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우정 없는 비정한 도시와 그 적들

[고담기담]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3-11-1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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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신에서 흐른 피가 도랑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가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한양의 새벽 풍경을 더욱 무채색으로 만들었다. 포교 이춘동은 상반신이 도랑에 처박힌 채 발견된 피살자를 우두커니 내려다봤다. 포졸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이 포교님! 이걸 어쩔깝쇼? 끄집어내 우선 거적으로라도 덮어둘깝쇼?”

    고개를 가로저은 춘동이 쪼그리고 앉아 죽은 사내의 허리춤을 뒤지기 시작했다. 호패를 찾아 집어 든 그가 천천히 일어나 신원을 확인했다. 춘동이 미동 없이 그렇게 서 있기만 하자 포졸이 다시 물었다.

    “얼굴이라도 빼내 놔야 하는 거 아닐깝쇼? 곧 초검관이 올 텐데, 이대로 뒀다간 한소리 듣지 싶습니다요.”

    그제야 정신이 든 춘동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졸 둘이 시신을 도랑에서 빼낸 뒤 얼굴이 하늘로 향하도록 거적 위에 눕혔다. 시신의 옷차림새와 체격을 보는 순간 춘동은 이미 피살자가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다. 시신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오랜 벗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나타난 초검관은 한성 중부의 도사 한봉석이었다. 시신 검시를 대충하거나 중요 기록을 빠트려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 걸로 유명한 자였다. 춘동은 적이 안심됐지만, 대궐 코앞에서 벌어진 사건인지라 도사가 어찌 나올지 또 모를 일이었다.

    “누가 발견했지? 처음 본 자가 누구냐고? 빨리 대답해. 나 바빠.”

    춘동은 저만치서 비 맞은 생쥐 꼴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최초 목격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밤새워 마신 술이 덜 깨 눈이 풀려 있는 군교였다. 군교에게 다가간 도사가 상대를 위아래로 흘겨보며 물었다.

    “나 한봉석이야! 잘 알지? 몰라? 우리 집안을 몰라? 한성판윤 한 대감님이 내 아버지라고! 어쭈, 뭘 째려봐? 내가 서자라 우스워?”

    도사는 하급 무관인 군교를 몰아세우다 마침내 따귀를 갈겨댔다. 아침잠을 방해한 시신에 화풀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엉뚱한 곳에다 분을 풀려 작정한 듯했다.

    “너 야금을 어겼지? 맞지? 이 냄새 봐, 이거! 너 인마 이실직고해. 네가 죽였지? 맞잖아? 너 저 새끼랑 같이 술 먹고 싸웠지? 빨리 말해!”

    군교가 살인자로 몰려가는 장관을 바라보던 춘동은 조금씩 뒷걸음질해 우포청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도사가 멀리서 그를 불러 세웠다.

    “야! 너 포교! 이리 와봐! 여기 죽은 놈 호패 어디 있어? 내놔. 빨리 끝내버리게.”

    침을 꼴깍 삼킨 춘동이 천천히 대답했다.

    “호패는 없었습니다.”

    “없어? 호패도 없어? 그럼 이 죽은 놈 군영에서 노역하다 내뺀 놈 아냐? 오호라! 그럼 말이 되네. 이 군교 녀석이랑 원한 관계네! 딱 보면 알아!”

    싱긋 웃은 춘동이 발길을 다시 우포청으로 돌린 순간, 도랑에서 시신을 꺼내자고 조르던 포졸과 눈이 마주쳤다. 급히 시선을 회피한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사건 현장에서 벗어났다.

    거미줄

    우포청으로 돌아온 춘동은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소매에서 호패를 꺼내 우두커니 바라보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임자년생 박복만.”

    복만은 소년 시절 춘동과 북한산에서 함께 과거를 준비하던 오래된 벗이었다. 춘동이 이를 악물며 호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10여 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복만이 갑자기 나타난 건 보름 전이었다. 우포청 입구에서 춘동을 기다리던 복만은 몹시 초췌했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이게 얼마 만인가? 복만이! 그동안 잘 지냈나?”

    복만은 대답 대신 춘동을 얼싸안으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니 이 사람아! 왜 이러는 건가? 춘부장 어른은 구존하시지?”

    춘동이 묻자 눈물을 글썽이던 복만이 희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 같은 가난뱅이가 부모 봉양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겠어? 벌써 돌아가셨어. 지금 처자식 건사도 힘들게 생겼네. 아니, 나 곧 죽을 몸일세!”

    바로 부서져버릴 것 같은 벗을 이끌고 운종가 뒷골목 주막을 찾은 춘동은 벗으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이대로라면 난 곧 죽어. 아니, 살해당할 거야.”

    파전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씹던 춘동이 놀라서 되물었다.

    “누가 자넬 죽인단 말인가? 내 비록 양반 신분에 돈이 없어 포교 노릇하고 있네만, 자세히 말해 보게. 포도청이 비록 부패해 유명무실해졌다지만 내 무슨 수라도 내볼 테니!”

    “소용없어. 난 거미줄에 걸린 나방 신세야. 그저 죽기 전 신세타령이나 하려 찾은 걸세. 가까운 벗 가운데 그나마 자네만 온전한 삶을 살고 있잖아?”

    “무슨 소리! 북한산에서 공부하던 넷 가운데 이런 하찮은 포교나 할 자 누가 있겠나? 주변머리라곤 도통 없는 내 팔자려니 견디며 살고 있네.”

    북한산 얘기가 나오자 복만의 표정은 더욱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가 무언가 망설이며 머뭇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내가 거미줄이라 했지? 그건 빚의 거미줄이야. 아주 무서운 조직에 빚을 졌어. 그 빚이 또 빚을 부르고 빚이 불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 그래서 말인데. 50냥만 변통해 줄 수 없을까? 그거면 한 열흘은 버틸 수 있어. 그 안에 처가 쪽에서 또 50냥을 변통하고 그래서 목숨을 연장하다 보면 뭔 수가 날 수도 있겠고.”

    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춘동이 속삭였다.

    “임금 바뀐 뒤로 포교들 봉급이 끊겼네. 한양 치안이 왜 이렇게 나빠졌겠나? 각자도생 중일세. 가끔 있는 대궐 행사나 장터 관리로 몇 냥씩 타는 게 전부라네.”

    “갚아줄 수 있어. 딱 50냥만 빚보증을 서줘! 그래도 자넨 포청 관리이니 받아줄 거야.”

    “누가 뭘 받아준다는 건가?”

    “나랑 함께 지금 가세. 여기서 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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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표교 한약방

    복만의 손에 이끌려 당도한 곳은 수표교 근처 한약방이었다. 복만의 말을 다 들은 약재상은 춘동의 호패를 꼼꼼히 살피더니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포교라. 뭐 그래봤자 똑같은 가난뱅이지만 혹 쓸모는 있겠군. 50냥? 주지!”

    약재상은 벽장 안 돈 궤짝에서 50냥을 꺼내더니 복만을 향해 휙 던졌다. 그는 치밀하게 계약서를 작성한 뒤에 춘동의 양손 지장을 다 받아냈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약재상이 느긋한 말투로 속삭였다.

    “이자는 한 달에 닷 냥! 못 갚으면 이자에 이자가 붙어 열 냥! 명심해야 할 건, 우리와 맺은 계약이 밖에 누설되면 안 된다는 거야. 그럼 바로 목숨이 사라져. 뭐 돈이 없으면 일을 해서 갚아도 돼.”

    당황한 춘동이 다시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을 하오?”

    복만 쪽을 슬쩍 노려본 약재상이 계약서를 소매 안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건 저 친구한테 물어. 사람을 죽이라면 죽이고, 물건을 옮기라면 옮겨! 아주 힘든 일은 안 시켜.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성의를 보여주면 돼. 돈도 못 갚고 일도 못 한다? 그럼 죽어야겠지. 명심해. 포교는 50냥의 목숨을 우리한테 빚졌어.”

    찝찝하고 불안했지만 춘동은 복만의 딱한 처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한약방에서 나와 수표교 위에 이른 춘동이 복만에게 물었다.

    “저들에게 도대체 얼마를 빚진 건가? 갚을 길은 있는 게 확실하고?”

    복만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우선 급한 불은 껐어. 처가 먼 친척이 흥인문에서 큰 국밥집을 하거든. 내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고개를 끄덕인 춘동이 복만의 집이 어디인지 물었다. 시선이 흐트러진 복만이 갑자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처자식은 친정에 가 있어. 나 혼자 뜨내기로 돈을 모으고 있지. 어떡하든 이 거미줄에서 벗어나 볼 테야. 혹시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생기거든?”

    “모른 척해.”

    “자넬 모른 척하라고?”

    “응. 그냥 잊어. 나랑 더 엮이지 말고, 50냥만 무슨 수를 쓰든 빨리 갚아. 잊지 마. 거미줄에는 걸리지 마. 자넨 포교니까 잘 해낼 거야. 아무튼 덕분에 내 목숨을 열흘 연장했어. 정말 간절히 감사하네.”

    말을 마친 복만은 수표교 인파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불길한 접근

    복만의 죽음이 술에 취한 군교에 의한 우발적 살인으로 결론이 날 무렵, 포청에서 이른 저녁 퇴근해 훈련원 옆에 있던 집으로 들어서려던 춘동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포교.”

    사방 골목길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다. 환청인가 싶어 사립문을 열려는 순간 차가운 손길이 그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흠칫 놀라 뒤돌아보자 약재상이 빙글빙글 웃으며 서 있었다.

    “잘 있었어? 왜 안 들렀지?”

    고개를 갸웃한 춘동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어디를 들르란 말이오? 그리고 아직 한 달이 안 된 줄로 아는데?”

    뒷짐을 지고 춘동의 집 사립문 안쪽을 살핀 약재상이 입술을 뒤틀며 대답했다.

    “처하고 자식들이 착하게 생겼던데? 돈 열심히 벌어 빨리 갚아야지? 한 달? 아직 깨닫지 못한 거야? 포교는 그날부터 나한테 빚진 게 아니거든. 계약서 안 봤어? 죽은 박복만의 빚 가운데 50냥을 떠안았던 거지. 그러니까 그 빚이 시작된 뒤로 한 달이 벌써 넘었다 이거야! 닷 냥이 벌써 붙었고, 곧 열 냥이 돼. 도합 60냥!”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춘동이 본능적으로 환도에 손을 가져다 대자 몇 걸음 물러선 약재상이 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워어이! 흥분하지 마. 복만이 꼴 되고 싶어? 돈 없는 거 잘 알아. 대화해보자 이거야.”

    집 안쪽을 흘낏 돌아본 춘동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곳에서 얘기합시다. 가족들이 알면 곤란하오.”

    춘동 앞으로 성큼 다가선 약재상이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곤란? 우리가 더 곤란해. 땅 파면 60냥 나오는 줄 알아? 갚지 못할 거면 빌리질 아예 말았어야지. 그럼 일이라도 해.”

    “무슨 일을?”

    “그냥 시키는 일. 그거 못 하겠으면 돈을 갚아. 못 갚아? 그럼 죽어야지. 죽기 싫어? 그럼 가족이라도 팔아. 딸년이 반반하던데?”

    약재상 멱살을 움켜쥔 춘동이 잔뜩 힘줘 말했다.

    “가족 건드리면 당신부터 죽을 거요. 복만에게도 이런 식이었소?”

    멱살을 천천히 풀어낸 약재상이 배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다 이렇다니까. 가족 얘기하면 벌벌 떨며 악을 쓰지. 하여튼 예외란 게 없어. 내일 한약방에 들러. 할 일을 줄 테니까 열심히 해봐. 그럼 향후 여섯 달 이자를 면제해 줄게.”

    약재상은 말을 마치자 골목길에 드리우기 시작한 그늘 속에 몸을 감추더니 그림자처럼 사라져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춘동은 여섯 달이라는 상대의 말에 안심하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다음 날 한약방을 찾아간 춘동은 홀로 남겨진 채 오래 방치됐다. 누군가를 모시러 나간 약재상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돌아왔다. 그런데 되돌아온 그의 태도가 돌변해 있었다. 약재상이 싹싹한 말투로 입을 뗐다.

    우두머리의 정체

    “내 참, 두령님은 역시 대단하시단 말이지. 오래 기다리셨어? 내 실례했다면 용서하시고! 좀 더 기다리시면 우리 두령께서 오실 거요. 두령께서 말씀을 안 해주시니 내 포교님께 대접이 소홀했지.”

    사라진 약재상이 앉았던 자리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조직 우두머리를 기다리던 춘동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새삼 기가 막혔다. 가난하지만 인륜을 지키며 살아왔고 박봉의 포교일망정 그 역시 나랏일이라 믿으며 버텨왔건만, 급기야 도성 왈짜패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셈이었다. 그런 상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문이 드르륵 열리며 사내 하나가 등 뒤로 다가왔다. 사내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춘동이 잘 있었나?”

    깜짝 놀란 춘동이 뒤돌아보자 소년 시절 북한산에서 함께 과거 공부에 매진했던 벗 안길상이 거만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춘동은 부지불식간에 벌떡 일어서 상대를 끌어안았다. 길상이 우두머리라면 살길이 열리는 것인가 감격하면서도 어쩌다 그가 이런 모진 길에 빠졌는지 두렵기도 했다.
    “앉아! 어서 앉아. 친구 사이에 뭐 격식 갖추고 그러나?”

    큰 소리로 말하며 마주 앉은 길상은 춘동에게 담뱃대를 권하며 자신도 한 대 입에 척 가져갔다. 한눈에 봐도 값비싼 청나라 담뱃대였다. 연기를 길게 뿜어낸 길상이 입을 뗐다.

    “옛날 생각나나? 북한산의 의형제였던 우리 네 명! 얼마 전 죽은 복만이가 가장 먼저 과거를 포기했지? 정신력이 약해빠진 친구였어. 그다음이 자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송휘준이도 마침내 짐을 싸며 울더군. 나 혼자 북한산에서 꼬박 한 해를 더 공부했어.”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네. 아깝게 여러 번 낙방했다 하더군. 먹고살기 바빠 옛 벗들 챙길 겨를이 없었네. 한데 어쩌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담뱃대를 놋쇠에 탕탕 부딪힌 길상이 무서운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이런 일? 이런 일이라고? 이게 뭐 어때서? 어차피 이 세상은 우리처럼 뒷배 없는 인간들에게 한 치의 기회도 주지 않잖아? 재주 있고 충심이 있으면 뭐 해! 기회를 안 주잖아? 그 작은 기회조차도!”

    방바닥을 바라보며 오래 침묵하던 춘동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복만이를 죽였나?”

    담배 연기를 훅 불어 춘동의 얼굴로 뿜은 길상이 키득거리며 웃다가 대답했다.

    “다 계약 때문이었어. 나도 복만이 살리려고 무던히 노력했거든. 돈만 갚으면 되는 건데 그걸 못 하니 난들 어쩔 수 있나? 조직은 규율이고 그게 무너지면 다 무너져. 누구도 예외는 없어. 심지어 자네도!”

    숨을 멈춘 춘동이 길상을 노려봤다. 그런 춘동을 힐끗 바라본 길상이 소매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이 계약대로만 해줘! 그저 계약대로만.”

    “뭘 해주면 되나?”

    “복만이가 못 하는 거.”

    “뭘 못 했나?”

    길상이 음산한 눈빛으로 춘동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송휘준이가 얼마 전 전라도 관찰사가 된 건 알아? 모르지? 임금이 바뀌며 외척이 발호하고 있잖아? 휘준이 집안이 덕분에 노가 났어. 어엿한 왕실 외척이 아닌가?”

    “그게 자네랑 무슨 관계고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랑 관찰사 사이의 관계는 알려고 하지 마. 그냥 복만이가 너한테 했던 걸 휘준이한테 그대로 해. 그럼 이자는 면제야. 그래도 50냥은 꼭 갚아.”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에 사로잡힌 춘동이 온몸을 떨며 상대를 노려봤다.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물었다.

    “다 자네 계략이었군? 날 빚으로 옥죄려 복만이를 이용한 거로군! 그래놓고 죽이다니, 의리나 양심이 있기는 한 건가?”

    “그게 복만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 그래도 보름을 더 살다 갔잖아? 조만간 전주로 내려가서 관찰사를 만나. 그리고 급전으로 200냥을 부탁해. 돈이 없으면 보증이라도 서달라고 애걸하란 말이야. 휘준이가 아직 재산은 별로 없거든. 자네라면 믿을 테니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길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벗어났다.

    전주로 내려가 감영 근처에서 숙박하며 관찰사 송휘준이 만나주기만을 기다리던 춘동은 가족이 염려돼 한양으로 자주 서찰을 띄웠다. 그는 아내의 답신을 받고 나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하곤 했지만, 자신이 저지르는 짓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기에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졌다.

    조직의 음모

    마침내 관찰사로부터 접견을 허락받은 춘동은 길상이 준 낡고 해진 도포를 걸치고 감영에 들어섰다. 예상보다 삼엄한 감영 경비에 그는 적이 놀랐지만 그런 데에 눈 돌릴 여유는 없었다. 인사를 나눈 직후 그는 관찰사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200냥만 꿔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200냥이라. 그런 돈은 내게 없다네. 집안 덕에 이 자리에 덜컥 올랐지만 동안 벌어둔 게 있어야 말이지. 한데 포교가 무슨 수로 포청을 비웠나?”

    마른침을 삼킨 춘동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실은 요즘 체직 중일세. 봉급을 전혀 안 받는 대가로 다른 일을 하도록 잠시 허락받았네. 한양 형편이 다 그렇잖은가? 돈줄이 다 말라버렸으니까.”

    춘동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휘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 성격에 힘들게 찾아왔을 텐데, 내겐 돈이 없으니 어쩐다? 빚보증이라도 서주면 되겠나?”

    예상외로 일이 술술 풀린다 싶어 표정이 밝아진 춘동이 상대 두 손을 덥석 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향해 관찰사가 입을 뗐다.

    “실은 나도 작은 부탁이 하나 있네.”

    “뭔가? 뭐든 들어줌세!”

    “혹시 안길상이 소식 들은 건 없나?”

    순간 제자리에 얼어붙은 춘동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관찰사의 눈을 바라봤다. 뭔가 낌새를 눈치챈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춘동이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길상이 본 적은 없네만, 혹시 왜 찾는 건가?”

    한숨을 길게 내쉰 관찰사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실은 내가 부임한 직후부터 산적들을 토벌하고 있네. 그게 전라도 최고의 골칫거리였거든. 가뜩이나 왕실 외척이라고 흉들을 볼 텐데 뭔가 성과를 크게 내고 싶었네. 그런데 도적들 산채들을 뒤지다 보니 이게 뿌리가 보통 깊은 조직이 아니었어.”

    “뿌리가?”

    “그래. 뿌리가 한양에 있네. 전라도 산채들은 한양 조직으로부터 명을 받는 줄기였어. 놀랍게도 생포한 졸개들 입에서 안길상이란 이름이 나왔네. 처음엔 동명이인이거나 설령 길상이가 맞다 해도 중간책 정도로 이용당했다고 여겼지. 하지만 아니었네! 길상이 고향이 여기 전주 아닌가? 그 친구 여기에서 세력을 키워 한양에 진출한 거였어. 그나마 길상이가 여기 있을 때 안면을 튼 전주 산적들이 두령 이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던 걸세.”

    두 손을 벌벌 떨던 춘동이 더듬대며 물었다.

    “그럼 자네 길상이를 추적하고 있었나?”

    고개를 끄덕인 관찰사가 벗의 얼굴을 빤히 살피며 대답했다.

    “산채들을 하나씩 없애는 중일세.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한양 조직이 나타날 테고, 그러면 한성판윤과 힘을 합쳐 한양 조직의 뿌리까지 일망타진할 수 있을 걸세.”

    현기증이 인 춘동이 잠시 고개를 떨어뜨린 채 침묵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 자네에게 이실직고할 일이 있네.”

    그 순간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관찰사가 서둘러 말했다.

    “친구끼리 이실직고까지 할 게 뭐 있겠나? 그건 그렇고 한성판윤 자제가 마침 여기 와 있는데, 지금 만나보려나?”

    놀란 춘동이 열리는 문 쪽을 돌아보자 한성 중부 도사 한봉석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섰다. 관찰사와 반갑게 인사한 그가 춘동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마침 관찰사가 관무로 잠시 자리를 비우자 봉석이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봐, 포교! 저번에 호패 감춘 것도 봐주고 사건도 대충 덮어줬잖아? 그럼 고마운 줄 알고 시키는 일만 해. 허튼짓하면 너도 박복만이 꼴 나는 거야. 두령 친구라고 절대 봐주는 일은 없어.”

    *이 작품은 조선 후기 문인 안석경의 야담집 ‘삽교만록’ 속 일부를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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