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호

공동 기획 | 한국 경제학 이슈와 학맥

“중간 지주회사 허용” vs “삼성 위한 특혜”

재벌개혁 방법론 논쟁

  • 윤영호 | 동아일보 출판국 기획위원 yyoungho@donga.com

    입력2016-09-22 1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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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와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 선후배 사이다. 두 사람 다 대표적인 재벌 개혁론자지만, 그 방법론을 놓고 극명하게 대립한다. 크게 보면 점진적 개혁과 구조적 개혁의 대립이다.
    국회도서관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전자도서관에서 ‘경제민주화’라는 키워드로 소장 자료를 검색하면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국회도서관이 소장한 단행본이나 학위 논문, 학술 기사 등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나오는 자료는 4·19 직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월간 ‘재정’ 1960년 7월호에 실린 최호진 전 연세대 상경대학장의 ‘경제민주화에 따르는 신 경제정책을 제2공화국에 요구한다’는 논문이 그것이다. 2010년 타계한 최 전 학장은 1956년부터 1978년까지 22년간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낸 우리 경제학계의 거목이다.

    그러나 최 전 학장의 경제민주화 주장은 당시의 한국 경제 실상을 반영하듯 ‘소박한’ 수준이다. 4·19 직후의 흥분을 엿볼 수 있는 이 논문에서 그는 “4월 혁명이 정치민주화의 발전 계기를 제공했지만,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경제민주화가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경제민주화 주장은 누구에게나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권력과 가까운 일부 기업에만 이권을 배분하거나 특혜성 대출을 해준 이승만 정권의 행태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경제력 집중 자체가 문제”

    그의 이런 주장은 지금의 경제민주화 논의와는 차이가 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도하는 현재의 논의는 ‘거대 경제세력의 지배를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경제개발 이후에 비로소 재벌이 탄생한 것을 감안하면 최 전 학장의 논문에 재벌 규제 논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 논의는 이처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띤다. 그런 점에서 “경제민주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다”(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체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경쟁에서 패한 사람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내용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이 들어갔는데도 최근에 와서야 경제민주화가 국민적 관심사가 된 이유는 뭘까. 경제민주화에 찬성하는 학자들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 심화와 편법·불법 승계 등 전근대적인 행태, 중소·중견기업의 위축 등을 그 배경으로 꼽는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더 나아지지 않는 생활수준, 재벌의 골목상권 침해로 인한 자영업자의 몰락, 40대만 넘으면 언제 짐을 싸야 할지 모르는 고용불안, 노인 빈곤으로 상징되는 희망 없는 미래. 그런 중에도 재벌은 계속 몸집을 불려왔으니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화두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경제민주화 논의는 필연적으로 재벌 개혁으로 이어진다. 경제민주화의 전제 내지는 출발점이 ‘경제력이 집중된’ 재벌을 개혁하는 것이라는 인식인 셈이다. “재벌이 경영을 잘해 경제력이 집중됐다면 뭐가 문제냐”는 재벌들의 주장에 대해 재벌 개혁론자들은 “과거 미국이나 일본의 경험을 보면 경제력 집중은 그 자체로 문제”라고 맞선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학과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독점력이나 상당한 시장지배력이 기업의 기술혁신이나 높은 생산성 같은 요인에 의한 것이라면 이를 문제시할 수는 없다. 반면 경제력 집중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20세기 초 미국의 진보 운동에서도 경제력 집중은 그것이 설사 합법적 결과라 해도 문제 삼았다. 경제력 집중 상태는 필연적으로 시장경제의 기본 질서를 흔들고 정치적 민주주의의 기반도 잠식하게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점진적 개혁 對 구조적 개혁

    재벌 개혁론자들은 아울러 재벌 자체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재처럼 선단식 경영을 통해 잘나가는 계열사가 못 나가는 계열사를 양으로 음으로 지원해 가면서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지 않냐는 지적이다. 잘나가는 계열사도 글로벌 경쟁에서 언제 뒤처질지 모르는 판에 뒤처진 형제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재벌 개혁론자들은 재벌 개혁 논의에 앞서 우리 재벌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선 1950년대 이후 한국 재벌과 같은 대규모 기업집단이 사라졌다는 게 정설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만 해도 모회사가 자회사 지분을 100% 보유한다. 따라서 자회사라기보다는 단일 기업 GE의 사업부로 보는 게 맞다.

    우리 재벌은 어떤가. 가령 A그룹의 계열사 a사와 b사가 있는데 a사는 그룹 총수가 80%의 지분을 가졌고, b사는 a사의 지분이 50%라고 가정하자. 두 회사의 순이익이 각각 100억 원이라면 A그룹 총수는 a사에서는 최대 80억 원(100억 원 × 0.8)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지만, b사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 배당금은 40억 원(100억 원 × 0.5 × 0.8)이다.

    이 경우 그룹 총수는 b사의 이익을 a사처럼 자기 지분이 높은 회사로 빼돌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a사가 b사와 거래하면서 유리한 단가를 받으면 b사의 이익이 a사로 흘러들어간다. 이를 막아야 할 b사의 이사들은 총수와 가까운 사람들이어서 모른 체하고, b사의 소액주주들은 소송을 해봐야 실익이 없어 포기하곤 했다. 한국 재벌에서 배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재벌 개혁론자인 김상조 교수와 박상인 교수는 재벌에 대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신동아’ 9월호에 언급했듯 두 사람의 주장이 일치하는 것은 여기까지고, 구체적인 개혁 방법론을 놓고서는 치열하게 논쟁을 펼친다. 점진적 개혁론(김상조) 대 구조적 개혁론(박상인)의 싸움이다.  

    “재벌에 대한 규율을 지금까지처럼 행위 규제를 중심으로 할 것인지, 이사회 중심 구조로 할 것인지, 아니면 그런 행위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개혁으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적어도 행위 규제 중심으로는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구조적인 접근을 하자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행위 규제를 해왔지만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비용도 많이 들고 감시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른다는 행위 규제 자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증좌다. 그렇다면 해답은 뻔하다.”(박상인 교수)


    목표와 현실

    삼성 안팎에선 삼성 오너가가 30% 이상 지분을 보유한 삼성물산을 주축으로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삼성금융지주회사로 재편하는 게 삼성의 목표라고 관측한다. 그래서인지 삼성생명은 그간 다른 금융 계열사 지분을 꾸준히 사들였다. 비금융 계열사와 관련해서는 향후 삼성전자가 중간 지주회사 구실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다음은 박상인 교수의 설명이다.

    “경제력 집중 해소가 재벌 개혁의 가장 큰 목표인데도 삼성이 금융 계열사를 매각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 없다며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비금융 지주회사의 금융 자회사를 6년 안에 매각하도록 했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정부가 펀드를 조성해 강제로 매입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도 참고할 만한 방안이다.”

    현재로선 두 사람의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분명한 것은 양자의 주장이 현 상황에서 재벌 개혁에 관한 가장 치열한 논쟁이라는 점이다. 양쪽 모두 장단점이 있기에 논쟁은 끝없이 이어진다. 다음 호에서 다룰 경제민주화 반대론까지 감안해 최종 선택은 국민에게 남겨진 몫이다.

    미니 인터뷰 |조장옥 한국경제학회장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 “탁월한 젊은 학자들 지원할 것”



    전쟁 중이던 1952년 11월 30일 부산에서 몇몇 경제학자가 모여 창립한 한국경제학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학회로 성장했다. 한때 일본과 국내에서 교육받은 경제학자들이 중심이 돼 폐쇄적으로 운영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후 회장 임기를 1년으로 하는 등 개방적인 학회 운영에 힘입어 회원 5000여 명을 거느린 학회로 성장했다.

    현 회장인 조장옥 서강대 교수는 경제학의 양대 산맥인 케인스학파와 고전학파 이론의 접점을 찾는 데 힘쓴 거시경제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계량경제학회장, 금융학회장을 역임해 본인은 “학회장 전문 교수”라고 멋쩍어하지만 한 후배 교수는 “그가 미국에서 계속 활동했더라면 일찌감치 노벨 경제학상 후보에 올랐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신동아’의 기획에 대해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회장 선출제 바꿔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서강학파’만 해도 한국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체계화한 이론을 정립한 학파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데, 이번 기획을 통해 과거를 잘 정리해놓으면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조 교수는 올해 3월 초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학회 운영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3월 25일 열린 임시총회에서 정관을 개정해 폐쇄적이라는 비판을 듣던 회장 선출 제도부터 바꿨다. 과거엔 이사회에서 선정한 회장 후보 3명을 대상으로 회원들이 투표했지만 이제는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입후보할 경로가 4개나 생겼다. 지방 회원들을 위해 지회도 만들었다.

    그의 이런 노력 덕분에 6월 28일 구정모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가 차기 한국경제학회장으로 선출됐다. 구 교수는 내년 3월 취임한다. 지방대학 교수가 이 학회 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설립 64년 만에 처음이다.

    조 회장은 “학회장으로서 아쉬운 점은 경위야 어찌 됐든 한국 경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이라면서 “탁월한 젊은 학자가 많은 만큼 학회가 회원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데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처음 2년은 허송세월했고, 이제야 구조조정을 하는 등 제 길에 들어섰지만 좀 더 과감한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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