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물류의 중심에 들어선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의 정체성’ 관심 갖다가 발견한 건물
건물주 설득에만 2년, 설계도 찾아 백방 수소문
올드냐, 에이징이냐 앵글에 따라 용도 변해
질문 던지는 공간에서 각자의 답 찾길
[대전=허문명 기자]
일제가 지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변신
추석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 KTX 대전역에 내려 인동으로 향했다. 최근 이곳에 새로 개관한 미술관 ‘헤레디움(HEREDIUM)’을 찾았다. 독일 출신으로 세계적 명성이 있는 화가이자 조각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대규모 신작 전시가 열리고 있는 곳이다.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접해봤을 세계적 지명도를 가진 작가의 한국 첫 개인 전시가 서울이 아닌 대전, 그것도 막 새로 개관한 공간에서 열리다 보니 미술계에서는 그 나름대로 입소문이 퍼지고 있었다.기자의 흥미를 자극한 것은 ‘헤레디움’이라는 건물 자체였다. 이 건물이 지어진 지 올해로 꼭 101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이 바로 이곳이었다. 국내에 남아 있는 흔치 않은 근대건축물을 미술관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이례적으로 느껴져 취재길에 나선 터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투명 바닥 아래 돌계단이 관람객을 먼저 맞는다. 공간을 리노베이션하는 과정에서 지하를 파다 나온 것인데 위에 투명 발판을 깔아 그대로 보이게 살렸다고 한다.
안젤름 키퍼는 이번 전시 제목을 ‘가을 : Herbst’로 정했다. 제목에 딱 어울리게 전시장 안은 낙엽과 가을 풍경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이 걸려 있어 무르익어 가는 바깥 가을 분위기와 걸맞았다. 이번에 나온 18점이 모두 대작인데다 작가가 오로지 이 공간을 위해 제작한 신작들이라는 점에서 키퍼가 공간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느껴졌다.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독일 작가 안젤름 키퍼의 대형 작품들을 선보인 전시장. ‘폐허에서의 재생’이라는 작품 세계 콘셉트에 맞게 ‘가을’을 주제로 했지만 쇠락의 느낌보다는 생명의 순환적 느낌을 강조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대전=허문명 기자]
헤레디움 건물에 서린 아픈 역사
전시 안내를 해주던 함선재 관장에게 ‘헤레디움’의 뜻을 물었더니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의미의 라틴어라고 했다. 앞서 언급했듯 1922년에 만들어진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건물의 역사성을 담은 작명이다. 동척은 무슨 일을 하던 기관이었을까.사실 ‘척식’이란 말은 우리에게는 모멸적인 단어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척(拓)은 ‘생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들거나 아무도 한 일이 없는 일을 처음 시작한다’는 뜻이고 식(植)은 ‘심는다’는 뜻이다. ‘척식(拓植)’은 ‘개척(開拓)과 식민(植民)’이라는 의미가 합쳐진 단어로 ‘미개의 땅을 개척해 자국민을 심는다’는 뜻이다. 일제는 미개척 땅인 조선을 개발해(척) 일본인들을 심는다(식)는 뜻으로 이 단어를 썼다.
주지하다시피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조선인들의 정치적 자유를 빼앗았고 척식회사를 통해 경제적 자유를 빼앗았다. 1910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전국 땅의 소유권, 가격, 용도를 모두 신고하도록 하면서 왕실과 관청 소유 국유지, 마을 문중 토지, 미신고 토지 등을 총독부 재산으로 만들었다. 척식 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파격적으로 싸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일본인들이 조선 땅으로 이주하도록 돕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일제강점기 전국에 총 9개였던 동척 건물은 광복 후 하나둘 사라져 현재 대전, 부산, 목포 등 3곳에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대전 건물은 체신청 등으로 쓰이다가 민간에게 매각돼 상점들이 들어선 상태에서 등록문화재가 됐다. 이를 사들인 회사가 대전에 기반을 둔 도시가스 공급업체 ‘씨엔시티(CNCITY)에너지’다. 황인규 씨엔시티에너지 회장은 건물을 허무는 대신 복원을 결정했는데 당시 복원 작업을 주도한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우리근대건축연구소)는 동척 대전지점의 역사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인동 100년 역사가 되다’ 도록에서 인용)
1922년 일제가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헤레디움 외관. [대전=허문명 기자]
부산 건물은 우여곡절 끝에 부산근현대 역사관이 되었고, 목포 건물은 헐려나가는 도중에 목포근대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대전 건물은 1950년대 민간에 불하되어 파이프 각재들을 파는 철강자재상회, 타일 도기 상점으로 사용되었다. 1층은 거의 다 변형됐고 내부는 가게 용도여서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이후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그러다 황인규 회장을 만나 복원을 하게 된 것이다. 실측 도면을 그리고 현황을 파악하니 건물 내외 윤곽이 드러났다. 세월에 의해 깨지고 찢어지고 파였지만 내용물은 거의 다 되살아났다.”
대한도시가스 창업주 고 황순필 회장의 장남이기도 한 황인규 회장은 24년간 검사 생활을 하다 회사를 맡아 CEO로 변신했다. 현재 씨엔시티 마음에너지재단도 이끌고 있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그와 마주 앉았다. 그는 대전에 기반을 둔 회사로서 대전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건물 복원과 헤레디움 개관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대전은 1905년에 생긴 신도시이자 계획도시입니다. 대전이라는 도시가 생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철도였죠.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인들이 만주 진출을 위해 조선에 철도를 놓았다는 얘기는 다 아시잖아요. 큰 밭이던 대전을 보고 딱 찍은 거죠. 처음에는 일본 역무원들과 군인들이 와서 살았는데 점점 규모가 커져서 여러 건축물을 남기게 되죠. 그중 하나가 이 건물입니다.”
실제로 대전에는 옛 충남도청사를 비롯해 옛 조흥은행, 산업은행 대전지점, 한국전력공사 대전보급소 등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보니 보존보다는 철거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일제 잔재는 청산해야 한다”며 충남도청사 철거를 공약으로 내세운 시장 후보자가 있었을 정도다.
과거는 해석의 영역,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
“남들은 허물자고 한 공간을 사서 복원하겠다는 결심을 한 계기가 궁금하다”는 질문에 황 회장은 건물을 사람의 인생에 빗대 설명했다.“누구나 아프고 후회스러운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과거라는 것도 결국 내가 어떻게 해석하기 나름이잖아요. 아프고 한스러운 과거라고 해서 그냥 덮어버리고 외면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걸 발전의 계기로 삼는 게 현재와 미래를 위해 더 유익한 것 아닐까요. 이 공간도 그런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그는 2022년 12월 준공 기념 음악회를 하면서 바이올리니스트 민유경 성신여대 교수가 선보인 교향시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의 의미가 이 건물에도 녹아 있다고 했다.
“‘정화된 밤’은 원래 리하르트 데멜의 연작시 ‘정화된 밤’에 곡을 붙인 현악 6중주곡입니다. 이 시에는 남녀 커플이 아름다운 달빛 아래 나무 사이를 거닐면서 나누는 사랑의 대화가 나오는데 여자가 불쑥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남자가 얼마나 놀라고 배신감을 느꼈겠어요. 하지만 남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기는 우리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죠.
저희는 개관 기념 음악회로 그 공연을 선택하면서 시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이 건축물은 어쩌면 우리 역사가 낳은 남의 아이잖아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 여러 선택이 있을 수 있지요. 우선은 미워하는 마음이 크겠죠. 그렇다고 학대하고 죽일 거냐(웃음) 그것이 아니라면 받아들이자, 포용하자. ‘정화된 밤’에 나오는 남자의 마음처럼 남의 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잘 키우면 우리 아이가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이 건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죠.
이제 우리도 일본에 대해 상처만 기억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강한 나라가 됐잖아요.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 볼 때 과연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에도 우리 후손들이 이 건물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상처와 트라우마만을 갖고 이 공간을 볼까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따지고 보면 일본인들이 이 건물을 쓴 기간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이니까 23년 정도예요. 이후 우리가 쓴 시간이 훨씬 길죠. 그런 점에서 보면 ‘남의 아이’도 아닙니다.”
공간에서 삶을 되새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전시민 덕분에 저희 기업이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저희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시민들이 없다면 저희도 없죠. 그래서 늘 뭔가를 돌려드리고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제가 검사이던 시절에 일로 대전에 몇 번 온 적이 있지만 기업을 맡으면서 대전의 오리지널리티, 정체성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어요. 대전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고요. 그러다 이 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건물은 주변이랑 커뮤니케이션하는 공간이잖아요. 중요한 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하는 건데 낡고 허름한 모습 그대로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밀집된 공간으로 쓰이는 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건물을 인수하는 과정 자체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건물주가 팔지 않겠다고 하셔서 설득하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그분이 이사 갈 새로운 장소를 찾으실 때까지 한 2년 기다렸어요. 건물을 인수한 다음에는 전문가들을 모아 자문하는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원형을 최대한 보전하고 원형이 없거나 불분명한 경우에는 모던하게 바꾸기로 정했습니다.
복원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건물을 지은 회사가 일본 다이세이 건설이라는 회사인데 이곳에 물어보면 설계도가 있지 않을까 요청했더니 ‘없다’는 답이 왔어요. 이어 일본건축물협회라는 곳까지 수소문해 알아보니 역시 ‘관동 대지진 이후 문서들이 모두 소실되어 찾을 수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결국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당시 외형 사진들과 기록물을 중심으로 복원을 시작했습니다. 내부를 다 뜯는데 퇴폐 이발소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욕조가 나와서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웃음). 내벽이 똑바르지 않아 전시 공간으로 만드는 데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질문이 떠오르는 공간이면 좋겠다”
일제 잔재 청산의 목소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데 자칫 공격받지 않을까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예술은 뭔가 다르게 보는 눈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창조력의 출발이라고 봅니다. 기존에 있던 걸 다르게 보는 거. 이 건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이미 무너진 건물로 볼 수 있고, 올드한 건물로 볼 수 있고, 에이징(숙성)돼 있는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앵글로 봤느냐에 따라서 용도가 변하잖아요. 저는 이 공간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었으면 해요. 왜 낡아빠진, 더군다나 일제가 남긴 이런 건물을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묻는 것에서 출발하면 대환영이죠. 물론 답은 각자가 내는 거지만요.”
용도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원도 복원이지만 과연 이 건물을 통해 대전시민들과 무엇으로 커뮤니케이션할 것이냐, 이게 중요했죠. 저는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 새로운 친구들이 와서 영감을 받을 수 있고 질문할 수 있고, 그래서 어떤 창의성이나 영감을 얻어갈 수 있는 그런 거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서울과는 좀 동떨어질 수 있는 공간인데 세계적 작가의 첫 전시를 유치한 것도 의미가 있어 보여요.
“운이 좋았습니다. 키퍼가 한국 전시에 관심 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고, 우리가 오퍼를 냈는데 하겠다는 답이 왔습니다. 이분 작품 세계 콘셉트가 ‘폐허에서의 재생’이잖아요. 그래서 이 공간의 의미를 공감해 준 것 같아요. 버려진 공간이 다시 태어났으니까요.
작가가 모두 신작으로 대작을 만들어 보내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운송비 보험료 등 경비도 많이 들었지만 요구 조건도 많았어요. 관객들이 그림을 충분히 만끽해야 한다면서 접근 금지선도 두지 말라고 하고, 안내문도 쓰지 말라고 하고 말이죠. 작품 망가질까 봐 조심하고 있습니다(웃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간에 대한 생각이 남다른 것 같네요.
“공간은 사용자가 편해야 한다는 게 기본 생각입니다. 직원들 지정석을 없앤 것도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이었어요. 도시가스공사는 도시가스를 공급하고 유지관리 보수가 본업이잖아요. 현장이 사무실입니다. 안전이 생명이다 보니 새롭게 아이디어를 내기보다 기존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문화가 팽배할 수 있지요.
처음엔 직원들이 문제가 있는 가스관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서 바로 공유하지 않고 보고서를 쓰는 데 시간을 보내더라고요. 지금은 3차원이 아니고 4차원 세계잖아요. 정말 상상력에 따라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업무 공간 스터디를 시작했습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구중궁궐처럼 돼 있던 사무 공간을 모두 허물고 자유롭게 만들었어요. 소프트웨어는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니고 하드웨어를 바꿔야 하잖아요. 자유석도 그냥 자유석이 아니라 현대카드, 포스코까지 벤치마킹해서 다양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있는 자리도 있고, 회의실처럼 오픈 스페이스도 있고요. 자기가 원하는 그때 집중하고 싶은 방에 가서 일하도록 한 거죠.”
그렇게 해서 생산성이 올라갔나요? 혁신의 결과가 궁금합니다.
“저희는 생산성이라기보다는 안전관리에 깊이를 더하는 게 업의 본질이죠. 공간을 바꾸니 직원들의 업무 태도와 소통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직원들이 저한테 얘기하는 게 ‘디지털 트윈’을 해보고 싶다는 거예요. 땅속에 묻혀 있는 가스관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디지털 공간으로 만드는 거죠. 가스관 관리에 제일 위험한 게 다른 공사를 하다가 관을 건드리는 것이거든요. 우리가 감독을 나가는데 디지털 설계도만 있으면 안전하게 공사하는 것이 가능하죠. 옛날엔 없었어요. 직원들이 국책 과제로 자발적으로 신청해 예산도 따 왔습니다. 공간을 자유롭게 바꾸니 소통이 자유롭게 이뤄져 조직의 활력이 생긴다는 걸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요즘 기업인 중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시민사회에 대한 기여를 고민하면서 각자의 터전이 되는 지역에서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 인문 정신을 뿌리내리려는 움직임이 많이 읽힌다. 대전이라는 지역 특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과거를 현재적·미래적 의미로 해석해 내려는 ‘헤레디움 정신’이 이곳에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