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국민연금에 가장 큰 수익 내주는 Tool
유명무실? “對기업 물밑 작업 활발”
국민연금 대주주化 부적절
ESG 원칙 추종 이유 = 책임 투자
위험자산 비중 확대, 국가 재앙 초래할 수도
원종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투자정책전문위원장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G가 약한 ESG는 ‘ESG 워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원종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투자정책전문위원장의 말이다. 9월 5일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충정로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국민연금기금은 1988년 국민연금법에 따라 설치된 이후 성장을 거듭해 글로벌 대형 연기금 반열에 진입했다. 6월 기준 자산 규모가 약 983조 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143조3000억 원이 국내 주식이다. 전체 자산 대비 14.6% 수준이다. 투자 종목만 약 1175개,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기업은 260여 곳에 달한다.
전 세계적으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원칙이 부각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됐다. 이에 맞물려 국민연금 역할론도 커졌다. 보유 지분으로 기업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서다. 또 3월 현행 제도가 유지될 경우 2055년 국민연금 기금이 소진된다는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발표 등 기금 고갈 위기론도 기금 운용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기금 운용 방향을 심의 및 의결하는 기구다. 심의·의결 전 사항을 전문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위험관리성과보상전문위원회·투자정책전문위원회 3개 전문위원회를 산하에 뒀다. 투자정책전문위원회가 중장기 및 연간 기금 운용을 위한 주요 계획을 세운다. 투자정책 결정 및 새 투자정책 개발, 기존 투자정책 변경 심의·검토도 맡는다. 투자정책전문위원회 방침에 따라 국민연금 기금 운용 향방이 결정되는 셈이다. 원종현 위원장을 만난 이유다.
칼을 차되 뽑아선 안 돼
9월 4일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충정로 사옥 종합상담실에서 한 시민이 상담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에 따르면 5월 말 기준 가입자는 2225만4964명으로 1년간 7만3000명이 줄어들었다. [뉴스1]
국민연금 역할론이 거세지는 모양새다.
“당연한 현상이다. 국민으로선 내가 낸 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고 싶을 테고, 기금 역시 국민의 노후 보장을 위한 것이니까. 우리로서도 이러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언제나 ‘책임 투자’ 원칙을 우선한다.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주요 기관투자자들의 의결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자율 지침)를 도입한 이후 더더욱 가입자의 이익을 어떻게 최대화할지 고민하며 기업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후 한 건의 주주대표 소송도 하지 않았다. 일각에선 국민연금의 견제가 유명무실하다고 비판하는데.
“크게 두 가지 고민이 있다. 첫 번째는 소송의 실익. 소송에 필요한 돈·인력 등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이기는 것이 과연 실익이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기면 오너·경영자 등 수뇌부가 부당하게 가져갔던 돈이 회사로 돌아오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회사 가치가 오를까. 또 오른다고 해서 상승분이 비용보다 클까. 확신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만약이라는 가능성. 국민연금이 정말 소송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절대 져선 안 된다. 지면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니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사실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예방 효과’다. 국민연금이 정말로 칼을 뽑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둑이 어떤 집에 침입할 때 죽는다고 생각되면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처럼, 국민연금이 칼을 차면 기업이 알아서 조심하길 바라는 것이다. 보이진 않지만 항상 기업과 대화하며, 이른바 ‘물밑 작업’을 하고 있다. 평화적 해결이 가장 좋은 방법 아니겠나.”
오너 일가가 대주주인 한국 기업 특성상 국민연금의 실질적 영향력 행사도 어려운 일 아닌가.
“그렇다. 주주총회로 가면 백전백패다. 일부 소유분산 기업을 제외하면 국민연금도 결국 소주주니까. 하지만 국민연금은 소주주여야 하는 게 맞다. 한 기업의 지분을 금융투자자가 과점할 때 오는 부작용이 더 위험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소주주로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 기업 경영에 대한 의견 기본값이 ‘찬성’이라는 뜻이다. 국민연금의 전문성이 뛰어나다 해도 기업 내부인사보다는 해당 기업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 지속 가능 위한 ESG, ESG 위한 G
9월 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공청회에서 박영석 기금운용발전전문위원회(기발위) 위원장이 기금운용 개선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날 기발위는 “국민연금 기금 고갈을 막기 위해선 국민연금이 위험자산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뉴스1]
ESG 원칙에 따른 투자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
“우선 ESG의 개념과 범위를 논하자면 너무 넓다. E, S, G 각각에 해당하는 항목으로 나눈 후 이를 근거로 투자하고 있는데, 가짓수만 160여 개에 달한다. 다만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뤄내기 위한 원칙임은 분명하다. 강조하건대 국민연금은 ESG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다. 책임 투자를 하고 있다. 향후엔 ESG를 잘하는 기업이 더 높은 수익을 내고,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국민연금은 장기적 관점으로 투자한다. 기업에 ESG를 잘하라고 요구함이 당연하다. ESG는 국민연금에 가장 오래, 큰 수익을 안겨줄 툴(Tool)이라고 보고 있다.”
여러 포럼, 세미나 등에서 유독 G를 강조했다. 이유가 있나.
“ESG는 유럽·미국 등 선진국에서 가져온 원칙이다. 사실 그 나라는 이미 기업 지배구조가 견실해 주로 환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은 다르다. 수출 의존 국가라 수입국 기준에 상품을 맞추다 보니 환경 부분은 퍽 뛰어나다. 그럼에도 마치 ‘환경을 잘하니 ESG도 잘한다’는 식의, ‘ESG 워싱’ 현상이 생기곤 한다. 상대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지배구조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또 ESG를 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도 지배구조에서 나온다. 지배구조가 확립·개선돼야 ESG 실행 주체가 명확해지고 지속성이 증가하는 이유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흔히 말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이유는 크게 지정학적 리스크와 오너 리스크 두 개로 압축된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후자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에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보나.
“그렇기도 하지만 단순히 부족하다고 해서 강조하는 건 아니다. 국민연금이 어떤 기업에 투자하는 이유는 ‘그 기업이 예뻐서’가 아니다. 높은 수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가가 오르도록 하는 핵심 키워드는 뭘까. ‘주주에 대한 존중’이다. 뛰어난 경영 판단으로 기업가치를 올리거나 높은 수준의 배당을 선택하는 등 주주를 존중하는 정도가 클수록 주가도 오른다. 하지만 승계·세금 등 문제로 오너 일가가 소액주주를 이용한 사례가 많다. 또 이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경영활동에서조차 주주를 제대로 배려하지 않는 기업이 상당수다. 물적 분할 후 재상장이 대표적 예다. 결정 목적과 과정에서 주주에 대한 존중이 있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지배구조가 개선되면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으리라 본다.”
골 넣기 싫어 안 넣는 선수 없다
국민연금 기금 고갈 위기론이 대두하며 운용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9월 1일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산하 기금운용발전전문위원회(기발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국민연금의 운용 수익률은 해외 연기금의 그것과 비교해 낮았다. 같은 기간 각 국가의 연기금 평균 수익률은 △캐나다(10.01%) △미국(7.03%) △노르웨이(6.69%) △일본(5.78%) △네덜란드(5.09%) △한국(4.7%) 순으로 나타났다. 기발위는 국민연금이 주식 등 위험자산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6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위험자산 비중은 45%인 반면 캐나다 연금투자(CPPI)의 그것은 85%에 이른다. 자본시장엔 국민연금이 주식을 더 사들이리라는 기대감도 왕왕 나타나고 있다.국민연금이 주식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현재 수익률로는 고갈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인데.
“수익률을 높이려면 위험자산 비중을 높여야 하는 것은 맞다. 리스크를 키우면 대신 기대 수익률도 커지는 건 당연한 원리 아닌가. 우리도 수익률 높이면 좋고, 그러고 싶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위험자산 비중을 90%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골 넣기 싫어서 안 넣는 축구 선수가 어디 있나. 지난해 경기가 좋지 않았을 때 국민연금 기금이 80조 원이나 줄었다. 만일 위험자산 비중을 높였는데, 그런 상황이 또 온다면 가히 ‘국가적 재앙’이 올지도 모른다. 위험 한도를 어느 정도로 할지 사회적 합의가 우선돼야 하는, 신중히 정해야 하는 문제다. 국민연금은 본디 기금이 아니라 ‘사회보험’ 제도다. 제도적 안정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컨대 한국 여성 노동자 비율이 예전보다 더 높아졌다곤 해도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인구가 줄어 가입률이 낮아질 수 있긴 하지만 여성 노동자 비율을 높이는 대안도 있지 않나. 또 현재 젊은 층의 국민연금 수령액이 너무 적어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라면 가입자에게 주거·보육부문에서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민연금을 ‘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수익률에 의존하게 되고, 위험이 커진다. 국민연금 제도에 대한 신뢰를 높인다면 자연스레 기금 견실성과 신뢰로 이어지리라 본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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