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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제발 서로 사랑하자”

지리산 토벌대와 빨치산, 65년 만의 만남

  • 정현상 기자 | doppelg@donga.com

“제발 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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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만남 자체로 가슴 뭉클”…그러나 끝내 이뤄지지 않은 화해
  • ● “국군과 토벌대의 양민 학살 사과해야”
  • ● “된장, 간장 안 준다고 빨치산이 민간인에 총질”
  • ● “건강히 오래 사십시오” “그동안 참 수고 많았소”
#1 6·25전쟁 중 경남 함양. 20대 초반이던 K씨는 한밤중에 여러 사람과 인민군 트럭에 실려 끌려가고 있었다. 전쟁 전에 알고 지낸 청년 B씨가 인민군이 돼 함양에 왔는데, 그가 K씨 일행을 끌고 가던 중이었다. 함양과 남원 경계지역을 넘어가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B씨는 K씨를 차에서 내리게 해 산속으로 끌고 가더니 갑자기 허공에다 총을 쐈다. 그러면서 “도망가라”고 속삭였다. K씨를 총살한 것처럼 하고는 그를 살려 보낸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K씨는 B씨의 생사를 수소문하다 그가 포로로 잡혔다 풀려나 남원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K씨는 B씨를 찾아가 고마움을 전했고, 이후 두 사람은 줄곧 교유를 이어갔다. 하지만 K씨는 가족이나 이웃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행여 B씨의 ‘붉은 전력(前歷)’이 드러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 2 ‘발 크기가 똑같은 두 소년이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과 열여섯이었다. 남쪽이 전쟁에 지고 있을 때 둘은 어깨에 총을 짊어진 소년병으로 북쪽 군대 편에 있었다. 북으로 퇴각하기 전날 밤, 그들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에 모여 있었다. 총을 든 북쪽 군인이 중대장이 찾는다며 두 소년병을 앞세우고 큰 바위 뒤로 갔다… (한때 함께 소몰이를 나가기도 했던 동네 형인 북쪽 중대장이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 남고 싶으면 남고 떠나고 싶으면 떠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소년병은 동시에 여기에 남겠다고 대답했다… 내려가라―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뒤에서 철커덕, 총의 노리쇠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의 순간이라고 여긴 열다섯 소년병은 자신의 온전한 신발을, 너덜거리는 신발을 신은 열여섯 소년병에게 벗어준다. 자신은 허벅지 부상으로 내달릴 수 없을 것 같아 친구를 살리려 한 것이다. 열여섯 소년병은 친구가 걱정됐지만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바꿔 신고 어둠 속으로 뛰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철커덕 소리가 다시 들리자 열다섯 소년병도 절뚝이며 달리기 시작한다. 중대장은 총을 겨누기만 했고, 쏘지 않았다. 신경숙의 단편소설 ‘세상 끝의 신발’에 나오는 얘기다.





지리산 싸움 속 인간애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 가면 인민군과 국군, 빨치산과 토벌대, 적군과 민간인 사이의 ‘애틋한 인간애’에 관한 이런 일화들을 흔히 전해 들을 수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두 세대가 지난 오늘, 남과 북은 핵과 미사일로 강경 대치하고 있다. 전쟁 중에도 피어난 인간애를 평시인데도 찾아볼 수 없다. 과거의 비극을 되새겨보려는 작은 모임에 눈길이 가는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다.

8월 27일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서 옛 토벌대와 빨치산 출신 인사들이 드문 만남을 가졌다. 지리산 주변에 살던 이웃이면서도 이념 때문에 서로에게 총을 겨눈 이들이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이웃이 됐지만 이들은 화해하지 못하고 살았다. 승자의 역사에서 빨치산은 연기처럼 잊혔고, 토벌대의 양민 학살과 같은 불편한 진실도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토벌대의 공적에 대해서도 온전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의 고택을 찾아다니며 인문학 강연을 여는 연구공간 ‘파랗게날’(대표연구원 이이화)이 ‘좌우의 깊은 골을 건너 애틋한 인간애에 이르고자’ 이날 만남의 자리를 주선했다.

신라시대 때 창건된 지리산 고찰로 전쟁 중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쓰이다 불에 타 소실된 후 재건된 벽송사가 만남의 장소였다. 빨치산 출신 임방규·최정범 씨, 토벌대 출신 문창권·임명근·김기태 씨가 이 자리에 참석해 극단의 상황에 내몰린 자신들의 삶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 30여 명도 이들의 만남을 보기 위해 절을 찾았다.

임방규(85) 씨는 남부군 소속 빨치산, 최정범(88) 씨는 인민군 1사단 참모장을 지낸 빨치산 대장 출신이다. 문창권(86) 씨는 11사단 산하 향토방위특공대원으로, 임명근(93) 씨는 지리산토벌대 작전참모 및 대한청년단 총무로, 김기태(88) 씨는 육군본부 부관실 사병계 소속으로 빨치산 토벌에 관여했다.



희망의 싹

아쉽게도 이날 극적인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마음의 깊은 골을 메우기에는 아직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음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임방규 씨는 “당시 국군이 양민을 많이 학살했는데, 잘못된 부분을 인식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게 인간이 할 짓인가”라며 토벌대 사령관의 사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전에 적이었지만 다시 만났는데 할 말은 없나”라는 이이화 씨의 질문에 토벌대 출신들은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임씨는 토벌대 출신들과 사진을 같이 찍는 것도 꺼렸다. 화해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는데, 사진을 같이 찍으면 그것이 이뤄진 양 오해받을 수 있다고 했다.

지난해에도 빨치산과 토벌대 출신 인사들의 만남이 벽송사에서 있었지만 분위기는 싸늘했다. 토벌대 출신 인사가 “빨치산이 마을에 내려와 된장, 간장을 안 준다고 민간인에게 총질을 했다”는 말에 빨치산 출신이 “우리는  전쟁은 했지만 무고한 사람을 그렇게 죽이진 않았다. 누가 언제 그렇게 했는지 정확히 말해라”라고 고함으로 맞받기도 했다.

다만 올해 참가한 토벌대와 빨치산 출신 인사들은 ‘(당장의) 화해는 어려워도 (대국적 차원에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했다. 임방규 씨는 토론이 끝나고 헤어지기 전 토벌대 출신 인사들에게 “건강히 오래 사십시오”라고 인사했다고 이이화 씨가 전했다. 토벌대 출신 김기태 씨는 며칠 뒤 다른 자리에서 “빨치산 출신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 사람들에게 ‘그동안 참 수고 많았소’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증오에서 벗어나면 한때 총부리를 겨눈 사이라 해도 따뜻하게 손잡을 수 있다는 희망의 싹이 보인 것이다.


절박한 순간의 ‘사람 이야기’

절박한 순간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다. 여성 빨치산을 사랑한 토벌대 장교도 있고, 인민군에 끌려가던 동네 동생을 몰래 도망치게 해서 살려준 인민군도 있다. 먹을 것을 찾으러 마을로 내려온 빨치산에게 양식을 있는 대로 퍼준 사람도 있다.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징비록’에서 ‘전장에서 서로 총구를 겨누는 아군과 적군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사람의 이야기는 피어난다’라고 회고했다. 광복군 출신 토벌대장 차일혁 경무관은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사살된 뒤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자 그의 장례를 치르고 유골을 섬진강에 뿌려줬다. 차 경무관은 이런 글을 남겼다.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지리산에서 싸우다 죽은 군경과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민주주의를 위해, 공산주의를 위해 목숨 바쳤다고 할 자가 몇이나 있었겠는가.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서 집단최면에 빠진 부질없는 전쟁이었다는 것을….”

지난해 ‘만남’에 참석했던 빨치산 출신 송송학 씨는 올해 4월 세상을 떠났다. 이이화 씨는 “역사의 증인인 어르신들이 하나둘 떠나고 있어, 이들이 생존해 있을 때 교훈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모임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빨치산과 토벌대는 15분씩 자기소개 형식의 발언을 요청받았다. 짧게 마무리하는 이도 있었고,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는 이도 있었다.

토벌대 출신 임명근 씨는 전후 함양향교 전교, 함양시조협회장 등을 지낸 한학자다. 현재 참전군인용사회장으로 있으면서 향토방위특공대 대원을 국가유공자로 정하는 데 기여했고, 마천 향토수호전적비 비문을 썼다. 비문엔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들(여순사건 김지회·홍순석 부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혀 월북하지 못한 인민군, 빨치산 이현상 부대)은 백무동 일대에 근거를 두고 밤이면 각 기관을 습격하고 그네들에게 비협조한 주민들을 반동이라 이름 붙여 납치 살해하고 식량은 모조리 약탈해가니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의분을 참지 못한 면내 20대 젊은이들 250여 명이 자진 봉기했다. (…) 밤이면 고지 근무 외에 마을에 잠복근무 나가 싸우고 낮에는 정보 수집하는 대로 아지트를 찾아가 싸웠다 (…) 지리산 공비 2000여 명이 몰려와 3일 전투를 했는데 적의 피해는 100여 명이고 아군도 48명이나 전사했다….’



짚신 신은 향토방위대

향토방위특공대원은 염색한 광목으로 군복을 대신했고, 군화 대신 짚신과 고무신을 신었으며, 일본군이 버리고 간 낡은 소총으로 무장했다. 전사한 대원 14명의 장례를 직접 치른 임씨는 죽어간 동료들을 잊지 못했다.

“인생의 맛도 못 보고 젊은 나이에 죽은 이들이다. 그 젊은 영령들은 분단 조국의 한을 안은 채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겐 가족이 없어 혼을 달랠 제사도 못 지내고 있다. 우리 면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쳤는데…. 마천면에서는 현충일에 기관장들이 충혼비 앞에 국화꽃 놓고 절하는 정도로 그들을 기린다. 국가적으로, 아니면 함양군 차원에서라도 위령제 정도는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안타깝다.”

김기태 씨는 형님이 빨치산의 총에 맞아 숨지고 이튿날 마을에 폭탄이 터지는 등 살벌한 분위기에서 토벌대에 자원했다. 전쟁이 끝난 후 참전군인용사회 마천지회장을 지냈다. 그는 “마천면의 24개 마을 중 14곳이 소개(疏開)되는 등 힘든 세상이었다. 정말 그때 어떻게 살아냈는지 모르겠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참전군인용사회 마천지회 회원인 문창권 씨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한다.

“남원 일대 수리조합 쪽에서 토벌대가 많이 죽었다. 나는 다행히 귀만 다쳐 지금껏 안 죽고 살아 있다. 무슨 명이 이리 긴지 모르겠다. 이승만 대통령이 빨치산 토벌대 2개 사단을 투입해 작전을 편 게 기억난다. 하동 화개면 태성골로 빨치산 부대를 몰아넣고 큰 전과를 올렸는데 아군은 희생이 크지 않았다. 그 후 빨치산 숫자가 크게 줄었고 자수자도 늘었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빨치산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난 4월 출간된 최정범 씨의 책 ‘지리산 달궁 비트’를 구술정리한 강동원 전 의원(전북 남원·순창)의 생각에 귀 기울여보자. 그는 이 책 ‘엮은이의 글’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빨치산은 금기의 영역이자 그저 ‘빨갱이’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재조명할 때가 됐다. 언제까지 조국 분단의 아픔이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져야 하겠는가”라고 적었다.



목숨 바쳐 이루려 한 세상

최씨는 더 이상 빨치산도, 빨갱이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주변의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최씨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요즘도 가끔 내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로 공산주의자였나?”

그러면 나는 지체 없이 대답한다.

“그렇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 북한체제를 지지한다는 말이냐?”

나는 다시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아니, 절대 아니다.”

(…) 내가 목숨을 바쳐 이루려고 했던 세상과 지금의 북한체제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최씨가 ‘목숨 바쳐 이루고자 한’ 세상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공산주의 세상이었다.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하고, 그래서 인민이 풍족한 삶을 구가하는 세상! 전쟁 때 그는 북한이 그런 이상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체제라고 믿었고, 남한을 해방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날의 북한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전 세계의 현대국가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습체제, 다른 무엇보다 인민을 억압과 굶주림과 도탄에 빠뜨린 북한의 현재 모습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잘못된 현실임이 분명하다. 내가 목숨을 던져 만들고자 했던 세상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지리산 달궁 비트’)

그는 1990년대 중반 대학생들과 함께 전시 빨치산 전북도당 사령부가 주둔한 뱀사골, 남원군당 비트(비밀 아지트)가 있던 달궁을 찾아가서 당시의 활동상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런 활동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젊었으니까. 한창 혈기왕성한 청춘이었으니까 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한다. (…) 그때 나는 적어도 그것이 정의라고 믿었으니까.”

최씨는 1928년 전북 남원시 이백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두 차례 징용지로 끌려갔고, 돌아와서는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전쟁이 터지자 그는 북한군 장교 이상윤 등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남원군당 작전부장, 1사단 참모장 등을 맡아 ‘빨치산 대장’으로 활동했다. 1953년 봄 경찰 토벌대의 소탕작전 때 체포돼 전범등급 ‘을’을 받았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고, 지금은 남원군 고향마을에서 농사를 짓는다. 벽송사 모임에 다리를 절며 나타난 그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자신을 소개했다.

“모두 건강히 살아남아 좋은 일 많이 하셔서 고맙다. 내가 스물한 살이던 1948년, 뚜렷한 주관이 없이 감수성이 예민할 때였는데, 좌우 혼란이 극심했다.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에 가입한 적도 있다. 절에 놀러갔다 항일투쟁으로 옥고를 치르신 어느 할아버지를 뵈었는데, 사회주의 계열인 그분 말씀이 다 옳은 것 같아 좌익에 가담했다. 그해 여수·순천사건으로 좌익 탄압이 심해지면서 살아남기 위해 빨치산이 됐다. 토벌대가 지리산에 있는 우리를 포위해 들어올 때, 진안의 운장산까지 몇 백 명을 데려가면 낮에도 경찰들이 총을 함부로 못 쐈다. 운명이 짧지 않아 하반신에 아홉 발의 총상을 입고도 이렇게 오래 살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모임이 있으면 참석해서 여러분께 좋은 말씀 드리려 한다.”

임방규 씨는 전북 고창중학 시절 학생운동을 시작해 인민군 의용군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으며, 회문산에 들어가 남부군 소속 빨치산이 됐다. 스무 살 때 포로가 된 그는 ‘양심의 자유’를 고수하며 전향을 거부해 32년 3개월 옥고를 치렀다. 1952년부터 20년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지만, 4년 뒤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로 구속돼 다시 13년을 갇혀 지냈다. 출소 후 비전향 장기수 모임인 ‘통일광장’ 대표를 지냈다.



‘지금 조국 땅에 전운이…’

“광복이 되고 고창고에 다닐 때였는데 선생님과 함께 놀러갔다가 생각지 못하던 얘기를 들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는데 왜 외세의 지배를 받아야 했는가 하는…. 일제가 나간 뒤 미국과 소련이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와 38선을 그었다. 그때 ‘소련놈에게 속지 말고, 미국놈 믿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지배층이 있고, 그로부터 수탈당하는 민중이 있었다. 나는 민중의 편에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최전선에서 무장투쟁을 했다. 침범한 외세와 맞서 싸운 사람들을 애국자라고 하는데, 나는 외세와 대결하며 한 세기를 살았다. 빨치산이라면 사람 많이 죽이고 포악한 놈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나를 보라. 내가 그렇게 악한 사람으로 보이나. 광복 후 좌익에 가담한 인물 대부분은 지방에서 존경받는 이들이었다.

이제 내가 세상 떠날 날도 멀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아름답고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절대로 사람이 사람에게 대못을 박아선 안 된다. 죽이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 땅은 우리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었고, 조상의 뼈가 묻힌 곳이다. 한 핏줄 동포들끼리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워 잘못된 부분은 가려서 버리고, 좋은 점은 더 발전시켜 나가자. 지금 조국 땅에 전운이 감돈다. 전쟁이 나면 다 죽는다.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야 한다. 전쟁할 때도 회담하지 않는가. 만나서 대화하면 원한도 풀어질 것이다. 36년간 우리 민족을 그토록 괴롭힌 일본엔 과거를 묻지 말고 미래를 지향하자면서 왜 우리 핏줄에겐 그렇게 못하나. 제발 서로 사랑하자.”



내년 2세들 만남 기대

이들의 만남을 지켜본 강동원 전 의원, 이남곡 인문운동가, 이순일 마산 태봉고 교사 등은 현대사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어르신들의 자기고백에 귀를 기울였다. 이남곡 씨는 “토벌대와 빨치산으로 맞선 분들이 여기 이렇게 함께 앉아 계시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벽송사 주지 원돈 스님은 이번 만남이 역사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했다.

“낮엔 토벌대가, 밤엔 빨치산이 사용하던 이 절이 누군가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무속(巫俗) 하시는 분들은 이곳에서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본다고 한다. 팔 잘리고 다리 잘린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인다는 것이다. 전쟁통에 죽어간 빨치산과 토벌대, 그 사이에 끼여 학살당한 양민과 스님들을 기억해야 한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는지 성찰해야 한다. 벽송사에서 선(禪)수행을 한 서산대사의 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가 떠오른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발걸음을 내딛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에게는 길이 되리니’. 어지럽게 흩어진 현대사의 발자국을 성찰해 정리하지 않으면 뒷사람들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이 자리가 소중하다.”

간디고 3학년이라는 한 학생이 빨치산 출신 임방규 씨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묻자 임씨는 이렇게 답했다.

“책에서 배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의 좋은 점을 온통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이 장래성 있는 사람이다. 바르게 살고 사람답게 살아서 죽을 때 큰 후회를 하지 않게끔 해야 한다.”

이이화 씨는 내년에는 빨치산과 토벌대 2세들을 한자리에 불러 살아온 이야기들을 들을 예정이다. 그 자리가 공개적인 화해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1세대에서 화해가 힘들면 2세대들에게서라도 인간애에 바탕을 둔  화해를 이끌어볼 생각이다. 서로 다른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훗날 남북한이 통일될 때, 혹은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사상을 만들 때 이분들의 생각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빨치산‘partisan’에서 온 말로, 일정한 조직체계 없이 농민이나 노동자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프랑스어. 한국의 빨치산은 6·25 전후 지리산 부근을 근거지로 활동한 조선인민유격대를 지칭한다. 대구 10·1사건으로 남로당이 탄압받자 좌파 인사들이 산으로 들어가 저항을 이어간 것이 시작이다. 1948년 제주 4·3항쟁 투입을 거부하고 여수·순천 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혀 월북하지 못한 인민군들이 합류했다. 한편 ‘항일 빨치산’은 일제강점기 중국 북동부와 소련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항일 유격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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