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호

“육체의 고통 끝나니 또 뭔가를 하고 싶다”

‘한국판 GI 제인’ 여군 레인저 1호 탄생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입력2016-09-22 1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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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발·훈련과정, 남군·여군 동일
    • ‘열외 아닌 열외’ 싫어서 지원
    • “여군이 둘이라 서로 파스 붙여줄 수 있어 좋았다”
    • 풀 먹이던 토끼, 생존술 훈련 때 결국 내 손으로…
    • “군복만 입은 군인 아닌, 싸워 이기는 군인 될 것”
    산세가 여간 험하지 않다. 이곳, 높이 572m의 옹성산(甕城山)을 끼고 육군보병학교 유격교육대가 있다. 군에서 유일하게 운영하는 유격전문양성과정이다. 유격전문가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한다.

    9월 2일 국내 최초로 탄생한 여군 레인저(Ranger, 유격전문가) 이세라(28, 육군2기갑여단 106기보대대 훈련지원부사관) 중사와 진미은(30, 육군3사관학교 교도대대 1중대 소대장) 중사도 이곳 출신이다.

    육군보병학교는 올해 처음으로 여군과 해·공군, 해병대에 유격전문과정 문호를 열었다. 이 과정은 2013년 55명(1기)을 포함해 이번의 4기까지 총 195명이 수료했다. 유격전문자격을 취득하면 전투복 왼쪽 가슴과 오른쪽 팔에 레인저 휘장을 달고, 유격교관의 상징인 ‘빨강 8각모’를 쓸 수 있다. 레인저는 평상시엔 유격훈련 교관 업무, 유사시엔 적군 지역에서 정찰대 임무를 수행한다.    



    47명 지원, 111명 탈락 

    9월 1일, 무박4일 훈련과정(종합유격전술훈련)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왔다는 여군 레인저들을 찾아갔다. 8월 4일 입소해 4주간의 훈련을 마친 이들은 수료식에서 레인저 휘장을 다는 일만 남겨 놓았다. 애초 147명의 지원자가 몰렸으나 입소 전 평가에서 110명, 훈련에서 1명이 탈락해 36명만이 교육을 받았다.

    유격전문양성과정 지원자들은 1박2일의 입소 전 평가에서 ‘육군체력검정’ 특급 성적을 받아야 합격한다. 3km 달리기(남자 12분30초 이하, 여자 15분 이하), 팔굽혀펴기(남자 72회 이상, 여자 35회 이상), 윗몸일으키기(남자 86개 이상, 여자 71회 이상)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기본. 여기에다 오리엔티어링 방식(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산속 지점을 통과해 목적지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찾아가고, 공격군장 15kg을 꾸리고 확인점 15개 중 4개를 찾아 2시간 내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의 급속행군, 100m 수영, 턱걸이 등도 통과해야 입소 자격을 얻는다.

    공보장교의 차를 타고 유격교육대로 들어가자 언뜻 ‘미소년’ 같은 두 사람이 걷고 있는 게 보인다. 체격이 왜소하다. 한 사람은 다리를 절고, 다른 사람도 발걸음이 무겁다. 여느 군인들보다는 좀 길어 보이는 커트 머리. 공보장교가 차를 세우고 부른다. “이 중사, 진 중사 타라!” “예, 감사합니다!” 복창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바로 그 ‘한국판 GI 제인’ 이세라, 진미은 중사다. 중성적인 목소리다.

    유격교육대에 도착해 먼저 교관들과 함께 4주간의 훈련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봤다. 교관 9명(대위 1명, 중위 6명, 하사 2명)이 훈련생 36명을 3개조로 나눠 조련했다. 훈련 강도가 엄청나다. △1주차 : 유격체조, 기초 장애물 극복, 산악 장애물 극복, 하천 장애물 극복, 수상 은밀 침투, 저고도 헬기 이탈 △2주차 : 편제장비 조작, 생존술, 주야간 장거리 이동 및 방향 유지, 구급법, 습격, 매복, 특수정찰·화력유도 훈련과 평가 반복 △3주차 : 전문정찰요원 능력을 기르기 위한 적 지역 침투, 정찰, 습격, 회피, 탈출 등 유격전술 △4주차 : 무박4일간 종합유격전술훈련.  



    ‘배려’에서 ‘인정’으로

    육군보병학교가 훈련 현장을 공개한 8월 24일. 그날 취재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교육생들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맨손으로 올랐고, 수직 56m 암벽에서 로프에 의지한 채 맨땅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며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지상에서 43m 높이에 있는 만경대 훈련장(하천 지형에서 필요한 유격전술을 숙달하도록 조성된 유격전문훈련장)에서 189m 와이어가 걸린 활차(滑車)에 매달려 시속 40~50km의 속도로 하천을 가로질러 도하(渡河) 했다.

    미국 육군 특수부대 훈련과정 ‘레인저스쿨’(60여 일간 진행)은 지난해 처음 여군에게 문호를 개방해 여군 레인저 2명을 배출했다. 한국군 유격전문양성과정은 미군 레인저스쿨처럼 남군, 여군을 똑같이 훈련시킨다. 국내 최초로 여성 레인저를 배출한 교관의 소감은 어떨까.

    “선발·훈련 과정과 난이도는 남녀가 동일하다. 단 선발 항목 중 여자는 매달리기, 남자는 턱걸이로 조정했고, 웃통을 벗는 하천장애물 훈련에서 여군을 제외했다. 여군의 체력은 상상 이상이다. 전체 수료생 중 중상급이다.”(이창우 소령, 육군보병학교 유격교육대장)

    “옹성산 500m 고지에 올라가면 고소공포증이 생길 수 있는데 여군들은 모두 담대하게 레펠 훈련을 잘 받았다. 25kg 군장을 메고 10km 산악을 뛰는데, 한때 속도가 뒤처지긴 했지만 끝까지 서로를 독려하며 페이스를 유지했다. 자연스럽게 여군을 ‘배려’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생존술 훈련에선 좀 달랐다. 남군은 토끼를 가차 없이 죽이는데, 여군은 토끼에게 풀을 먹이더라(웃음).”(김대현 대위, 육군보병학교 유격교육대 교관)  

    인터뷰는 유격교육대장실에서 진행됐다. 두 여군은 처음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지만 대화가 이어지자 조금 부드러워졌다. 다만 훈련의 피로 때문인지 틈날 때마다 손깍지를 끼면서 우두둑우두둑 소리를 냈고, 어깨와 허벅지를 손바닥 끝으로 탁탁 두드렸다.

    ▼ 오늘 훈련에서 돌아왔다고 들었다.  

    진미은 공육(06)시 어간(於間)에 왔다.



    ▼ 생존술 훈련 중 방사된 닭, 토끼를 맨손으로 잡는 과정이 있는데, 한 여군이 토끼를 못 죽이고 풀을 먹이고 있었다더라.   

    이세라 작은 벌레도 정말 싫어하는데 닭과 토끼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무서웠다. 죽이려고 살펴보니 엄청 귀엽게 생겨서 엄두가 안 났다. (입맛을 다시며) 근데 토끼고기가 참 맛있었다.

    진미은 그래, 맞아. 약간 질긴 닭고기 느낌? 불쌍하긴 하지만, 고립된 상황에서 부하들을 먹여 살리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훈련이었다. 먹고 나서 탈이 나지 않도록 안전하게 ‘해체’하고 조리하는 과정이라 유익했다.



     GI 제인

    ▼ 마침내 레인저 휘장을 받게 된 기분이 어떤가.

    이세라 명예이고 자부심이다. 빨강 모자를 쓴 교관이 되는 꿈을 이뤘다. 남군들도 받기 힘든 훈련을 여군이 해내는 반전을 이뤄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 군 생활할 때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 같다.

    진미은 오른팔에 레인저 마크가 달려 있는 이상 군 생활하면서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육군3사관학교에서 생도, 병사들에게 유격훈련을 잘 가르치겠다.

    ▼ 결혼, 출산, 양육에 대한 고민은 없나. 훈련 중 월경이 문제가 되진 않나.

    진미은 월경은 약 등으로 조절할 수 있다. 결혼, 출산 이런 부분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당장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이세라 결혼과 출산은 가장 큰 숙제다. 군 생활과 육아 병행 문제는 여군들에게 큰 고민거리다. 자신이 없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도 여군으로서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겠다.

    ▼ 롤모델이 있나.

    이세라 대대장님이다. 대대장님이 미 해군 여자 특수부대원을 그린 영화 ‘지아이 제인(G.I. Jane)’을 추천하면서 “GI 제인처럼 돼서 돌아오라”고 하셨다. “동정하지 마라, 넘어져도 굴하지 말고 마음을 굳게 먹어라” 같은 대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군복만 입은 군인이 아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인이 되겠다.

    진미은 특정인이 롤모델은 아니다. 사명감 가지고 군 생활하는 군인은 다 본받을 만하다. ‘이 훈련만 끝나면 숨만 쉬고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힘든 게 끝나니까 또다시 뭔가를 이루고 싶다. 이것도 해냈는데 못 할 게 뭐 있겠나. 

    “고통과 타협하지 말라”전문유격과정은 2013년 시작돼 올해로 4기를 맞았다. 올해 처음 전군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진미은·이세라 중사 등 여군 1호 2명 외에 공군 1호 3명(정현우 상사, 강택규 상사, 이재성 중사), 해병대 1호 1명(정해민 하사)도 최종 관문을 통과했다. 기수마다 문구를 정해 비석에 새기는데 4기는 이 말을 택했다. ‘선택했다면 후회에 굴복하지 말고, 가고 있다면 고통에 타협하지 말라’.



    정현우 상사(43, 공군 제5 공중기동비행단  헌병대대 경비관리) :
    나를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공군 1호’ 타이틀에 따르는 명예와 자부심을 열망했다. 자유형은 할 줄 알았지만 훈련 중 평영이 필요하다기에 한 달가량 배우고 왔다. 힘들었지만 전우들이 “나도 나이 들어 후배들에게 선배님과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며 격려해줘 큰 용기를 얻었다. 특히 여군들이 혹독한 훈련을 꿋꿋이 견뎌내는 모습을 보면서 힘든 내색을 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공군교육사령부에 복귀하면 이곳에서 배운 경험들을 활용해 공군기지 방어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강택규 상사(35, 공군 육탐색구조비행전대 항공구조대 항공구조사) :
    왼쪽 가슴에 레인저 마크를 달고 싶었다. 외국군이 이곳에서 위탁교육을 받으면 활차 A코스훈련을 가장 인상적이라고 한다던데 나 역시 그렇다. 중간에 하도 힘들어서 굳이 이걸 해야 하는 걸까 싶었는데, 끝내놓고 보니까 제대로 된 길을 갔구나 싶다. 힘든 순간은 그때뿐이고 모든 결과는 행동의 산물이다. 매사에 열심히 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미국 레인저 스쿨에 가고 싶다.



    이재성 중사(33, 공군 11전투비행단 헌병대대 특수임무소대 팀장) :
    육군의 좋은 훈련을 배워와 공군에 접목하려는 목적으로 지원했다. 4주차 종합훈련 중 야외에서 취침하고 물이나 식사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버티는 것이 힘들었다. 특히 완전군장하고 전투화를 신은 채 수영하며 침투하는 하천 은밀침투는 이곳에서만 접할 수 있는 훈련이다. 공군은 공군기지를 방어하는 훈련을 주로 하지만, 육군은 유격전도 펼치기 때문에 복합적인 상황을 훈련받는다. 이런 훈련을 후배들에게 알리고 싶다. 육해공군이 함께 훈련하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 좋은 교육을 받았다. 최고의 선택이었다.



    정해민 하사(22, 해병대 1사단 수색대대 팀장) :
    지휘관 추천으로 왔다. 전체 2등으로 수료했다. 유격전문과정은 해병대 임무와 유사하지만 활차 A코스훈련은 처음 받아본 것이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산악훈련시 로프를 비롯해 기본 장치는 마련된 상황에서 훈련이 진행된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기본 장치를 설치하는 산악전문훈련도 추가하면 좋겠다. 여러 전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남을 위해 살고 싶었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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