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호

이선경의 讀書, 督書, 毒書

아름다움이 인간을 구원하리라

  • 이선경 | 문학평론가 doskyee@daum.net

    입력2016-09-22 15: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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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여기의 인간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 삶이 어떤 한계선을 넘었을 때, 생활과 의식이 심각하게 분열돼 더 이상은 어제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공황일 때, 인간은 구원받아야 한다. 전쟁이나 테러, 자연재해와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일상의 행복이 보장되지 못하는 현재적 삶의 조건은 탈출구를 찾게 한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책들은 거친 세상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권모술수의 전쟁에서 살아남는 필살기를 공개하거나, 그러다가 생긴 상처를 치유해주거나, 때로는 아예 고통에서 잠시 눈 돌리고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회유한다. 각종 예술 서적 역시 이에 부응해 치료나 휴식의 방향에서 활용되기도 한다.



    미술관, 현대의 聖地

    강상중의 ‘구원의 미술관’은 21세기의 절망적 상황을 목도하며 구원의 방법으로 ‘미(美)의 진실’을 제시한다. 재일 한국인의 위치에서 아시아와 세계, 식민과 탈식민, 개인과 시대를 고민해온 정치학자가 이번에는 그 해결의 방법을 미술에서 발견한다. 그래서 이 책은 미술 자체라기보다는 미술을 통해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책에 더 가깝다. 그 시작은 미술관이라는 장소에서부터다.

    강상중은 저서 ‘도쿄 산책자’(20 13)에서 국립신미술관을 거닐면서, ‘구원의 미술관’의 토대가 된 알브레히트 뒤러의 ‘1500년의 자화상’이 그에게 준 구원과 미술관의 종교적 기능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망명과도 같던 독일 유학 시절,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에서 우연히 보게 된 뒤러의 그림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수용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해답을 얻은 것이다. 여기에는 미술관이라는 장소의 힘이 있다.



    우리는 왜 미술관에 가는가. 미술 작품 자체만큼,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주는 위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시각적이며 조형적인 창작물을 선별해 전시의 가치를 부여하는 공간이 미술관이다. 의도부터 고귀하게 만들어진 미술관에서 감상자들은 전시와 보존의 가치 때문에 묵중해진 분위기, 유명 작가의 진품을 직접 만난다는 기대, 순례하듯 걸으며 성찰을 권유하는 관람 방식 덕분에 세속 안에서 성지를 방문한 것과 같은 느낌을 경험한다.

    그리고 어슴푸레한 미술관 안에서 때로 계시처럼 어떤 운명적 작품과 만나는 순간이 있다. 이러한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신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종교적 체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구원이 이뤄지는가.



    구원의 시작

    사실 ‘구원’이라는 책의 제목은 역자의 의역이며, 원제는 ‘당신은 누구? 나는 여기 있어(あなたは誰? 私はここにいる)’다. 이는 뮌헨의 미술관에서 뒤러의 자화상이 유학생 강상중에게 운명처럼 던진 화두이며 이후 그를 정신적·학문적으로 이끄는 지침이자, 30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미술적 구원의 방식이다.

    뒤러의 그림은 ‘나는 여기 있어’라고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면서 ‘당신은 누구?’라며 감상자의 존재를 묻는다. 이것은 미술만이 하는 대화의 방식이다. 뒤러의 ‘1500년의 자화상’이 감상자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초상화의 시선 때문이다. 투명하고도 슬픈 듯하면서 인생의 심연을 꿰뚫어 보는 눈동자, 여기에 가슴 앞에 놓인 섬세한 손이 보여주는 화가로서의 결연한 자기 선언. 이 같은 그림의 구도가 만들어낸 초상화의 시선과 감상자의 시선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직감적인 번쩍임. 그 강렬한 존재감이 경계적 위치의 정치학자를 만든 운명의 시작이다. 



    감동과 수용의 아름다움

    반드시 첫눈에 반하는 강렬함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미술은 점·선·면의 2차원, 양과 형태의 3차원, 색과 질감이 내는 감각을 바탕으로 감상자의 시선을 붙든다. 이처럼 미술이 나타내는 존재감이 구원의 시작이다. 감상자를 독단과 아집으로부터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원근법 안에 건설된 소실점을 중심으로 타인과 사회와 자연을 이해한다. 이것은 근대 이후 사회에 널리 퍼진 자기중심주의이자 주관주의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의 비극을 더 극단적으로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위치의 상대화가 필요하다. 문자가 이것을 허울 좋은 말로 공허하게 외칠 때, 미술은 이를 실제적으로 보여준다.

    16세기를 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은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그렸으며, 물구나무를 선 채 스케치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 ‘죽음의 승리’에는 시선의 중심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는 모습이 표현되는 동시에 재생과 희망도 얘기한다.

    또한 극도의 미니멀리즘으로 형태와 색을 밀고 나간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는 시선을 배제하면서 감상자의 자아를 사라지고 녹아내리게 한다. 에도(江戸)시대 이토 자쿠추의 ‘군계도’에 그려진 열세 마리의 닭은 열세 개의 시선으로 열세 개의 세계를 만드는데, ‘파브르 곤충기’를 회화로 구현한 것이다. 이처럼 단 하나의 소실점에서 벗어나 만들어진 망아(忘我)와 무심(無心)의 세계. 이것이 오히려 우리를 시선의 긴장에서 해방시켜 ‘지금, 여기, 나’의 존재를 다각적인 객관성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것이 미‘술(術)’적 구원의 방식이다.

    그러나 구원은 존재를 다시 보게 하는 기법(術)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성지순례 같은 미술관의 아우라는 아름다움(美)을 통해 그 초월적인 구원의 경지를 완성한다.

    이 책은 미술에 대한 지나친 전문성을 배제한다. 그 대신 미술을 삶의 방식으로 만들며  ‘감동’과 ‘수용’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감동이란 살아가는 힘이 된다. 운명을 수용한 삶은 또다시 감동을 준다. 애초의 감동이란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감동의 일격이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미풍처럼 서서히, 하지만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는 미술이 필요하다. 그것이 ‘미(美)의 진실’을 통한 구원이며 아름다움이다.



    강박의 환상일지라도

    이러한 ‘미(美)’술적 구원의 예로 ‘기도’를 소재로 한 일련의 미술품과 작가주의를 배제한 도예품 등이 제시된다. 대량 인쇄된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기도하는 손’, 불상 12만 개를 목표로 일본 각지의 민심을 달래며 보살상을 나누어준 승려 엔쿠, 소박한 생활에도 고개 숙여 기도를 올리는 농부를 그린 밀레의 ‘만종’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태도의 문제다. 기도란 적극적인 행동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조용한 감동이 있다.

    한편 나치의 박해 시절 영국에서 만난 유대인 루시 리와 그녀의 독일인 파트너 한스 코퍼가 만들어낸 꾸밈없는 도기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심수관 일가가 메이지 시대 창씨개명의 압박을 견디며 만들어낸 도기에는 과도한 자기주장이 없다. 그러나 이 도예품의 기교 없는 자기주장에는 고난을 견디며 인간의 마지막 존엄만은 지킨 수용의 아름다움이 있다. 필자가 이전부터 종종 말해온 구원이란, 특히 ‘구원의 미술관’을 통해 말하고자 한 구원이란, 인간이 최후까지도 존엄과 품위를 선택하는 삶의 태도일 것이다.

    어쩌면 미술품을 통한 구원의 체험은, 경건하게 차려진 미술관의 위엄 아래서 이미 구원받을 준비가 돼 있는 관람자에게만 주어지는 기회, 혹은 감동받아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환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 불가해한 화학작용이 이전과 이후를 전혀 다르게 만든다면, 그래서 이것이 삶의 전환점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미술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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