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호

미술과 마음 이야기

시스티나 성모 그리스도의 변모

라파엘로 산치오

  • 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입력2016-09-22 11: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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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미술사를 생각할 때 어떤 화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하르먼손 판 레인 렘브란트, 프란시스코 고야를 떠올리는 분도, 빈센트 반 고흐나 파블로 피카소를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 사조는 프랑스 인상주의, 가장 많이 아는 화가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세계사 수업 때 서양 근대 미술이 르네상스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배운 것도 기억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서양 미술사를 생각할 때 르네상스 화가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르네상스란 ‘재생’ 또는 ‘부활’을 뜻합니다. 새로운 예술과 학문을 창출하려 한 르네상스는 14세기 후반~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융성했습니다. 이 운동은 알프스 너머에 있는 북유럽 지역에 전파돼 전 유럽에 퍼져나갔습니다. 문화의 침체기로 알려진 중세와는 달리 새로운 활력을 안겨준 르네상스는 근대 유럽 문화의 출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라파엘로, 라파엘 전파

    르네상스를 이끌어온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특징은 3가지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부흥, 인간 존중에 대한 신념, 원근법의 적용입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끈 화가들은 각기 개성 있는 화풍을 선보였는데, 신과 인간, 기독교와 그리스·로마 문화 등을 주제로 삼아 조화와 균형이라는 이상적인 미를 표현하려 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3인방은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1483~1520)입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그림이지요.



    세 사람 중 다빈치는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었습니다. 회화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과시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화가인 동시에 ‘다비드’ ‘피에타’에서 볼 수 있듯 탁월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였습니다.

    오늘 소개할 주인공인 라파엘로는 화가이자 건축가였지만,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보다 회화에 주력했습니다. 우아한 아름다움을 담은 걸작을 많이 남겼지요. 라파엘로 작품이 갖는 큰 미덕은 르네상스 미술의 이상을 잘 구현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미적 이상과 표현 방식에 가장 충실했고, 동시에 르네상스를 완벽하게 재현한 화가입니다.

    라파엘로가 서양 회화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19세기 중반 영국에 등장한 ‘라파엘 전파(前派, Pre-Raphaelite)’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로 이전의 화가들이 공유한 이상, 다시 말해 자연과 진실의 영감을 중시한 화파를 말합니다. 윌리엄 홀먼 헌트, 존 에버렛 밀레이,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이 화파를 대표합니다. 이들이 라파엘로 이전의 화풍으로 돌아가자고 강조한 것을 보더라도 라파엘로가 서양 근대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작 속 미세한 감정 표현

    라파엘로는 ‘성모의 화가’입니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담은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시스티나 성모’(The Sistine Madonna· 1513~1514)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꼽힙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분묘를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이 작품은 처음엔 이탈리아 피아첸차에 있는 성 식스투스 수도원에 있다가 작센의 아우구스투스 3세에게 기증돼 현재는 독일 드레스덴 미술관에 걸려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 크기가 196x265cm에 달하는 대작으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경건함이 담겼습니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보고 있자면 영혼이 깨끗해지고 단단해집니다. 왼쪽에 있는 교황 식스투스 1세가 신앙심 깊은 모습으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경배한다면, 오른쪽에 있는 성녀 바르바라는 아래쪽의 아기 천사 푸토(putto)들을 평화롭고 따뜻한 표정으로 내려다봅니다.

    특히 푸토들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며 사랑받았습니다. 어느 유명 커피 전문점에서는 이들 푸토를 마스코트로 사용해 인기를 끌고 있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푸토들의 표정이 참 재미있습니다. 다소 지쳐 보이면서도 어린 아이다운 순수함을 드러내 보이는 표정을 보노라면 라파엘로가 미세한 감정의 표현에 얼마나 능숙한 화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은 구도에 있습니다. 성모자와 교황 식스투스 1세, 성녀 바르바라의 안정된 삼각 구도, 그 아래 푸토들을 배치한 적당한 파격은 라파엘로가 그 어떤 화가보다도 조화와 균형의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저는 라파엘로가 보여주는 이런 우아한 조화와 균형의 감각을 좋아합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차분해지고 평화로워집니다. 예술은 삶의 반영이자 이상입니다. 다시 말해, 예술은 삶의 희로애락을 담는 동시에 삶이 지향해야 할 가치를 보여줍니다. 예술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면,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를 감상하며 배우게 되는 가치는 조화로움과 균형 잡힘이 아닐까요.



    조화와 균형의 어려움

    조화와 균형은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이루기 쉬운 가치가 아닙니다. 이 둘은 한 개인의 삶 내부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심리 내부에서는 욕망과 절제, 이성과 감성,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에 늘 긴장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갈등을 해결하기 어려운 까닭은 어느 하나만이 정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합리성을 존중하는 삶, 그리고 감성과 비합리성을 존중하는 삶 가운데 무엇이 더 낫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성과 합리성만을 중시하면 우리 삶은 황폐해질 수 있고, 감성과 비합리성으로 삶을 채워가면 예측 못한 사고들을 처리하고 감당하느라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담사인 제가 개인의 심리적 건강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지닌 심적 안정감입니다. 자기 마음과 대인관계에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사람들을 보면 예외 없이 삶의 다양한 측면을 조화롭게 조직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을 안정되고 탄탄하게 만들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이 됩니다.

    사회에서도 조화와 균형은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다른 이익과 이념을 가진 집단들로 이뤄진 사회는 그 이익과 이념이 충돌함으로써 긴장 및 갈등을 유발합니다.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이념갈등, 계층갈등, 지역갈등 등 다양한 사회갈등이 존재합니다. 조화와 균형은 이러한 긴장과 갈등에 맞선 가치입니다. 긴장을 완화하고 갈등을 해소하려면 인간과 인간 간의, 집단과 집단 간의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요즘 극단적인 주장들이 맞서는 우리 사회가 걱정스럽습니니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기보다 부정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기보다 무시해버립니다. 정치적 이념의 대립, 사회정책에 대한 갈등, 양성 간의 충돌이 넘치는 뉴스들을 보면서 매일매일 현기증을 느낍니다. 그만들 좀 우기고 조화롭게 맞추면 안 되겠냐고 외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거룩한 천상, 혼란스러운 지상

    조화와 균형을 내세웠다고 해서 라파엘로가 삶과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는 라파엘로가 남긴 최후의 대작인 ‘그리스도의 변모’(The Transfiguration·1518~1520)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이 작품의 대부분을 그렸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무리 작업은 제자 로마노가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바티칸 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은 문제작입니다. 초대형(276×405㎝)인 이 작품은 두 층위로 나뉩니다. 윗부분엔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변모를 담았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처럼 흰 그리스도 옆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고, 바로 밑에선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놀란 표정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아랫부분엔 세상 사람들의 혼돈스러운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변모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다양한 혼란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거룩한 천상과 혼란스러운 지상의 대비에 있습니다. 저는 라파엘로가 세상에서 둘로 나뉜 것들이 결국 하나로 이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이 대작을 통해 던졌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가 고전적인 르네상스 미술을 해체하고 역동적인 바로크 미술을 예고했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상과 천상, 삶의 빛과 그늘, 일상적 삶과 신앙적 삶이라는 서로 다른 것들을 조화와 균형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재현한다고 봅니다.

    삶은 본래 이성과 감성이 공존하고, 이기심과 이타심이 충돌하며, 사랑과 미움이 갈등하는 모순적인 것이 아닐까요. 하늘에선 거룩한 찬양이 들려오지만, 땅에선 서글픈 절규가 들려오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이 우리를 둘러싼 삶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 안에서 은혜를 받기도 하고 희망도 얻으면서 살아 갑니다.

    500년이 지난 이 그림은 오늘도 제 어깨를 굳게 잡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세상이 주는 혼란함에 흔들리지 말고 앞을 향해 조화롭게 걸어가라고, 세상이 주는 긴장에 눈길을 보내기보다는 땅에 내디딘 두 발에 힘을 주고 균형을 찾으라고 말입니다.  



    박 상 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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