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호

한평생 이야기를 쫓은 자의 최후 [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1-10-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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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3대째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잔반 가문 출신 고덕출은 탁월한 필사 솜씨 덕분에 꽤 윤택하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유난히 남의 글 베껴 쓰기를 좋아했던 그는 결혼한 뒤로도 서재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고전이나 당대 유행하는 비평서를 베껴 관청이나 학당에 납품했다. 그런 그에게 후손이 생길 리 없었다. 청상과부나 마찬가지 신세였던 아내는 고씨 집안 먼 피붙이를 들여 아들 삼아 기르다 아예 적자로 입적했다.

    아내와 자식과 더불어 사는 일상의 기쁨을 알 리 없는 덕출은 마치 수도승처럼 더 많은 서책을 베껴 세상에 전하는 데만 몰두했다. 심지어 자신이 애호하는 글을 만나기라도 하면 주문량의 두세 배를 필사해 공짜로 바치기 일쑤였다. 비록 스스로 훌륭한 글을 쓰지는 못해도 남이 쓴 글의 미덕만큼은 귀신처럼 알아볼 줄 알았던 덕출에게 필경사란 직업은 생업이기보다 운명이었다.

    정조의 죽음과 낯선 자의 가르침

    정조 임금께서 느닷없이 승하하시던 해, 그는 자신이 흠모하던 문운의 별이 졌다는 절망감에 붓을 놓았다. 좋은 책이 세상에 많이 깔릴수록 인간의 삶이 더 멋지고 풍요로워지리라 여긴 그의 순박한 믿음은 가루처럼 부서져 버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댔고 기방을 찾아 풍류를 탐했다. 그렇게 폐인이 돼가던 무렵, 서재에서 만취한 채 잠든 그를 누군가가 살며시 깨웠다.

    “이보시게, 덕출이! 잠시 일어나 앉아보시게.”



    두 눈을 비비며 상대를 바라본 덕출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안 뒤로 몸을 물렸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빛을 한 사내는 곧 바스러질 것 같은 가냘픈 몸매를 하고 있었다. 덕출이 간신히 입을 뗐다.

    “누구시오? 누구시길래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온 거요?”

    하늘하늘한 흰 적삼을 휘날리며 덕출에게 바싹 다가선 상대가 속삭였다.

    “자네의 의문에 답을 주려 왔다네.”

    조용히 생각에 잠겼던 덕출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한때 의문이 많았던 사람이긴 하오만, 이제 그런 따위 마음은 죄 사라졌소.”

    “왜 의문이 사라지셨는가? 이 흥미진진한 세상에?”

    멀뚱히 상대를 바라보던 덕출이 무언가에 홀린 듯 말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알면 알수록 무언가 깨닫는 게 있었소. 그건 끝이 없는 일인지라 호기심도 무궁하게 샘솟았다오. 배우면 길이 보이고 그 길은 또 다른 길로 연결돼 멈출 길이 없었소. 그게 다 책 속에 들어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소? 내가 본 걸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이 너무도 즐거워 필경사가 됐다오.”

    “책임감이 대단하셨구먼?”

    “좋은 걸 혼자만 알면 안 되잖소? 꿀벌처럼 부지런히 지식을 퍼 날랐건만, 그랬건만.”

    “세상은 그대로다?”

    “그렇소. 아니, 더 나빠지는 것 같소. 사람들은 책을 읽고도 그걸 믿지는 않는가 보오.”

    “책은 책일 뿐이니까.”

    “맞소! 책은 그저 글자를 모은 종이더미요. 결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한참 동안 덕출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마치 시를 읊조리듯 속삭였다.

    “정조대왕을 진심으로 숭모했던가 보오? 그리 순진하시니 당연히 그러셨겠지. 생각을 좀 바꿔보시면 어떻겠소? 남의 글을 베끼지만 말고, 이젠 자신의 글을 써보는 거요. 혹시 알 게 뭐요? 정말 귀중한 건 책이 아니라 당신의 그 머릿속에 들어 있을지?”

    가짜 책을 만들어내는 재미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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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바뀐 덕출은 유명한 작품을 이리저리 짜깁기해 표절하는 훈련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정교하게 날조한 책을 멀쩡한 필사본 사이에 슬쩍 끼워 넣어 성균관에 납본한 날, 그는 종일 불안에 떨며 안절부절못하고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담해진 그는 송나라 성리학자들 언행록에 조선 민담을 이리저리 뒤섞어 엮은 ‘성리잡설’이란 위서를 만들어 납품해 보았다. 역시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세상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 순간, 덕출의 눈앞에 새로운 우주가 열렸다. 능란한 위조가가 돼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가슴으로부터 고동쳤다.

    덕출의 작업량은 이전의 갑절로 늘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정상적인 필경 일을 했지만 밤부터 새벽 동안엔 존재하지도 않는 어록이나 주석서를 날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놀라운 건 그런 위서를 찾는 유생이 하나둘 늘었다는 점이다. 덕출이 지어낸 책은 소일거리로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기존 틀을 벗어난 분방한 매력이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집을 찾아온 유생 하나가 이렇게 물었다.

    “고 선생. 나이 어린 제가 이리 불러도 될까요? 아무튼 고 선생께서 넣는 서책 가운데 참으로 흥미 있는 것들이 들어 있습디다?”

    겁에 질린 덕출이 바들바들 손을 떨기만 하자 빙그레 미소 지은 유생이 다시 말했다.

    “아니, 아니오! 놀라지 마시오. 뭐라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오. 그 책들 다른 유생도 다 좋아한다오. 내용에 불경한 게 담겨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궁금한 게 있어 그러오.”

    마른침을 삼킨 덕출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바싹 다가앉은 유생이 속삭였다.

    “보아하니 그 책들, 누군가 지어낸 게 분명하오. 설마 필사나 하는 고 선생이 지어냈을 리는 없겠고. 누구요?”

    손에 쥐고 있던 세필을 필통에 담으며 덕출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모릅니다. 운종가 헌책방에 떠도는 걸 심심해서 필사해 둔 건데, 어쩌다 섞여 들어갔나 봅니다. 다음부턴 조심합지요!”

    “이런, 이런! 누가 조심하라 그랬나? 우린 그 책들이 재미있소! 근엄하신 선학들께서도 우리처럼 피가 도는 사람일 뿐이겠고, 게다가 그 풍류와 해학이라니! 읽다가 한바탕 웃고 나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니까?”

    “전 전혀 모르는 바이니 책방에 가서 수소문해 보십시오. 일이 워낙 밀려서 쇤네는 이만.”

    작업실로 서둘러 들어온 덕출은 유생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날조한 위서를 누군가 즐겨 읽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지은 사람까지 탐문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손을 떼야 할 시점이었다. 성인의 말씀 한 마디라도 고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참수될 수도 있는 서슬 퍼런 시국이었다.

    낯선 유생이 다녀간 뒤 덕출은 가짜 책 만드는 일을 중단했다. 하지만 이미 위조 작업에 깊이 중독된 그는 무언가를 날조해 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는 있지도 않은 야사를 지어내 서책 대여점인 세책방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야사나 패사 같은 소설류는 어차피 비공식적으로 유통됐기에 아무도 작자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솜씨가 점점 좋아진 그는 한양 저잣거리에서 회자되던 온갖 이야기를 언문으로 흥미진진하게 새로 꾸며내 보급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세책방 주인들은 덕출에게 몰려와 원본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원본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지만 일개 필경사인 덕출이 원본 없는 책을 가공해 납품했다는 것도 가당찮은 일이었다. 그는 ‘세상에 있지 않은 노인’이란 뜻의 ‘무유옹’이란 인물을 만들어냈다. 무유옹이라는 신비한 작가가 덕출에게만 원본을 제공한다고 우겼다. 반신반의하던 책방 주인들은 돈만 벌면 된다는 마음으로 덕출의 말을 믿어버렸다.

    바야흐로 무유옹의 시대가 열렸다. 그가 지은 책이 날개 돋친 듯 대여되는 바람에 금방 낡아버렸다. 대여할 소설 부수를 늘리려다 보니 정작 필경 일은 안중에도 없게 됐고, 새로운 이야기를 요구하는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는 정신없이 창작과 필사를 반복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비슷한 이야기를 순서와 내용만 살짝 바꿔 지어내도 대중은 그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저잣거리 이야기꾼의 탄생

    책방 주인 다음으로 덕출에게 몰려온 자들은 장안의 진기한 소식을 세도가 잠자리에 제공하는 일로 생계를 꾸리던 이야기꾼들이었다. ‘이야기 주머니’로 불린 그들은 단체로 몰려와 작가가 누구냐고 호통쳤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한양도성 안에서 벌어진 신기한 일이란 일은 우리가 다 꿰고 있거든? 그건 아시지? 정승 판서네 며느리 절에 가는 횟수도 우린 훤해요. 암만! 근데 어떻게 우리가 모르는 일을 그 작자가 아느냐고? 말이 돼? 이는 필시 다 꾸며낸 짓일진대, 우린 못 참아! 같이 벌어먹고 살아야지? 안 그래? 누군지 말해. 요절을 내놓을 테니.”

    소란을 피우던 이야기꾼들이 돌아가고 나서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덕출은 어느덧 장성한 아들을 불렀다. 그가 아들에게 물었다.

    “넌 이 아비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아느냐?”

    잠시 머뭇대던 아들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잘은 모르오나 예전에 하신 말씀은 기억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던고?”

    “꿀벌이 하는 일을 하고 계시다 하셨습니다.”

    “꿀벌이 하는 일?”

    “네. 세상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돌아야 한다고. 그게 꿀벌이 꽃이 피거나 열매를 맺게 해주는 일과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세간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소설 창작을 그만둔 덕출은 외출 횟수가 부쩍 줄었다. 필경 일도 시들해진 그는 그동안 모은 재산으로 조용히 여생을 마칠 요량이었다. 턱이 각지고 눈매가 날카로운 젊은 영남 선비가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자신을 안동처사로 소개한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인생 최후의 이야기

    “고 생원이 한양을 떠들썩하게 했던 저 유명한 소설들의 원작자라는 걸 잘 알고 있소. 난 위험한 사람 아니오. 애써 부인할 필요도 없으니 잠자코 내 얘기나 들으시오.”

    상대 소매 깃을 움켜쥔 덕출이 급히 말했다.

    “사람 잡을 말씀 마십시오! 게다가 쇤네 과거에 응시한 적도 없사온데 생원이라니요?”

    덕출의 손을 깃에서 뜯어낸 안동처사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진즉에 과거를 포기한 포의 신세요. 그냥 서로 생원이라 부르면 어떻겠소? 난 소싯적 성균관 생활을 했었소이다.”

    문득 숨을 멈춘 덕출이 상대의 입술을 그윽이 노려보았다. 상대가 말을 이었다.

    “정말 재미난 책들이 학관에 가끔 섞여 들어옵디다. 선학들 어록이나 일화들이었는데, 이게 그럴싸하긴 하지만 조금 조악한데다 뭐랄까, 소설기가 다분했소. 박학해 보이긴 했지만 과거 공부해서 크게 될 그런 솜씨는 아니었지. 누가 이런 걸 날조했을까 궁금했지만 뭐 그냥 그러려니 했소. 그러다가 최근 안동 지역에서 유행하는 서책들을 열람하게 됐지 뭐겠소?”

    “어떤 서책들인지요?”

    “소설들! 이미 한양에선 인기가 시들해졌다고 합디다. 작가인 무유옹인가 하는 자가 갑자기 사라졌다고도 하고. 아시다시피 안동은 한양보다 문물의 유행 속도가 느리지 않소?”

    “전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필경사일 뿐인 걸요.”

    “더 들어보시오! 아무튼 그 소설들을 우연히 읽고 난 예전 성균관에서 읽었던 그 위서들이 떠올랐소. 내 눈은 못 속이거든! 그건 같은 사람이 지은 거였지. 한문이든 언문이든 글 속엔 작가 특유의 체취가 배어 있소. 둘에선 분명 같은 냄새가 났어. 너무 궁금해 한양에 올라와 세책가들에게 물어봤지. 성균관에 위서를 공급했던 자와 똑같은 자가 책을 필사해 대줬다더군. 바로 당신, 고 생원이!”

    덕출은 눈에 초점을 잃고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상대가 천천히 입을 뗐다.

    “당신 소설이 왜 그리 인기를 끌었는지 알기는 하오?”

    머리를 숙인 덕출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소설들은 먼 옛날 한나라나 당나라를 배경으로 하잖소? 정말 재밌지만 현실감이 없지. 근데 고 생원의 소설은 요즘 한양의 인정물태를 다뤘지 않소? 지금 이 시대 사람살이 냄새가 났던 거요. 마치 독자들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던 게지. 바로 그게 인기 비결이었소. 그리고 그건 엄청난 무기이기도 하지!”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의혹에 휩싸인 덕출이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왜 성균관을 떠났는지 아시오? 정조께서 승하하셨기 때문이지! 부패한 조정에 더는 기대를 걸 수 없었어. 낙향해 후학을 길러 훗날을 기약하려 했소. 근데 생각할수록 분이 안 풀리더군! 요즘도 안동 어른들은 밤마다 정조대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소.”

    “억울하다니요?”

    “모르는 척하기요? 다 알면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거겠지! 노론이 전하를 독살했다는 얘기 말이오.”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던 덕출은 쿵쿵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애써 물었다.

    “안동의 남인 선비님들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얘긴 얼핏 들었습니다만, 그 얘기를 하필 제게 하시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타오르는 눈빛으로 덕출을 쏘아보던 상대가 발음 하나하나를 칼로 끊어내듯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생원께서 쓰신 소설들 말이오. 하나같이 정조대왕을 칭송했잖소? 성스러운 정조께서 다스리시던 무슨 해였다로 늘 시작하지 않았소? 가짜 어록에도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제일 많이 등장했고.”

    “그런데요?”

    “고 생원 마음 내가 잘 아오. 우리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전하를 위해 큰일 하나만 합시다! 마지막으로 정조대왕에 관한 소설 하나만 써주시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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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서 작가, 삶을 정리하다

    덕출이 지은 소설은 천천히 퍼져나갔지만 대여 속도가 결코 줄지는 않았다. 세책업계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현군이 정조이고, 그를 독살한 마군당 세력이 노론을 빗대고 있음을 누구나 눈치 챘지만 아무도 대놓고 발설하진 못했다. 그렇게 작품의 위험한 영향력은 미풍처럼 한양 밑바닥에서만 살랑댔다.

    안동 관청에 첫 벽서가 나붙고 집권 노론에 대한 성토가 차츰 중원 땅으로 옮겨붙으려 하자 괴소문에 대한 삼사의 보고가 비로소 조정으로 올라갔다. 미풍이 돌개바람으로 번지려 하고 있었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덕출은 가산을 정리해 먼 친척이 사는 충주로 이사할 궁리까지 했다. 불안한 마음이 든 그는 안동처사에게 자주 기별을 청했지만 어떤 답신도 돌아오지 않았다.

    덕출이 지은 소설이 금서로 지정되자 미지근했던 불안은 확고한 절망으로 변했다. 역적으로 몰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들을 서재로 불러들인 덕출이 슬픈 기색 가득한 표정으로 넋두리하듯 속삭였다.

    “아들아. 불쌍한 네 어미를 데리고 충주 친척집으로 빨리 떠나거라.”

    눈물을 흘리던 아들이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로 겨우 입을 뗐다.

    “아버님을 두고 떠나기 싫습니다. 어차피 집안 전체가 큰 벌을 받게 되면 어디로 피한들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한참 눈을 감고 있던 덕출이 타이르듯 말했다.

    “그건 이 아비가 처리할 일이다. 비록 저 안동처사의 세 치 혀에 휘둘려 감당 못할 짓을 벌였지만 식솔만큼은 지킬 셈이다. 어서 떠나거라.”

    잔뜩 어깨를 움츠린 아들을 향해 덕출이 덧붙였다.

    “난 그저 이야기를 쫓으며 살아왔을 뿐이다. 이 세상을 어떻게 해볼 생각도 능력도 애초 없었지. 어쩌다 대중의 과분한 애호를 받고 간이 부었던 게야. 겁 없이 우쭐했던 게야. 마지막으로 정조대왕을 위해 좋은 일 하나만 하자는 작은 일념이었다. 무유옹으로 살아오며 한 번도 들킨 적이 없거든. 분수도 모르고 기고만장했던 대가를 치르는 게다. 너와 네 어미만은 살릴 테니 날 믿고 어서 피신해라.”

    아들과 아내를 서둘러 떠나보낸 덕출은 목을 맬 질긴 끈을 마련한 뒤 서재에 틀어박혀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도 잘 써지던 글이 꽉 막혀 한 줄도 나아가지 않았다. 목숨 줄이 길어서인가 싶어 아예 끈으로 목을 맨 채 붓을 잡았지만 상황은 여전했다. 그는 간절히 살고 싶었다. 그리도 강했던 글쓰기의 욕망이 알고 보니 삶의 욕망이었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마지막 독자

    덕출에게 자기만의 글을 쓰라고 꼬드겼던 사내는 여전히 백지장처럼 파리한 낯빛으로 나타났다. 상대는 몹시 유쾌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덕출이 퉁명스레 물었다.

    “남의 인생을 망쳐놓고 그 즐거운 표정은 도대체 뭐요?”

    희로애락이 뒤범벅된 미묘한 표정을 지은 사내가 대답했다.

    “죽음도 결국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오? 그런데 이야기 마치기가 왜 그리도 힘드신가? 게다가 죽고 나면 무유옹의 삶은 신화가 될 텐데, 작가로서 더 부러울 게 뭐가 있으실까나?”

    헛웃음을 내뱉은 덕출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죽음은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라 끝이요. 더 보고 더 듣고 싶은 게 아직도 많소.”

    “허허 참! 소설도 끝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아직도 모르시는가? 어차피 더 쓰고 싶은 글도 없지 않으셨던가? 이쯤에서 결말을 짓는 게 훨씬 보기도 좋고 그렇소만.”

    “빨리 죽으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소?”

    “그게 아니라, 이제 쉬라는 뜻인데 못 알아들으시는가? 이야기가 끝났다는데 그러시네. 이야기는 끝나야 하는 거요. 그래야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니까.”

    덕출은 ‘다음 이야기’라는 말에서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그가 물었다.

    “다음 이야기가 과연 있겠소? 내가 죽은 뒤에도?”

    천천히 하지만 크게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대답했다.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요. 부디 편히 눈감으시길 바라오. 자네 아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긴 하는데.”

    “내 아들?”

    “자네 아들! 지금 그를 살리고자 바동대는 거 아니셨소? 무유옹의 정체가 실은 저 안동처사였다고 유서에 쓰고 자결하려던 참 아니셨소? 아무 걱정 말고 가시오. 안동처사가 대신 누명을 뒤집어쓰고 능지처참될 거고, 아들은 훗날 자네처럼 작가가 될 테니까. 진짜 무유옹이 누구였는지 후세가 알게 될 거요.”

    목에 줄을 건 덕출은 평화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홀가분하게 자결했다. 그가 의식을 잃기 직전 몸이 종잇장처럼 얇은 사내는 진짜 종이가 돼 공중으로 펄럭이며 떠올랐다. 사내는 한 장의 종이가 돼 덕출의 서안 위로 내려앉았다. 그건 한 작가의 삶을 종결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한 유서 한 장이었다.

    #윤채근 #환상극장 #무유옹 #덕출 #신동아



    * 이 작품은 ‘기재기이’의 ‘서재야회록’ 일부에서 모티프를 얻어 지은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환상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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