다시 야반도주해 우리 다른 길을 찾아요!” 

    아이를 지키려고 신분을 밝힐 수도, 그렇다고 대대손손 노비의 삶을 감내할 수도 없던 조신은 이번에도 아내 뜻을 따랐다. 옷가지와 이불을 넣은 보따리를 등에 지고 첫아이를 가슴에 품은 그는 자꾸 넘어지는 아내를 재촉하며 새벽바람에 주인 몰래 줄행랑을 놓았다. 내륙 깊숙이 서원경으로 도피한 부부는 산 중턱에 움막을 짓고 화전민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 소작농의 텃세를 이겨내며 자갈투성이 야산을 간신히 일궈놓으면 엉뚱한 다른 화전민 떼가 나타나 자리를 빼앗기 일쑤였다. 살의를 품은 조신이 낫을 들고 울부짖을 때면 아내가 조용히 타일렀다. 

    “당신이 승려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누굴 죽여 얻을 행복이 어디 있겠어요? 다행히 아직 우린 젊으니 조금 더 후미진 곳을 찾아봐요.” 

    아름다운 아내의 말에 화가 풀린 조신은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당신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이 모든 지옥 같은 고통도 내겐 다디달다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남편 머리칼을 쓰다듬던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무렴요. 그렇다마다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데요. 연분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전국을 이리저리 떠돌다 남원경으로 흘러들어올 무렵, 조신 부부는 이미 늙어 어떤 육체노동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돼 있었다. 슬하에 자식 다섯을 두었지만 제대로 된 식사는 하늘의 별 따기였고, 가족이 몸에 걸친 건 옷이라기보다 넝마에 가까웠다. 들판에 풀집을 엮어 임시 거처를 마련한 부부는 어린 자식들이 번갈아 마을로 내려가 구걸해 오는 음식으로 연명해야 했다. 그러다가 첫아이가 굶어 죽었다. 흐느껴 울던 조신이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여전히 그대를 연모하고 애지중지한다는 걸 잘 알지?” 

    남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아내가 대답했다. 

    “잘 알다마다요. 저도 당신을 처음처럼 연모한답니다. 당신과 겪는 이 세월을 단 한순간도 싫어한 적 없어요.” 

    아내의 두 손을 움켜쥔 조신이 이를 악물며 속삭였다. 

    “첫째가 왜 죽었는지도 잘 알지? 우리와 제 동생들한테 먹을 걸 양보하다 그리 됐소, 아무리 당신을 아낀다고 해도 이런 치욕을 더는 견딜 길이 없구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세요? 전 늘 당신 편이에요.” 

    “우리 헤어집시다! 아이 둘씩 나눠서 각자의 고향으로 가 살길을 찾아봅시다!” 

    남편의 일그러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내가 천천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 이만하면 오래 견뎠어요.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여한 없이 서로를 아껴줬잖아요? 다만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은 그대로라는 걸 잊지 마세요.”
    관복을 덥석 안은 조신은 그날 밤 자는 내내 한시도 그녀 손을 놓지 않았다. 동이 터올 무렵, 자식 둘씩을 나눠 거느린 부부는 마지막으로 서로 마주 보며 이별을 고했다. 조신이 말했다. 

    “다음 생에도, 또 그다음 생에도, 우리 인연이 남았다면 꼭 다시 만납시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관복이 희끗희끗 센 남편의 머리카락을 몇 차례 쓸어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을 꼭 끌어안은 그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눈을 동그랗게 뜬 조신이 머리를 갸웃하며 물었다. 

    “뭘 말이오?” 

    대답 없이 남편의 눈을 오래 바라보던 관복이 떠나기 위해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기회가 되신다면 말이에요. 우리 첫째 묻어준 곳으로 가보실래요?” 

    아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골똘히 생각하던 조신이 마침내 대답했다. 

    “형편이 좋아지면 꼭 가보리다. 녀석을 묻은 고갯길로 찾아가서 꼭 정식으로 매장해 주리다.”

    조신의 꿈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전’ 이야기의 배경인 강원 양양군 낙산사의 의상대. [GettyImage]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전’ 이야기의 배경인 강원 양양군 낙산사의 의상대. [GettyImage]

    조신은 몸서리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낙산사 대웅전이었다. 얼핏 눈에 들어온 석가불의 표정이 미묘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초여름인데도 온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이마의 식은땀이 목덜미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새벽 예불이 시작되려는지 경내에 잔잔한 인기척이 번지고 있었다. 화급히 대웅전을 벗어난 그는 바닷가로 내달려 파도를 향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생시 같은 꿈이어서 오히려 잠에서 깬 지금이 꿈처럼만 느껴졌다. 

    자신의 직장인 보타사로 돌아온 조신은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세어 있었던 탓이었다. 눈을 감자 꿈속에서 보낸 관복과의 삶이 진짜 한평생의 무게로 그를 짓눌러왔다. 서둘러 농장 하급 감독자들을 소집한 그는 농장 최고관리자인 지장(知莊)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자기 지분의 땅문서와 부임 이후 모아뒀던 금붙이를 수레에 실어 낙산사 공물로 바치도록 명했다.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그는 속이 후련해졌다. 

    고향인 영월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신은 문득 꿈속에서 관복에게 한 마지막 약속을 떠올렸다. 망설이던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원경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꿈에서 첫째 아이를 묻었던 고갯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알 수 없는 흥분에 떨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시신을 파묻은 자리를 가까스로 발견한 그는 끝이 뾰쪽한 돌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딱딱한 물건의 한쪽 모서리가 드러났다. 마침내 나타난 물건의 정체는 돌미륵이었다. 조신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겨우 몸을 일으킨 그는 미륵상을 정성스레 씻은 뒤 인근 절에 정중히 봉안했다. 

    영월에 도착한 조신은 고향에 있던 남은 재산마저 모두 처분해 정토사라는 작은 절을 지었다. 죽을 때까지 정토사에서 두문불출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은 어린 시절 영월 세달사에서 함께 출가한 동료 눈에 띄었다. 조신과 마주친 옛 동료는 급히 등을 돌리는 상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조신 스님 아니신가? 나 몰라보겠나? 같이 세달사에서 계를 받지 않았었나? 자네도 많이 늙었군그래.” 

    활처럼 굽은 등을 지팡이로 버티며 옛 동료를 바라다보던 조신이 대답했다. 

    “반가우이. 이만 난 바빠서 가봐야겠네.” 

    매정하게 발길을 돌리는 조신을 향해 옛 동료가 쏘아붙였다. 

    “너무하군그래. 뭐가 무서워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건가?” 

    문득 걸음을 멈춘 조신이 뒤뚱대며 몸을 돌리더니 희미하게 속삭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었네. 그 꿈이 허망해 세속 욕심을 다 내려놨지. 그런데 그게 내가 꾼 꿈이 아니었어. 나도 자네도 다른 누군가의 꿈일 뿐이라면 어쩔 텐가?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다 부질없는 얘기야. 한데 오늘 그 꿈이 끝날 것만 같단 말일세. 아니, 너무 걱정은 말게. 다 부처께서 이미 하신 말씀이거든. 아무튼 나 먼저 가네.” 

    그날 밤 조신은 웃으며 세상을 떠났다. 


    세달사의 젊은 승려

    영월 땅 세달사의 주지는 젊은 승려 조신을 불러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 지금의 강릉 땅인 명주에 있던 말사 보타사와 그 부속 농장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사세가 기울어가던 세달사 처지에서 말사인 보타사 농장은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보타사에 부임한 조신은 농장 경영을 효율적으로 혁신하는 한편, 불필요한 소작 인력은 과감히 내쫓았다. 불과 한 달 만에 보타사 재정은 회복됐고, 조신은 그로부터 만들어진 여유 자금으로 주변 땅을 사들였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인근의 큰 사찰 낙산사에서 스님의 겨울 수행 기간인 동안거를 마치는 기념으로 법회를 개최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법회에 초대된 조신은 우연히 명주태수의 딸 김관복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어쩌면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유난히 새카맣고 맑은 관복의 눈동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거침없이 조신을 향했기 때문이다. 한 치 망설임 없이 조신의 표정을 주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위엄 있으면서 매혹적이었다. 조신은 관복이 던진 강렬한 눈초리 한 번에 온통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마치 꿈속의 일 같았다. 

    어린 소녀에게 연정을 품게 된 조신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혀를 찼지만 이미 기운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는 밤마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낙산사 대웅전에 숨어들어 부처께 빌고 또 빌었다. 부처를 회유하다가 때론 협박하기도 했다. 쓸데없이 공물을 자주 바친 건 혹시나 관복과 다시 마주칠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신기루처럼 조신의 인생에서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서 보타사 인부 한 명이 조신에게 슬픈 소식 하나를 전했다. 명주 지역 최고 미녀인 김관복이 정혼했다는 사실이었다. 조신은 격분했다. 혼이 나간 그는 깊은 밤 술을 퍼마신 채 낙산사 대웅전으로 숨어들었다. 부처를 향해 두 발을 쭉 펴고 앉은 그가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겁니다. 이건 조신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이리 된 걸 어쩌란 말입니까? 당신은 자비심도 없단 말입니까?” 

    혼곤히 취해 설핏 잠에 들었던 조신은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놀랍게도 김관복이 옆에 앉아 있었다. 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은 그가 상대의 볼을 만지며 물었다. 

    “이게 꿈이요, 아니면 생시요? 그대 진짜 김관복이 맞소?”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관복이 그사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조신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부처를 향해 큰절을 올리고 관복을 품에 얼싸 안았다. 관복이 물었다. 

    “소녀가 그리 좋으신가요?” 

    상대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조신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말로 다 못할 고초를 겪으실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입꼬리가 귀밑에 걸린 조신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남원경의 돌미륵

    자식들을 나누어 각기 자기 고향을 향해 떠나기 직전, 관복이 망설이다 한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헤어지지만 제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언제나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아니, 이 우주가 다 헐어져 사라질 때까지 곁에 있게 될 겁니다. 그걸 잊지 마세요.” 

    아내의 말이 뜻하는 바를 몰라 당황한 조신이 눈동자를 멀뚱거리기만 하자 그녀가 남편에게 다시 다가와 포옹하며 속삭였다. 

    “기억을 못 하셔도 상관없어요. 전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제야 조신이 겨우 입을 뗐다. 

    “내가 무얼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요? 헤어지는 마당에 왜 이상한 말을 하는 거요?” 

    관복이 희끗희끗 센 남편의 머리칼을 몇 차례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헤어지기 슬퍼 두서없이 떠드는 것이오니 괘념치 마시어요. 대신 큰아이 묻어준 곳을 기억하시거든 꼭 다시 찾아가셨으면 합니다. 그곳에 제 마음이 있을 거예요.” 

    역시 아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한참 침묵하던 조신이 급히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 형편이 펴지자마자 찾아가 꼭 정식으로 매장하리다.” 

    마침내 생이별을 선택한 부부가 마주 잡은 서로의 손을 놓는 순간 꿈이 깨버렸다. 망연자실 낙산사 대웅전을 둘러보던 조신이 천천히 일어나 바닷가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으로 몰아치자 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기이한 일이었다. 꿈과 현실이 뒤섞인 기분이 들었다. 현세에 대한 욕심이 눈 녹듯 사라진 대신 형언할 길 없는 우울함이 찾아왔다. 

    보타사와 얽힌 모든 인연을 정리하고 고향인 영월로 돌아가던 조신은 꿈에서 관복이 한 마지막 말을 기억해 내곤 남원경으로 향했다. 첫째를 묻은 장소를 파다 돌미륵을 발견한 그는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돌미륵에는 선명하게 김관복 석 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관복과의 결혼생활이 꿈이었다면 자신이 지금 있는 현실도 꿈이어야 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조신은 돌미륵을 잘 씻어 인근 절에 봉안하고는 서둘러 발길을 되돌려 명주로 향했다.

    길고 긴 꿈

    명주태수의 관아에 침입하는 건 무모한 일이었지만 조신은 개의치 않았다. 노복으로 변장한 그는 김관복이 생활하는 관아 가장 깊숙한 장소까지 몰래 들어가 밤이 되기까지 숨어 있었다. 달빛마저 흐릿해진 깊은 밤, 그는 관복의 침소로 잠입해 주변을 살폈다. 신기하게도 경호하는 여자 노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장롱 옆에 우두커니 서서 잠든 관복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는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까닭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려내렸다. 

    잠들어 있던 관복의 두 눈이 스르르 떠진 건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듯 유연하게 조신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기다렸사옵니다. 이번에도 성공하셨네요?” 

    그녀의 말을 헤아리느라 멈칫대는 사이 관복의 두 손이 조신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끝내기는 싫어졌거든요. 우린 부부였잖아요?” 

    상대의 손을 떼어내며 조신이 물었다. 

    “도대체 그대 정체는 무엇이요? 보살이요? 아니면 악귀요?” 

    관복이 환하게 웃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빛이 찬란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가 이번에는 조신의 허리를 감싸며 대답했다. 

    “분명히 말씀드렸었습니다. 우리 사이의 정애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맞습니다! 어쩌면 전 악귀인지도 몰라요. 혹은 보살일 수도 있지요. 저도 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해요. 당신은 제 꿈속의 사람입니다.” 

    입술을 떨며 조신이 다시 물었다. 

    “내가, 내가 당신 꿈이 만든 허깨비란 말이오? 사람이 아니란 거요?” 

    “그렇습니다. 이 꿈 밖의 제가 한도 없이 같은 꿈을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혹시 모르지요. 당신을 꿈꾸는 저조차 다른 누군가의 꿈속 존재일 수도 있겠지요?”
    “돌미륵은 그대가 친 장난이었던 거요?” 

    “아닙니다. 같은 꿈을 끝도 없이 꾸는 게 지겨워졌나 봐요. 내용을 조금 바꿔본 겁니다. 언제부턴가 당신이 다시 한번 날 찾아오길 바라게 됐거든요.” 

    관복의 손에 이끌려 침상에 앉은 조신이 상대의 머리를 감싸며 거듭 물었다. 

    “내가 그대 꿈속의 존재고, 그대 역시 누군가의 꿈이 만든 존재라면, 나 역시 꿈을 꿔 다른 세상 하나를 만들 수도 있는 셈 아니오? 그렇지 않소?” 

    고개를 끄덕인 관복이 조신을 침상에 누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건 당신의 자유입니다. 저도 어느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처음엔 너무 슬프고 공허했어요. 그러다가 차라리 제가 가장 좋아하는 꿈을 무한정 꾸며 살기로 결심했지요. 당신은 항상 제가 꿈꾸던 사람, 바로 꿈속의 사람입니다.” 

    둘은 먼동이 틀 때까지 사랑을 나누었다. 밤은 꽃냄새 가득한 봄날에서 폭설 쏟아지는 겨울로 풍경을 바꿔가며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 이 작품은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조신전(調信傳)’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환상극장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