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한 해 국내에서 발생한 유기동물은 8만2100여 마리. 그 절반 이상이 안락사의 운명을 맞는다. 주인을 찾거나 재입양되는 숫자는 그보다 적다. 사람에게서 버려져 기본적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주는 곳이 있다.
결국 예상 도착 시각보다 30분가량 지체되고서야 나눔센터 앞마당에 차를 댈 수 있었다. 큼지막한 글씨로 ‘경기도 도우미견나눔센터’라고 쓰인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순간 얼마 전에 본 TV 뉴스가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젓고 지나갔다. 휴가철만 되면 피서지 인근에 버려지는 유기견 수가 급증한다, 유기견의 2·3세대들이 야생 들개로 변한다, 그들이 시민을 위협하는 바람에 포획 후 안락사시킨다…. 피서지에 버려지는 유기견의 상당수도 정해진 수순처럼 안락사의 운명에 처한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유기동물을 보호할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새 주인을 만나 분양될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1초 만에 ‘무장해제’
현행 동물보호법에 따르면, 유기동물은 지방자치단체장에 의해 보호·관리된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동물보호관리 시스템에 7일 이상 공고한 후에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락사시키거나 일반에 분양할 수 있는 법적 효력을 지닌다는 뜻이다. 유기견 분양률은 매년 20%를 넘지 못하는 실정이다.“왈왈왈!” “컹컹!” “앙앙!”
나눔센터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푸들부터 진돗개까지 온갖 종류의 개들이 몰려와 껑충껑충 뛰면서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진풍경. 손을 내밀자 머리를 들이밀고 혀를 날름거리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엄청난 ‘환영식’ 덕분에 만난 지 1초 만에, 긴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이라도 된 양 울컥해졌다.
입구에서부터 화려한 환영 퍼레이드를 펼치던 10여 마리의 개는 취재진이 움직일 때마다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녔다. 몇 마리는 발에 밟힐까 걱정될 정도로 적극적이었지만, 위협적이거나 감당 못할 만큼 부담스럽진 않았다. 아웅다웅 싸우는 개들도 없었다. 마치 어릴 적부터 받아온 최상의 예절교육이 몸에 밴 듯한 매너였다. 타고난 외모도 하나같이 훌륭했지만, 방금 목욕과 드라이를 마치고 나온 듯 보송보송한 털이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커팅으로 마무리돼 ‘미모’를 더욱 빛나게 했다. 언뜻 봐도 노련하고 정성스러운 ‘솜씨’가 느껴졌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접하던, 좁은 철망에 갇혀 병들고 불안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유기견들의 행색과는 사뭇 달랐다. 이 밝고 사랑스러운 개들이, 사람을 이토록 따르고 좋아하는 개들이 인간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런 개들을 내다버리는 마음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죽이는 일→살리는 일
장애인 도우미견으로 선정되지 못한 개들은 일반 가정에 반려견으로 무상 분양된다. 도우미견으로선 탈락이지만 가정에선 최고의 반려견으로 손색없을 훈련과정을 거친 터라 분양 후 파양되는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분양 후 약 한 달간은 훈련사들이 전화 상담 등을 통해 자신이 훈련시킨 개들이 입양 가정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파양할 경우에도 나눔센터로 돌려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등 사후관리가 철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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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개는 없다
“지체장애인 보조견은 문을 열어주거나 신문과 휴대전화를 갖다주고 냉장고 문을 열어주는 등 신체활동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유기견들이 처음부터 능숙하게 이런 일을 해내는 건 아니다. 입소 초기엔 기본적인 배변 훈련조차 안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입소한 개는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엉킨 털을 정리하고, 기본적인 건강진단을 거쳐 홍역, 간염, 렙토스피라, 파보바이러스 장염, 파라인플루엔자 등에 대한 예방접종을 받는다. 집단생활을 하기에 한 마리만 건강에 이상이 생겨도 다른 개들에게 병을 옮길 수 있어 철저한 건강관리는 필수다. 훈련사들이 24시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유다.
그래도 방학이나 주말엔 봉사활동을 나온 학생들 덕분에 일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나눔센터에서 학생들의 봉사활동을 반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곳의 유기견 관리 시스템을 반려견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場)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운창 팀장은 나눔센터에서 소규모로 진행하던 청소년 대상 반려견 교육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유기견 근절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게 견주 교육입니다. 반려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책임은 100% 견주에게 있기 때문이죠. 단순히 책임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도 반려견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반드시 공부하고 배워야 할 게 있어요. 기본적인 배변 관리, 식사 챙기는 법, 반려견과 교감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법 등을 어릴 때부터 가르친다면 올바른 반려동물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왜 ‘동물복지’인가
“혹자는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동물복지냐’고 하죠. 그러나 동물복지는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열쇠가 될 겁니다. 올바른 반려동물 문화는 청소년에게 생명존중 사상을 갖게 하고, 감성 계발과 심리적 안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는 사람에게도 폭력적일 수밖에 없어요. 동물매개 치료견은 폭력적인 문화에 노출돼 정신적인 문제를 지닌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여운창 팀장)
취재를 마치고 나오다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 문에 붙여놓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삶은 인간만큼이나 말없는 생명체들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사람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며 죽음이 아닌 생명을 원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그러하다.
-달라이 라마
문을 열고 나오자 화장실까지 따라온 시추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반색했다. 시간을 더 지체하다간 그사이에 든 정을 뿌리치지 못할 것 같아 서둘러 차에 올랐다. 부디 이번엔 좋은 주인을 만나 남은 견생(犬生)이나마 행복하게 보내기를 진정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