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톈진(天津)은 ‘천자의 나루터’였다. 명(明)나라 영락제가 톈진에서 배를 타고 상륙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톈진은 베이징의 목줄이자 항구였다. 수도를 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서양 열강과 중국이 충돌한 공간이다. 톈진은 베이징을 위해 존재하는 외눈박이 거인이다. 그래서 톈진 사람들은 ‘톈진 무인(武人)’ 곽원갑을 그리워한다.
중국어를 배우면서 중국인과 웬만한 의사소통은 가능해졌지만, 아무래도 중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다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톈진 여행 중 발랄한 스무 살 아가씨를 만났다. 내가 인사차 “간마야(干嘛呀)?”라고 물어보자 그녀는 내 표현이 어색하다며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누나가 가르쳐줄게(姐姐講一下). ‘간마야(干嘛呀)?’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뭐하는 거야?’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고, 일반적으로 ‘뭐해?’라고 물어볼 때는 ‘간마너(干嘛呢)?’라고 해.”
내 나이의 반밖에 안 되는 어린 친구가 천연덕스럽게 ‘누나’라고 자칭하자 헛웃음이 나왔지만, 워낙 발랄하고 귀여우니 모든 게 용서가 됐다.
자부심이 강해 20대 중반 청년도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이 어르신네가 어찌 네 말을 듣겠느냐”고 말하는 곳, 초등학교 꼬마 아가씨에게도 ‘누님(大姐)’이라고 불러줘야 하는 곳, 톈진이다.
영락제의 루비콘
톈진(天津)의 약자는 ‘나루 진(津)’ 자다. 톈진이란 ‘천자의 나루터’라는 뜻으로, 명나라 영락제가 여기서 배를 탄 것에서 유래한다. 로마의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하며 루비콘 강을 건넜듯,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톈진에서 배를 타고 상륙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영락제로 등극했다. 즉, 톈진은 영락제의 루비콘이다.톈진은 아홉 줄기 강물이 황해로 흘러가는 교통의 요지다. 일찍이 수양제가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대운하를 건설했을 때부터 베이징의 관문도시 톈진은 크게 발달했다. 특히 송대(宋代) 북방 유목민족 국가들이 베이징을 중요 거점으로 삼으면서 톈진의 중요성도 급부상했다. 톈진은 강남의 물자를 베이징에 끌어오기 위한 물류도시였다.
톈진은 영락제와 인연이 깊다. 주원장은 원을 물리치고 명을 건국하며 장쑤성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송대부터 강남은 이미 중국 경제의 중심이었으나, 북방 국가들이 베이징을 수도로 삼아 정치의 중심은 되지 못했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우며 난징을 수도로 삼아 정치와 경제의 중심을 일치시켰다. 주원장이 죽고 손자 건문제가 황위를 계승하자, 건문제의 삼촌인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체는 톈진에서 수로를 따라 진군해 ‘정난의 변(靖難之變)’에 성공한다.
주체가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민심은 싸늘했다. 대의명분도 없이 황제가 되고 싶어 일으킨 정변이었다. 명분 없는 정변이라 당대의 관료·지식인들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방효유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황제의 스승이었다. 영락제의 측근들은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에 글 읽는 선비가 없어질 것”이라며 살려주길 청했고, 영락제 역시 그의 재주와 명성을 아껴 방효유를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영락제의 제의를 단칼에 자르고 “연적(燕賊)이 위(位)를 찬탈했다”며 돌직구를 날렸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일가 친척에다 지인들까지 873명을 방효유 앞에서 죽이고, 끝으로 방효유도 죽였다. 유배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 사건을 통해 명나라 초기 인재들이 대거 사라졌다. 더욱이 당시 문화의 중심이 강남이기에 처형당한 사람은 대부분 강남의 명사들이었다. 강남의 민심은 더더욱 영락제에게 등을 돌렸다.
조계지 톈진의 비애
영락제의 책사 도연(道衍)은 정난의 변 직후 고향 쑤저우(蘇州)를 찾았다. 20년 만의 금의환향이었으나 고향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았다. 여든 살에 가까운 도연의 누이는 도연을 만나지도 않고 돌려보냈다.“그렇게 지체 높으신 분이 이런 초라한 집에 오실 용무가 있겠습니까. 무언가 잘못 아시고 오셨겠지요.”
민심이 이렇게 차가워지자 영락제는 자신의 본거지 베이징을 수도로 삼으며, 강남의 물자를 끌어올리기 위해 대운하를 개수했다. 톈진은 자연스럽게 교역·물류의 중심지가 됐다. 영락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는 출병기지, 황제가 되고 난 후에는 ‘물류센터’가 된 셈이다.
베이징의 목줄로서, 군사·경제적 요지로서 톈진은 매우 중요했다. 베이징을 지키려면 톈진을 반드시 지켜야 했고, 베이징에 들어오려면 톈진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근대에 톈진을 지키려는 중국과, 톈진에 들어오려는 서양 열강은 첨예하게 맞부딪쳤고, 톈진은 중국과 서양이 만나는 동시에 충돌하는 공간이 됐다.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는 걷기 좋은 길이다. 드넓은 강변엔 최첨단 고층건물과 함께 근대 유럽식 건축물들이 늘어서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다. 유럽풍 건축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뽐낸다. 톈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서개천주교당(西開天主敎堂)은 경건하게 기도하는 천주교인과 놀러온 구경꾼들이 모두 즐겨 찾는다. 오늘날에는 서양적 가치와 중국적 가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까지 역사는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특히 조계지 톈진은 커다란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거대한 생산기지이자 탐나는 시장이다. 서양 열강은 중국의 귀한 상품을 얻고 중국 시장에 물건을 팔려 했으나, 당시 세계경제의 으뜸이던 중국은 폐쇄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중국은 서양인을 천박하게 돈만 밝히는 오랑캐 장사꾼으로 봤고, 서양은 중국인을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로 봤다. 상호 경멸은 갈수록 심해져 중국은 서양인을 털북숭이 원숭이로 봤고, 서양은 중국인을 아편 피우는 동양 원숭이로 봤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하니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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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중요한 것은 사고방식의 변화였다. 많은 중국인이 전통 관념을 버리고 서구적 가치를 수용했다. 일례로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여행을 두려워했다. 중국은 땅이 너무 넓고 별의별 사람이 워낙 많기에, 중국인은 집 떠나기를 겁냈고 꼭 가야 한다면 길일(吉日)을 택해 움직였다. 그러나 근대식 창가(唱歌)는 이런 관념을 조롱했다.
“세상사 기구해도, 도처에 사람들이 다니네. 가다가 막다른 곳에 이르면, 다시 물러나면 되지 않는가. 만약 미로를 만나면, 입을 열어 물어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힘써야지. 길흉이란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 기선은 물로 다니고, 마차는 육지를 다니네. 천리를 오가는데도 참으로 빠르도다. 갖가지 속된 금기(禁忌)들 모두 떨쳐내고, 오로지 서양 사람들의 장점을 따라 배우세.”
서양을 추종하는 분위기는 근대 속담에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유학생은 속성 3년 공부면 천하를 다닐 수 있으나, 수재는 3년을 더 공부한다 한들 촌보도 움직일 수 없네.”
이 말은 한나라의 대학자 동중서의 고사를 빗댄 말이다. 동중서가 하도 열심히 공부하느라 ‘3년 동안 집안의 정원도 보지 못했다(三年不窺園)’는 고사는 수천 년간 중국 지식인의 귀감이 됐으나, 이제는 ‘퇴물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서양 문물을 배우고 세계를 두루 다니는 유학생이 돼야 했다.
톈진 조계지는 세계 각국의 은행이 들어차 국제금융 중심지가 됐다. 9개국 조계지답게 다양한 풍격의 건축물이 들어서 ‘만국 건축박물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청말의 실력자 위안스카이는 톈진에 중국 최초의 신식 경찰을 만들었고, 중국 최초의 민주적 지역의회 선거를 감독했다.
근대 톈진은 중국 제2의 공업도시였고, 1949년 이전만 해도 상하이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오늘날에도 톈진은 1546만 명이 사는 대도시다. 인구밀도는 상하이, 베이징에 이어 중국 본토(홍콩, 마카오, 대만 제외) 3위이고, 1인당 GDP는 1위(2014년 1만6874달러)다. 중국에 4개뿐인 직할시 중 하나임에 부끄럽지 않은 실적이다.
‘베이징의 무엇’
톈진은 중국 정치의 중심 베이징, 경제의 중심 상하이, 내륙 제일의 메트로폴리스 충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톈진이 이만큼 성장한 것은 베이징과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톈진의 성장에 한계가 있는 것도 베이징과 가깝기 때문이다.톈진은 베이징과 불과 117km 거리에 있다. 자동차로 한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고, 시속 300km의 고속철을 타면 30분 만에 도착한다. 중국이 폐쇄적이고 교통이 불편할 때 톈진은 베이징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매우 중요했지만, 베이징으로의 접근성이 높아진 지금은 중요성이 크게 떨어졌다.
톈진은 톈진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항상 ‘베이징의 무엇’으로서만 존재한다. 톈진은 베이징이 바다로 오갈 수 있는 베이징의 항구다. 톈진은 베이징에 비해 인구가 적고 생활환경이 쾌적하며 물가가 싸다. 그래서 베이징인은 주말에 톈진에 와서 바람을 쐬거나 쇼핑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즉, 톈진은 베이징의 휴식처이자 할인 쇼핑센터다.
베이징, 톈진, 허베이를 묶어서 ‘징진지(京津冀)’ 지역이라 한다. 수도권이긴 하되 강남의 경제력에 밀려 체면이 서지 않자 정부는 수도권을 발전시키기 위해 ‘징진지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그런데 세 지역이 서로 협력해 상승작용을 일으키기보다는 한정된 자원을 나눠 먹는 제로섬 게임처럼 경쟁하는 탓에 성과가 지지부진한 편이다.
수도 베이징은 돈 되고 폼 나는 3차 산업으로 가려고 ‘3고(高)1저(低)’ 기업(노동력·자본 투입, 에너지 소모, 오염 물질 배출은 많고 효율은 낮은 기업)들을 톈진과 허베이가 가져가길 원한다. 톈진과 허베이는 당연히 부루퉁하다. 베이징이 그간 징진지 일대의 인재, 자원, 우수 기업, 고부가가치 산업들을 몽땅 독차지하고도 이제 와서 힘들고 돈 안 되는 것들만 떠넘기려 한다고 원망한다.
빈하이 대폭발
허베이는 워낙 낙후돼 있기에 협의에 따라 여러 산업을 받아들여 발전을 꾀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톈진은 이미 상당히 발전했고, 베이징과 산업·경제노선도 비슷하며, 시민들의 요구 수준도 높다. 베이징과 허베이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격이다. 톈진시의 한 간부는 “베이징과의 합병 이외에 톈진을 발전시킬 방도가 없다”고 탄식했다. 숱한 저발전 지역에 비하면 배부른 엄살이긴 해도, 베이징에 치여 사는 톈진의 고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동북아 국제물류·항운의 중심으로 거듭나려는 톈진의 야망은 빈하이 신구(濱海新區)에서 드러난다. 톈진 빈하이 신구는 1980년대 광둥성 경제특구, 1990년대 상하이 푸둥 신구를 잇는 핵심 경제특구로, 환발해경제개발구의 중심이다. 2010년 말 이미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중 285개 회사가 투자하고 사무실을 여는 등 외국인 직접투자(FDI) 성과도 눈부셨다. 미국 보잉사와 함께 세계 항공시장을 양분하는 유럽 에어버스 항공사는 빈하이에 공장을 세웠다. 원자바오 당시 총리가 고급 제조업을 성장시키고 싶어 하던 고향 톈진의 숙원을 풀어준 셈이다.
그러나 화려하게만 보이던 빈하이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해 8월 12일 밤 빈하이에서 발생한 대폭발 사고가 그것이다. 근처 빌딩에서 폭발 동영상을 촬영하던 사람은 잠시 후 두 번째 대폭발이 일어나자 그 충격파로 쓰러졌다. 바닥에 나뒹군 채 천장만 보여주던 휴대전화는 옆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려줬다.
“사람이 쓰러졌어!”
거대한 화염은 불의 신이 강림한 것 같았고, 시커먼 버섯구름은 핵폭탄이 떨어진 듯했다. 다음 날 아침, 톈진항 야적장에 빽빽하게 주차돼 있던 새 차들은 불에 타 잔해만 남았다. 화재 현장의 검은 잿더미는 지구의 심연으로 통하는 구멍처럼 보였다. 여기에 고인 물웅덩이는 시안화나트륨이 기준치의 40배를 초과했고, 일부 지점에서는 800배를 초과했다. 사고 현장에서 1.8km 떨어진 한국 교민 아파트의 창문이 박살 난 장면이 한국 뉴스에 보도됐다.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에는 떼죽음을 당한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시안화나트륨은 비를 만나 시안화수소가 된다. 시안화수소는 나치가 유대인 학살에 사용한 맹독성 기체다. 중국발(發) 미세먼지에 시달리던 한국 역시 시안화나트륨이 미세먼지와 함께 바람을 타고 와서 독극물 비가 되어 내릴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중국 규정에 따르면, 주거 지역 반경 1km 내에서는 위험물 창고를 설치할 수 없고, 시안화나트륨은 24t만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루이하이 물류회사는 이 모든 규정을 어겼다. 애초에 허가도 없이 창고를 운영했고, 아파트 단지가 사고 현장에서 불과 600m 안에 있었으며, 시안화나트륨을 700t이나 쌓아뒀다. 규정을 이렇게까지 어긴 배경에 위험물을 감독·규제하는 공안국의 묵인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장멍판(張夢凡)은 당시 사건 현장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는 소방서에서 통신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최근 BBC 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밤 10시 53분에 신고 전화가 걸려왔고, 동료들은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첫 폭발 후 동료들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 열폭풍이 느껴졌다. 지진인가 했는데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고, 소방서의 문, 지붕, 창문이 날아가버렸다. 동료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취해 2명의 운전사와 교신이 됐으나 곧 연락이 끊겼다. 동료들의 휴대전화는 모두 끊겼고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통제와 불신
사건이 터지자 루이하이의 즈펑(只峰) 사장은 정신적 충격으로 쓰러져 입원했으며 말을 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됐다. 사건 조사 중 교통운수위원회 행정심비처 둥융춘(董永存) 처장이 추락사한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톈진 빈하이 대폭발 사건으로 173명이 죽었고(8명은 실종), 797명이 부상을 당했다. 건물 304채, 차량 1만2428대, 컨테이너 7533개가 파괴됐고, 11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이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애초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재(人災)였으며, 주요 관계자들은 규정을 어기고 진상을 은폐했다. 사건 조사는 투명하지 않았고, 처리 방식은 매우 미적지근했다. 언론 보도뿐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철저히 통제됐다. 사건 처리가 속 시원하지 않은데 언로를 막아놓으니 온갖 유언비어와 괴담이 횡행했다. 현지 공영방송 톈진위성TV가 뉴스 보도는 하지 않고 한국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을 방영한 것은 뭇 사람의 공분을 샀다.
여행 중 만난 중국인 친구는 “외국 언론은 톈진 폭발사고 희생자를 몇 명이라고 보도했느냐”고 내게 물었다. 외국 언론도 중국의 공식 발표를 인용해 보도했다고 말하자, 그는 석연치 않다는 듯 말했다.
“현장 근처엔 많은 거주민이 있었고, 세 차례나 투입된 소방수들은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어. 그런데 죽은 사람이 200명도 안 되겠니? 중국인들은 언론에 보도된 사망자 수보다 5배쯤 많을 거라고 생각해. 내 친구 한 명은 소방관으로 2~3년 일했는데, 톈진 폭발사고가 일어난 후 퇴직하고 딴 일자리를 구하더군.”
그의 말은 정확한 정보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해 신빙성은 떨어진다. 그러나 비단 톈진 폭발사고만이 아닌 다른 사건·사고에 대해서도 정부와 언론이 신뢰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분위기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속성장의 그림자
중국의 2015년은 대형 인재(人災)의 해였다. 광둥성 선전에서는 산비탈에 위법으로 쌓은 건축·산업 폐기물이 무너져 7명이 죽고 70여 명이 실종됐으며, 상하이 황푸강에서는 새해맞이 레이저쇼를 보려고 31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가 35명이 죽고 43명이 다치는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주장 삼각주의 중심 선전, 장강 삼각주의 중심 상하이, 환발해의 중심 톈진에서 벌어진 인재는 중국 성장의 그림자를 드러냈다.
톈진 폭발사고 1주년이 돼가던 지난 8월 11일 후베이성 당양(當陽)시에서는 화력발전소의 고압 증기관이 폭발해 21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했다. 수도의 관문이며 환발해경제권의 중심으로 성장해온 톈진. 그러나 고속성장 이면에 수많은 숙제가 산적한 중국의 현실을 톈진 역시 공유하고 있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