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9일로 데뷔 10년을 맞은 빅뱅은 자타 공인 최고 아이돌이자 월드 스타다.
- 빅뱅은 ‘아이돌’과 ‘아티스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 중간지대를 지향했다.
지난해 ‘아시아투데이’가 영화, 방송, 가요 관계자 등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빅뱅은 압도적 표차로 ‘지난 10년간 최고의 남성그룹’으로 꼽혔다. 미국 ‘LA타임스’도 빅뱅을 “K-POP을 통틀어 가장 성공한 보이밴드”라고 소개했다. 빅뱅은 9월 8일 방영된 미국 CNN 토크쇼 ‘토크 아시아(Talk Asia)’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6년 8월 19일 결성한 빅뱅은 이제 막 데뷔 10년을 맞았다. 빅뱅은 어떻게 ‘최고 아이돌’로 등극한 걸까. 앞의 동아일보 조사를 다룬 기사에서 전문가들은 빅뱅이 “대중성과 음악성, 솔로와 그룹 활동, 시각적 매력과 창작 능력을 두루 갖추고 10년 간 생명력을 지켰다”고 평가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분석은 빅뱅의 인기 동력을 정확히 꿰뚫은 말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별것 아닌 설명을 가능케 한 빅뱅의 방법론들이 선구적이고 혁신적이다. 아리송한가. 그 아리송한 부분들을 풀어 빅뱅의 성공 요인을 살펴보자.
아이돌? 아티스트?
먼저 ‘아이돌’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용어가 정착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국내 미디어에선 제2차 아이돌 붐이 일어난 2007년경부터 ‘아이돌’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애초 아이돌은 10~20대층에서 폭발적 인기를 구가하는 ‘젊은 세대 전용 연예인’들을 가리켰다. 1950년대에 인기를 끈 엘비스 프레슬리를 설명하며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비틀스나 롤링스톤스 같은 밴드에게도 아이돌 호칭이 붙었다.
한국에서는 일본 아이돌의 의미를 그대로 수입했다. 10대 무렵의 어린 나이에 데뷔해 각종 댄스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들을 지칭했다. 댄스 음악 위주인 만큼 군무(群舞)를 통한 퍼포먼스가 포인트라 그룹 형태가 대부분이다. 결국 한국에선 과거에 ‘댄스그룹’ ‘10대 그룹’ 등으로 부르던 뮤지션 형태를 ‘아이돌 그룹’으로 부르게 됐다.
그런데 이런 뮤지션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이른바 ‘비전문 인력’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음악에 별 관심도 없고 재능도 없으며, 할 줄 아는 건 그저 춤이고 최대 자산은 외모이며 이걸로 인기를 누린다고 여긴다.
‘아티스트’는 이 같은 아이돌과 정반대 개념으로 인식된다. 이것도 일본에서 쓰는 표현이다. 일본에선 ‘실력파’라는 뜻이지만, 한국에선 그 의미가 더해졌다. 대개 자기 음악을 직접 작사·작곡하는, 고유의 음악 세계를 지닌 뮤지션을 가리킨다. 홍익대 주변에서 활동하는 인디밴드를 연상하면 된다. 그렇게 한국의 대중음악계 뮤지션은 아이돌과 아티스트, 양 갈래로 나뉜 상태다.
그런데 빅뱅은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애초에 중간지대를 지향했다. 처음엔 지독한 오디션 과정을 거쳐 멤버들을 선발한 점을 강조하며 ‘실력파 아이돌’을 자처했다. 그러다 자신들이 직접 프로듀싱에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자체 생산형 아이돌’이란 호칭을 내보냈다. 데뷔 1년을 넘어선 시점부턴 소속사가 아예 이렇게 주장하고 나섰다.
“빅뱅에게 아이돌 그룹이라는 수식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빅뱅은 나이가 어리다는 것 말고는 기존 아이돌 그룹과 공통점이 별로 없다. 오히려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서태지와아이들 ‘선택적 계승’
하지만 빅뱅의 셀링 포인트는 아이돌의 그것과 동일하다. 멤버들은 본명 대신 귀에 쏙 들어오는 별칭으로 등장했다. 빅뱅 CD 소책자엔 “빅뱅 1~4집 싱글앨범 및 1집 정규앨범 안에 들어 있는 마운트(mount, 쿠폰의 일종)를 모두 모으시면 빅뱅 팬클럽 멤버의 자격이 부여되며, 콘서트 및 YG에서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특별한 혜택이 주어집니다”라고 쓰여 있다. 첫 단독 콘서트 실황 DVD에는 콘서트 실황 외에 메이킹 필름, 미공개 영상, 콘서트 스틸 컷 등을 골라 디자인한 포토북도 만들었다. 라디오와 TV에서 비트박스와 성대모사 등 개인기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그런데도 빅뱅은 아이돌이되 아이돌이 아닌 그룹, 아티스트이되 또 아티스트라고 보기엔 애매모호한 그룹으로, 기존 아이돌과 아티스트 개념 사이의 어느 곳엔가 위치한 ‘제3의 길’을 표방했다. 이 대목에서 이와 유사한 왕년의 거물급 뮤지션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2년 혜성처럼 등장해 우리 대중음악계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서태지와아이들. 당시 이들도 ‘아이돌과 아티스트 사이의 길’을 캐치프레이즈로 밀고 나갔다.
여기에서 빅뱅의 핵심적인 성공 요인을 짚을 수 있다. 서태지와아이들 이후 ‘아이돌과 아티스트 사이’ 노선을 그대로 모사한 경우는 많지 않다. 패닉 등이 비슷한 형태였으나 결국은 아티스트에 더 가까웠다. 서태지도 솔로로 돌아왔을 땐 아이돌의 향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한 콘셉트를 확립하기가 그만큼 어려운 까닭에 후발주자가 등장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빅뱅은 이 같은 노선을 정교하게 따라 서태지와아이들의 진정한 후발주자이자 계승자로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빅뱅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는 서태지와아이들 멤버 양현석이 수장으로 있는 기획사다. 그러니 애초부터 ‘노리고’ 서태지와아이들의 계승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 서태지와아이들이 시대를 풍미하며 1990년대의 대표 뮤지션이 됐듯, 빅뱅도 2010년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했다. 성공사례의 성실한 답습 효과다.
‘진짜 악동’ 지드래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악동이란 해외 연예뉴스에서 접하는 악동과 다르다.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악동은 성립하기 어렵다. 한국 대중은 연예인에게 엄격한 사회적 잣대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을 ‘공인(公人)’이라고 명명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공적(公的) 역할을 수행한다’는 개념으로는 틀린 표현이지만, ‘공적으로 노출된 인물(public figure)’이라면 맞는 말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그런데 이처럼 ‘공적으로 노출된 인물’에 엄격한 잣대를 부여할수록 진짜 악동은 등장하기 어렵다. 그 자체가 반사회적 인물로 공격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동은 딱 악동 ‘이미지’만 팔지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다. 악동처럼 껄렁껄렁하게 다녀도 때 되면 불우이웃돕기 기부라도 해야 한다. “나는 나”를 외치며 떠들어대지만 형님 동생 잘 모시고 잘 베푸는 이미지도 보여줘야 한다. 유교 사회 최대 덕목인 효도 콘셉트도 빠질 수 없다. 결국 ‘알고 보면 착한 아이’가 넘실대는 것이 우리 대중문화계다.
그런데 지드래곤은 데뷔 초기부터 ‘진짜 악동’이었다. 첫 단독 콘서트에서 성행위를 연상시키거나 기타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여기까진 그저 악동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에 등장한 사적 논란들은 심각했다.
한창 인기를 끌던 2011년 대마초 흡연 혐의로 조사를 받았는데 양성 반응이 나왔다. 초범이고 대학생인 점 등을 감안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지만, 양형 기준에 미달해 그렇게 됐을 뿐 불법은 불법이었다. 이후 지드래곤은 2014년 하트 모양 위에 ‘Molly(마약류 엑스터시의 한 종류)’라는 글자가 적힌 사진을 SNS에 게재해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69’가 씌어진 티셔츠를 구하고 싶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뮤직비디오에서 성적인 단어가 적힌 병원복을 입고 나왔고, 그룹의 다른 멤버를 상습적으로 구타한다는 구설에도 올랐다. 노래 가사에 “이 정도 빠른 flow라면 도망가 내가 너라면 가라 눈 깔어”란 대목이 등장해 의혹이 증폭됐다.
지드래곤은 어떤 의미에서도 ‘알고 보면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캐릭터는 홍대 힙합 신 등 언더그라운드에서나 통용됐지만, 지드래곤은 달랐다. 대중은 그런 ‘악동 지드래곤’을 더없이 사랑했다. 메인스트림 대중음악계에 그런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기에 유독 눈에 띄다 보니 그렇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지드래곤은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자유인’의 콘셉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이게 성공한 것이다.
새로운 흐름의 주창자
지드래곤은 이렇듯 지금껏 실험돼본 적 없는 과감한 이미지 메이킹과 마케팅,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한 사건·사고들 덕분에 독보적인 존재로 거듭났다. 그리고 지드래곤이 발굴한 이미지를 나눠 가진 빅뱅 역시 매우 드문 종류의 뮤지션, 사건·사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도 특별한 이미지를 구축해갔다.
빅뱅이 데뷔한 지 10년이 지난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 상황을 보자. 빅뱅과 같은 초대형 성공은 당연히 후발주자를 부르기 마련이다. 아이돌로 인식되는 이들 중 빅뱅이 그러했듯, 직접 작사, 작곡, 프로듀싱에 참가하는 이가 많아졌다. 아이유, 비스트의 용준형,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제아가 그렇다.
악동 이미지를 대범하게 구사해 대중으로 하여금 사회적 일탈의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아이돌도 늘었다. YG는 빅뱅의 걸그룹 버전이라 할 2NE1을 내놓아 어마어마한 인기를 모았고, 같은 콘셉트의 보이그룹 아이콘과 걸그룹 블랙핑크를 새롭게 론칭했다. 그렇게 ‘제3의 길’과 ‘악동’ 콘셉트 시장은 확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빅뱅의 입지는 견고하다. 빅뱅은 10년 동안 새로운 뮤지션 흐름의 주창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다져왔다. 멤버들이 해외 각지에서 유지하고 있는 인기는 여타 후발 그룹들이 빠른 시일 안에 따라잡기 어렵다. 빅뱅의 아이돌과 아티스트 사이 ‘제3의 길’ 노선은 일본이나 중국 등지에서도 차별성이 있다. 이들 나라에선 한국만큼이나 ‘착한 아이’에 대한 집착이 심해 빅뱅과 같은 악동이 등장하기가 쉽지 않다.
‘K-POP 빅뱅’의 진원지
빅뱅은 한국 대중문화계의 지형도를 바꿨다. 빅뱅과 KBS의 악연은 오래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속사 YG와, ‘뮤직뱅크’를 필두로 한 KBS 예능국 간 갈등이다. 어찌 됐건 빅뱅은 무대 관련 조율을 이유로 ‘뮤직뱅크’ 측 컴백 무대 출연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 방송사를 택해 KBS 출연을 보이콧했다. 그럼으로써 빅뱅은 지상파 방송사 위주로 짜인 대중음악계 권력 지형도에 격변을 가져왔다.이제 ‘스테이션’의 시대는 끝나고 ‘콘텐츠’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 빅뱅은 그 자체로 한국 대중음악계 ‘카리스마’를 대변하는 존재로 비치기에 다른 어떤 동일 콘셉트의 후발주자들이 등장해도 대중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다.
다시 동아일보 설문조사로 돌아가 보자. 조사는 현명하게도 ‘지난 20년간 최고 남녀 아이돌 가수와 노래’라는 제한을 뒀다. 20년 전이면 1996년, 한국 대중이 알고 있는 아이돌 1세대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이 등장했거나 막 등장하려던 시점이다. 그러나 빅뱅의 초기 모델을 제시한 서태지와아이들은 빠진다.
만약 여기에 서태지와아이들이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여전히 빅뱅이 1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현재 활동 중인 그룹이라서가 아니다. 서태지와아이들이 대중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해도, ‘K-POP’이란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빅뱅은 K-POP이 세계 무대에서 막 발견되던 시점에 그야말로 ‘빅뱅(big bang, 우주 생성의 시발이 된 대폭발)’을 일으켰고, K-POP의 지향점을 꾸준히 제시했다.
한국은 짧은 시간 동안 걸출한 뮤지션을 많이 배출했다. 이미자, 남진, 나훈아에서부터 조용필, 산울림, 들국화, 신해철, 서태지 등에 이르기까지 이루 셀 수도 없다. 그러나 이들과 K-POP 뮤지션은 구분된다. K-POP은 ‘세계가 듣는다’는 개념을 한국 대중에게 선사해준 흐름이다. 그 중심에 있는 빅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