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호

이건희 회장 “전 세계 공항 카트를 접수하라”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⑬]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1-05-1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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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첫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 광고

    • 삼성TV는 집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 제품이 아닌 이미지를 팔아라

    • 홍라희 여사와 맹연습…‘도저히 못하겠다’

    • 무대 공포증이 있었지만 스피치연습을 하며…

    2004년 11월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 광장 옥외광고에 등장한 삼성 광고. [위키피디아]

    2004년 11월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 광장 옥외광고에 등장한 삼성 광고. [위키피디아]

    지난 회에서 이건희 회장의 마케팅 상상력을 소개했는데 내친김에 더 들어가 보자.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명예교수는 한 칼럼(1월 21일자 한국경제신문)에서 이런 회고를 하고 있다.

    “1982년 8월 박사 논문 준비 차 영국 런던에 갔다. 유럽 대륙을 들러 도착했기에 수중에 영국 화폐가 없었다. 체어링크로스역에 내리자마자 환전 센터에 가 여권과 달러를 내밀었다. 쉰 살쯤 돼 보이던 뚱뚱한 아저씨는 내 여권을 신기한 듯 보더니 ’메이드 인 코리아 숟가락과 포크는 봤지만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만큼 한국은 먼 나라였다. 1987년 2월 귀국할 때쯤 삼성 TV는 미국 전자제품 매장 선반 밑바닥에 있었던 것 같다. 귀국 후에도 연구를 위해 1년에 한 번쯤 영국과 미국을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한국의 달라진 위상이 경탄스러웠고 한국을 세상에 알린 기업들이 고마웠다. 1990년대 어느 시점까지는 스스로를 좌파라고 믿었기 때문에 재벌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었지만 삼성에는 늘 고마움을 느꼈던 것 같다. 연구나 발표를 위해 외국에 나갔을 때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면서 앞으로 직면해야 할 여러 어려움을 새기며 머릿속이 복잡하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눈에 들어오던 삼성 선전탑의 모습은 든든하고 위로가 됐다.”

    국내 상황은 늘 어지럽고 혼돈스러웠지만 밖에 나가보면 대한민국의 글로벌 기업들의 활약덕분에 ‘메이드 인 코리아’의 위상과 괄목상대한 성장을 체감했던 경험은 박 교수 뿐 아닐 것이다. 기자 역시 미국 주요 도시에 현대차가 돌아다니고 러시아 최고급 호텔에 소니가 아닌 삼성 TV가 놓여 있었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박 교수의 선전탑 경험을 들으니 삼성이란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는 과정에서 보여준 이건희 회장의 상상력을 전하는 에피소드들이 있어 소개하려 한다.



    대한민국 첫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 광고

    2006년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 구단 관계자를 접견한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2006년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 구단 관계자를 접견한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배동만 전 제일기획 사장은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 삼성이 옥외광고를 하게 된 사연을 이렇게 전한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진 계기가 88서울올림픽 아니었습니까. 나라도 존재감이 없는데 삼성은 오죽했겠습니까. 삼성이 본격적으로 세계를 향한 광고를 하자는 전략을 세운 게 1999년부터입니다. 1차로 혼신의 힘을 기울인 첫 작업이 2002년 5월 점등식을 한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 광고였습니다.”

    이 일의 배경에는 홍보라는 업의 본질을 꿰뚫은 ‘이건희 상상력’이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장소 선정 이유, 광고 콘텐츠, 비용과 반응, 효과 등이 포함된 종합 보고를 드린 바로 다음날 서면으로 회신이 왔는데 실무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매우 구체적인 지시가 적혀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나요.

    “우선 광고에 들어가는 제품들이 너무 많으니 줄이라는 거였습니다. 하루 150만 명이 오가는 세계 최고 번화가에서 사람이 걷다가 흘깃 보는 옥외 광고판에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0.01초도 안될 텐데 소개되는 제품이 너무 많으면 뇌리에 남지 않을 거라는 지적이었습니다.

    뉴욕 타임스퀘어 광고란 게 당시 우리로서 웬만해서는 거머쥐기 힘든 기회였고, 막대한 비용(1000만 달러)이 들다보니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20여 가지 제품 이미지들을 넣었었는데, 회장은 통신 분야로 집중해 5~6개 정도로 줄이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둘째, 제품보다 로고를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실제 당시 여론 조사를 해보니 미국 내에서 삼성 브랜드를 아는 사람들은 4%정도로 매우 낮았습니다. ‘SAMSUNG’을 ‘쌤숭’으로 읽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하기야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는 지도 모르는 미국인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제품 광고만 한다고 효과가 있겠느냐, 로고를 확대해 계속 고정시켜 보여주라는 거였죠.”

    그는 “수십 년 광고업에만 매달린 사람들이 긴 시간 골몰해서 올린 보고서를 단박에 지적하는 회장을 보며 난다 긴다 하는 '광고쟁이'들이 허를 찔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의 전자제품이나 휴대전화 광고가 뉴욕 맨해튼 한복판을 점령했다고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할 수 있으니 ‘겸손하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또 당신 얘기가 틀릴 수도 있으니 반드시 미국 소비자와 전문가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배 전 사장은 이어 “회장에게는 뭔가 제안을 드렸을 때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감(感)이 탁월한 분이어서 일하는 게 신이 났다”면서 이런 일화도 전했다.

    “유럽에 축구 열풍이 대단하니 선수들 유니폼에 ‘애니콜’ 광고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니 즉각 시행하라고 하셨지요. 긴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처음에 맨유(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에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했는데 마지막에 ‘첼시’로 결정됐습니다. 5년 동안 1200만 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선수 유니폼, 그라운드 펜스에 애니콜 브랜드를 광고하고 모델 선정 권한도 받았습니다. 이듬해 첼시가 유럽 축구에서 1등을 한 덕에 휴대전화 매출이 전년대비 27%나 올랐습니다. 광고를 만드는 과정에서 무선 사업팀과의 협업이 중요했는데, 회장이 결정한 사안이다 보니 다들 합심해 일사천리로 진행한 기억이 있습니다.”

    삼성TV는 집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해외에 나가서 ‘삼성’ 브랜드를 만나 뿌듯했던 또 다른 일로 공항 카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것은 실무진의 아이디어가 아닌 전적으로 회장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초기 비서팀장을 했던 기외호 전 코리아헤럴드 사장의 증언이다.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어도 브랜드 인지도가 없으면 소용없는 거 아닙니까. 1990년대 초반에 수출 협상을 하러 미국에 가면 속상할 때가 많았습니다. ‘삼성TV가 소니에 절대 뒤지지 않는데 왜 안 사느냐’고 따지면 ‘거실에 소니TV가 있어야 격이 올라간다. 아무도 모르는 ’듣보잡‘ TV를 갖다 놓으면 집 품격이 떨어진다’는 말에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즈음 회장이 갑자기 비서실에 ‘전 세계 주요 공항 카트가 몇 개나 되며 누가 만들고 있고 카트에 붙이는 기업 광고는 어떻게 운영되는지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삼성이 광고를 할 경우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직접 카트를 만들어 공급해 줄 수는 없는지, 심지어는 카트를 가져다 분해해 삼성중공업이 만들 경우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드는 지까지 계산해 보고하라는 지시였습니다.

    공항에 가면 누구든 카트를 안 쓸 수 없지 않습니까. 30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 다니는 사람은 어느 나라든 상류층이었고요. 회장은 여기에 착안한 거죠. 마침내 세계적인 공항 곳곳에 삼성 로고가 붙은 카트가 돌아다닐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한때 전 세계 공항 카트의 70%에 삼성 로고가 붙었지요. 그야말로 삼성을 세계에 알린 대표적인 성공사례였고, 이건 전적으로 회장 아이디어였습니다.”

    제품이 아닌 이미지를 팔아라

    이건희 회장은 지금은 일반화된 기업 이미지 광고를 먼저 실천한 사람이기도 했다. 회장과 동갑내기로 1970년대 함께 일했던 손병두 전 호암재단 이사장(전 세종대 총장)은 2000년 7월호 월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이건희 회장은 1970년대 중반 해외사업 추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그룹 경영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 기획실에서 비서실로 자리를 옮겨와 있던 나는 기획조정실 이사가 되면서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지켜보게 되었다…이 무렵 일이었다. 부회장이 기업 이미지 광고 제작을 지시했다. ‘이미지 광고’라는 개념 자체에 익숙지 않았던 우리들로서는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세계적인 문화재들을 훑어보고 드디어 거북선을 배경으로 한 ‘기술의 삼성’이란 광고를 제작, 신문에 전면 컬러 광고를 냈다.

    광고가 신문에 실리자 이 부회장은 ‘아주 잘됐다’며 격려해줬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이 집무실로 부르더니 ‘이걸 광고라고 만들었냐’며 야단을 쳤다. 광고라면 상품 선전 광고가 전부인 줄 아는 ‘실리파’ 이병철 회장에게 새로운 영역인 이미지 광고는 충격으로 다가갔던 모양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이 부회장과 옛 것을 고집하는 이병철 회장의 완고함 사이에서 우리는 똑같은 사안으로 오전에는 이 부회장에게 칭찬받고 오후에는 이병철 회장에게 불려가 꾸중을 듣게 됐다.

    이건희 회장은 부친과는 대조적인 분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카리스마가 아주 강했다. 카리스마가 아니더라도 삼성그룹 창업주인데다 연세가 많고 연륜이 오래된 분이어서 말하기 조심스럽고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병철 회장 앞에서 잔뜩 주눅 들어 나온 후엔 이건희 부회장 방에 가서 풀었다.

    ‘회장님 앞에서 야단맞고 나왔습니다’ 하고 보고하면 이건희 부회장은 우리를 다독거려 주었다. 나이가 젊고 신세대다운 유연한 사고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병철 회장은 인사에 있어서도 인정사정없는 분인데, 그럴 때면 이건희 부회장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좀 심하게 한 것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직접 건의하지는 못했어도 우리의 푸념은 들어주었다.”

    그는 때로 “이 부회장 생각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며 이런 토로도 했다.

    “변화에 대해 너무나 빠르게 앞서 갔기 때문에 밑에서는 생각을 읽기가 아주 힘들고 갈등을 느낄 때가 많았다. 업무 지시를 할 때도 자세한 설명을 하기 보다는 추상적 개념을 던져주는 스타일이었다. 기업 이미지 광고를 지시할 때도 ‘제품 선전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미지 광고로 바꿔 보라’고 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소화할 능력이 없으면 구체화시키거나 접근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

    최고의 웅변가를 불러 스피치연습까지

    2011년 7월 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강원도 평창이 선정되자 감격스러워하는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2011년 7월 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강원도 평창이 선정되자 감격스러워하는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하지만 회장은 직접 자신이 메신저로 나서야할 때에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매우 구체적으로 작은 일까지 꼼꼼하게 챙기며 노력을 거듭했다는 게 가까운 사람들의 증언이다.

    육현표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은 2003년부터 회장의 신년사 준비를 보좌하는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회장이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고, 또 이를 실천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회장께서 신년사 원고를 완성하시면, 저희 같은 실무진이 반드시 해야 하는 후속 작업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웅변가라고 불리는 사람을 섭외해 원고를 읽게 하고 녹음을 하는 거였죠. 한번은 웅변 학원을 운영하는 분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회장께 그 분이 읽은 원고 녹음테이프를 드리면 거실은 물론 화장실에서까지도 계속 틀어놓고 연습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런 노력은 오래전부터 한결같았습니다. ‘신경영 선언’을 한 해인 1993년 3월 ‘제2창업 5주년’ 기념식이 열렸는데 그 전날에 갑자기 잠실 체조경기장에 나타나 연단에 올라서시더니 준비한 연설 원고를 꺼내 읽으며 연습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다’고 감탄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년사와 관련해 배종렬 전 제일기획 사장은 “내용 한자 한자에도 대단한 정성을 기울였다”면서 이렇게 전한다.

    “취임 초기에는 제가 신년사 초안을 썼는데, 회장은 몇 개월 전부터 ‘그룹 전체를 어떤 식의 모습으로 어떻게 끌고 갈 지에 대한 방향’을 담고 이걸 어떻게 포장할 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습니다. 항상 연설문 뒷부분에는 직원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메시지가 꼭 있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원고 작성을 위한 세세한 지시도 많았다고 한다.

    “반드시 키워드와 메시지가 있어야 하며, 전에 썼던 키워드들을 똑같이 쓰면 안 되고 간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쉽지 않았죠. 대략 초안을 가지고 가면 ‘읽어 보라’하고 가만히 들으시다 ‘(원고) 놓고 가라’ 하세요. 이 후 당신께서 몇 번씩 다시 읽어 보시고 ‘이렇게 저렇게 고쳐 봐라’ 하세요. 한 서너 번 그런 과정을 거쳐서 어느 정도 다듬어지면 새로운 용어도 넣고 메시지도 담은 뒤 완성됐다 싶으면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갑니다. 녹음도 해서 직접 들어 보면서 어디서 띄어야 하고 어디를 강조해야 할지 일일이 표시까지 하면서 연습하셨습니다.”

    무대 공포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것은 이건희 회장이 사실은 ‘무대 공포증’을 가진 게 아닌지 느껴질 정도로 대중 앞에서는 연설을 싫어했다는 증언이다. 다시 기외호 전 사장 말이다.

    “이 어른이 평소에는 엄청 눌변 아닙니까. 단상 위에 서서 이야기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해 실무진 입장에서 난처할 때가 많았습니다. 1973년 미국과의 합작 법인인 삼성코닝은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에서도 소개될 만큼 매우 성공한 합작 케이스였습니다. 1988년에 경북 구미공장을 착공하는데, 착공식에 코닝 회장은 물론 정부 고위 관계자들도 대거 참석하기로 돼있었고 당연히 회장님 축사도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사 전날 밤에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축사를 안 하시겠다는 겁니다. 제가 너무 놀라며 ‘회장님, 안됩니다. 미국에서는 회장이 직접 날아와 하는데 회장께서 답사를 안 하시면 큰일납니다' 거듭 말씀드렸지만 끝까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거 아닙니까. 결국 다른 계열사 사장님이 대신 했습니다.”

    -갑자기 전날,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였을까요.

    “사전에 필경사를 시켜서 큰 글씨로 숨을 쉬고 띄어 읽는 대목까지 표시해 연습을 하셨는데 당신이 결국 만족하지 못 한 겁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엔 삼성종합화학 기공식이 있었는데 대통령까지 참석하는 행사라 회장이 당연히 축사를 하기로 했었습니다. 어느 날 댁에 갔더니 홍라희 여사님과 두 분이 맹연습을 하고 계시더군요. 그런데 행사 임박해서 밤중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도저히 못하시겠다는 거예요. ’제발 그냥 하시라‘고 통사정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달려갔는데 연습하시느라 땀범벅이 되신 모습에 오히려 제가 놀라 더 청하지 못하고 그냥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삼성이건희 #뉴욕맨해튼광고 #삼성로고공항카트 #이건희무대공포증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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