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한동훈, 지도자 되려면 정치적 용맹성 가지라” [+영상]

6공화국 체제의 섬세한 목격자이자 담지자, 김종인

  • 김도언 시인·소설가

    입력2023-10-2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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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尹, 말 거칠고 절제 안 돼 0.7%P밖에 못 이겨

    • 야당 상대로 협치를 하거나, 국민 상대로 정치를 해야

    • 문재인은 조국의 말과 생각 답습한 사람

    • 정치에는 정직함 필요… 노무현과의 인연

    • 할아버지 김병로 대법원장 비서로 처음 정치 경험

    • 부가가치세 도입과 국민건강보험제도 정착 주인공

    • 나는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위해 정치하지 않았다

    [+영상] 김종인 "문재인은 조국 말과 행동 답습한 사람"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박해윤 기자]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박해윤 기자]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근처 서울지방경찰청 뒤편 오피스텔 건물에 자리 잡은 김종인(83)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연구실은 희붐한 조명 속에 어쩐지 고아한 오라(aura)가 스며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방은 세수로 80이 넘었지만 여전히 한국 정치판의 ‘대체 불가능한’ 멘토 역할을 맡고 있는 희유한 존재가 현현하는 현장이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김종인 전 위원장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만찢남’, 만화를 찢고 나온 불사의 캐릭터처럼도 보인다.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를 위해 착석한 직후부터 김 전 위원장의 스마트폰은 계속 울렸다. 외부 행사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거나 방문 허락을 구하는 연락들로 보였다. 여전히 김 전 위원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명백한 방증. 인터뷰 당일 아침에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고 온 참이라고 했다.

    인터뷰이에 대해 호들갑부터 떨 생각은 없다. 생각을 한번 해보자.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김 전 위원장 같은 일관된 영향력과 일정한 자장을 양대 진영으로부터 인정받는 인물이 과연 있었는지를. 보통은 한 진영의 원로로서 고정된 역할을 맡고 있다가 정치적 셈법이나 반대 진영의 정략적 배려에 의해 적당한 관직으로 영전됐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라져버리는 게 정치 노장들이 보여준 흔한 풍경이었다.

    김 전 위원장의 책상 뒤편에는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사진이 표구된 액자가 놓여 있었는데, 조손(祖孫) 관계를 떠나 김 전 위원장이 할아버지 김병로 선생을 얼마나 지극히 존경하는지 내심 가늠할 수 있었다.



    정치를 한다는 건 무엇일까. ‘정치를 한다’는 레토릭은 불행하게도 지금 긍정적 맥락에서 쓰이질 못하고 있다. 본래는 가치중립적이어야 마땅할 말인데 부정적 맥락에서 비판과 질정의 언술로 쓰이는 게 현실이다. “지금 저 사람이 정치를 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정치는 정당하지 못하고 합리성도 확보하지 못한 권모나 술수의 동의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김종인 전 위원장의 정치참여는 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심이 된 국보위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끝없이 정통성 논란을 빚고 있는 5공 정부에 그가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그의 정치 역정의 시금석이면서 동시에 아킬레스건일지도 모르니까. 혹시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의 대학 강단에 설 때부터 정치참여를 염두에 두었던 것일까.

    한국 현대 정치사의 고유한 존재

    “현실 정치에 기회가 있으면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에요. 사실은 1963년에 할아버지가 단일 야당을 창당했는데, 그때 내가 이른 나이에 심부름 같은 걸 하는 비서 역할을 맡았어요. 그때부터 정치인들을 지속적으로 접해본 거죠. 야당 인사들은 거의 다 만나봤고 최고회의 군인들도 만나봤고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현실 정치를 경험하게 된 거예요. 그 체험을 뒤로하고 독일에 가서 경제학이라는 공부를 해보니 자연적으로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문인 거예요. 당시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이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상이던 에르하르트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에르하르트에 대한 이야기는 김 전 위원장의 최신간 저서 ‘독일은 어떻게 1등국가가 되었나’에 상세히 기술돼 있다.)

    에르하르트는 1958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한국의 기자들이 독일도 분단국이고 한국도 분단국인데 통일의 방법이 뭐냐고 물으니까 통일에 대한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다, 자기 체제에서 최고의 성과를 이루면 그걸 바탕으로 해서 통일이 될 것이다, 이런 말을 했어요. 그게 나중에 실현이 됐잖아요. 저는 그때부터 독일 경제에 관심이 있어서 독일에서 1학기부터 경제학을 공부한 거예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정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는데, 그때 GDP(국내총생산)가 불과 83불이었어요. 내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면 한국에 필요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다, 경제개발이 되면 한국의 정치발전도 뒤따라올 것이다, 그때 내가 기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거죠.”

    정부 수립 후 혼란스러웠던 시기 대법원장과 야당 당수를 지낸 할아버지의 영향, 그리고 유럽 선진국에서 느꼈던 젊은 유학생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 그러니까 그에게 정치 감각은 공기처럼 피부에 체감되는 것이었으리라. 더 듣고 싶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독일에서 공부하던 1968년 유럽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났어요.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학생 데모가 독일에서 가장 심했는데, 갑자기 불란서 파리가 5월 중순쯤 시위대의 물결로 뒤덮이고 파리 사회가 마비되고 5월 31일 드골이 대국민 연설을 하면서 국민이 원하면 물러나겠고 했어요. 정작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곳은 독일인데 독일 사회는 안정을 유지했던 거고요.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에 여러 가지 안전망을 만들어놓았는데, 그 결과 학생들이 시위를 해도 기성세대의 호응이 많지 않았던 거죠. 당시 내가 파리도 직접 갔었거든요. 드골이 집권하면서 근대국가의 기본을 만들었죠. 나토도 탈퇴하면서 핵무기도 개발하고 강력한 국가의 기본을 만들어놨는데, 1968년 시위로 흔들렸고 정권도 바뀌었던 거예요. 경제가 바뀌면 사회가 바뀌고 문화적 습속이나 민중의 생각도 바뀌는데, 드골과 프랑스 정치인들은 이걸 몰랐던 거예요. 그게 독일 정치와 프랑스 정치의 차이였죠. 독일은 사회의 요구, 기층민중의 요구를 제도적으로 계속 정착시키고 실행했어요. 그걸 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았죠.

    학위를 다 마치고 1972년 11월쯤, 그때 한국은 유신 상황이었는데, 귀국 하려고 하니까 교수님이 그런 나라에 가서 살 수 있겠느냐고 만류하는 거예요. 두세 달 상황을 예의 주시하다가 1973년에 귀국해서 보니까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장했는데, 학교에서 수업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학생 시위가 너무 많았고 정부도 대학을 통제하고 있었어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죠. 경제학자로서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정치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생각하기로는 한국도 독일과 비슷한 형태의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1970년대 세재개편·국민건강보험제도 기틀 마련

    사람의 말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알 수 있다. 단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말과 자신의 실천적 행위를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하는 말에 심급이 있다는 것을. 전자의 말에는 비늘 같은 장식이 섞이게 마련이다. 김 전 위원장의 말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고 담백하면서도 곡진했다. 설득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내가 대학교수로 있던 1974년 7월 한국 정부가 부가가치세를 도입해요. 그런데 내가 독일에서 국가시험 논문을 부가가치를 주제로 썼단 말이에요. 당시 부가가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심지어는 재무부 세제국도 부가가치세를 모르는 거예요. 당시 남덕우 재무부 장관이 도움을 요청하기에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부가가치세 도입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더니, 자기도 대학교수를 해봤지만, 대학교수가 정부 일에 반대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 좀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경제부처 관료들에게 부가가치세가 무언지 제대로 알려줘야겠다 싶어서 협조하게 된 거예요.

    그러다가 정부 사절단이 유럽에 시찰을 가게 됐어요. 나는 구라파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배울 게 없어서 안 가려고 했는데, 가는 동안 설명이라도 해달라고 해서 가게 됐어요. 그런데 당시 여비를 사립대 교수에게 줄 수 없으니까, 국무총리실에 평가교수단 제도가 있어서 그 예산을 썼어요. 그 평가교수단에 들어가게 된 거죠. 들어가서 보니 40대 미만 교수는 나 하나였어요. 나는 한국에서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스승이나 선배가 없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어요.

    당시 경제수석이나 청와대 비서실장들에게 경제적 소신을 말했죠. 학생이 데모를 한다고 수업을 할 수 없게 만들어놓으면 어떡하느냐, 수업은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 의견까지도 건의했죠.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의 차이를 말하면서 독일이 경제발전의 성과를 어떻게 제도화하고 정착시켰는지를 설명했어요. 사회 안정을 기하는 게 중요하고 산업사회의 새로운 세력을 어떻게 포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죠. 직설적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절대빈곤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니 국민들이 정부에 감사해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져선 안 된다고도 했죠. 새로운 산업사회에서 국민의 정서와 요구를 정책이나 제도로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요.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실질적인 정책을 만들어내라고 해서 대외비로 금요일마다 회의하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 후 김종인 위원장은 부가가치세와 국민건강보험제도를 도입하고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노조 설립 등 노동문제의 해결에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인다. 당시에 대한 회고를 들어보자.

    “당시 한국은 노동문제가 제일 시급했어요. 그런데 정부 인사가 자주 바뀌니까 정책 기조도 흔들리고 진행이 제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대통령 명령으로 당장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니, 어려운 근로자 계층을 포용하는 방법으로 건강보험법을 제시해서 그걸 관철시킨 거예요. 그때 우리나라 경제부처 장관 중 건강보험제도를 한 사람도 찬성한 사람이 없어요. 대통령을 설득해서 성사시킨 거죠. 지금은 한국 건강보험제도가 세계에서 제일 잘된 제도라고 하지 않아요? 그렇게 교수로서 나 나름대로 전문성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 있었죠. 그 무렵에 제가 다시 독일에 가 있었는데, 10·26이 일어난 거예요. 유신체제가 붕괴한 거죠.

    그해 말에 귀국하면서 독일 친구들에게 농담 비슷하게 정치를 한번 해봐야겠다고 이야기했어요. 봄 학기에 계엄령 선포되고 사회가 또 혼란스러워지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그때 국보위가 발족되어 보안사가 조사해 보니 부가가치세 도입이 부마사태 등 사회 소요를 발생시켰다면서 그걸 없애야 하는데, 그걸 실무적으로 검토할 사람으로 나를 국보위 재무위에서 부른 거예요. 그래서 제목이나 이름만 써먹는다면 안 하겠다고 거부하다가 집행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간 거예요. 내가 거기 가서 도입 3년밖에 안 된 부가가치세를 없애면 더 혼란이 온다는 소신을 피력해서 부가가치세 폐지를 막았지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오른쪽)과 김도언 시인. [박해윤 기자]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오른쪽)과 김도언 시인. [박해윤 기자]

    노동문제 솔루션 들고 5공 참여

    그는 전두환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요주의 영입 인사였다.

    “어느 날 전두환 대통령이 외부에서 온 교수들이 할 얘기가 있으면 하라고 해서 지금 경제가 안 좋은데, 우리 경제는 윤리를 바로 세우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어요. 문제를 일으킨 기업인들에 대해서 규율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나왔더니, ‘어디서 운동권 교수를 데려왔냐’는 소리까지 들었어요. 그런데 이틀 뒤쯤 다시 찾아와서는 전두환 대통령이 당신의 구상을 그대로 보고서를 만들어 올리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게 1981년 9월 중순의 일인데, 전두환 대통령이 보고서를 보고 하는 말이 어떻게 자기가 했던 생각과 똑같냐는 거예요.

    그 보고서의 핵심이 노동법 문제를 현실에 맞게 바로잡자는 거였어요. 임금 격차는 애초 노동법이 잘못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그걸 짚은 거죠. 그걸 고치려고 하다 보니까 또 전경련이 반기를 들어요. 그리고 노동청장이라는 사람도 전경련 편을 들고요. 지금 노조가 기업 단위인데, 나는 당시에 기업노조로 가서는 안 된다, 산업 단위 노조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남덕우 총리가 전경련 편을 들어서 그때 기업 단위 노조가 생긴 거예요.

    그러다가 방송을 듣다 보니 내가 비례대표가 됐더라고요. 누구한테 비례대표 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요. 여당 소속이 돼 소신을 갖고 교육세 등 예산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행정부에서 계속 반대해요. 그런데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내 말이 맞거든요. 그때부터 나에 대한 견제가 심해졌어요. 모함도 하고 공격도 들어왔어요. 저는 2년만 하고 후반부에는 국회의원을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무총장이 당신은 조광조 같은 사람이니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만도 감사한 줄 알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하더라고요.(웃음)”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 당시 경기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지금의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김종인 전 위원장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다. 가부장적 질서가 사회의 제반 관습을 통어하던 시절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어야 할 아버지의 부재가 그에겐 어떻게 작용했을까. 범인에게는 틀림없이 상처나 결핍으로 내면화될 수 있는 무게였을 텐데 말이다. 그러자 정색과 함께 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내 나이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숨기더라고요. 아버지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속으로 왜 거짓말을 하실까 그랬어요. 아버지의 주검이 실려나가는 걸 다 봤는데 말이에요. 나는 내가 좀 이상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로 아버지에 대해서 한 번도 특별히 생각을 하거나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를 그리워한 적도 없고 아버지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이미 부재한 걸 그리워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필자가 정치부 기자나 정치평론가는 아닌 관계로 정치적 화제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덜 샤프할 수는 있겠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세계관이나 감성의 구조, 정서적 전모랄까 그런 것들은 정치부 기자들보다는 섬세하게 읽어낼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쿨하게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김 전 위원장의 본래면목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사적 감상이나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평생 삼엄한 공적 삶을 살았던 김병로 선생의 삶을 오마주하면서 자연스레 그의 태도에 스민 천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보는 것이 맞다.

    추상처럼 차갑게 공사를 분별하는 것, 개인을 멸하고 공동을 떠받드는 것, 그것은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마조히즘과도 같은 역설적 쾌감이리라. 지금 그걸 당당히 견디는 정치인을 찾을 수 있을까. 독일 유학생이라는 그에게 따라붙는 연혁 때문인지는 몰라도 니체의 철인과 비스마르크 같은 재상의 이미지가 동시에 연상됐다면 필자의 오버일까.

    정치적 소신을 숨기지 않는 경제수석

    김 전 위원장은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실효적인 경제정책 수립을 주도하고 러시아와의 수교에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박람강기였던지 그뿐 아니라 정치 현안에 대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여기서 6공화국 체제의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3당 합당 전후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자.

    “당시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3당 합당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피력했어요. 3당 합당은 우리나라 정치구조를 이상하게 왜곡했어요. 3당 합당을 해서 의석수가 3분의 2가 넘었는데 14대 총선을 앞두고 안기부장이나 내무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를, 많으면 3분의 2 적어도 180석이 된다고 호언장담을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 다 있는 데서 ‘나는 그렇게 안 본다, 까딱 잘못하면 과반수도 안 될 것’이라고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당신은 경제수석인데 정치를 얼마나 안다고 그런 얘기까지 하느냐’고 그럽디다.

    내가 그 사람들 내보내고 노 대통령에게 따로 이렇게 말했어요. ‘이렇게 긴장하지 않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으면 여소야대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요. 무소속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미리미리 포섭해서 과반수가 안 됐을 경우 그런 사람들을 입당시켜야 한다는 조언도 했거든요. 정보기관에서는 당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모두 당선 가능권으로 표시해 뒀더라고요. 제가 유세 현장을 가보니까 민심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때 다 떨어졌어요. 서울 강남 황병태, 김만제, 강서의 남재희 등등이 다 떨어진 거예요. 우리 국민이 그렇게 바보가 아니에요. 3당 합당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부 여당을 견제한 거란 말이에요. 집권 여당이 어떻게 해야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있는데, 지금도 여당이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요.”

    노파심이 들어 검증 차원에서 확인해 보니 1992년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실제로 황병태 의원은 김동길 통일국민당 후보에게 서울 강남갑에서, 부총리 출신 김만제 후보는 홍사덕 민주당 의원에게 서울 강남을에서, 5선 고지를 넘보던 남재희 후보는 민주당 최두환 후보에게 서울 강서에서 패했다. 이즈음에야 고백하는 것인데, 각종 사건과 인물과 시기를 연월까지 정확하게 기억해서 술회하는 김 전 위원장의 기억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박근혜·문재인 대통령 탄생의 산파, 그리고 토사구팽

    6공의 핵심 인물이었지만 그가 정치인으로 세인의 레이더망에 확실히 붙잡힌 것은 2011년 12월 중도확장을 노린 당시 신한국당-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 체제의 구원투수로 수혈됐을 때부터다. 그는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걸고 총선과 대선을 모두 승리로 이끈다. 그러곤 곧바로 팽을 당하고 경제민주화 공약은 폐기되다시피 했다. 이후 그는 5년 뒤 2016년 1월 20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돌연 문재인 후보의 요청으로 민주당 비대위와 선거대책위를 맡아 총선 승리와 문재인의 재수로 치른 19대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그에게 ‘킹메이커’라는 치명적인 별명이 따라붙은 건 이때부터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겠다.

    “내가 박근혜 대통령도 도와주고 문재인 대통령도 도와주고 지금 국민의힘 비대위원으로 도와주고 그랬을 때가 나이가 70이 넘었을 때예요. 그 나이는 자기 한계를 알아야 할 나이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한 게 아니에요. 내가 다른 사람처럼 개인적 목적을 위해서 그랬다면 계파를 만들거나 세를 만드는 데 열중했겠죠. 나는 국가를 위해서 그랬던 것이지 한 번도 나 자신을 위해서 정치를 하지 않았어요. 내가 총선과 대선까지 박근혜 정부를 가장 열심히 도왔는데, 결국 탄핵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는데요. 사람들이 정직하지 않은 거예요. 도움이 필요할 때와 목적을 달성했을 때가 다르더란 말이죠.

    문재인과 민주당을 도와준 것은 그때 당시 일본처럼 한국도 소위 보수 장기집권처럼 갈 거라고 보는 시각이 있었어요. 당시 민주당이 안철수가 빠져나가는 등 상황이 엉망진창이었어요. 새누리당에서는 20년 집권이라는 호기 어린 말도 나오고 있었고요. 그러면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갈 수가 없어요. 강한 야당이 존재할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민주당과 문재인을 도와주게 됐죠. 그런데 또 배신을 당하게 된 셈이에요. 그런데 나는 정치의 세계라는 게 원래 그런가 보다 했어요. 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속이 상하고 배신감을 느껴서 아마 건강까지 잃었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마음을 가급적 편하게 갖고 그런 거에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내가 찾아간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준 거잖아요. 나는 그러니까 채무자가 아니라 채권자의 위치에 있었던 거죠.”

    산파역을 맡았던 두 명의 대통령으로부터 인간적인 배신을 당한 그는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용맹성과 함께 정직함을 들었는데, 왜 그렇게 말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어서 인터뷰어의 이목이 새삼 김 전 위원장에게 주목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 되고 싶다며 찾아온 해수부 장관

    “노무현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그러니까 2001년 1월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요. 전에는 몰랐던 사람이에요. 보고 싶으면 오라고 했더니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둘이서 와인을 한 잔씩 마셨는데, 자기가 대통령에 출마할 건데 대뜸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때 사실 깜짝 놀랐어요. 내가 그랬죠. ‘당신 지금 장관인데, 대통령 출마하려면 내일이라도 당장 장관 사표를 내시오’라고요. 결기를 보여달라는 거였죠. 그런데 장관으로서 계획한 게 있어서 6개월은 더해야 한다고 그래요. 나는 대통령 출마를 하려는 사람이면 장관을 내던지는 게 떳떳한 거 아니냐 그랬죠. 1주일 후에 또 만났어요. 그때도 둘이서만 만났는데, 이번엔 정색을 하고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물어봤죠, 왜 대통령을 하려고 하냐고. 그러니까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겪은 이후 양극화 현상으로 사회가 너무 불공평해졌는데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말을 들어보니 그럴듯해요.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박해윤 기자]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박해윤 기자]

    그러고서 열흘인가 있다가 장관직에서 해임됐어요. 시간이 많으니까 이따금씩 만났어요. 2001년 12월쯤인가 여론조사를 해보니까 노무현 1.5%, 이인제가 33%예요. 그런데 내 느낌에 이상하게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거 같은 거예요. 이건 다른 얘긴데 1997년 대선에서 540만 표로 3등을 했던 이인제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자기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겠냐고 묻기에 당신은 대한민국 역사에 큰 기여를 한 거다. 당신이 대통령선거를 완주했기 때문에 한국이 여야 간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된 거다. 그 결과 대한민국이 IMF 등 국제기구에서도 인정을 받은 거다. 당신은 그 기여로 540만 표를 받은 거다. 대통령을 하려면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어요. 그러니까 그러겠다고 하더니 김대중 쪽으로 가더라고요.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우리가 다 알잖아요.

    노무현에게도 편안한 길을 가면 안 된다고 얘길했죠. 그런데 막상 후보가 되니까 또 확 달라지는 거예요. 쓴소리나 거북한 소리를 안 듣고 싶어 하더라고요. 내가 ‘당신은 반미주의자로 알고 있는데, 머리로만 하고 입으로는 하지 마라’고 했더니 그걸 안 지키는 거예요. 그러다가 지지율 떨어지고 정몽준 지지율 올라오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이 됐죠. 후보 시절 TV 찬조 연설을 좀 해달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에 대한 믿음이 많이 엷어져서 그건 거절했어요.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역사와 경제 등 공부를 많이 해서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는 자린지를 분명히 알고 했으면 좋겠어요. 역대 대통령들은, 지금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는 자린지를 도통 모르는 것 같아요.”

    김 전 위원장의 언술은 노무현 정신을 계승했다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조국의 말과 생각을 많이 답습한 사람인데, 검찰개혁이라는 걸 저는 이렇게 봐요. 검찰개혁이란 말은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에요. 대통령이 검찰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면 검찰 스스로 변할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역대 정권이 계속해서 검찰을 이용해 자기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검찰이 오만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대통령이 검찰을 권력 옆에 두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거란 말이죠. 그렇게 했어야죠.

    문재인 정권에서 제일 잘못한 게 법원을 망쳐놓은 거예요. 과거에 노무현 정권이 실패한 이유가 사법부와 언론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체 분석에 따라 사법부를 장악하려고 했던 것인데, 대법원장만 자기 말 듣는 사람을 시켜놓으면 사법부가 장악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인 게 판사가 3000명이고 다 독립적인 기구 같은 건데, 무슨 수로 그들을 장악해요. 결과적으로는 사법부만 망쳐놓은 거예요. 자기들 목적 추구에만 관심 있으면서 그렇게 정치적 정의를 외치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1987년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는 6공화국 체제와 양당 정치, 대통령 등 한국 현대 정치사의 페이지를 채우는 데 중요한 서술자 구실을 했던 장본인이 그 체제를 비판할 때, 그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계속 실패하면서도, 아니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장에서 정치를 바꾸겠다는 꿈을 계속해서 꾸는 그는 어쩌면 비관적 낭만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두 개의 공당에서 세 명의 대통령을 만드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이가 자신이 만든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대목에서 나는 유연한 현실감각과 탄력적인 상상력을 엿본 듯한 느낌이었다.

    양당제, 한국 정치가 안 하고 있는 일들

    “양당제는 제로섬게임이에요. 5년마다 한 번씩 한탕씩 해 먹고 나가는 거라고요. 그러면 나라가 발전할 수가 없어요. 그 이야길 늘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해요.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는 자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냥 권력을 잡고 행사할 줄만 아는 거죠. 예를 들어 지금 출산율이 0.7명밖에 안 돼 나라의 장래가 암울하잖아요. 대통령이 이런 것에 진지하게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거예요. 1989년 보건사회부 장관 할 때 출산율이 1.9명였어요. 그런데도 내가 산아제한을 철폐하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엄청나게 비난하더라고요. 결국 내가 장관 그만두고서 산아제한을 계속 적극적으로 실행하더니 1995년에는 출산율이 1.5로 떨어지고 이후 지금 이 지경까지 왔어요. 그 문제를 내다보지도 못하는 정권들인데요.

    지금 양당제도는 국가 발전에 기여를 못 하고 현안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3의 정치 세력이 들어와서 양쪽을 자극하는 모멘텀이 있어야 해요. 국가 통치구조 권력체제를 바꾸는 건 필수예요.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하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막강한 권한만 행사하기 때문에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대통령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국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만 생각하니까 개헌이 안 되는 거죠.”

    그의 비판은 응당 현 정부 여당을 향했다

    “이념이나 역사적 관점에 대한 이야기, 건국절, 정부 수립 다 쓸데없는 이야기들이에요. 왜 그런 것들이 필요한지 납득이 안 돼요. 건국이란 말은 허구의 개념이에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으로 볼 수도 있고,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임시정부 시작을 건국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걸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게 참 이해가 안 돼요.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들이잖아요. 2010년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천안함 사건이 났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에 가서 연설하면서 전쟁이 터질 것처럼 이야기하고 반공을 전략적 화두로 지자체 선거를 치렀는데, 그게 실패했거든요.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던 거예요. 지금 GDP가 3만2000불이 넘는 시대인데, 생각을 해보세요.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어 봐야 몇 명 있겠어요.

    여당이 잘못하면 그냥 공짜로 정권을 먹는 게 야당이에요. 그런데 여당은 제대로 일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하는 거예요. 내가 정강정책 다 만들어놓고 국민의힘이라는 이름도 지었는데, 정강정책대로만 해도 좋을 텐데 그걸 안 해요.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언로도 막혀 있어요. 아마 이 인터뷰도 대통령실로 보고가 안 될 건데요. 내가 현직 대통령을 모실 때는 직언도 했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직언을 하면 왜 불만만 이야기하냐는 식이에요. 윤 대통령은 자기 말을 하는 걸 좋아하는 분이기 때문에 경청이 안 돼요. 지도자는 레토릭이 정말 중요한 것인데 도어스테핑 시작할 때 나는 그게 5개월도 안 돼 없어질 거라고 봤어요. 대통령은 레토릭 한마디로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고, 다시 살아날 수도 있고, 바로 설 수도 있는 존재예요. 말이 거칠고 절제가 안 되어서 대선에서도 겨우 0.7%포인트밖에 이기질 못한 거예요.”

    김도언 시인. [박해윤 기자]

    김도언 시인. [박해윤 기자]

    한동훈, 이재명, 이준석의 미래

    차제에 김 전 위원장에게 양대 진영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언급되며 솔솔 차기 대권주자로 군불이 지펴지고 있는, 미래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한동훈 장관은 지도자로 부각이 되고 싶으면 정치적 용맹성을 가져야 해요. 내년 총선에서 험지에 가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지만 정치적 미래가 보장된다고 봐요. 이준석은 아직까지 국민의힘에 대한 미련이 너무 강해요. 저는 그게 안타까워요. 국민의힘에 집착하다가는 자기 일을 할 수 없어요. 분위기를 보면 자기도 알 거 아니에요. 대표라는 사람이 징계를 받고 당원 활동 정지까지 당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해요. 국민의힘 대표였다는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거죠. 이재명 대표도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면 정치 생명은 끝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걸 자신도 알 거고요.”

    김 전 위원장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있었던 2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을 돌아다녀 봤다고 술회했다. 그때 유세장을 돌아다녀 보면 누가 당선될지가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 유세를 들어보고 이 사람이 되겠다고 한 사람이 당선됐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람을 보는, 그 사람의 가능성을 읽어내고, 그 사람의 가능성이 매개가 돼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 정치의 메커니즘을 읽어내는 천부적인 눈이 있었다는 진술이겠다. 그는 그런 눈으로 물경 40년 넘게 한국 정치의 현장에서 멘토이자 감별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길에 어디 영광만 있었으랴. 독한 상처와 고독이 영광의 뒤안길에서 틀림없이 회오리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는 다행히 그 회오리의 작란에 휘말리지 않을 정도의 강단과 지혜가 자신에게 있다는 걸 믿은 사람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고 싶을 때 써먹을 수 있는 유효한 가정법 하나를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 당장 이 시간 이후 그가 세상에 없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그랬을 때 문득 견딜 수 없이 허전해지고, 두려움이 찾아오고, 답답하고 씁쓸하다면, 아울러 가질 수 있는 모든 설렘과 기대가 사라진다면 그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의미와 가치를 가진 존재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된다. 독자들에게 한번 상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김종인이 없는 지난 40년과 지금 이후를. 누가 뭐라든 6공화국 체제의 가장 섬세한 목격자이자 담지자였던 그를.

    김종인 전 위원장과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장을 갖추지 못한 나는 그 비를 맞기로 하고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드는 것이었다. 김 전 위원장은 한국 정치에 우산을 씌워주느라 평생 비를 맞아온 사람이 아닌가 하는. 꼭 그랬을 것 같은 생각. 그러면서 단 한 번도 생색내거나 엄살 부리지 않은, 우리 시대의 공공재.

    [신동아 11월호 표지]

    [신동아 11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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